소설리스트

21. (21/22)

"나왔어"

집에 들어오자마자 보인건 확실히 화난것처럼 보이는 녀석의 얼굴이었다.

"지금 시간이 몇신데 이제야 들어오냐?"

정면에 있는 시계는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늦게 들어온게 화가 난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건지 녀석은 지금껏 꽤나 안절부절하고있었던것 같았다.

"뭐 어때? 내가 애도 아니고 겨우 아홉시잖아"

그냥 같이 놀다보니 시간이 조금 늦어졌다는건데 왜 그걸가지고 화를 내는걸까. 내 아무것도 아니라는듯한 발언에 녀석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그래, 지금껏 뭐하다왔냐?"

"그냥… 친구랑 놀다왔는데"

"친구 누구?"

"같은반 친… 야, 내가 왜 이걸 너한테까지 말해야 하는건데?"

녀석은 내가 되묻자 할말이 없는지 입을 닫고있었다.

범인 취조라도 하듯이 물어보는 저런건 싫었다. 아무리 내가 얹혀살고 있다지만 내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떠들어야 하는건 싫다. 그리고 저녀석이 저런 질문을 하는 의도도 알고있기 때문에 더더욱 기분이 나쁘다.

"앞으로는 일곱시 전까지 들어와"

"뭐야, 무슨 상관이야?"

"걱정되니까 그러지! 밤중에 돌아다니는거 위험하니까 앞으로는 일곱시까지는 들어와"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기 시작했다. 정말 걱정해주는걸까?

"생각해주는척하기는…"

쓸데없이 감동해버릴뻔했다. 교복을 벗으려 방에 들어간뒤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녀석은 나를 힐끗 보더니 다시 TV로 시선을 옮겼다. 뭐야, 저녀석 오늘 약간 이상하다.

"거실에 밥차려놨으니까 먹어"

거실로 향하자 언제 차려놓은건지 다 식어있는것으로 보이는 밥상이 있었다. 뭐랄까, 배는 고프니 먹기야 하겠다만 왠지모르게 손해보는 기분이었다.

"다 식었잖아"

"데워먹든가"

그렇게 말한 녀석은 갑작스레 뭔가 생각났다는듯 밖으로 나가려는것처럼 보였다. 신발을 신는 발걸음이 왠지모르게 수상했다.

"어디가?"

"잠깐 요 앞에"

-덜컥

그렇게 말한 녀석은 뭐라 말할새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난 테이블 앞에 식은 밥상을 마주하고 멍하니 있었다.

"그지같은놈, 데워주고 나가면 덧나나"

식어있는 김치찌개는 역시나 맛이 더럽게 없었다.

15:40분경, 하교하는 도중 누군가가 따라붙음, 서로 모르는 사이인것으로 추정. 실랑이를 벌이는것으로 보였음, 남자는 여자를 아는것 같았으나 여자는 남자를 모르는 눈치였음. 남자의 이름은 김성현. 남자는 실랑이 끝에 어디론가 가고 여자는 친구와 함께 가기 시작함.

16:30분경,친구와 'coco'팬시점에 들렀다가 나옴, 시내를 걷고있음

17:00, 분식집에 들러 라면을 먹음

17:30분경, 화장품가게에 들어갔으나 바로 나옴.

.

.

.

.

.

-슥

거짓말을 한건 아니었다. 너무 늦게와서 선우 그녀석과 만난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억측이었던것 같았다. 그나저나 추적을 붙여놨더니 녀석의 행적을 알수있어서 꽤나 좋다. 왠지모르게 스토커라는 느낌이 강하긴 하지만…

괜스레 의심해서인지 녀석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편지봉투에 들어있는 보고서를 찢어 바닥에 버리며 지금 삐쳐서 궁시렁대고있을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성현이 형이랑 만났나?"

그런데 둘이 싸웠다니? 그리고 모르는 눈치라는건 무슨소리지? 자기 친형을 잊어버렸을리도 없고…

화가 난건지,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가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녀석이 뭔가 이상하다는건 사실이었다.

"정현아?"

"……어?"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내 의식을 끌어낸건 언제 온건지 내 앞에서 날 쳐다보고있는 새엄마의 얼굴이었다. 양손에는 뭘 사온건지는 몰라도 한보따리씩 들고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올때 장봐오라는 얘기를 했었지.

"손에 그거 뭐야?"

"아무것도 아냐"

보고서를 구겨 주머니에 넣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몸에 좋지 않다는걸 아는 새엄마는 바로 단념하고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안타?"

"타'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다른 생각에 잠긴다. 아침에서부터 녀석은 왠지 이상했다. 그것을 무어라고 딱히 꼬집어 말할수는 없었지만 어쨋든 그건 이상한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개학한 관계로

조금씩 사라져간다.

그건 마치 지우개로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을 지워나가듯이 천천히… 천천히 지워져 가고 있다.

한명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안타깝다거나 두렵다거나 그런건 아니었다. 단지 잊어버리고 그대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나갈수 있을까. 잊어버린 사람중엔 잊어버리기 싫은 사람도 있을것이고 지우고 싶은 사람도 있을것이고,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내 추억의 일부인 사람도 있을것이다.

난 알고 있었다.

난 사람들 하나하나를 지워가는게 아니었다.

단지, 나라는 자신을 조금씩 지워가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만 지나면, 이제 '나'라는건 그저 흰색 도화지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은 백지가 되어버릴 것이다. 머리도, 생각도, 추억도 모두 텅 비어버린 그저 살아 숨쉬는 인형이 될 것이다.

어째서 내게 이런일이 일어나는 걸까, 화가났다. 언제나 날 괴롭히는 세상에 대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잊고싶지 않았다.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도 많지만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더 많았다. 어째서 내게만 이런일이 생기는 걸까, 언제나 나는 운이 나빳다.

"으으…"

하얀 아침이었다. 이불 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기운에 몸이 떨려왔다. 몸이 무거웠다. 전보다 몸무게는 훨씬 가벼워졌겠지만 항상 움직이는 내 자신은 더 무거워진것 같았다.

-끼이이

"일어났냐"

문밖으로 나서자 녀석이 소파에 않아 TV를 보고 있는게 보였다. 그래, 아직은 알아볼수 있다.

이젠 나로서도 멈출수 없어졌다.이 모든 상황은 날 이렇게 만든 사람이 또다시 내게 뭔가 장난을 친건 아닐까. 

잊은게 뭔지, 난 알지 못한다. 단지 '잊어버렸다'는 사실만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아직은 알아볼수 있는 녀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뭘봐?"

언젠가 잊을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단지 멀지 않은 시일 내에, 잊어버리기 싫었다. 이녀석만은 잊기 싫었다. 갑작스레 눈물이 나올것만 같았다.

모든걸 잊어버렸을때 난 이녀석의 곁에 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단지 이렇게 내가 녀석을 기억하는 동안은 같이있을수 있겠지.

그래도 지금은 언제든 볼수있다.

그리고 녀석도 조금은 눈치채고 있다.

-끼이익

"뭐야, 다 일어났네?"

역시나 아직도 알아볼수 있는 정현이의 엄마는 졸린얼굴을 하고 어슬렁어슬렁 방에서 나왔다. 

아침상을 앞에 두고도 멍하니 있는 날 보더니 녀석은 내 머리를 손바닥으로 툭 쳤다.

"뭐야…"

"얼른 먹고 학교가야지, 뭐하냐?"

말과는 다르게 녀석은 자신도 먹지 않고있었다. 먹지 않는다기보다는 못먹고있었다. 내 옆에 않아있는 식성 좋은 아줌마만 잘 먹고 있었다. 녀석은 아무래도 밥을 먹지 않는 내가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그 눈빛에 할수없이 수저를 들자 녀석도 같이 수저를 들었다.

기운이 없다고 해야하나, 숟가락을 들기도 귀찮았다.

"먹기 싫어?"

"조금"

그 말에 녀석은 할수없다는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학교가기 싫어]

그 속뜻을 이해하지 못한건 아니었다. 단지 화가났다.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것 같으면서도 계속해서 주저하는 모습을 봤을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교문 앞에 다 와서야 그런 말을 꺼내는 녀석을 보자 괜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가지 말라는듯, 녀석은 내 옷자락을 말없이 쥐고 놓지 않았다. 눈빛도, 내 옷을 잡은 손도, 녀석의 표정도 너무나 약해보였다.

마치 당장에 꺼지려고 하는 촛불처럼 녀석은 위태로워 보였다.

교문 앞에서 학교에 가지 않기로 결정한 우리 둘은 아무렇게나 이곳저곳을 걸어다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가는곳이 어디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린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걸었다. 왠지모르게 전보다 사이가 더 멀어졌다고 생각하는건 착각일까.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날카로운 언행과 항상 불만 가득했던 표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약해졌다는걸 설명이라도 하듯 녀석은 내내 힘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집에 갈까?"

"……"

녀석은 고개를저어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대로가 좋다는듯 녀석은 그렇게 어딘가 한쪽 귀퉁이가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아무래도 좋은거다.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냐는건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아직 녀석이 날 기억하고 있다.

어느샌가 밤이었다. 봄의 밤하늘은 겨울 못지않게 춥고 어두웠다. 우리는 그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단지 서로가 서로를 따라가듯 그렇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녀석이 기억을 잃어가는 것에 대해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녀석도 그것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불안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얘기를 꺼내면 지금 당장이라도 녀석이 날 잊어버릴것 같아서 두려웠다.

"왜…"

그 다음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말없이 내 손을 잡는 녀석의 눈빛이 당장이라도 울어버릴것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왜…그래?"

고개를 푹 숙이고 울음을 참는건지 녀석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내 고개를 든 녀석의 볼에는 눈물이 구슬처럼 툭 떨어져내렸다.

"잊어버리기 싫어…"

작품에 대한 질문, 혹은 감상등은 제 뜰의 방명록에 해주시면 언제든지 답변해 드립니다.

리플로 다시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니 주의해주세요

난 아무것도 해줄말이 없었다.

아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이해할수 없었으니까. 갑자기 몸이 바뀌는 그런 현상 들어본적도 본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녀석의 기분이 어떤지 알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섣부른 위로의 말을 하는건 더 좋지 않았다. 녀석의 기분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괜한 잘난척을 하는건 싫었다.

"왜…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거야?"

녀석은 평소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것 같아 보였다. 그 눈빛에 담긴 억울함과 슬픔을 가늠하는것도 나에겐 버거웠다.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럴수 없었다. 무언가,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맞잡고있는 손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렸다. 녀석이 떠는것일테지만, 나도 떨렸다.

녀석은 바보가 아니다. 울어도 소용없다는걸 안다. 아무리 울어봐야 남는건 허탈함과 슬픔, 그리고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뿐이다. 녀석은 흐느끼거나 하지 않았다. 단지 눈물을 멈추고 멍하니 서있었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럴 뿐이었다.

이럴땐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여자친구가 없어서인지 난 방법을 몰랐다. 아니, 그 이전에 남의 심각한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해줄 정도로 난 믿음직한 놈이 되지 못했다.

"네…잘못이 아니겠지"

단지 그 말밖엔 해줄수 없었다. 그것만은 확신할수 있었기 때문에 멍하게 나도 그 말만을 반복했다. 

"그런 말밖엔 할수 없는거야?"

갑작스레, 화난듯한 녀석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무슨…?"

"그런식의 위로밖에 할줄 모르는 거야?"

확실히 알수 있었다. 녀석은 내게 화내고 있었다. 슬픔이 도를 넘어서 분노가 된건지, 녀석은 내게 화내기 시작했다.

"늘 그랬어, 따뜻한 위로 한번 받아본적 없어, 지금도 내 기분이 어떻든 간에 그냥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고 겨우 그런 한마디만 하면 그걸로 끝이야?"

"그게…그게 아니라…"

그래, 그런건 아니었다. 단지 난 녀석이 내 섣부른 위로에 더 큰 상처를 받을까봐 주저했던 것이었다. 다른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녀석은 그걸 자신에 대한 무관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네가 알리가 없어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지금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기분이고 어떤걸 원하는지 넌 모르니까!"

"아…"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지금 녀석이 화를 내는 이유가 뭔지,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갑작스레 나타난 녀석의 감정의 기복에 나는 어쩔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지금까지의 억울함을 울분으로 내게 표출하고 있었다.

"지금 니가 내 기분을 알아? 기억이 하나하나 사라져가는 기분이 어떤지, 다른사람들은 날 알지만 난 그사람들을 모르는 기분을 알아? 넌 죽어도 몰라, 그러니까 그렇게 담담할수 있는거야!"

녀석은 너무 순식간에 말을 한 탓인지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난 그때까지 내가 할 적당한 말을 찾지 않고 있었다. 난 언제나 내 생각을 정리하고 그 상황에 필요한 말을 했다.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은 삭제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버릇때문에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저 멍하게 녀석이 화를 내는걸 보고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을수는 없었다. 난 녀석의 어깨를 붙잡고 무언가 말하려 했다. 담담한게 아니라 그저 무슨 위로의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그랬던 거라고 말하려 했다.

-탁

"놔! 내 몸 함부로 만지지마… 나 그때 사실 기억하고 있었어, 전부 다 기억나는데 일부러 기억 안나는척 했던거야, 난 그렇게 해서라도 친구로 있고싶었는데… 넌 항상 아무런 노력도 하질 않잖아!"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것 같았다. 녀석의 말과 함께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내가 녀석을 강제로 범하던 그날밤, 그리고 다음날 녀석이 기억이 안난다고 해서 얼마나 안도했었는데, 그게 거짓말이었다니.

녀석이 나와 같이 있으며 참았을 그 혐오감을 생각하니 머릿속이 타들어가는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난 같이 모르는척했던 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마치 무너지기 전에 한번에 갑작스레 불타오르는것처럼 녀석은 있는대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기운이 많이 빠져서인지 녀석의 목소리는 소리지르는것같지도 않을만큼 작았다.

"하아…하아…"

녀석은 말하는것만으로도 지치는지 기운빠진 숨을 내뱉으며 지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까와는 다르게 나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녀석은 내가 가까이 다가오는걸 허락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생긴 마음의 벽에 나는 어떤 말을 해야할지 선택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내게 쏘아지는 불신과 원망, 오해, 그리고 애증이 담긴 눈빛을 견디기 힘들었다.

"넌 지금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있는지 몰라, 내가 매일 어떤 기분에 사로잡혀 잠을 자는지, 내가 매일 무슨 생각을 하며 일어나는지, 내가 너때문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넌 몰라!"

"어째서… 나때문에?"

난 녀석이 괴로워할만한 일을 한적이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알기에 그런일은 없었다. 하지만 녀석은 정말로 있다는듯 진심으로 괴로운 표정을 하며 울기 시작했다.

"난…난…"

녀석은 끝내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만큼 하기 어려운 말인듯 녀석은 눈물로 말을 삼키고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곧 다시금 눈물을 그치고 녀석은 화를 가라앉힌듯 담담한 표정을 짓더니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너는 내 기억이 사라지건 내가 널 잊어버리건 말건 상관없겠지, 우리는 원래 남남이니까, 그러니까 지금 내가 사라져도 상관없겠지?"

"그런 말이 어디…"

"말하지마, 난 그래도 잠시나마 너를…"

녀석은 그 다음 말은 안된다고 생각한건지 그래도 돌아서 버렸다. 난 그때, 태어나서 맨 처음으로 강한 불안감을 느꼇다. 이런 엄청난 불안감을 처음이었다. 녀석이 그대로 발을 떼고 걸어가버릴것 같았다. 내 예측이 빗나가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속으로 강렬하게 빌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내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발을 떼고 걸어가는 녀석을 보면서도 난 머릿속이 풀린 실타래가 뒤엉키듯 어지러워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단 한마디 '가지 마' 라는 말을 못해서, 나는 그대로 녀석을 떠나보내버리고 말았다.

해피엔딩일까 베드엔딩일까, 새드엔딩일까 데드엔딩일까

괜한 객기라는것따위, 당연히 알고있었다.

녀석이 잘못한것도 없다는걸 알고있었다.

단지, 너무 화가 났을 뿐이었다. 그런 식의 위로밖에 받을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화가났을 뿐이었다. 그래서 끝까지 모르는척 하려고 했던 그날밤의 일이 기억 안난다는 거짓말까지 전부 말해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버리고 떠나간다고 해서 갈곳이 있는것도 아니었다.

이제 봄이라고는 해도 밤은 춥다. 온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정현이 녀석과 엄청나게 사이가 안좋은 녀석, 아직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조금 놀랐다. 지금 간다고 한다면 분명 들여보내줄 것이다.

하지만 싫었다.

또 그런짓을 하고싶지는 않았다. 더이상 남자와 같이 잔다거나 하는 일은 겪고싶지 않았다. 스스로도 안좋은 기억밖에 없을뿐더러 이제는 견딜수가 없다.

"추워…"

추위에 떠나가버린 사람들과 텅빈 공원, 그 공허함이 지금 내 기분을 대변해주듯 쓸쓸하게 남아있었다. 새파랗게 날이 선 초승달이 시리도록 차갑게 눈에 박혀 들어온다.

코트 자락을 여미어 보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는다. 아니, 단지 체온상의 문제가 아니다. 이젠 갈곳마저 없다는 사실이 눈물이 날정도로 서러웠다.

난 그렇게 정처없이 이곳저곳을 걷고있었다.

[부분 기억상실증인듯 합니다]

[예?]

[지금부터 약 한달정도 전까지 기억 못하시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뿐만 아니라 다른것도 잊어버리셧을수도 있습니다]

[……기억을 되찾을순 없나요?]

[아아,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몇년동안 기억을 되찾지 못한다거나 하는건 극히 드문 일입니다. 대개 한달이나 빠르면 일주일정도 내에 기억이 돌아오니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하아…"

기억상실이라, 그 TV에나 나오던 식상한 소재가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드라마는 아닌법, 곧 기억이 돌아온다고 하니 별로 문제될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데에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었다. 동생도, 부모도 어디에 간건지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있었다. 게다가 집은 오랫동안 비워놨던건지 바닥에 먼지가 얕게 쌓여있었다.

다른때라면 한달정도 기억쯤이야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서 안될것도 없지만 지금은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억이 사라져버렸다. 전화를 해봐도 모두 불통, 미궁에 빠져있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 한달의 사이에 난 자퇴를 한 모양이었다. 학교를 다시 가려고 하니 '자퇴했잖아?'라는 친구놈의 말에 난 어이가 없었다. 복학을 하면 되겠지만 사실 난 자퇴를 예전부터 결심하고 있었기에 복학할 마음은 없었다.

병원을 나온지 이틀째, 난 지금 아직도 뭐가뭔지 모르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단지 중요한건 내가 취직을 했다는 것이었다. 뭔지모를 그 회사는 회사라기보다는 심부름센터같은 곳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꽤나 높은 직책을 맡고있는 사람이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걸 알고는 병원에 와서 내가 무슨 일을 했고 앞으로는 어떤 일을 다시 맡게 될것인지 설명했다. 단지 머릿속이 복잡해서 반밖에 듣지 못했다는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내가 기억을 잃은것도 그 일을 하다가 머리를 다쳐서 그렇게 된거라는 설명도 했다. 병원비는 그쪽에서 모두 부담을 했고 나는 일주일동안 쉬라는 말을 들었다.

뭘까, 그 잠깐의 한달 사이에 내 인생은 너무나도 뒤바뀌어 있었다. 마치 미로 한가운데에 떨어져버린듯한 당혹감, 그리고 사라져버린 가족들은 단서 하나도 없으니 찾을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동생이 다니던 학교에 가봐도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말만 나오고 부모의 직장 동료들을 찾아가 봐도 갑자기 동시에 자취를 감췄다는 말만 나올 뿐이었다.

-스륵 스륵

갑자기 TV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발자국 소리다. 이곳 오르막길을 오르는 사람이 많기때문에 사실 별로 대수로울것도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발자국 소리는 모든 소리보다 더 우선해서 내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나는 왠지모르게 그 걸음이 우리집으로 향하고 있다는 예감을 떨쳐낼수가 없었다.

-스륵……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갑작스레 걸음이 멈췄다. 뭔가 머뭇거리고 있는듯 문에 있는 불투명 유리로 보이는 실루엣은 내 의혹이 확실해졌음을 알려주는것 같았다.

-덜컥

"……"

"……"

그렇게, 입장자와 주거자는 만났다. 물론, 난 처음보는 사람, 아니, 처음보는 여자였다.

"당신… 뭐야?"

초면에 뭐야라니, 실례가 이만저만이 아닌 여자였다.

"뭐……당신이야말로…누군데?"

밖이 너무 추워서 모르는척 들어온건지 얼굴이 새빨갛게 부르터서는 검은색 코트를 있는힘껏 껴입고 있는것 같아보이는 여자였다. 키는 작은 편이었고 머리가 길었다. 뭐 이런 외모였다. 하지만 중요한건 여자의 태도였다. 마치 여기가 제 집이라도 된다는 양 들어와서는 네가 왜 있냐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당연히 어이가 없었다. 여자는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그 작은 입을 열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우리집인데…"

"……우리 집인데? 무슨소리야?"

내가 어이없다는듯 말하자 여자는 눈꼬리를 치켜뜨더니 적반하장 자세로 나왔다. 게다가 문을 닫고서 신발까지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아무리 집을 잠깐 비워놓았기로서니 남의집에 무단침입해놓고 자기집이라고 우기는거야 당신?"

그렇다는건 만약 저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잃은 한달의 기억동안 우리 집마저 다른사람에게 넘어갔다는 건가?

아니, 아니었다, 그럴리는 없었다. 왠지 미심쩍었다.

"무슨소리야? 여긴 내가 몇년 전부터 쭉 살았는데"

"댁이야말로 무슨소리야, 몇년전부터 쭉 산건 나야" 

분명 한달 안의 기억동안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면 저쪽에서 날 모를리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우린 초면임을 확신할수 있었다.

"맞아, 당신 그러고보니까 전에도 나한테 자기 모르냐고 아는척 했었지?"

"무슨소리야, 난 너같은 여자 몰라"

이젠 내 집에까지 눌러앉으려고 발악하는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이 여자가 하는말이 다 정신병자의 헛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생긴건 멀쩡한데 정신병이라니, 딱한 노릇이었다. 나는 박애주의자기 때문에 이런 사람을 이런 추운날에 밖으로 쫒아내버릴수는 없었다.

"보아하니 쉴데가 없어서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를 하는 모양인데 하루밤정도는 자게 해줄수 있으니까 조용히 자고 내일 나가"

"무슨소리야 여긴 우리………"

여자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갑자기 표정이 시무룩해져서는 방으로 힉 들어가버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만약 정신병자라면 방 위치도 잘 모를텐데 현관에서 옆으로 바로 틀면 방이 있다는걸 어떻게 알았을까? 

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쓸데없는 상상을 지워나가려 애썻다.

책으로 만들어주세요라는게 새로 생겼더군요.

제꺼에도 9개의 신청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거 책으로 만들어지면...... 완전 막장이네요

웃기는 일이었다. 어째서인지 집은 멀쩡했고 게다가 안에는 전에 나에게 자기 모르냐고 아는척을 하던 이상한 놈이 살고있었다.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만약 잊어버린 사람이라면 날 알텐데 지금은 날 새까맣게 모르는 사람인양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초면임에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집이 다른사람 손에 넘어가버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가 거기에 소유권을 주장하는것도 웃긴 일이었다. 게다가 하룻밤정도는 재워준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코트를 벗어 벽에 걸어놓고 교복을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직 잠들기에는 너무나 이른 시간인데다가 나는 머릿속을 교차하는 수많은 생각에 잠들수가 없었다.

이젠 녀석을 더이상 볼수 없을것이다. 난 나를 잘 안다. 난 돌아가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이젠 불안했다. 모두 다 잊어버리고 있다. 내가 언제까지 녀석을 기억할지도 불확실했다.

'더이상 만나지 못해'

눈물이 나올것 같았다. 그리고 만난다 해도 이제 난 녀석을 기억할수 없을때일 것이다. 내 처지에 울분이 치밀어 올라도 어쩔수 없었다. 지금도 계속해서 기억은 사라져가고 있다.

날 이렇게 만들 그 정체모를 녀석은 이렇게 내가 괴로워하는걸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을까?

알수없는 일이었다. 다만 중요한건 지금 난 죽고싶을정도로 괴로웠다. 이젠 눈물도 나지 않았다. 말라버린건지, 아니면 이제 더이상 슬프지 않은건지, 그렇게 뒤척이고만 있었다.

"……"

"수현이는 어디있어?"

"……갔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단지 머릿속이 텅 비어버려서 그 안이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게 되어버렸다고 해야할까, 그저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녀석 앞에 있을때 그렇게나 무슨말을 할까 고민하며 생각에 생각을 했는데 결국은 녀석이 가버리기 전까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어딜가? 집에?"

"몰라…"

화낼 기분도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기분이라는게 없던것처럼 화도 나지 않고 허탈한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선 '가버렸다'라는 말만을 끝없이 되뇌이며 고장난 라디오같이 그런 단어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새엄마의 얼굴은 보이는것 같지도 않았다. 난 어떻게 여기까지 돌아온걸까.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잡아야 했던걸까. 난 녀석을 잡아야 했던걸까.

난 아직도 그것에 대해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걸까. 정신을 차려보니 창문은 이미 햇살이 밝아있고 나는 소파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자고있었다. 눈앞에는 내 앞에 엎드려서 내 배를 베게삼아 자고있는 새엄마의 모습이 있었다.

몸이 떨려왔다.

단지 그것뿐, 추워서 떨리는게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졸린얼굴을 하고 방문을 열고 나올것 같아서, 녀석이 성가시다는 표정을 하고서는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나올것 같아서 그래서 떨려왔다.

하지만, 그럴리 없다는걸 알려주듯 문은 10분을 기다려도 20분을 기다려도 계속 닫혀있었다. 내가 일어난걸 느낀건지 새엄마도 일어나더니 졸린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라고 앞에서 중얼거리는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듣고싶지 않았다.

"으우우…"

온몸이 뻣뻣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자극한다. 이불 속에 다시 들어가고는 싶지만 이곳은 이제 남의 집이다. 더이상 내 집이 아니었다. 오래 있고싶지 않았다. 부엌으로 나가자 언제 일어난건지 검은색 정장을 갖춰입은 어제의 그 남자가 있었다.하지만 그건 알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이제 다시 만날 사이도 아니다. 지금 난 내 앞가림도 하기 힘들다.

"하루밤이면 충분하지? 나도 이제 여기서 살거 아니야, 게다가 이쪽 동네 건물들 이제 다 철거되니까 쓸데없는 미련갖지 말라고"

아마도 자기가 떠난다고 해서 내가 이곳에서 살거라고 생각했는지 헛된 희망을 없애주기 위해 말한듯 싶었다. 그래도 꽤나 오랫동안 살았던 곳인데 철거된다니, 조금은 씁슬한 감이 있었지만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교복을 다시 입을수는 없다. 난 안방에 남아있던 내 옷을 입었다. 그리고는 코트를 걸쳤다.

"집 없어?"

-끄덕

"아침정도는 사줄수 있는데"

다른 의도가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어제의 내가 딱하게 보였던건지, 아니면 그 잠깐의 인연때문에라도 가만둘수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쁜사람같아보이지는 않았다. 

아침에 문을 연 식당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있어봐야 24시간 김밥집이라던지 하는것들 뿐이었다. 이른 새벽이라서인지 낮이 점점 길어지고 있음에도 아직 완전히 밝지는 않았다.

"이름이 뭐야?"

"…수현"

우연인지, 내 동생과 이름이 똑같았다. 하지만 뭐 그리 희귀한 이름도 아니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다. 추위에 잔뜩 얼어있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이제 저쪽 집도 철거되게 생겼다.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바로 옆 도시에 있는 아파트에 이사할 생각이었다. 회사가 거기에 있었고 일을 하려면 가까운게 좋기 때문이었다.

아직 추운 날씨에 그냥 근처 아무곳이든 괜찮겠다 싶어 들어가자 따뜻한 공기가 기분좋게 날 데워주기 시작했다.

그냥 눈에 보이는 메뉴를 아무거나 시키고 나서 녀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확실히 어제는 어이가 없어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누구나 한번쯤 돌아볼만한 외모였다. 하지만 그리 관심이 있는건 아니었다. 어차피 다른 사람이다. 지금 밥 한번 사주고 끝날 사이인데 친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왜 밥 사주는거야?"

"집도절도 없어보이는데 안쓰러워서 그렇다고 해야하나"

"동정이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녀석은 어느새 나온 국밥을 잘만 먹고있었다. 먹는모습이 꼭 토끼같았다. 머리라도 한번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성깔이 좀 까칠한것같아보여서 참았다. 가출청소년같은 부류인듯 싶었다. 경찰에 신고할까도 생각했지만 타인의 일이다. 저녀석도 그런건 바라지 않을것이다.

"가출한거야?"

"……"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기분나쁘다는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왜그래? 말하기 싫으면 안해도 되는데…"

"머리아파…"

"에?"

녀석은 고개를 들더니 오른쪽 관자놀이를 잡으며 두통을 호소했다. 처음엔 그저 편두통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수준이 아닌듯 녀석은 머리를 부여잡고 아파하기 시작했다.

"아으…으……"

-드륵

"괜찮아?"

"거기 왜그래요?"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기에 소리가 들렸던건지 주인이 와서 녀석을 살펴봤다. 그러고는 병원에 전화하자며 다급하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녀석의 상태는 보통 두통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는것 같아보였다.

"아윽…깨질것같아… 으… 으…"

녀석은 고통이 도를 넘어섯는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쩔줄 몰라하고 응급처치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두통에 좋은 응급처치같은건 아는게 없었다.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나중에는 쥐어뜯기 시작했다. 

-삑……삑……삑……

"으으…"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게 되어있었다. 그렇게밖에는 표현을 하지 못할 정도로 지금 내 기분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상태였다.감기 끝 미열처럼 남아있는 두통이 머리를 울려서 입을 벌리기조차 힘들다.

뭘까,

주변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낯설다. 하얀 침대, 파란색 담요, 온통 하얀 천장을 보면 여기가 병원이라는걸 알수 있었지만 뭐랄까, 여기가 나의 세계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는 이곳.

-덜컥

문이 열리고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물통을 들고 들어왔다.

"어, 일어났냐?"

"……"

그 남자는 인상을 한번 쓰더니 나더러 귀찮게 한다며 장난반 진담 반정도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내게는 너무나 중대한 문제가 하나 생겨버린것 같았다.

"누구…?"

"……무슨소리야?"

"몰라… 난…"

본적 없는 사람이 내게 아는척을 하고 있었다. 그래, 난 이 사람을 모른다 뭔가 다른 문제를 떠나서 난 몰라. 그렇게 부정하고 싶었다. 내 몸의 이상을 그렇게 애써 부정하고 떨쳐버리고 싶었다.

'단지, 전부 잊어버렸을 뿐이야'

그렇게, 머릿속에서 뭔가가 울려퍼지듯이 물감이 퍼지듯 번져간다. 그 잠깐의 여백이 지나가고 나서, 나는 지금 내 상태를 확실히 깨달을수 있었다.

"아무것도…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뭐?"

그 남자는 어이없다는듯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아마 나를 아는 사람인듯, 하지만 저 화난 표정과 걱정따위 전혀 하지 않는듯한 냉정함이 나와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갑자기 뭔소리야? 아무것도 기억이 안난다니, 혹시 나한테 들러붙으려고 그런 거짓말 하는거라면 당장 집어쳐"

"…기억 안나는건 기억 안나는거야, 그리고 내가 왜 당신한테 들러붙어?"

남자의 목소리는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그 느낌이 내 피부에까지 전해져 오는듯 찌릿찌릿하게 전해져온다. 문득 창밖을 보니 유리창에 비치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래, 난 여자였던거구나. 내 성별까지 잊어버릴 줄이야, 정말 그렇게 난 모든걸 잊어버린 채였다.

남자는 잠깐 멍하게 날 쳐다보더니 다시금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 진짜로 아무것도 기억이 안난다고? 니 이름도?"

"그래"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듯 탄식을 내뱉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잠시 뭔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난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대충은 알것같았다.

"그래, 그럼 내가 너와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해주지 넌 어제 갑자기 내 집에 쳐들어와서 하룻밤 자고갔고 다음날 아침에 불쌍해보여서 아침이라도 사줄까 하다가 갑자기 니가 아픈척하더니 기절해버려서 그걸 병원으로 데려온게 다야, 이제 알았지? 너와 나의 관계"

"별거 아니네"

"그래 정말 별거 아닌 관계지 그러니까 내가 네 병원비건 뭐건 네 집도 어딘지 모르는데 널 데려가야 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겠지"

남자는 그걸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내가 지금까지 여기에 있던것도 최소한 니가 일어난 다음에 부모님을 부르고 그런 처리를 해주기 위해서 있던거였는데 네가 기억을 잃어버렸다니까 이젠 나도 어떻게 해줄수가 없는거야"

-덜컥

그렇게 짧은 인연은 끝나버렸다.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고 나서 만나는게 저런 재수없는 놈이라니, 기분이 별로였다. 그러니까 결국엔 집도절도없는 날 떠맡는게 귀찮아서 버리고 가는거라는걸 왜 저렇게 돌려서 말하는걸까.

루즈한 전개는 싫어서 그냥 급전개 시켜버렸음

"그러니까, 아무것도 기억이 안난다구요?"

"네…"

의사는 안경을 치켜세우더니 날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아마도 곤란하다는듯, 신원을 확인할 물건도 없는 날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하고있는것 같았다. 핸드폰도 지갑도,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검사 결과로 보자면 일단 몸에 이상은 없습니다만… 계속 입원해 있지는 않으시겠죠?"

"모르겠어요"

일단은 돈이 없으니까 병원쪽에서도 보호자가 없는 날 계속 받아줄 정도로 자비롭지는 않을것이다. 아마 오늘 당장이라도 병원 밖으로 내보내지게 되겠지. 의사는 날 계속해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간호사 잠깐 나가봐요"

"네"

옆에 있던 간호사가 의사의 눈짓에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링거같은 귀찮은건 다 떼어버렸기에 거동에 불편함은 없었다. 

"지금 보호자분이라거나 그런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신다구요?"

"네"

"흐음… 병원쪽에서도 이런 문제는 좀 냉정합니다. 입원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는 환자를 계속 입원시켜줄 정도로 병원이 자비로운것도 아니니까요 아마도… 오늘 내에 퇴원이 결정될겁니다"

"……"

그래, 난 바로 버려지게 되는것이다. 문득 처음 만난 그 남자가 떠올라 화가나 버렸다. 난 어떻게 되는걸까. 생각하기도 싫은 상상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 의사는 묘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을 하고 있었다. 뭐랄까, 그 표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정이었다. 기억을 잃어서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표정의 의미는 알기 힘들었다.

"그럼 이대로 퇴원하시게 된다면 갈곳도 없으시니 거리를 전전하게 되실텐데… 기억이 돌아오실 때까지 제가 돌봐드릴수는 있습니다"

"네?"

"제 집에서 기억이 돌아오실때까지 돌봐드리겠다는 말입니다. 물론 병원비는 제가 낼테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랄까,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단지 '아, 그렇게 되는거구나'하는 생각만이 머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내겐 거부권이란 없었다. 모든게 처음보는 사람인데 초면의 의사라고 해서 안될건 없었다.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것 정도로 대답을 대신하는게 지금 내 저치를 잘 이해하고 있는것 뿐이었다.

'이름이라도 말해줄걸 그랬나'

돈쓰는 일도 아니다. 병원비는 내가 낼 이유가 없었다. 연고도 알수없는 녀석을 3일간이나 돌봐줬으면 그걸로 된거다. 일을 다시 시작하기 전의 짧은 일주일의 휴일을 녀석에게 거의 다 써버린 것이다. 그때문에 본 손해만으로도 충분했다. 보험처리도 안되는 녀석의 엄청난 병원비를 내가 낼 이유같은건 없었다.

하지만 자꾸 녀석의 눈빛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체념과 포기가 녀석의 눈에 가득했다. 한줄기 희망도 없이 어둡고 흐리멍덩한 그 눈빛, 전혀 원망의 기색이나 분노도 찾아볼수 없었다. 그저 '나같은 놈에게는 기대도 안했다'라는것같은 눈빛이. 잊을수가 없었다.

병원을 나와 회사에서 마련해준 집에 도착한지도 시간이 꽤나 지났다. 이제 그 높은 계단을 올라가야만 하는 그 집에 갈 이유도 없다. 이제 이곳이 내 집이다. 아무래도 가슴 한구석이 찜찜했다. 지금 다시 가서 이름이라도 말해주고 다시 온다면 이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녀석은 분명 입원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으니 당연스럽게도 강제퇴원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걸까. 집이 없으니 거리에서 잠들게 될것이고 점점 날씨는 따뜻해지고 있으니 얼어죽을일은 없겠지만 배고픔에 시달릴게 뻔했다.

직업? 정상적인 직업을 가질수 잇을리가 없었다. 외모라면 확실히 빼어나니 몸이라도 판다면 모를까.

내가 알바가 아니었다. 남남일 뿐이다.그 짧은 인연에 불쌍함을 느껴서 그정도까지 돌봐주면 그걸로 된거다. 난 그것만으로도 이미 착한 사람이라는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한 친절을 베푼 셈이었다.

하지만 뭘까, 무언가 가슴 한구석에 돌덩이같은게 올라와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방금 마주치고 이야기를 했던 사람이 나때문에 거리로 쫒겨나게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재차 내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을 해도 어쩔수 없었다.

난 원래 이렇게 책임감이 있는놈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디엔가 숨어있던 선행본능이라도 나온건지 앉아있는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TV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난 분명 알고있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한달정도는 편히 잠들수 없다. 수현…수현… 김수현… 내 동생과 이름이 같아서인지 더더욱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내 처지가 누구하나 돌봐줄정도로 여유가 있는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슴은 답답해서 무언가 꽉 막힌것처럼 숨을 쉬는것도 거북했다. 모든게 내 책임이라는것과 내가 병실을 나갈때 날 쳐다보던 녀석의 눈빛이 자꾸만 생각났다.

'그래, 이름만 말해주고 나오는거다'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걸까. 난 병원앞에 서서 크게 심호흡했다. 아직은 있을것이다. 커다란 병원 입구에 서서 나는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머리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이름만 말해주고… 이름만 말해주고 나오는거야…'

병원 내부는 사람이 많았다. 대기실에 앉아 병원비를 내려고 하는건지 돈을 세어보는 사람, 척 보기에도 꽤나 많은 액수다. 원무과에 서서 무슨 문제라도 있는건지 큰소리를 치는 사람, 지인이나 혹은 자신이 큰 병의 진단이라도 받은건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사람.

그렇게, 병원은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주제에 사연 많은 사람들이 오고, 또다시 가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5층까지 올라가자 바로 앞에 간호사들이 앉아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게 보였다. 그런건 신경쓰지 않았다. 그냥 방금 전의 병실로 가서 이름만 말해주고 나오는게 내 일의 전부였다. 그걸로 난 편안해질수 있을 것이었다.

분명, 1인 환자실 511호였다. 휠체어에 앉은 사람, 어디가 아픈지 얼굴 전체에 붕대를 둘러감싼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알수없는 약품냄새들이 코끝을 자극한다. 마치 단거리 달리기를 하는듯 길고 긴 복도를 걸어가자 511호실이 눈앞에 보였다.

"……"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뭐랄까.  지금 들어가면 내가 녀석을 책임지겠다고 말하기라도 할것같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더더욱 강하게 내 스스로를 강하게 다잡았다. 이름만, 이름으로 충분하다. 후회할 짓은 안하는게 좋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눈앞에 보인건, 아무도 없는 침대와 방금 전까지 사람이 썻던거라고 확인이라도 해주려는듯 간호사가 정리를 하고있는 모습이 있었다.

"아… 아까 보호자분이신가요? 이곳 환자분은 아까 퇴원하셧는데…"

"…벌써요?"

병원이라는곳이 이렇게 냉정한 곳이었나, 입원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다는걸 확인하자마자ㅏ 가차없이 내쫒아버린건가.

괜히 화가났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병원은 자선기구가 아니다. 그동안 계속 있게 해준것만으로도 충분한 손해였을것이다. 입원비도 받지 못했는데 바로 퇴원시키는쪽이 나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화가났다.

"언제… 나갔죠?"

"얼마 안됐는데… 30분쯤 되었나?"

"네… 감사합니다"

망연하게 병실을 나와 힘없이 복도를 걸었다. 아까는 걱정으로 걸었던 복도가 이제는 허탈해진 마음으로 걷고있었다. 나는 속으로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나와 관계없는 녀석이다. 어찌되든 알바가 아니었다. 이름따위 모른다고 해서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이 있을것이고 설마 굶어죽기야 할까.

하지만 내 머리는 자꾸만 유흥업소같은곳에서 몸을 파는 녀석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내가 아는 사람이 그런 모습이 된다고 생각하는건 꽤나 좋지못한 상상이었다.

"야, 너 봤냐?"

"그 환자?"

"진짜 예쁘던데… 기억상실증이라고 했지? 연예인 뺨치더라니깐?"

갑작스레, 멍한 머리에 파고드는 소리가 있었다. 휴게실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의사들의 대화소리였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무엇때문인지 그 소리는 내 귀에 정확히 들어오고 있었다. 휴게실에는 의사들뿐, 난 드물게 걸음을 멈추고 그 대화를 들었다.

"흐… 내가 담당이었으면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게다가 병원에 데려온 사람도 사실 보호자가 아니었다며?"

"상현이 그새끼… 그 버릇좀 고쳐야 하는데 말이야"

"기억에 문제있는 환자들한테 치근대는거? 전에도 하나 건드렸다가 큰일날뻔하지 않았나?"

"그렇지, 그런데 원장빽이 뒤에 버티고 있는데 큰일 나도 큰일 아닌거지"

그 대화는, 한 의사에 대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 의사는 기억같은 면에 문제가 있는 환자들을 데려다가 성폭행을 하거나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데리고 있으면서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작자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중요한건 그 의사가 어떠느냐가 아니라, 그 의사가 데려간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머리가 차갑게 식어가는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강제퇴원당한게 아니라, 녀석은 그 의사의 꼬임에 넘어가서 그놈을 따라간 것이었다.

"저기… 지금 하시는 얘기 말인데요"

"헛!"

"드, 들으셧나요? 이건 그냥…"

"이상현이라는 그 의사가 데려간 환자가 설마 511호실 환자인가요?"

"아, 예? 그게 아니라…"

"확실히 말해주세요, 제가 보호자거든요"

의사는 내 눈빛을 보고는 어쩔수 없다고 생각한건지 그렇다고 말했다.

"그 이상현이라는 의사분 주소좀 알려주시죠"

"아 그건 좀… 안되겠는데…"

"내가 보호자라고 했잖아, 그새끼가 헛짓거리 하기 전에 가려고 하니까 빨리 주소좀 알려달라고…"

최대한 지금 내 심정을 자제하며 씹어내듯이 말했다. 두 의사는 안색이 파랗게 질려서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없으면 안돼"

"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없으면 안된다고"

"무슨소리야?"

내 옆에 앉아있는 녀석은 내 헛소리를 듣고는 내가 걱정되기라도 하는지 내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수업소리도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너 왜그러냐? 며칠 전에는 학교도 빠지더니 오늘은 미친놈처럼 헛소리나 해대고, 이제 죽을때가 된거냐?"

"……"

이번엔 대답을 하지 않자 녀석은 이상하다는듯 어깨를 한번 치켜올렸다. 그걸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친구에 대한 관심은 끝이었다. 언제나처럼의 일상. 전혀 이상한것 없이, 전혀 다를것 없이 천천히 진행되고 있는 일상…

-피식

그곳엔, 없는것이 하나 있었지만 말이다.

"하아…"

하얀 입김이 나온다.아무것도 생각할수 없는 파란 하늘. 그 아래에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건지 알수가 없다. 마지막이었던 그 장소에 서서 그 시간을 회상한다. 며칠 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5분전의 일처럼 피부에 와닿은 날카로운 목소리.

"내가… 필요한데…"

그저 곁에 있으면 충분할거라고 생각했었다. 당연한 일 아닌가. 녀석의 뚫려버린 마음은 내가 곁에 있기만 하면 나아질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는지, 녀석은 조금 더 따뜻한 위로와 겉으로 드러나는 마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어디에 있을까. 녀석은 그래도 내가 필요하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녀석이 지금은 어디에서 뭘 하고있을까. 사실 난 그때의 기분으로 아직도 고민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뭐해?"

"……"

내가 걱정되는건지, 어린애도 아닌데 요즘 날 따라다니며 날 살피는 새엄마가 날 붙들었다.

"요즘 너 이상해, 이상한 소리나 중얼거리고 괜히 걱정되게 만들지마"

"별거… 아냐"

"별거 아니긴, 수현이 때문이지?"

난 주먹을 꽉 쥐었다.새엄마는 추측을 확신으로 바꾼느 데에 그다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피부를 찌르는 한기에 몸이 절로 움츠러든다.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눈빛은 무시한채, 나는 마지막을 회상한다.

"……엄마"

"…나 부른거야?"

내쪽에서는 맨 처음 부르는 엄마라는 목소리에 감동한건지, 엄마는 몸을 부르르 떨며 웃었다. 그래, 이 사람을 미워해야할 이유같은건 없었다. 단지, 조금 불쌍하고, 조금 약하고, 조금 잘 우는 사람일 뿐이었다. 나쁜 마음같은건 없고, 오히려 조금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엄만데 잘해주라고 항상 말하던 녀석이 생각났다. 그래서인지도 몰랐다. 이 갑작스러운 변덕은.

"기쁘네… 그런데 왜?"

"수현이한테는… 내가 필요했을까"

공허한 기분에 몸이 움츠러든다. 엄마는 고요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것 같았다. 빠른 대답을 바라지는 않는다.엄마는 내 처음의 질문에 단지 조용히.

"확실히… 그랬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말을 했다.

"아니야… 난, 사실 난 내가 녀석에게 필요하다기보단, 나에게 수현이가 필요한게 아닐까"

"좋아하는구나?"

"……모르겠어"

대답을 할수가 없었다. 뭐랄까, 엄마는 모르는 또다른 문제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난 지금 나 자신에게 솔직해질수가 없었다. 전부터 생각해온 나의 단점이었지만. 난 너무 생각이 많았다.

"확실하게 말할수 있는건…"

입을 벌려 다음 말을 하려고 하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추위때문에 입이 얼어서인지, 아니면 이 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단 세글자를 말하려는데 너무나 입가가 떨려왔다.엄마는 우는 날 감싸며 날 달랜다

"힘들어…너무…"

어느새 100회가 눈앞에 있네요.

그리고 엔딩은 아직 조금 많이 남았습니다. 설레발 치지 마시구요 헤헤.

조금 진지해지는 부분입니다.

뭐 예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앞으로의 스토리는 성현이와 수현이가 같이 살게되는 스토리입니다. 중도 변경할수도 있긴 하지만 왠만하면 그렇게 안될것같구요. 정현이는 혼자 마음고생을 하게되고 그 와중에 새엄마와 화해하게됩니다(위 내용처럼 말이죠). 수현이와의 이별이 가정을 화목하게 만들게 되겠군요

어쨋든, 의사는 단역, 선우는 잠수상태인것으로 설정이 되었습니다

"여기가…"

"네, 제 집입니다"

뭐랄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혼자살기엔 너무 넓어보인다는 것이었다. 병원 인근의 아파트 꽤나 고층에 위치한 이곳은 척 보기에도 이사람이 꽤나 돈이 많다는걸 짐작하게 만들고 있었다. TV며 가구며 모든것들이 전부 비싸보이는 것들뿐, 내심 속으로 위축되고 있었다.

별로 짐이라고 할것도 없는 옷가지들을 내려놓자 그는 세수라도 하려는지 화장실로 들어갔다.

-두리번

뭐랄까, 이런곳은 나와 맞지 않는다. 기억을 송두리째 잃었음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청소는 잘 되고 있는건지 정리가 잘 되어있는 주방과 안방이 보였다. 안방 안에는 침대와 TV그리고 화장대가 보였다.

침대는 푹신푹신했다. 뭐 당연한 거겠지만 어째서인지 편하지가 않았다. 단지 허무할정도로 큰 공허함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저녁은 먹고 자는게 어때요?"

얼굴에 물기가 있는 그 남자가 내게 와서 말했다. 별로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먹어두는게 나쁘지 않을 것이리라.

사실은 다 알고있었다.

일부러 모르는척 순진함을 연기하며, 바보같이 속아넘어가주는것 뿐이었다.

다 알고있었다. 대가 없는 친절이 없다는건 알고 있었다. 그 남자도 뭔가를 바라고 내게 접근했다는걸 알고 있었다. 아까부터 남자의 눈빛에 보이는 그 감정이 욕망이라는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 단지 모르는척, 앞으로 내게 일어날 일들이 뭔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듯 놀라는 연기를 해야한다는게 귀찮고 성가실 뿐이었다.

남자가 날 여기 데려온 이유, 내게 안보이려는듯 애쓰지만 그 남자가 가져오는 물통에 약을 탓다는것 정도는 굳이 보려 애쓰지 않아도 볼수 있었다.

밥이 아니라 약을 먹는 기분으로 먹는다. 아니, 애초에 기분이란 것따위는 없이 그저 공허한 허무함뿐 결국 내 인생은 이렇게 될뿐인 것이었다.

아니, 사실은 다행일 것이다. 만약 내가 물을 마시지 않는다면 남자는 강제로라도 날 범할 것이다. 무슨 일이든 간에 '강제'라는건 기분나쁘다. 차라리 약을 먹는게 더 좋다. 아니, 약을 준비해준 남자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호화스럽지는 않지만 맛은 괜찮았다.

"천천히 드세요"

"……"

작은 몸이라도 원하는건 많았다. 마치 화풀이라도 하는듯 음식을 입에 밀어넣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채워지는건 없이 그저 그와는 다른 또다른 허무함이 생겨나 버린다. 그러고는 목마른 사람을 연기하며 물을 마신다. 컵에 가득한 물을 단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시고는 또다시 물통에서 물을 따라서 다시 마신다.

아니, 마신다기 보다는 내 안에 부어버린다. 그렇게 모든 약을 내 안에 부어넣어버렸다.

"꽤 많이 마시네요…"

"……"

그저 알았다는 식의 미소를 지어보인 뒤 난 식사를 마쳤다. 읽고싶지 않아도 읽혀지는 희열에 가득한 그 눈빛은 당장이라도 먹은걸 토해내고 싶게 만들었지만 이젠 익숙해져야만 한다.

이게 내가 살아가야만 하는 세상이니까.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흰색의 천장은 어딘가를 쳐다보려 해도 쳐다볼수가 없다. 그저 흰색이라는 전체적인 느낌은 있지만 어느 한곳에 집중할수는 없었다.

남자는 서두르지 않았다. 이런 일이 상당히 익숙하다는듯이 거실에 나가 TV를 틀어 보고있는것 같았다. 저렇게 내쪽에서 먼저 이상을 보일때까지 저러고 있겠지.

약이 있는편이 좋다. 그래야 나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강간당할수 있으니까. 그 다음날의 일은 그 다음날의 일이다. 어차피 내가 가지고 있는건 이 몸밖에 없으니, 차라리 숙박료라고 생각하자.

기억나지 않는건 기억나려고 노력해봐야 그저 허무한 상실감 뿐이었다. 기억해내고 싶지도 않았다. 날 찾는 사람도, 날 아는 사람도 없다. 그저 도시라는 섬에 버려진 사람처럼 사람은 너무나 많은데 그중에 날 아는사람은 아무도 없는 그 고독감을 맛봐야만 하는 것이다.

마치 꿈꾼 뒤 잊어버린 그 꿈의 내용을 생각하려 하는것처럼, 기억나지 않는걸 기억해내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아득한 기억때문에 괴로워진다. 그러니 애초에 생각하려 노력하지 않는게 좋다.

-딩동딩동딩동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린 이유는 울려오는 초인종 소리 때문이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는걸 알려주기라도 하려는듯 벨은 쉬지않고 계속해서 울려대고 있었다. 남자도 그게 견딜수 없었는지 내게도 다 들리는 혼자만의 욕설을 내뱉으며 인터폰을 받고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택배왔는데요]

"에?"

-뚝

남자는 인터폰을 끊고 문을 열었다. 분명 어디선가 택배가 올만한 물건은 없었을 거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난 다시 멍하게 약의 약효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퍽!

"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들린건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섬뜩한 소리였다. 그리고 곧이어 들리는 소리는 누군가가 누구를 때리고 있다는걸 알수 있을정도로 왠지 모를 불길함에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자 그곳에는 전혀 의외의 인물이 사람을 떡이 되도록 패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표정과는 너무도 다른 무섭고 화난 표정이라서 잠시동안은 그 사람인지 모를 정도였다.

"뭐, 뭐야 너! 왜이러는…"

"닥쳐! 이 개같은 새끼"

-퍽!

남자의 얼굴에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아넣듯이 강하게 한번 때리자 남자는 깔아뭉개고 때리는것을 그만하고 구둣발로 바닥에 넘부러져있는 남자의 머리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내가 정신을 차렸을때 맨 처음 내 앞에 있던 남자였다. 어째서 자기 갈길을 가지 않고 내앞에 있는걸까. 하지만 중요한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사람이 죽지 않을까 싶을정도로 처참하게 몰골이 되어가고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내 자신이 신기했다.

"가자"

날 쳐다보고 그 남자가 한 말이었다.

"…어딜?"

"여긴 안돼, 넌 모르는 모양인데…… 아니 이따가 얘기해줄테니까 일단 나가자"

"……"

남자는 내 손을 붙잡고 억지로 신발을 신게하더니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분여만에 알아볼수 없을정도로 떡이 된 남자의 얼굴을 한번 더 걷어찼다. 엘리베이터에 날 밀어넣듯이 태우고 내려가기 시작하자 방금 전까지 있었던 화난 기색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아니, 지금 모습을 본다면 방금 전까지 사람을 그렇게 때렸다는걸 믿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것이다.

끌려오다시피 남자의 집에 도착하자 난 왠지모를 불쾌함에 기분이 나빠져 있었다. 게다가 오토바이를 타면서 맞은 찬바람 때문인지 기분이 더 안좋았다.

"뭐하는 짓이야?"

"넌 모르겠지만 그녀석 너같은 기억상실 환자들만 골라서 나쁜짓을 하는 음흉한 놈이야, 너한테 무슨짓을 했을지 모른다고"

"……그게 어때서?"

"뭐?"

내 말이 의외였는지 그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내가 방금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듯 되물었다. 하지만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이해하지 못했을리가 없었다.

"…그럼 나 책임질거야?"

"에? 그… 그건…"

"책임 안질거면 왜 데려온거야?"

"아니 난… 그런 짓을 당하게 하는건 싫잖아?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화가났다.책임질것도 아니면서 단지 그런 짧은 문제를 생각하면서 날 데리고 나왔다는건가?

"내 몸이 어떻게 굴러가든 당신이 알바 아니잖아? 난 방금 너때문에 그런 짓을 당한다 하더라도 당분간은 지낼 곳이었는데 그곳을 잃었어 책임질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짓을 한거야? 그건 그냥 쓸데없는 참견일 뿐이야"

"그런게 어딧어? 넌 그럼 그런 놈한테 당하는게 좋다는 말이야?"

"좋지는 않아, 다만 어쩔수 없다면 그렇게 이해하는거지,네 쓸데없는 참견만 아니었다면 난 최소한 잠잘곳은 있었어"

하지만, 난 소리를 치면서 화내지도 않았다. 단지 조용하게 내 생각만을 말하며 화가 났다는건 드러내지 않고 방금 자기 자신의 그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만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점점 더 더워지고 있었다.

남자는 말이 없었다. 단지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을 되살려 보는듯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위선자"

"뭐?"

"아무것도 아냐"

하지만 못알아들었을리가 없다. 그렇다. 단지 내가 위기라 생각하고 구해준 다음 그 뒤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 그게 위선자인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잠시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는 날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잘못한것 같아, 하지만 난 솔직히 내가 아는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한다는게 싫어, 기분나빠 그냥 두고보라고 본인이 말해도 그렇게 하지 않을것 같아"

"그게 위선자 아니야?"

"그래, 하지만 난 지금 다시 방금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할거야"

이해할수 없는 논리, 결국 자기만족식의 선행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한 뒤 '아, 난 착한일을 했다'라는 식으로 쓸데없는 자기위로. 무엇도 해결되는것 없이 또다른 문제만 낳는식의 해결일 뿐이다.

"그래, 그러니까 책임지면 되는거지?"

"…"

이번에는 내쪽에서 할말이 없어져 버렸다. 지금까지 질책해놓고 나서 책임져 주겠다는 말에 좋다고 달려들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난 그런 일반적인 사람들의 행동처럼 할수는 없었다. 난 지금 당장 있을곳이 없다. 남자의 눈은 자포자기 상태였다.

"그래, 그러면 돼"

"당분간은 여기에 있어도 좋아, 확실히 내가 잘못한것 같으니까 거기에 대한 ㅐㄱ임을 질테니까. 이젠 됐지?"

"그래, 충분해"

난 그 말이 나오자마자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양말까지 벗었다. 방금 전부터 더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씻으려고?"

"아니…"

"그런데 옷은 왜 벗…어?"

남자의 당황한 목소리는 이제 귓가에 아른거리듯이 들려오고 있었다. 무언가에 제대로 집중할수가 없다. '더위' 자꾸만 느껴지는 더위가 견딜수 없이 날 괴롭힌다.

"더워…"

"너… 뭐 약이라도 먹었냐? 방금 전까지 밖에있어서 추울텐데 덥다고?"

-슥

남자는 내가 남은 옷마저 벗어버릴 것처럼 보였는지 내 손을 붙잡으며 내 행동을 말렸다.

"히익!"

"왜, 왜그래?"

"하아…"

순간 피부에 다른 사람의 맨살이 와닿는 느낌에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기분이 좋아져 버렸다고 해야할까. 방금 전까지 그렇게 화냈으면서도 내 자신이 이렇게 바뀌어지는게 가능한지가 의심스럽다. 남자는 남자대로 당황하고 나는 나대로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설마… 너 약이라도 먹었냐?"

-끄덕

"하아…하아… 더워…"

"그걸 왜먹어! 알면서도 그걸 먹었어?"

"먹으면… 더 견디기 쉬울것 같아서…"

숨이 차다. 몸이 뜨겁고 입안이 바싹 마른다. 몸은 무언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입으로 직접 나오지는 않는다. 필요에 의해서는 하겠지만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한다는건 생각도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난 더더욱 곤란해져 있었다.

남자는 남자대로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침착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내 몸에 손조차 대지 못하고 발갛게 달아올라 숨을 몰아쉬는 날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내가 약을 먹었다는걸 알았으니 이제 곧 내가 그렇게 될거라는것도 알고있을 터였다. 괜히 아까 약을 먹은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뭔가 말하고는 싶다. 하지만 뭐랄까, 이런건 아무리 무심한 여자라고 해도 망설여지는 말일 것이다. 눈앛의 남자도 내 상태를 알지만 어쩔줄 모르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가…"

"응?"

"가……가……가……"

뭔가 한 단어는 나오는데 그 다음 단어를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는 내가 하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듯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는 있지만 의사전달이 되고있지 않았다.

"가… 뭐?"

"가……가슴…"

"가…가슴? 그… 그건 왜…"

"가슴!"

더이상은 말할수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걸로 알아들었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는 더듬더듬 말했다. 몸은 계속 뜨거워지고 달아오르고 있었다.

"마…만져달라고?"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이게 100회를 넘어갈 줄이야....

마...만져달라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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