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벨소리가 울린다. 문이 열리고 왠지 서늘한 인상의 정현이가 문을 열고 날 안으로 들인다. 왠지 힘겨워 보이는 표정을 한 녀석은 말없이 소파에 가서 앉는다. 약간 화난것 같기도 하고, 약간은 어두워 보이기도 하는 표정이다.
"어디갔다왔어?"
"그냥…"
별로, 선우와 같이 있다는걸 이 녀석에게 말하는건 조금 기분이 그렇다. 왠지모르게 죄의식을 느낀다고 해야할까.
"어디 아퍼? 왜그래?"
녀석의 얼굴에 손을 갖다대자 왠지 뜨거워져있는것 같았다. 열이 있는건가. 녀석은 볼에서 손을 떼며 다시 멍한 표정이 된다. TV도 켜져있지 않았다. 왠지, 고민하고 있는것 같았다.
방에 들어가 교복을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오자 녀석은 그대로 멍한 상태였다.
"나 배고파"
"아… 그래…"
녀석이 당황한듯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부엌으로 향한다. 왠지 이상하다. TV를 켠다. 무엇을 하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너무 피곤하다. 소파에 비스듬하게 누웠다.
-쨍그랑!
아침에도 하나 깨졋던 접시가 이번에도 하나 깨졌다. 녀석은 서둘러 깨진 유리조각들을 치우더니 다시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그저 물을 끓이는것 뿐이다.
"라면 싫은데"
"주는대로 먹어"
"쳇"
나는 내가 입고있는 옷을 보았다. 레이스가 잔뜩 달린 잠옷, 왠지 화려하고, 귀여워 보이는 타입의 잠옷이다. 전신거울에 몸을 비쳐보니 상당히 어려보이는 모습의 어색한 내가 서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예쁜 모습에 나조차도 견디지 못할만큼의 성욕이 솟구쳐 오른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억지로 그 마음을 삼킨다. 언뜻 비치는 희미한 속옷에 왠지모르는 어색함, 그리고 충동.
내 몸에 흥분한다는게 애초에 말이 안되는 일이다.
나는 어땟을까. 남자였다면. 지금의 내 모습을 한 똑같은 여자가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지금 날 바라보는 남자들의 눈빛과 다를게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싫다. 그게 너무나 혐오스러워서, 더이상 생각하지 못하게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긴 머리, 거추장스럽다. 잘라버릴까.
문득, 목이 말라서, 냉장고를 열어 물통을 꺼냈다. 물을 마시면서도 왠지모를 위화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어제는 물이 이상했는지 쓴맛이 났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앗!"
순간, 유리조각이 발바닥에 박혔는지 발가락에서 뜨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제대로 못치워?"
"어?, 어, 미안"
왠일일까. 사과를 좀처럼 하지 않는 녀석이 내게 미안하다고 하며 날 앉히고 발가락에 박힌 유리조각을 빼낸다. 괜찮냐고 물어보는 녀석은 날 올려다보며 순간 갑자기 얼굴이 묘하게 달뜬것처럼 변해서는 다시 일어났다.
"왜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녀석은 다시 라면을 끓인다. 식탁에 앉아 멍하니 라면이 다 끓여지기를 기다린다. 맞은편에 있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 그러고 보니, 내 가슴, 꽤나 큰 편일까. 아니면 체형이 날씬해서 그런지 가슴이 더 커보이는 걸까. 양손으로 가슴을 하나씩 쥐자 손에 들어오고 조금 남는걸 보니 큰건 아니다. 딱 적당한 정도라고 해야할까.
그래도 이렇게 내가 내 가슴을 만지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은근히 기분좋다고 해야할까.
"밥먹으면서 그런거 하지마"
"에에?"
내 행동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녀석이 라면을 그릇 두개에 담아오며 말했다. 내 맞은편에 앉은 녀석은 젓가락을 내게 건네고 자기도 먹기 시작했다.
"나 그런거 아니야"
"알았으니까 다 먹고나서 해"
"아니라니까~"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한 녀석은 라면을 먹는데에만 열중한다. 뜨겁다.나는 뜨거운건 많이 싫어한다. 나는 꽤나 어중간한 성격이어서 더운것도 싫고 추운것도 싫었다. 굳이 좋아한다면 서늘하면서도 따뜻한것 정도일까. 뭔가 모순되는 느낌이지만 난 분명히 그렇다.
라면은 맛이라기보다는 그저 배를 채운다는 느낌이었다. 영양가가 좋지 않던, 먹고 바로 자면 얼굴이 붓던 그런건 신경쓰지 않았다. 그냥 '되는대로'
-딩동
벨소리, 문 박에서부터 들려오는 벨소리는 왠지모르게 내 가슴을 뛰게했다. 녀석은 올것이 왔다는듯한 표정을 했다. 지금껏 고민했던게 지금의 일이었던건지, 녀석의 표정은 꼭 내가 보기엔 썩어들어가는것 같아 보였다.
-딩동딩동
녀석은 문을 열려는건지 열지 않으려는건지 오락가락하는듯 머뭇머뭇하더니 이내 잠긴 문을 열었다. 식탁에서 보이는 그 실루엣은 나도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모습이었다.
"나왔어~"
기분좋다는듯이 웃으며 들어온 사람은 정현이 새엄마, 나에게는 이모라고 소개했던 사람이었다. 이상하게도 잠옷 차림으로 라면을 먹고있는 날 보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건지 작은 종이가방을 거실 한폭판에 내려놓은 그 여자는 척 봐도 상당히 아니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현이는 무시한 채 나에게 오더니 내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부모님이 외국으로 나가셧다고 했지? 그동안은 여기서 지내도 좋아, 단, 내가 같이 있어야된다, 알겠지? 정현이가 벌써 다 말했니?"
"아, 아뇨…"
"다른 보호자분들은 안계셔?"
정현이 녀석이 나를 보는 눈빛이 간절하다. 무언가, 눈빛만으로 통하는게 있다고 한다면 이걸 뜻하는 걸까, 본능적으로 눈치챈 나는 거짓말을 해버리고야 말았다.
"다… 먼곳에 사세요, 일단은 오래 나가시는것도 아니니까 잠깐만 지내면…"
"내집이야, 내가 지내게 하든 말든 무슨상관이야"
갑작스레 정현이가 끼어들어서 한마디 했다. 그 말에 할말을 잃은건지 잠시 막막해하던 그녀는 이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미성년자들의 동거는 안돼!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고!"
그러는 당신도 꽤나 보호가 필요한 여성같은데요.
"내맘이야, 둘다 내 집에 얹혀사는거니까 큰소리치지마"
"으으…"
나는 아무말 하지 않았다. 말그대로 나는 얹혀사는거니까 내가 뭐라고 할 권리같은건 없다. 집세를 안받는것만해도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라면은 대화 도중에 다 먹어버렸다.
"저기… 이모"
"나 아직 젊으니까. 언니라고 불러"
그건 내가 싫은데, 누나도 아니고 언니라니, 오빠라고 부르는것도 먹은게 얹히는 기분이었는데 언니라고? 차라리 날 죽여라.
하지만 그러면서도 입은 너무나 매끄럽게 언니라는 두글자를 구사하고 있었다.
"언니… 음, 알았어요"
"!!"
뒤에서 쳐다보던 녀석은 충격먹은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가와 먹은 그릇들을 치웠다. 아마 아까 기분이 안좋아 보였던건 지금의 상황이 오리라는걸 알고있었기 때문이었을까.
토하고 코피나고.....
미치겠다
"하아아…"
하얀 한숨이 길게 늘어진다. 하지만 온몸은 그렇지 않아서, 하얀 추위에 얼어붙기라도 했는지 잔뜩 긴장되어있다.
"세상 끝났냐, 왜 그렇게 한숨을 쉬어?"
"으음… 그냥"
사실 내 인생엔 무언가가 개입에도 아주 크게 개입해 버렸다.
일단 개입(介入)이라는 단어라 함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 끼어들다. 정도인데 나는 그런 개입, 그것도 아주 폭력적인 개입을 당해서 지금 이렇게 되어있다. 단지 그건 폭력만이라고 볼수는 없어서 지금 나는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는 상황이 된 채이다.
역발상이라고 해야할까, 역발상(逆發想)이라기보다는 비상식(非常式)이겠지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꽤나 애매모호하면서도 판타스틱한 그런것이다.
여자가 되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리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비행소녀다. 청소년의 성관계가 불법인지 아닌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일단 중요한건 오래된 우리나라의 관습으로 볼때 그건 비행이라고 봐도 좋다.
이렇게, 난감한 일에, 난감한 상황에, 절대 눌러앉으리라고는 생각도 할수 없었던 친구네 집에 눌러살게 되다니, 게다가 초절정 미소녀가 되어버린 지금은 타인의 위협에 내 목숨 하나도 부지하기 힘들 지경이다.
춥다.
"추워?"
생각과 동시에 물어보는 이녀석, 사실 날 가장 잘 아는 녀석이 이녀석이다. 같이 있던 시간이 가장 많아서, 이녀석과 나는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서로의 성격도 잘 안다. 그래서인지 우리 둘은 뭔가 닮은듯하면서도 정반대인 구석이 있었다. 지금은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더 커서 위축감이 들 정도지만
[거짓말]
순간, 머릿속으로 울리는 말이 있었다. 나는 그걸 내 옆에서 걷는 정현이 녀석이 한 말로 착각해서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뭐라고?"
"춥냐고 물어봤잖아"
"아니, 그거 말고, 그 다음에"
녀석이 무슨 소리냐는듯 어깨를 들썩여보인다.
"무슨 소리야 그 다음이라니"
"거짓말… 이라고 했잖아?"
"난 그런적 없는데?"
장난을 치는건 아닌듯싶었다. 환청일까. 그런데 거짓말이라니 그게 무슨소리지.
하긴, 환청은 의미없는것이 대부분이다. 누구나 듣는, 하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그런종류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난 낙천적인 거라고 해야할까.
이렇게 변해버린 몸이다. 환청정도쯤 들려도 이젠 놀라지 않는다. 무덤덤하게 학교로 걸으며 시린 몸을 한번 떨어본다.
"전화하면 좀 받아 계속 무시하지 말고"
"아아, 그런가, 난 인기가 많아서 네 전화따위 받아줄 시간이 없는데 어쩌나…"
"개소리…"
"뭐?"
사실 지금까지 부재중에 걸려온 전화는 많지만 직접 받은건 몇 없었던것같다. 학교까지 걸으며, 주위의 시선이 꽃히는것이 느껴진다. 아마도 주변사람들은 연인으로 오해할것이 분명하다.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타인은 타인일뿐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든 상관은 없다. 뭐 일단은 사촌오빠라고 해명해놓은 사람은 한명 있지만. 갑자기, 녀석이 내 손을 잡음과 동시에 무언가를 건넨다. 남들은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건네어진 그것은, 검고 무거운 이형의 물체였다.
"뭐…야 이게?"
"만화나 텔레비전에서 많이 봤잖아? 지지직! 하면 으악! 하는거"
"이…게?"
내 손에 딱 맞는 크기의 그것은 보던것보다는 사이즈가 많이 작았다. 흉흉한 검은 광택을 내뿜는 그것은 생각했던 것만큼 무겁지는 않았다. 단지 주머니에 넣고다니면 편할 정도의 무게감이었다. 이걸 주는 이유는 딱히 물어보지 않아도 알수 있는듯, 녀석은 그냥 고개를 끄덕여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치마 뒷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그것은 꽤나 마음에 들었다.
-틱 틱 지지지
"조심해,일반인이 죽을정도는 아니지만 신경이 예민한사람은 죽어"
"이거 허가받아야 살수있는거 아니야?"
허가, 즉 합법이라는것과는 거리가 먼 세계에 사는 이녀석에게 그런걸 물어보는 자체가 어폐가 있었다. 녀석은 역시 불법적인 루트를 통해 얻은건지 살짝 미소지어보였다.
"호신용"
"너한테 실험해볼까?"
"장난치다가 죽으면 책임지게?"
"으음… 그럴까?"
"최신형 모델이라던데, 사이즈도 휴대가 용이하게 소형으로 만들었다고 하고, 비싼거니까 잃어버리지마"
"응"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믿을수 없다는 시선으로 쳐다본다. 날 너무 불신하는거 아닐까. 마음에 안든다. 하지만 이걸 건네준 자체가 내 신변에 안전을 기하는 거니까. 날 생각해서 그러는 거겠지.
"어쨋든… 고마워"
"알면됐어"
녀석이 내 머리에 손을 올려놓더니 아래로 쓱쓱 쓰다듬는다. 갑자기 애완용 강아지가 된것같은 기분에 그 손길을 피한 다음 앞서 걸었다. 왠지, 기분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왜그래?"
"애완동물취급하지마, 기분나빠"
"애완동물 맞잖아? 내집에 살고, 내가주는 밥먹고"
어느새 뒤따라온 녀석이 내게 말한다. 주변의 녀석들이 듣지는 않았을까, 괜히 둘러보게된다. 다행히 들은 녀석은 없는듯, 녀석은 혼자 실실 쪼갠다.
"아아, 미안, 애완동물이 아니라 가축이 더 어울리겠네, 소 돼지같은…"
"!!"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모욕감이라기보단, 그걸 부인할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다 좋은데, 이녀석은 장난이 너무 심하다. 그래서, 우리 둘은 자주 싸우고, 자주 화해하고, 그렇게 지냈다.
하지만, 왠지모르게 내 처지가 너무 억울해져버렸다.
난 잘못한게 없는데. 이러게까지 날 몰아붙인 세상이 너무 싫어졌다. 그리고, 갑자기 녀석이 너무 싫어졌다.
"어라? 너 삐졌냐?"
"안삐졌어"
사실, 삐진사람보고 삐졋다고 하면 더 삐진다. 그리고, 화난 사람한테 삐졋다고 하면 더더욱 화가 난다.
그리고, 울고싶은 사람에게 삐졌냐고 물어보면 눈물이 나는 법이다.
나도 인간의 일반론을 벗어날수 없는지,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교문이 가까워져옴을 느껴서, 나는 달렸다.
"나, 나 먼저 간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뛰었다. 녀석은 자신이 한 말로 인해 내가 어떤 기분에 빠졌는지 모르는듯, 볼을 타고 얼어붙을것같은 볼에 눈물이 한방울 흘렀다.
사실, 화내고 있는데, 정작 화내고 있는 대상이 그 마음을 몰라주면, 훨씬 더 답답한 법이다. 사실 녀석이 잘못한건 단지 말장난을 했을 뿐이다. 내가 이 처지에 빠지게 된건 그녀석 잘못이 아니다. 게다가 갈곳없는 날 데려와주지 않았던가.
고마워해도 모자라는데 미워하고 있다니, 나는 바보다. 하지만 이 울분이, 억울함을 분출할 곳이 없어서, 나는 녀석을 원망하고 있었다.
다 그녀석 때문이다. 내 처지를 잘 알면서 그런 질나쁜 농담을 한 그녀석 잘못이다.
[삐졌니, 그래, 가축은 너무했고 애완동물로 해줄께 ㅋㅋ]
내가 화난건 모르고 이런 질나쁜 문자를 또 보냈기 때문에 내가 더 화난걸지도 모른다.
"누구랑 문자해?"
"!!"
-드르륵!
무심코 들려오는 말에 벌떡 일어나 버렸다. 거기엔 휠체어를 타고있는 아현이가 왠지 놀란눈빛을 하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니… 그냥…"
"남자친구?"
"아니…아니… 그런거 없어"
"그런데 왜 그렇게 당황해?"
짓궃은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다가오는 아현이는 도저히 미워할수 없게 생겼다. 단지, [시끄러워]라는 짧은 답장을 얼른 보내고 온 문자를 지워버렸을 뿐이다. 난처한 표정을 짓자, 아현이는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자리로 갔다.
예쁘다. 확실히, 걸을수 없다는게 너무나 안타까울 정도로
옆자리의 오빠, 진현이라고 했던가. 둘이 무언가 얘기한다. 무엇이 즐거운건지 웃는다. 들은 얘기에 의하면 아현이는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다 돌아가시고 아현이는 두다리를 다쳐서 저런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큰아버지의 집인 진현의 집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 생활이 어떤지는 알지 못하지만 지금 모습을 보면 굉장히 좋은듯하다.
그에 비하면 난…
문득, 또다시 울고싶어졌다. 그런 악질적인 장난을 하는 녀석에게 과연 내가 있어야 하는걸까. 문득 의심이 되었다. 아침과는 달리 우중충한 하늘이 왠지 오늘따라 더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오늘 안좋은일 있어?"
"아?"
민정훈이라고 하는, 왠지 망므에 들지 않았던 녀석이 내 책상 앞에서 실실거리며 물어온다.
"아니… 괜찮은데"
"그런데 왜 그렇게 울상이야?"
"내가 그랬나?"
"확실히 그랬는데, 울것같은 표정이었다니까?"
아직 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대로 표정에 드러났던걸까.
"야! 너 또 찍접대냐?"
"아아! 아아아! 왜그래! 아무말도 안했어!"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반장이 녀석을 끌고 사라졌다.아아, 여러모로 둘다 학교생활 힘들게 하는 모양이다.
-지이잉
진동과 함께, 문자가 도착했다.
[주인님을 거역하다니, 오늘 들어오지마!]
이런 내용이었다. 장난이겠지, 장난이겠지
"하하…"
장난이겠지라고 하면서도, 장난인걸 알면서도, 왠지모르게 눈가에 먹구름이 낀건지, 눈앞이 새까맣게 변해버렸다.
어째서 이런 장난을 치는거야, 내가 힘든걸 알면서도. 모르는건 아닐텐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들어오지 마? 이게 무슨소리야?"
옆에서 아현이가 문자의 내용을 본건지, 내게 물었다. 봐버린걸까. 주인님이라는 그 단어, 친구끼리 하기엔 상당히 매니악한 단어였는데. 하지만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덜덜 떨린다. 손이, 몸이, 장난인걸 알면 그만 멈추란 말이야, 하지만 몸은 떠는것을 멈추지 않는다. 왜지, 난 왜 과민반응하는거지.
하지만, 갈곳없는 처지에 반박할 말도 없다. 하지만 이대로 굽히고 들어가기엔 왠지, 내 자신이 너무 비참해지는것 같았다.
[알았어]
이번 답장도 짧았다.하지만. 하고싶은말은 너무 많았다. 원망하고싶었다. 화내고 있는데 그걸 몰라준다는 사실이 이렇게 더 화가 나고 더 비참하고 더 괴롭다는걸 새삼 느낀다. 가서 주먹으로 한대 때려줘야 기분이 풀릴것 같았다.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것 같았다.
쉬는시간이 끝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정현의 단 하나의 나쁜점.
하지만 가장 큰 단점이라고 해도 될듯. 본래 악의는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는 사람이 가끔 있죠.
-쏴아아아아
비가 내린다. 비와 흙이 섞이면서 나는 흙냄새를 느낄 새도 없이 굉장한 기세로 쏟아지는 비는 마치 홍수라도 날것같아 보였다. 우산은 없다. 예보되지 않은 비였기에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인지, 우산이 없어서 그저 현관 앞에서 쩔쩔매고있을 뿐이었다.
-드륵
현관의 신발장을 열고 실내화를 넣은 뒤 신발로 갈아신는다. 그저 갈아신기만 할뿐,이 빗속을 뚫고 갈 방도가 없으니 막막한건 마찬가지지만.
다들 비가 멈추길 기다리는지, 몇몇 녀석들은 신문을 머리에 이고 전력질주한다. 비가 와서 그런걸까, 추웠다.
"우산 없어?"
뒤를 돌아보자. 휠체어에 타고있는 아현이와 그걸 끌고있는 진현이 보였다. 그 둘도 우산은 없어보였는데, 늘상 기다리는 검은색의 큰 차에서 나온 사람들인지 검은옷을 입은 사람 둘이 우산을 쓰고 양손에는 우산을 하나씩 쓰고있는게 보였다.전부터 느꼇지만 아무래도 대단한 집안의 애들인 모양이다.
"괜찮으면 태워다 줄까?"
진현의 말이었다. 곤란하던 차였다. 그보다 더 좋은 제안은 없으리라. 하지만 왠지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고마워"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진현이 나오는걸 보고 고개를 숙였다. 그걸 당연하게생각하는듯, 아아 하고 손을 내저어보인 녀석은 질린다는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학교앞에선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위화감 조성하는거야?"
"죄송합니다 도련님."
그러면서 그 남자는 고개를 또 숙이며 우산을 씌웠다.
"우산정도는 혼자 쓸수 있어, 그리고 우산은 저기 뒤에 수민이부터 씌워줘"
그러자 다른 남자가 내게 다가오더니 커다란 검은 우산을 내 머리 위에 놓았다. 왠지모르게 위축되는 느낌은 은근히 겁나는것같다.
아현은 추운건지 몸을 부르르 떨고있었다. 교문 밖에 대기하고있는 검은 차가 보였다.
"!!"
그리고 나는 다른걸 보았다. 정현이가. 교문 앞에서 커다란 이인용 우산을 손에 들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듯, 녀석은 나에게 이리오라고 손짓해보였다.
문득, 화가 나버렸다. 내 기분은 생각하지 않고, 난 괜찮을거라고 생각하는건가. 그리고 교문 앞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면, 그런걸로 내가 풀릴거라고 생각한걸까.
나는, 녀석을 지나쳐, 검은 차에 올라탔다.
커다란 검은색 차에 타자 예상대로의 넓은 공간이 나왔다. 휠체어에서 내려 소파같은 좌석에 앉은 아현은 내게 웃어보이며 어서 타라고 손짓했다. 진현은 앞쪽좌석에 탔다.
리무진이라고 하는 차, 사실 처음이었다. 은근히 묘한 기분에 냉장고가 있다더니 역시 조그마한 냉장고가 있었다. 처음보는 고급차의 내관에 신기하게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본다.
"수민이부터 데려다주자, 어디살아?"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오늘 들어올 생각하지마]
진심일까. 진심이 아니라는건 안다. 하지만 알았어라고 답장을 보내버렸는데, 다시 들어간다면 녀석은 또 '안들어온다며?'라는 말로 날 자극할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방금 무시한것때문에 녀석도 약간은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갈곳이 없다. 나는 갈곳이 없다.
나는 정말 비참한 심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신림아파트"
"출발해주세요"
아현의 말과 함께 검은색 차는 출발했다. 창밖에서 녀석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마워"
정현이 사는 아파트, 내 집이 아니다. 단지 나는 식객, 바로 라인 앞까지 데려와 내려주며 아현은 잘가라고 손을 흔들어 보인다. 아현과 진현, 둘에게 모두 인사하며 나는 땅에 붙어 떨어질것같지 않은 걸음을 옮겼다.
비를 잠깐 맞아 젖은 옷은 신경쓰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작은 어깨, 힘없이 가라앉은 어깨, 무엇하나 자신감 있는 모습이 아닌 두 눈, 패배의식에 젖어있다.
다 때려치우고, 그냥 주저앉아서 울고싶다. 이 시간이 영원인것 같아서, 기절할것같다.
-딩동
너무나 짧은 시간동안 엘리베이터는 열한개의 층을 이동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문이 보인다. 벨을 눌러야 하는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몇밀리만 움직이면 정현이 새엄마가 와서 문을 열어줄 것이다. 하지만 정현이 돌아온다면? 왜 왔냐라고 말하지 않을까. 나는 벌써부터 녀석을 무시한걸 후회하고 있었다.
벨은 누르지 않았다.
"뭐야… 어린애같이"
아주 작게, 아무도 듣지 못할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맞다. 어린애다. 난 아직 어린애다. 그래서 쉽게 상처받고, 쉽게 삐치고, 쉽게 화낸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화가 안풀렸다. 미안하다고 하는 문자 한통 오지 않은 핸드폰을 다시 한번 무의미하게 쳐다보며, 녀석이 사과하기 전까진 돌아가지 않는다고 강하게 다짐했다.
그래, 난 어린애다.
나는 결국 벨을 누르지 않고 아파트 밖으로 나왔다.
-쏴아아아아아
비가 쏟아진다. 녀석은 이제 곧 돌아올 것이다. 비를 이곳에서 피하며 멍하니 있다간 녀석에게 또 바보취급당할수도 있다. 그건 싫다. 싫어서, 라인 밖으로 나와 비를 맞기 시작했다.
얼음같이 차가운 비가 교복을 적신다. 다른 라인에 들어가서 문자가 올때까지 기다릴까 하는 생각으로 반대편 아파트 라인에 들어가 기다렸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들이 날 쳐다보는 이상한 시선이 싫어서 다시 나와버렸다.
'우산이라도 빌려달라고 할걸'
난 참 바보다.
"쳇…"
문자는 오지 않고있다. 그래봐야 20분 지났을 뿐이다. 최소한 세시간쯤은 사라져줘야 녀석도 조급해하지 않을까. 하지만 추위에 젖은 몸은 덜덜 떨린다. 얼마 전에도 시내에서 바들바들 떨었었다.
그땐 가슴이 너무 아파서, 춥다는건 생각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살을 에이는 차가운 빗방울이 온몸을 적신다. 이제 곧 문자가 도착할테니 핸드폰만은 젖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품속 깊숙히 핸드폰을 넣어두었다.
이곳 근처에서 얼쩡거리다간 녀석의 눈에 뜨일수도 있고 그럼 더 바보취급당할게 분명했다. 그냥 지나치더니 고작 이러고 있냐라는 말을 듣고싶지는 않았다.
시내로 나가자.
-촤아악!
"아윽!"
물웅덩이를 밟고지나가는 트럭때문에 나는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도 모두 물에 젖은 생쥐꼴이 되고 말았다.
"옷이 젖었어, 어제 빤건데… 어떻게해"
"망할자식같으니라고…"
전부 고운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꺼내 혹시나 젖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젖지는 않아서 빛을 발하는 핸드폰을 보며 안심할수 있었다.
모두 우산을 쓰고 다니는데 나만 우산이 없다는 사실이 왠지모르게 더더욱 비참해지는것 같았다.
[바보]
라고 하는 환청이 들린것 같았다. 아무래도 좋다. 얼른 미안하다는 문자가 와서 들어가고싶다. 이대로라면 얼어버릴것같아. 지금쯤 집에 있을텐데.
-지이잉
"!!"
순간, 온 문자에 놀라서 핸드폰을 열고 기쁘게 문자를 확인했다. 나는 웃고있었다.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수도권지역에 급작스러운 호우, 외출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하…하………"
-털썩
울고싶어졌다. 재난경보문자따위에 기뻐하다니, 바보바보바보바보
젖은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물인지 눈물인지, 뜨뜻한 무언가가 눈에서 흘렀다. 바보같이 울고있었다. 울면 진짜 바보다. 핸드폰을 다시 품속에 넣고 일어섯다. 사람들이 쳐다본다.
다시 걷는다. 시내 한복판을 비맞으며 걷는 녀석,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간다. 빗방울이 차갑다. 우산 살 돈도 없어서, 더더욱 비참하다.
왠지, 녀석이 점점 더 미워지고있다.
세시간째, 나는 전화는 커녕, 문자 한통도 받지 못하고있다.
"바보"
얼른 문자 안하면, 절교할지도 몰라. 이게 다 누구때문인데.
"콜록! 콜록!"
감기걸려버린걸까. 재채기와 함께 목이 아프다. 네시간째, 핸드폰의 시계는 8시를 가리키고 있고 어두컴컴해져서인지 뭐가 뭔지 알아보기도 힘들다. 추워서 그런걸까. 정신은 바짝 들어있지만 자고싶다.
다 때려치우고 그냥 집에 들어갈까. 그냥, 밖에서 조금 놀다왔다고, 그렇게 말하면 그만이다. 그냥 기다리는건 못본거라고 말하고싶다.
다 필요없잖아. 이것도 그냥 내 고집일 뿐인데, 어린애같이. 겨우 그런 말 하나에 삐쳐선 네시간이나 가출했다고. 나한테 소리칠지도 몰라.
하지만 생각뿐, 내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병원 건물 구석에 멍하니 서서, 오지 않는 문자를 기다린다.
품속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그것을 열어서 무엇이 왔는지 확인한다. 이미 결과는 나와있다.
-미끌
"아…"
-철벅
순간, 세상이 정지한것처럼 보였다. 내 눈에는 작은 물웅덩이에 빠져있는 핸드폰, 액정에 이상이 생긴건지 서서히 빛이 변하더니 꺼져버리는 모습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아…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걸로, 문자가 와도 받을수 없게 되었다. 물에 젖은 핸드폰을 들었다. 아무리 눌러도, 아무리 종료버튼을 꾹 누르고 있어도 작동하지 않았다. 멍하니 비를 맞는다.
안돼, 안돼
문자가 와도 받지 못하잖아, 녀석이 사과를 해도 모르잖아 이렇게 되어버리면. 바보같이, 바보같이 바보같이 바보같이 무슨짓이야 이게, 왜 놓친거야, 대체 왜 놓쳐버린거야.
"바보…같이…"
빗방울에, 눈물이 섞여서, 점점 더. 점점 더 좌절해간다. 병원 건물을 떠나 정처없이 걷는다. 들어갈까. 생각했다.
심리묘사는 참 뭐같군...
"핸드폰… 켜놓으라고 했는데…"
켜놓을수 없게 되어버린 핸드폰을 다시 품에 넣는다. 젖어버린교복은 얼음덩이를 입고있는것 같았다. 하얀 입김이 부들부들 떨린다.
"바보…"
고개를 숙였다.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많은데, 고개를 숙이자 눈물이 났다. 빗방울과 눈물이 섞여서 무엇이 눈물이고 무엇이 빗방울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단지 분명한건.
지금 내가 울고있다는것.
가야할곳도 없다. 단지, 그저 내가 처한 이 상황이 억울할 뿐이다. 나의 잘못이 뭐길래.
단지 등가교환이라는 그런 어이없는 논제로 날 설득하려하는 세상이 싫다. 본래 원하지도 않았던 거래, 등가교환이고 뭐고 다 집어치워.
울면서. 나는 정처없이 걸었다. 이제 문자가 와도 받을수 없다. 집에도 돌아가지 않는다. 또 그때처럼, 녀석이 날 찾아주길 기다려야 하는걸까.
"………하하"
바보같이, 그때와 똑같은 장소, 그 아래에 나는 앉아있었다. 얼마 전, 부모님을 잃은것 때문에 상심했을때, 여기에 멍하니 앉아있는 날 녀석이 데리러 왔었다.
바보같이, 난 여기에 있으면 녀석이 날 데리러 올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보"
어쩔수 없다. 난 여기까지밖에는 모르겠다. 더는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나지 않는다. 집에는 갈수 없다. 그냥, 그냥 와줘, 제발 와달라고. 추위에 떨며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쏴아아아아아
빗줄기는, 이제 아팠다. 살을 때리는 빗줄기 때문에, 입술과 손은 이미 얼었는지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걸까.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나고 있었다. 그걸 숨기고 싶어서,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는다. 문득 본 문닫은 건물 위의 전자시계는 10시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아…하아…"
녀석에겐, 이제 기대도 하지 않았다. 순전히 내 착각인데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어디든지 가고싶다. 일어났다. 뭘까, 난 갈데가 없다.
문득 누군가가 생각났다.
김선우.
녀석이라면, 날 받아주지 않을까. 아니, 그동안의 관계도 있으니, 받아줄거다.
어렴풋이 내 자신이 이젠 싸구려로 느껴졌다. 몇번 같이 잔것가지고 이제는 그것으로 집에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해 버렸다. 몸을 파는 여자같은 생각을 해버렸다. 아니, 그럴수밖에 없다. 내 마지막 재산은 이 몸이니까. 이것이라도 팔아야 하는걸까.
네온사인의 흥청거리는 거리는 너무나 외로웠다. 누군가 안아줬으면 하고 바란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녀석의 집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등교길이 나왔다. 비오는 어두운 밤의 등교길은 보이는게 없었다. 아침에 이곳에서, 녀석이 한 말 때문에 이렇게 된거다. 사실 별거 아닌일로 내가 화를 내서. 일이 더 커진거다.
모두 다. 내가 이렇게 만든거다.
하지만 난 어째서 녀석을 원망하고 있을까. 바보같이, 등교길을 걸으며 생각한다.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
계속 생각하다가 가로등 밑에 오도카니 서있는 사람들 보고, 나는 할말을 잃었다.
"어…째서?"
거기엔, 녀석이 우산을 쓰고 멍하게, 정말 아무생각 없는것처럼 멍하게 땅을 쳐다보고있는 모습이 있었다. 그 모습에 할말을 잃어서, 나는 잠시 어둠속에서 가만히 서있었다.
-쏴아아아아아
비가… 온다.
기쁜건 아니었다. 그대로, 내가 지나친 그 다음부터 계속 저대로 서있었던건지, 그자리에 못으로 박히기라도 한듯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왠지, 감동이라기보다는 화가났다.
겨우 저런 짓이나 하고 있었던 건가. 미안하다면, 미안하다고 말하면 끝날 일을, 저렇게 멍청하게 서 있었던 건가.
하지만 알고있다. 저녀석이나 나나, 감정을 말하는게 서툴러서 그렇게는 못한다는걸, 장난은 쉬워도, 진심을 표현한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때문에, 그럴수 없다는걸… 하지만 알면서도, 사람이기 때문에, 솔직하지 못한것에 대해 나는 화가났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한대 때려주고 싶었다.
-턱
"!!"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올라왔다. 불길한 위화감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상자에 넣어진채로 버려진 고양이를 보는것같은 눈을 하고있는 녀석이 서 있었다.
"뭐해? 비는 다 맞으면서…"
경계심이 풀어진다. 안도감에 숨이 가라앉는다. 단지 그런것이었을까.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왔다. 하늘, 검은 하늘이, 빗방울이, 하얗게 이지러지는것같은 느낌이었다.
시험기간인데.... 뭐하는거지
머리가 아프다.
"……"
어둠에 물든 방 안에, 침대에 누워있는건지 푹신푹신한 감촉이 느껴진다. 땀을 흘렸던 건지, 온몸이 축축해서 기분이 나빳다. 젖어서 기분나쁘게 달라붙고 무거웠던 교복은 어디에 있는건지 지금 입고있는옷은 내 옷이 아니었다. 하늘하늘한 원피스같은 옷, 잠옷인것 같았다. 어째서 그녀석이 여성용 옷따윌 가지고 있는거지.
"우으……"
머리가 깨질것같다. 또다시 시작되는 두통에 머리를 잡고 몸을 뒤튼다. 검은 세상이 마구 일그러지기 시작하고 눈앞이 흔들린다.
"으으!! 아아아아아악!!!"
-쿵!
몸을 들썩이다가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진것 같았다. 등이 아픈것과는 비교할수없을정도로 아픈 머리때문에 그런것에 신경을 쓸수가 없었다. 나도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온다. 머리가, 머리가 이대로라면 깨져버린다.
"크으으으으흐으흐으!!!"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 머리속을 누군가가 마구 헤집어놓는것같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구 일그러진 눈앞은 제자리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대로 죽어버릴것만같이 극렬한 두통은 침마저도 삼키지 못할정도로 강하게 내 뇌리를 자극한다.
"끄으으으으으…흐흐흐 아으!!"
눈물과 침이 뒤섞여서 흘러내린다. 죽고싶다. 이 고통을 잊기 위해서라면, 죽는것이라도 할수 있을것 같았다. 약, 약, 어디서 생각이 난건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있을리가 없다. 게다가 남의 옷이다. 교복에는 들어있겠지만 이 옷에 들어있을리 없다.
"으으으으으으으!!!"
죽는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그런 생각이 자꾸만 어지러운 머리속에 아른거린다. 죽기싫다. 난 이대로 죽기 싫어. 발버둥친다. 약약약약약 약이 필요하다. 눈물과 침을 질질 흘리면서 올라오는 극심한 구토감에 시달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아욱… 으…"
책상 위에, 달빛에 희미하게 보이는 검은색 봉지가 있었다. 뭔지는 몰라도, 분명 저 안에 약이 들어있었다는게 기억이 났다. 간신히 기어가 봉지 안에 손을 넣어 되는만큼의 약을 꺼낸다. 몇개를 먹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입에 들어가는대로 씹어삼켰다.
"흐으…흐으…흐으…"
두통이 가라앉는다. 아니, 가라앉는다기보다는 없어져버린것 같았다. 머릿속이 어지럽다. 이 약, 효과가 엄청나게 빠르지만 엄청난 후유증이 있었던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나는건 그런게 아니라. 지금 당장 쓰러져버릴것같은 극심한 무기력함이었다.
-덜컥
"왜그래, 어디 아파?"
문이 열리고, 익숙하지 않은 빛과 함께 누군가가 들어온다.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군지는 알수 있었다. 녀석은 바닥에 널브러져있는 나를 끌어안고 침대에 다시 눕혀놓는다.
"왜그래, 어?"
"아…으……"
내 행동에, 나도 놀라버렸다.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극심한 고통에 뇌가 언어라는걸 잊어버리기라도 한건지 입술과 혀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온몸의 무기력함, 손끝 하나도 움직여주지 않았다.
"왜그래, 말이 안나와?"
고개를 끄덕이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되지 않았다. 문득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정현이는, 그럼 아직도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걸까? 분명 그럴거라고 뇌가 멋대로 생각해버렸다. 말도 나오게 하지 못하는 주제에 제멋대로의 상상은 날개를 단것처럼 혼자서 나아간다.
"졸려서 그런거야?"
"……"
이젠 말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눈이 절로 감긴다. 녀석은 그걸로 내가 잔다고 생각한건지, 이불을 덮어주며 잘자라고 속삭였다.
정현이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도, 더이상은 나지 않았다.
일어나보니, 해는 중천이었다.
-부스럭
몸을 움직이는건 힘이 들었다. 간신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정도만으로, 나는 모든 힘을 다 쏟아버린건지 눈이 또다시 감기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다. 여긴 어디인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난 어제 뭘 한건지, 어째서 여기 있는건지, 잠시 뒤에 기억났지만 순간, 내 이름까지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서…선…우?"
혀가 말리는것같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아서 간신히 내뱉은 말에 누군가가 몸을 일으킨다. 한참 옆에 누워있던 남자는, 익히 알고있는 얼굴을 한 선우였다.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아니, 혀가 뇌의 통제를 듣지 않는건지 자꾸만 움직이는게 힘겹다.
몸이 왜이렇지. 침대 아래로 내려가 책상을 짚고 간신히 일어선다.
"왜그래? 힘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조차도 힘들다. 하지만 일어서있지 않으면, 왠지 다시는 일어설수 없을것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애써 일어서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책상에서 손을 떼는순간 힘이 풀린 다리는 그리 무겁지 않은 체중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너… 왜그래?"
왠지모르게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다. 어째서, 왜 다리까지 말을 안듣는건지. 어느새 침대에서 내려온 선우가 내 어깨를 붙잡고 말한다. 다리가 움직여주지 않는다. 아니, 온몸 어느곳에도 힘을 줄수가 없다.
"화…"
"화 뭐?"
"화…ㅈ…"
혀가 움직이지 않는다. 뭐가 문제지. 이런 나 자신이 나도 답답해서 미칠것같았다.
"화장실?"
다행히 녀석이 알아듣는다.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날 일으켜 세우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부축하고있는 모습에 왠지 꼭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아…아…"
"왜그래?"
다리에, 아니, 그보다는 다른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걸 느낀건지, 녀석이 서둘러 화장실에 들어가 내 팬티를 벗겼다. 겨우, 오줌따위도 참을수 없을만큼 몸이 이상해져 있었던건지, 팬티는 더러운 액체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내가 입고있는 원피스를 벗기더니 변기에 앉혔다.
"어디…아파?"
"……"
대답할수 없었다. 나도 지금 내가 어디가 이상한건지 모른다. 뭐가 잘못인지도 모른다. 내가 뭘 잘못한건지도 모른다. 어젯밤의 백지장같은 하얀 기억은 잊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솟아올랐다. 우는 표정을 지을 여력도 없었다. 무표정하게, 눈물만을 흘리고 있었다. 녀석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걸까. 소리없이 우는 나를 욕조에 앉히더니 물을 틀었다.
"목욕하면 괜찮아질거야…아마"
내 눈물을 닦아주며 녀석이 내 볼에 가볍게 키스한다. 안심하라는 표시였을까. 내 불안한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것 같았다.
S:84%25
M:3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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