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17/22)

"으으…"

무언가에 홀린듯한 기운이 아직도 남아있다. 마지막에야 정신을 차리고 나서 대충 수습해 놓은 뒤에 잠들었는데 일어나보니 이건 얼마 자지도 못한것 같았다. 난장판이었던 침대시트를 세탁기에 쑤셔넣고 새걸로 갈아놓은 다음 쓰러진 수현이에게 옷을 입혀놓은 다음에서야 잠들수 있었다.

"으윽"

머리가 아프다. 그리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엄청나게 귀찮았다. 뇌 속에 기생충이라도 있는것 같은 기분…

난 뭐라고 말해야 할까. 뭐라고 변명을 해야 저녀석이 납득하고 전처럼 다시 돌아갈수 있을까. 그리고보니 침대에 눕혀두었던 녀석이 없다. 어디에 있는거지?

거실에서는 TV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직 새벽, 조금 열린 문으로 밖을 살펴보니 형광등 불빛으로 녀석의 얼굴이 보인다. 뭔가 상당히 귀찮은 일이 있다는듯한 표정이었다.

-꿀꺽

미칠듯이 심장이 뛴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하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수도 없다. 뭐라고 변명할 거리라도 만들어서 얘기해야 한다. 뭐라고 말하지? 내가 어째서, 내가 왜 저녀석을 그렇게 만든거지?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온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 그걸 지금 너무나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있는다고 좋아질건 없었다. 부딪혀 보는게 최선이다.

-끼이이

문을 열고 나가자 녀석이 날 응시한다. 눈빛은 왠지 어제처럼의 그 두려움이나 공포같은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평소대로, 녀석은 그저 평소대로 날 심드렁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다시 눈을 TV로 옮긴다.

뭐지? 최소한 날 죽이려 들정도로 화낼거라고 생각했는데.

"뭐해? 밥줘"

"어, 어?"

어이없는 질문에 어이없는 탄성을 내고야 말았다. 내 반응에 녀석은 마치 뭐 잘못먹었냐는듯이 쳐다보더니 다시한번 밥! 이라고 짧게 말했다. 점점 더 상황은 이해할수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고 있었다.

아직 시간은 5시, 일어나기에는 이른 시각이다. 녀석은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대고 있었다.

"그런데 이옷 뭐야?"

그러면서 녀석은 자신이 입고있는 잠옷을 가리킨다. 그거야 당연히 어제 내가 사줫던 옷인데…

설마

"너 어제일 기억 안나?"

녀석은 진짜 모르는 표정이었다. 잠옷의 정체를 모른다는건 다른 일도 모두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겼다는 건가?

"아 몰라, 머리아퍼, 나도 이렇게 된건 처음이야. 내가 어제 무슨 사고쳤어?"

골이 지끈지끈거린다고 그러면서 멍한 눈빛이 잠시 되었다가는 다시 돌아온다. 기억이 없다? 그렇다면 어제 내가 했던 일도 기억 못한다는 건가?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다. 기억 못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없던일로 만들면 그만이다. 녀석은 기억을 못한다 그것이면 괜찮다. 단지 녀석이 처녀였다는것, 그것만 제외하고서라면 괜찮았다.

"이거 니가 사온거야?"

"어…어… 뭐 그렇지"

"매니악하긴"

녀석은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비웃듯이 내게 말한다. 그게 어딜봐서 매니악한건데? 

"너… 진짜 기억 안나?"

내가 재차 묻자 녀석은 짜증스럽다는듯 말했다.

"생각 안난다니까, 너 이상해 기억 나든 안나든 무슨상관이야. 너 설마 어제 내가 취했다고 나한테 그렇고 그런짓 한건 아니겠지?"

"……뭐, 뭣? 내, 내가 왜 너한테 그런짓을 해! 내가 미쳤냐!"

너무나 정확한 지적에 나는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어제는 미쳤기에 그런일이 가능했던 거였겠지. 그래, 그때 난 미쳤었다. 난 미친거야

"왜 과민반응 하고그래, 어쨋든 배고파, 밥줘"

녀석은 다시 TV로 시선을 옮긴다. 엄청나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부엌으로 향한다. 그런데 김선우 그 개자식은 저녀석하고 잤다고 말했는데… 그런데 어째서 처녀인 거지? 거짓말이었던건가? 게다가 성현이 형은?

아니, 게다가 저녀석은 취했을때 자기를 갖고싶냐고 물어봤는데? 그렇다는건 한번쯤은 했다는 말인데… 뭐지? 누가 진실이고 누가 거짓인거지? 게다가 전에는 형이 자기를 강간했다고 말했는데…

머리가 점점 어지러워진다.

-쨍그랑!

실수로 접시 하나를 깨뜨리고 말았다. 파편을 줍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피가 맺혀간다. 김수현이 그걸 멀찍이서 보더니 다가오면서 말한다.

"병신, 베였나?"

빨갛게 피가 맺히는걸 보고선 말한다. 괜찮다며 손을 들어보이는 순간 갑자기 녀석이 어깨를 움츠린다. 뭐지? 방금 그건… 꼭 겁먹은것 같잖아

"얼른 치워, 나 밟아서 베이면 똑같이 해줄테니까"

녀석은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소파에 가 앉았다. 분명 아까는 겁먹은 거였다. 마치 손길을 거부하는듯한… 어제의 그것 때문에 본능적으로 날 거부하는 건가?

어쨋든 난 돌이킬수 없는 일을 한 셈이었다.

"하아… 추워"

학교가는길, 녀석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추워를 연발한다. 어제의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만 특별한 건지, 녀석이 어제보다 더 예쁜 것처럼 보였다. 겨우 그 일 하나로, 친구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하는 건가?

"나…이상해"

"뭐가?"

묵묵하게 걷다가 녀석이 어렵게 꺼낸 말이었다.

"남성혐오증 같은거 생겼나봐"

"무슨 개소리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뜨끔해지고 있었다. 나도 그 원인중 하나일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녀석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문에 그런 말을 할수도 없었다.

"몰라… 남자만 보면 무슨 못볼걸 본것만큼 기분이 더러워지고 가까이 가는것도 싫어, 너같은 경우는 조금 덜한데… 모르겠어… 왜 그런지"

그래서 아까 내가 손을 올렸을때 움츠러든 거였나… 남성혐오증이라… 그렇게나 당했으니 그런 증상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걸 아닐 것이다. 녀석은 지금 내가 곁에 있는것만으로도 힘든지 상당히 참으려 노력하는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난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사실 전부터 조금 그랬어, 어제는 덜했는데 오늘 갑자기 심해져버린것 같아"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말을 할수가 없다. 녀석의 정도가 얼마나 심한걸까, 나는 녀석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아니나다를까 녀석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마치 내 손이 더러운 무언가라도 된다는 양

"불편해? 이렇게 하면?"

"………"

녀석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서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친구가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것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미안해지는 모양이었다. 

젠장,젠장, 속으로 연발한다. 지금 미안해해야하는게 누군데, 그게 누군데 왜 네가 미안해하는거야…

"내일부터는 학교 따로따로 갈까?"

"괜찮아… 너무 가까이 있지만 않으면 괜찮으니까… 미안해"

녀석은 정말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녀석은 내 옆에 바짝 붙어있지 못하고 조금 떨어져서 걸었다. 녀석은 모르는 남자의 시선조차도 불쾌해서 견디기 힘든지 당장이라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버릴것 같았다.

"난 왜 이러지? 이렇게 되고싶어서 그렇게 한게 아닌데…"

녀석이 교문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난 속으로 끊임없이 자학하고 있었다.

"또 지각이냐? 밤에 뭐하나 이제와?"

친구녀석의 말을 무시하고선 책상에 앉는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같아선 김선우 녀석에게 가서 녀석이 처녀인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한다면 녀석과 잣다는걸 대놓고 광고하는 꼴이기 때문에 그럴수도 없었다.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었다.

수업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때마다 미칠것같은 마음은 더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나때문이다. 다 나때문에 이렇게 된거였다. 녀석이 그런 이상한 증상을 보이는 것도, 전부 나때문이었다.

"똥이라도 밟았냐? 표정이 왜그래?"

급식시간, 갑자기 김선우 녀석이 나에게 찾아와서 한 말이었다. 녀석은 평소처럼 뭔가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듯한 표정이었다. 재수없다. 교실에는 전부 배식받으러 갔는지 나와 김선우 둘밖에 없었다.

"내가 어제 장난이 심한것 같아서 알려주는건데"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귓속말로 작게 속삭였다.

"사실 나 김수현 안건드렸어"

"뭐?"

"뭐냐니? 그러니까 처녀라고"

어제의 그 말은… 그럼 거짓말이었나? 거짓말? 하하, 무슨 싸구려 희극의 싸구려 함정에 걸려든 주인공 같았다. 그러니까 저녀석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내가 혼자 그렇게 만든 거였다… 그 소리였나? 

"왜그러냐?"

"아, 아니야… 아무것도"

"사실 나도 조금 진지해져보고 싶었거든, 그러니까 녀석이 선택하기 전까지는 우리 둘다 건드리기 없기다"

약속하기도 전에 약속이 깨져버린 셈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녀석은 왠지 즐거운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넌 선택받았다고 해도 녀석이랑 사귀지는 않을거 아냐? 그냥 나한테 넘겨"

"닥…쳐… 넌 안돼 절대…"

난 그런말할 자격이 없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녀석에게 넘겨준다고 생각하면 그건 또 싫었다. 난 뭐지? 내가 생각해도 난 이기적이었다. 난 녀석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친구로서 좋아할 뿐이다. 어제의 그 일은 없었던 일이 되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죄책감… 이 죄책감은 어찌할수 없었다. 나는 녀석의 인생을 망친 셈이었다. 전부… 나때문이다.

"흐음… 뭐 선택은 니가 하는게 아니야, 뭐 밉보이는 일 하나라도 생기면 그땐 끝장이지"

만약 그때일을 녀석이 기억해낸다면? 그건 끝이다. 첫경험을, 그걸 뺏겨버렸으니까 날 선택할 확률은 없다시피했다. 녀석이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게 다행이었다. 

녀석은 밥먹으러 간다면서 교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어제만 그러리라는 법도 없었다. 그때마다 겪는 감정이 다르니까 난 오늘 밤에 또 녀석을 범할지도 몰랐다. 두번 녀석이 기억하지 못하게 되길 바라는건 무리다. 아니, 그때는 잠시 미쳤었던것 뿐이다. 오늘밤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흐으음…"

복도를 걷는다.

"뭐 작전은 완벽했는데…"

또다시 늘 가던곳으로 간다. 조용한 침묵이 있는 그곳, 방금 전 녀석의 표정을 보면 작전은 완벽하게 들어맞은것 같았다. 똥씹은 표정, 뭐 이젠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간만에 착한척 하려니까 이것도 골빠지네"

주머니에서 꺼낸 케이스를 바닥에 버린다.그리고는 바닥에 묻어버렸다. 바닥에 살짝 묻어놓은 그 케이스는 이름도,상표도,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개발단계의 물건이니까 이름이 있을리가 없었다.

"인조처녀막……뭐 이런걸 만들생각을 했지?"

원리는 간단한 거였다. 여성의 음부에 삽입해놓은 뒤에 자극이 있으면 터져서 붉은색 피가 흘러나온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물건이었지만 확실히 효과가 있었을지는 의문이었다.

녀석이 그걸 하고 나서 죄책감을 받을만큼 받았고 녀석이 질색할만큼 질색했다면 자연히 나에게 오게 되어있다. 누구든지 자신을 강간한 놈은 싫은 법이니까. 남자에게만 효과를 발휘하는 그 흥분제는 꽤나 구하기 힘들었지만 어쨋든 잘 된 모양이었다.

아마 녀석은 친구의 처녀막을 뚫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녀석의 혐오스러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겠지, 그리고 잘만 한다면 오늘도 한번 더 일이 생길수도 있다. 두번째에는 아마 이정현 그녀석 성격에 포기하고 넘겨줄수도 있다.

아니 뭐 녀석이 넘겨주지 않아도 김수현이 알아서 도망쳐와준다면 더 좋겠지 그것 자체로 이미 게임은 끝난거니까.

어제 김수현이 도착하기 전, 이정현의 방에 들어가 냉장고에 있는 물에 남자에게만 반응하는 흥분제를 넣었다. 학교는 미리 조퇴를 했었다. 하지만 여자에게도 조금 반응하기 때문에 물을 김수현이 먼저 먹었다면 조금 문제가 있을수도 있었다.하지만 어차피 여자에게는 효과가 금방 끝나기 때문에 녀석은 곧 정신을 차릴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김수현을 불러서 술을 마셧다. 적당히 취한 녀석의 옷을 벗겨서 방금 땅에 묻은 그걸 녀석의 그곳에 넣었다. 물론 그때는 우리 집이었고 그렇게 한 다음 녀석은 집으로 보냈다. 그걸로 이미 작전은 완성이었다.

물을 안마시는 인간은 없으니까 녀석은 언젠가 물을 마시게 된다. 마시게 된다면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흥분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이정현은 김수현을 강제로 범하게 되고 그것에 김수현을 상처받게 된다. 이정현은 처녀성을 상실시켰다는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나중에 내가 김수현을 가지게 되어도 녀석이 아무말 하지 못하게 만들 껀수이기도 했다. 뭐 녀석의 집에는 정수기가 없는것 같아서 물이 들어있는 통에도 약을 넣어놨으니 문제는 없었다. 게다가 그 약은 맛이 없는 약이라서 느끼지도 못할 것이었다.

굳이 김수현을 취하게 해서 정신을 못차릴 정도까지 만들어 놓은 이유는 자신의 그곳에 인조처녀막을 넣은것과 그게 터졌을때 당황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필름이 반쯤 끊어져 있으니까 처녀막이 터지던 말던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뭐 대충 이런 느낌의 작전이었는데 실패해도 그만 성공하면 좋은 방식이었다.김수현이 처녀막이 터졌다는걸 눈치채 봐야 그저 이상한 일이라고 한번 생각한뒤 끝나거나 병원에 가거나 둘중 하나의 일이었다.

녀석의 집에 들어갔던 방법은. 녀석이 김수현이 오자마자 키를 복사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그 아파트 근처에는 열쇠점이 없으니까. 번거로운걸 싫어하는건 모두가 마찬가지일테니 열쇠를 하나 더 가졌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어렵다.

둘은 학교가 다르니까 태영중학교가 조금 더 일찍 끝나는 걸 알고 있을테니 키를 자신이 가지고 있을리는 없었다. 녀석도 머리가 좋으니 그걸 눈치채지 몰할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김수현이 집문 앞에서 기다려야 하니까.그렇다고 또 김수현에게 키를 맡긴다는건 녀석이 어딘가 들렀다 올수도 있으니 자신도 집앞에서 기다리는 상황이 벌어질수도 있었다. 뭐 그래서 어딘가에 키를 보관해 놓았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파트에서 숨길곳은 편지함과 신문꽃이밖에 없었다. 노출이 심한 편지함보다는 신문꽃이가 조금 더 확률이 높았다. 뭐 신문꽃이에 열쇠가 없다면 사람을 불러서 강제로 열 생각이었지만 어쨋든 열쇠는 신문꽃이에 있었고 작업을 무사히 끝마칠수 있었다.

"이젠 뭐 기다리는 일만 남았군"

하루하루 더해가는 죄책감과 김수현을 더이상 괴롭히고 싶지 않다면 나에게 그냥 보내는게 나을 것이다. 그 물통에 있는 흥분제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하지만 정현이가 깜빡해서 열쇠를 학교에 가지고 갔다면?)

   ↑

이건 애교로 봐주세요

그나저나 저런애들 틈에 껴서 주인공은 고생만 하네요~~

-턱

순간, 놀람과 함께 뒤를 돌아보니 익숙하지 못한 얼굴이 있었다. 민정훈이라고 했지. 아침부터 그렇게 활발한 이유는 뭐야? 그다지 활발하고싶지 않은 추운 아침인데…

하지만 어디까지나 속마음일 뿐 겉모습으로 나오는 행동은 달랐다.

"어, 안녕"

"지금오는거야?"

그럼 여기있는데 지금오지 뒤에오겠냐 멍청한놈아.

-끄덕

등교하기에는 약간 이른 시각이었다. 여기는 잘 모르겠지만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대개8시 10분이었다. 지금 시각이 7시 40분이니까 일러도 꽤나 이른 시각이다.

그나저나 생긴건 정상적인데 왜 하는짓은 죄다 또라이짓이지? 역시나, 이런놈들은 어딜가나 하나씩 있다.

겨울의 추운 공기가 귓가를 스쳐간다.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린다. 단지 추워서만은 아닌지 나는 이상하게도 남자가 곁에 있는것때문에, 그 이상하면서도 칙칙한 느낌에 몸을 떨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모르게 옆으로 조금 떨어져서 걷는걸 보면… 역시나 많이 이상해져 버린것 같다.

그렇게까지 미친놈은 아닌지 그냥 옆에서 걷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녀석은 안심하고 있던 내 마음을 짓밟아버리는 말을 했다.

"생각해봤어?"

"뭐가?"

녀석은 날 쳐다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다. 마치 뭔가 불만스러운 사항이 있다는듯, 네가 불만스러운 사항이 있으면 어쩔건데

"사귀자고 했던거!"

"에?"

주변에 다른 애들도 다 듣는게 그렇게 얘기하면 다들 날 쳐다보잖아. 이런 시선집중엔 별로 적응하지 못해서 은근히 기분 요상하다고. 게다가 이자식 남의 시선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미친놈

"그, 그건 싫다고 했잖아"

"내가 싫은거야?"

당연하지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우린 만난지 얼마 되지고 않았고 또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많이 부족하잖아"

"그런건 그냥 차차 알아가면 되는거야, 그러니까 사귀자, 응?"

아니, 나는 너따위하고 알아가는 시간을 함께하기도 싫단다. 그러니까 제발 떨어져줘 

-퍽!

"커억!"

순간 허공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누군가가 나타났다. 내게는 구세주와도 같이 보이는 그는 과연 우리반 반장이었다. 반장은 내 옆에서 걷던 짜증나는 녀석의 뒤통수를 세차게 후려갈기며 도착했다. 그것도 신난다는듯 웃으면서

너도 은근히 위험해 보여

"너 아침부터 수민이한테 껄쩍대는거야? 변태!"

"옆에서 걸으면 다 변태냐?!"

"다른사람은 안그런데 너만"

"내 이 잘생긴 얼굴이 어딜봐서 그런 스타일인데?"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구만. 녀석은 스스로를 잘생겼다고 표방하며 마치 협박하듯이 반장에게 소리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러는 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호박꽃냄새가 난다 뭐 얼굴은 말할것도 없지만"

"뭐이썅?"

"훗,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만 다음에는 국물도 없을줄 알아라아아아!!"

녀석은 도주하며 소리쳤다. 녀석을 붙잡으려 달려나가던 반장은 이내 지쳐서는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재미있는 녀석이다… 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시달리는게 나여서 그런지 그다지 재미는 없었다.

"얼른 가자"

실내화로 갈아신고 교내로 들어간다. 복도는 온풍기의 영향인지 따뜻했다. 역시, 난 이런 학교가 좋아.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지나가는 녀석들 하나하나가 날 한번씩은 훑어보고 간다. 마치 뱀이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구역질이 난다. 당장에라도 토해버릴것같은 더러운 기분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건 학생이든 교사든 상관 없었다.

그 시선에 담긴 의미를 너무나 섬세하게 느낄수 있었다. 이대로 더 있으면 토해버리고 말거야.

"수민아, 안색이 안좋은데…어디 아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제 조금 늦게자서…"

숙취해소는 확실해야 하지만 이건 숙취같은게 아니라고, 3-4라고 되어있는 팻말을 확인하고 안에 들어서자 또다시 시선의 집중이 느껴진다. 이른 시간임에도 자리에 있는 녀석들은 많았다. 내 옆자리에 앉은 녀석도 날 한번 보더니 다시 무언가에 열중한다. 옆자리에 남자라… 수업에 집중은 커녕 양호실에 실려가지나 않을까. 난 정말 남자라는 생물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 모습이었다는걸 잊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분명 전에는 내가 남자라고 확실하게 다짐하고 겉은 여자라고 해도 속은 남자라는걸 잊지 말자고 계속 생각했었는데…

-털썩

"안녕"

체면상의 인사만 하고 다시 옆자리의 아현이에게 인사한다. 왠지 몸이 조금 더 안좋아 보였다. 몸이 약해 보였다. 감기에만 걸려도 학교에 못나올것 같이 약해보이고 가냘파 보였다. 내 인사에 같이 안녕이라고 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또 그건 아닌듯 싶었다.

문득 창밖을 보니 하늘은 높고 새파랬다. 구름낀듯 우중충한 내 마음과는 정반대로, 하늘은 너무 넓고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내게 남은게 뭘까. 내가 가질수 있는건 뭘까.

아무것도 없었다.

도덕시간이었다. 누구나가 다 아는 도덕원리를 칠판에 적어놓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 인간이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 그걸 듣고, 똑바로 실천하는 이들이 있을까?

'교통신호를 어겨서는 안된다'이런 간단하고 쉬운 도덕원리조차도 무시받는 세상인데, 인명따위는 소중하게 생각지도 않는 사람들이 판치는 세상인데,저런 교육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아마 그걸 가르치는 선생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주어진 대로 가르치며 주어진 대로 복습시키는것 뿐이다. 작은 종이쪼가리 하나를 던져주고 나서는 그간 외운것을 마지막으로 복습시키겠지. 중요한건 그런게 아니다.

그렇게나 저 교육이 의미가 있다면, 저런 도덕교육을 받았을 오빠가 날 강간하는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건 가장 기본적인 건데, 누구나 다 알고있는 건데, 그걸 어겼다. 

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원하는게 무었일까. 모두가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지금 날 힐끗거리며 바라보는 몇명의 남자들의 시선도 더이상은 견디기 힘들었다. 끝없는 구토욕구가 밀려온다. 마치 헛구역질이라도 나오려는듯

'더러워'

참을수가 없다.

'더러워'

저 시선들이 견딜수 없이

'더러워'

날 바라보는 저 욕망에 가득한 눈빛은 더이상은 견디기 어려웠다. 내 다리를 훑는 저 시선, 내 목덜미를 지나가는 눈빛, 더이상은 견딜수 없었다. 도덕시간에, 도덕스러운 인간이 되기 위한 교육을 하는 그 시간에 성추행을 하고 있다. 여자를 쳐다보는것만으로도 성추행이 성립되는건 다 이것때문이다. 그 바라보는 눈빛 자체가 비뚤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느낄수 있었다.

-털썩

느려져가는 주변의 움직임 사이로 누군가가 내 몸을 흔드는것같은 느김이 들었다. 또 누군가의 목소리, 날 부른다. 하지만 대답할수 없었다. 이미 입은 닫혀버렸고 눈도 감겨버렸다. 점점 의식이 수면 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져간다.

"으으…"

일어나보니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단지 주변 지형지물이 하얀게 아닌, 그저 하얀 세상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하얀색 물감을 뿌려놓은듯 모두 하얀빛.

이건 꿈인가. 아아, 이건 꿈이다. 꿈이 아니면 이런 세상이 있을리가 없다.

아련한 의식 속에 누군가가 날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애써 눈을 떠 몸을 움직이니 눈앞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아니, 그저 희뿌연 안개에 가려진 그 누군가였다. 안개는 곧이어 걷히면서 누군가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건 약간 낯익으면서도 낯선이의 얼굴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인지, 아니면 내 기억속의 아무나 끄집어내서 만든 인상인지 그건 낯익으면서도 낯설었다.

"연결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여어~ 낯빛을 보니까 죽을상인데?"

"누…구?"

"이런이런, 또 오락가락하는 모양이네, 역시나 인간은 이래서 안된다니까 꿈을 꾸면 좀 기억을 해내라고, 소원성취~ 해줬더니 그렇게나 죽을상이라니, 쯧쯧…"

"소…원?"

소원? 소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다만 눈앞의 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인간인지 아닌지도 모를 자가 날 이렇게 만들어준 이라는건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너 특별해지고 싶어했잖아, 그래서 특별하게 만들어 줬더니 그럼 즐겨야지 왜 죽으려고 그러냐, 너 그러고 있다가 자살한다"

"어…응?"

"원래는 변신시켜준 다음에 그냥 가만히 놔두려고 했는데 네 정신상태를 보아하니 그대로 가면 곧 자살해버릴것 같아서 지금 이렇게 온거라고"

"난… 난… 특별해지고 싶었지만 특이해지려고 한건 아니야"

"그거나 그거나지 임마, 어쨋든 이제 완전 여자로 탈바꿈인가? 눈빛에 여성스러움이 묻어나오고 있어, 흐으음… 그런데 좀 징그럽다"

내가 자살한다고? 자살? 내가?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면 욕부터 하던 내가 자살을 한다고?

아니, 말이 된다. 난 분명 이대로라면 견딜수 없어했을 것이다. 탈출구따위 없으니까 방법은 죽는것밖에 없다는걸 알고 있으니까.

"게다가 이거 꼴을 보아하니 오래도 못갈것같고… 미완성 마법을 써서 그런지 불균형도 심하고… 대비책으로 약을 보내주긴 했는데…"

"무슨…소리?"

이 존재가 분명 나에게 뭔가 했다는건 알수 있었다. 내 의지가 만들어낸 환영인지 뭔지는 알수 없지만.

"뭐 후회하냐? 그럼 원래대로 해줄수도 있어"

원래대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존재는 거짓말을 하는것 같지는 않았다. 원래대로 돌아간다면 다시 남자로?

아니, 싫었다. 남자가 싫다. 내가 그것들과 똑같이 변한다는건 이제 생각도 할수 없었다. 그 존재는 귀찮다는듯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생각하지 싫어지고 있었다. 꿈결같이, 점점 더 하얗게 변해간다.

"뭐 리셋은 싫은거지? 연결이 점점 약해지는데… 이번의 연결이 제일 강했는데, 뭐 그러면 하나만 해주지, 뭐 어차피 잊어버리겠지만 너네 집에 있는 물, 갖다버려… 그…색깔…"

점차 그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차례차례, 누군가 내 머릿속의 기억을 지워나가는듯 기억이 희미해진다. 이윽고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에는 그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도 가지지 못한채,

대략 개사기스러운 초월적 존재의 개입, 쟨 누굴까요? 모든것의 배후에 있는 놈입니다. 사실 수현이를 괴롭히고 있는건 저녀석일수도...

그런데 제가 왠일로 성실연재를 할까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으으…"

머리아프다.

"……"

일어나자 보인건 온통 하얀빛의 세계였다. 내가 지금 누워있는 침대도, 내가 베고있는 베개도. 천장도. 이불도. 벽도 모두 하얀색이었다.

양호실이구나.

몇개의 침대가 더 있는걸 보고 확신했다.

"어, 일어났네?"

"어…?"

눈앞에서 의외라는듯이 말하며 날 쳐다본건 성준이라고 했던 녀석이었다. 소파에 앉아서 녀석은 발목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저녀석이 여기 있는걸까.

"너 쓰러졌잖아"

아아, 그랬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내가 뭘 한건지, 내가 왜 여기 있는건지도 실감이 안난다. 이미 내 존재 자체가 너무 희박해져버린듯이. 허공에 붕 떠있는듯한 부유감은 날 묘한 기분으로 만든다.

"그런데 너는…?"

"체육시간인데 다리다쳐서…"

그렇게 말한 녀석은 빨갛게 부어오른 발목을 보여주었다. 아파보인다. 많이.

그런데 왜 저녀석은 웃고있는걸까. 아프면 울어야지.

아아, 그 말은 틀리구나. 틀렸어

"지금 몇교시야?"

"5교시"

"많이 잤네…"

녀석은 양호선생님이 있는 방으로 가더니 냉장고를 열어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음료수 두개를 꺼내더니 내게 가져왔다.

"얌마, 그걸 니 맘대로 가져가면 어떻게해 내꺼야"

"뭐 어때요. 환자 마시라고 있는건데, 협찬받은걸 자기꺼라고 생각하면 안돼죠"

"협찬은 얼어죽을. 그나저나 쟤는 일어났네?"

침실…인가? 이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침실로 양호선생님인듯한 흰 가운을 걸친 남자가 들어왔다. 양호선생님… 이라고 하기에는 왠지 불성실해 보인다. 그리고 마음이 따뜻해 보이지도 않고.

그런걸 바란건 아니지만 양호선생님은 여자가 정석이라는게 머리에 박혀있는지라 쉽사리 적응이 안되는 선생님이었다.

"야, 괜찮냐?"

"네?"

내 어리버리한 대답에 양호선생님인듯한 남자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이마에 손을 얹고는 열을 재는듯 잠시 가만히 있었다.

"열은 없는데, 머리에 나사 하나가 빠진게 아닐까"

"남의 머리에 함부로 하자만들지 마세요"

성준이 말하며 내게 음료수를 건넸다. 캔음료가 아닌 비타민제였다. 별로 즐기지는 않지만 성의를 무시할순 없다고 생각하며 비타민제의 뚜껑을 열고 한모금 마셧다.

지독하게 날 괴롭히던 남성혐오증은 나도모르게 사라져 있었다.

선생님과 제자녀석이라고 보기에는 성준이는 버릇없었고 선생님은 선생님 나름대로 불성실해 보였다. 일에 애착이 없는건지 귀찮은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아픈지 모르니까 잘좀 봐요"

"젠장, 이런것따위는 내가 호 한번 해주면 다 낫는다고"

낫는다고 해도 그걸 받고싶지는 않아.

"어떨까… 어디 아픈데 있냐?"

귀찮다는듯 툭 던진다.

"아뇨"

나역시 짧게 말한다. 그 말에 선생님은 그러면 됐다고 하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양호실 일지같이 생긴것을 가져와서는 내게 말했다.

"나갈때 여기에 이름쓰고가라, 아니, 내가 써주지, 3학년 6반이지?"

"네"

"이름은?"

"수민이요, 김수민"

"아아, 그래, 이왕 온김에 다이렉트로 6교시까지 놀다가 가라"

선생님이 하기에는 책임감 없고 학생에 대해 애정이 없는것 같아보인다.

"선생님이면 얼른 쫒아보내야 하는거 아니에요?"

"이자식, 날 다른 선생들과 도매금으로 넘겨버리지마. 난 특별해"

"특이한거겠죠"

성준이와 양호선생님의 말싸움 아닌 말싸움은 잠시 더 오래간 지속되었다. 뭘까. 뭔가 잊어버린듯한 기분. 꿈을 꿨는데 그 꿈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중요한 무언가를 둔 곳이 어딘지 까먹어버렸을때 드는 기분과 같다. 무언가 중요한걸 잊었다.

"어쨋든 가고싶으면 가고, 난 언제나 풀가동이니까 5시까지 있어도 상관없어"

"5시에는 가야되는 이유가 뭐에요?"

"퇴근해야돼, 난 칼퇴근이라서 말이지"

가운만 입었지 깡패다.

"원래 저런 선생님이야, 네가 이해해"

비타민제를 한번에 다 들이킨 녀석이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선생님한테 말버릇 나쁘면 자다가 피똥싼다"

"그런거 들어본적 없어요. 그리고 얘 아무것도 안먹었는데 먹을것좀 없어요?"

그러고 보니 5교시면 급식시간은 지났다. 은근히 배가 고파져 오는것 같기도 하다. 불성실한 양호선생님은 날 쳐다보더니 아쉽다는듯 책상 서랍에서 빵봉지 하나를 꺼내 던져주었다.

"우유는 없어요?"

"거덜을 내라 망할자식"

소보루빵을 받아든 성준이는 그걸 나에게 넘기고 양호선생님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내게 넘겨주었다. 200ml짜리 우유, 학교에서 나눠주는건가.

"고마워"

"수민이라고 했냐?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저놈은 강탈한거라고"

"감사합니다"

"음음, 그래야지. 저자식은 선생님에게 예의가 너무 없어. 좀 본받아라"

컴퓨터로 뭘 하는지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빵 잘먹으라고 말했다. 둘은 선생제자면서 꼭 앙숙지간같다.

퍽퍽한 빵맛이 오늘따라 더 맛이 없는것 같다.

몇개월만?

"……"

성준이라는 녀석은 교실로 돌아갔고 나는 양호실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어디가 아픈건 아니지만 교실로 돌아가서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날 쳐다보는 녀석들의 시선을 받기는 싫었다.

밤에 날 생각하면서 자위를 하는 녀석도 있을까?

순간, 구역질이 올라왔다.

"우, 우욱!"

순간 올라온 구역질은 그대로 먹은 음식물을 게워내게 만들었다. 바닥도 아니고 침대 시트에 대고 한 것이기에 이불이 더러워질 것이었다.

"우우욱!!"

-툭툭

올라오는 구역질에 먹은건 빵밖에 없는걸 토해내고 있는데, 누가 내 등을 두드려주고 있는게 느껴졌다. 구역질을 끝내고 뒤를 돌아보니 한손에는 어느새 비닐봉지 하나를 손에 들고있는 양호선생님이 날 바라보고 있는게 보였다.

이불은 더러워지지 않았다. 언제 달려온건지 검은색의 비닐봉지에는 내가 토해낸 것들이 가득차 있었다.

"다 토한거냐?"

"아…에…네…"

"여기"

선생님이 내민건 어느새 준비된 물과 휴지였다. 선생님은 그 비닐봉지를 어디론가 가져가더니 조금 후 다시 돌아왔다.

"이불에 토하면 안돼, 더러워지면 내가 다 빨아야 하거든"

"네… 죄송해요"

"죄송할것까진 없고"

결국 자기가 손해보니까 한거였나, 선생님은 양호실 컴퓨터에 앉아 다시 무언가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설마 게임하는걸까?

구역질, 점점 더 혐오감에 미칠것 같아진다. 왜이러지, 나도 내 자신을 모르겠다. 나는 누구지, 왜 여기에 있고, 왜 지금 이런 모습으로 여기에 있는거지.

난 점점 더 흐릿한 환상에 녹아들어가는듯한 몽롱한 기분을 느꼈다.

사실 난 내가 소년소녀가장이니 뭐느니 하는 말은 나와는 동떨어진 세계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모가 버리고 간 자식, 태어나자마자 어디론가 보내져서 국외로 입양되는 자식, 키우다가 생계의 어려움에 못이겨 결국 버려지고 마는 자식.

나는 그걸 별 감흥 없이 봤다. 내 일이 아니다. 당장 내 옆에 일어난 현실로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나는 무덤덤할수 있었다.

게다가 국외로 입양시킨 자식을 또다시 뻔뻔스럽게도 얼굴에 철판을 깔며 다시 찾는 부모 또한 역겨울정도로 추해보였다. 그 눈물이 예전에는 자식을 떠나보낼때 양심의 가책때문에 한방울 흘렸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들의 속사정따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이해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나는 부모가 없고, 집도 없고, 재산도 없다.

가진것 자체가 없다.

-휘이이이

사나운 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간다. 서늘한 감촉, 떨려온다. 사시나무 떨듯이 온몸이 떨려온다.

그건 단지 추위가 아니라 혼자 남겨졌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공포, 절망감들이 모두 섞여서 배출되는 것이었다.

내 미래에는, 내 과거에는

아무것도 없다.

기억할것도 없고 내다볼것도 없다. 그저 '혼자'라는 그 기분은 정말 싸늘하게 내 몸을 휘감는다.

그래서일까. 나는 지금 나에게 남은, 나의 재산이 아니라 나의 '인연'으로 묶인 이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

친구,혈육 그 둘, 싫어하건 좋아하건,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잃고싶지 않아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잃고싶지 않아, 그런 기분이 문득 들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그 기분은 정말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당장에 누군가를 의지하지 못하면 쓰러져버릴것만같은 위태로움, 정말 그렇다. 당장에 눈물이 나올것 같지만 눈물흘려도 봐줄사람이 없다는 그 참담한 기분

미칠듯이 내 심장을 옥죄어 온다.

죽고싶다.

난생처음, 괴로움에 미쳐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 생각해놓고도 나 스스로도 놀라 현실의 감각으로 되돌아온다.

눈앞에는, 무언가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응?"

"뭐야, 불러도 대답 안하고"

고개를 들어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녀석을 바라본다. 주변에는 어느새 꽤 많이 걸어왔는지 주변에 같은학교의 녀석들은 띄엄띄엄 보이기만했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나왔기 때문에, 담임에게 집에 간다고 한마디 하고 나왔다.

"언제부터 있었어?"

"한참 전부터 같이 걸었는데 몰랐냐?"

"어… 그냥, 몰랐어"

김선우, 녀석은 정신없는녀석이라고 한번 말한 뒤 녀 옆에 섯다. 방금 전은 내가 대답이 하도 없어서 내가 못가게 막은 것이었나보다.

싸늘한 기분, 하지만 옆에 누군가가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기분은 사라져버린다. 역겨움, 그건 없었다. 지독한 외로움에 역겨움따위는 이미 어디론가 가버린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선가 쉬고싶다. 마음 자체가 쉴수있는 곳으로, 단지 육체가 아니어도 좋다. 마음만 편안해진다면 어디든 좋다.

"그런데 왜… 여기 있어?"

"심심해서"

한가한 녀석이다… 라고 무심코 생각해버렸다. 아니, 사실 이녀석을 부르는 곳은 꽤나 많을것이다. 약간 질적으로 떨어지고, 지능수준도 떨어지는 하급 생명체들이 이녀석을 부를 테니까, 뭐 가는곳이라고 해봐야 노래방이나 골목 구석진곳에서 독한 연기나는걸 뻐끔거릴 뿐일텐데

"심심한데 왜 나한테 와?"

"놀아줘야지"

"……"

바보같이, 녀석은 어느새 내 팔에 팔짱을 꼈다. 어색하게 그것을 풀고 녀석과 거리를 둔다. 약간 일그러지는 녀석의 표정이 그려진다. 

"너희집에 가자"

"왜?"

생각있어? 라는 말은 뒤에 삼킨듯 녀석이 날 쳐다본다. 그런건 아니다. 정현이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가는건 잠시 뒤로 미뤄도 좋다. 일단은 그곳이 아니라 조금 다른 곳에서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것 뿐이다.

"그냥… 졸려"

"여관이냐 우리집이"

크기로 보자면 호텔에 가깝지 않을까. 녀석은 안그래도 자기 집으로 가고 있었는지 방향은 바꾸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교복 잘 어울리네"

"그런가?"

감탄하듯이 말한다. 잠깐이었지만 녀석의 시선이 내 다리에 잠깐 머문다. 아아, 남자니까. 이해하자. 전부다 싫어하다 보면 나는 정말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졸려

-털썩

"진짜 자려고?"

"으응"

외투와 마이를 벗고 침대에 드러눕자마자 이불을 덮고 눈을 감는다. 녀석은 뭔가 어이없는 일이라도 있다는 것처럼 멍하게 날 쳐다볼 뿐이었다.

"옷 갈아입고 자는게 어때? 옷 구겨질텐데"

"몰라…"

이미 양호실에서 잔 덕분에 교복은 충분히 구겨져 있다. 더 구겨질것도 없어서 그냥 잠을 청하려 하는데 녀석이 내 얼굴에 무언가를 던졌다.

"뭐야"

"그거로 갈아입고자"

"클텐데"

"그거 입고자는것보단 나아"

녀석이 던진건 하얀색 티셔츠 하나였다. 이제 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추운데, 반팔 티셔츠 한벌이라니, 너무한 녀석이다.

교복과 치마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고 그 티셔츠를 입었다. 역시나 너무 커서 허벅지 반쯤까지 내려오는데다가 어깨도 넓어서 헐렁헐렁했다. 한쪽 어깨가 흘러내려서 왠지 야해보인다. 하지만 묘하게 잘 어울리는것 같다.

"노린거지 너"

"으음? 잘 어울리는데?"

녀석이 내 양어깨를 잡고는 말한다. 섬뜩한 기분, 묘한 감각이 찌릿하다. 녀석의 눈빛, 왠지모르게 불타고 있는것같다. 그 대상이 누군지는 말 안해도 알고있지만

"오늘은 싫어"

"왜?"

"몰라… 그냥 싫어"

남자랑 잔다는건 이제 없었으면 좋겠다. 여기 온 이유도 그저 쉬고싶은것 뿐이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내 싫다는 말에 녀석도 강제로 하기는 싫었는지 어깨에서 손을 떼더니 컴퓨터 앞 의자에 앉는다.

녀석이 컴퓨터 전원을 켜기 위함인지 고개를 숙여 컴퓨터의 전원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날 슥 쳐다본다. 아래에서부터 올려다본다.

"팬티보인다"

그리고는 기분나쁘게 웃는다. 재빨리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고 눕는다. 어째서, 녀놈은 여자친구도 없는걸까, 왜 나한테 자꾸 이러는걸까.

"넌 여자친구 없…"

-지이이잉

내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책상 위의 녀석의 핸드폰이 진동한다. 그걸 한번 힐끔 보더니 녀석은 받지 않고 그냥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본다.

"왜 안받아?"

"받기 싫은 전화니까"

"누군데?"

졸린 눈으로 쳐다본다. 졸려서,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래도 내 안에 남은 호기심은 그걸 계속해서 궁금해한다. 울림은 계속된다. 하지만 녀석은 줄창 울려대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안받을거면 수신거부하면되잖아"

"그렇게 안받으면 안돼"

"왜?"

"여자전화니까"

귀찮다는듯 그렇게 말한 녀석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핸드폰을 어디엔가 툭 던져버린다. 던져도 핸드폰은 끈질기게도 계속 울어댄다. 진동음은 내 귀에 파고들어 어느새 잠을 다 깨워버렸다.

"시끄러워 저거"

"안오겠지"

"다섯번째야"

끊어졌다 다시 울렸다가. 끊어졌다가 다시 울렸다가. 계속 반복한다. 이젠 내가 짜증이 날 지경이다. 침대에서 내려와 그것에 손을 뻗는다. 녀석이 그걸 보고는 놀란 눈빛이 된다. 핸드폰 액정에는 '이현지'라고 쓰여져 있었다.

"받지마!"

"그냥 한번 받고 끝내, 시끄러워 죽겠어"

"하아… 알았어"

나의 귀찮다는듯한 말에 녀석이 핸드폰을 내 손에서 가져가더니 조용히 하라고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가 보인다. 누굴까. 여자친구? 아니면…

그런건 중요하지 않아서 나는 침대로 가 드러누웠다. 녀석은 무슨 중요한 통화라도 한다는듯이 방 밖으로 나갔다. 누구의 전화인지, 어떤 전화인지 조금은 궁금하다.

아직 내가 잠들지 않은, 잠들기 직전에 녀석이 방을 다시 들어와서는 귀찮다는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서는 나갈 준비를 하는지 벗어놓았던 옷을 입기 시작한다.

"어디 가?"

"자고있어, 바로 올테니까, 괜찮으면 하룻밤 자고가도 돼"

"으응… 갔다와…"

의식이 점점 아래로 떨어지는듯하다. 방문을 나서는 녀석이 입으로 뭔가 중얼거리는것도 같았다.

-쾅!

시끄럽게 문 닫히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깻다.흐릿한 시야로 점점 무언가 눈에 들어온다.

"!!"

그곳에는 무언가 엄청나게 무서운 거라도 본건지 붉게 충혈되어있는 눈을 하고 교복 마이 단추는 두개정도 뜯어져 있고 와이셔츠는 반쯤 벗겨진데다가  머리도 많이 흐트러져 있는 모습을 한 김선우가 놀란 토끼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다리에 힘이 풀린건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그래?"

흐트러진 모습한번 볼수 없었던 녀석이 이렇게나 당황한 모습을 보니 나도 걱정이 되었던 걸까 나는 잠이 확 깨버렸다. 밖은 어느새 밤이 되어있어서 어둑어둑했다.

"허억…허억…허억…"

녀석은 기듯이 침대맡에 오더니 옷매무새를 가다듬을 생각은 하지 않고 갑자기 날 끌어안고는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허억…허억…"

"뭐, 뭐야 갑자기"

-두근 두근

착각일까, 날 끌어안은 녀석의 가슴에서 내 가슴으로 심장의 두근거림이 전해져오는것 같았다. 무언가에 엄청나게 당황하고 놀란 상태인듯 녀석은 날 끌어안고 놓을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이이잉

녀석의 핸드폰이 울기 시작했다. 녀석은 손에 꼭 쥐고있던 핸드폰을 한번 확인하더니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걸 열었다.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통화내용이 내게도 들렸다.

[괜찮냐?]

"허억…허억… 어…어…그래…"

[안괜찮아보여]

"지금…어때?…"

[몰라, 지금 현지 죽는다고 난리났어, 니가 너무 심했다 솔직히]

"씨팔…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녀석은 크게 소리쳤다. 그 소리에 나도 약간 당황해서 뒤로 살짝 물러났다.

"가지마… 가지마… 옆에 있어"

내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서자 녀석이 날 가지 못하게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엉거주춤하게 앉아서 녀석은 내 몸에 기대듯이 안겨있었다.

[너 누구랑 같이있냐? 야!]

"끊어, 나 지금 미칠것같아…"

녀석이 핸드폰을 닫더니 배터리를 뽑아 바닥에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무슨 일일까, 궁금증이 더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왜그래? 아까 전화때문에 그러는거야?"

녀석은 대답하지 않고 내 품에 기대듯이 안겨있었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녀석은 몸을 부들부들 떤다.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나…나… 지금 무서워"

"왜 무서운데, 말해봐"

두려워하고 있는듯한 녀석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녀석은 힘없이 고개를 들더니 덜덜 떨며 말한다. 녀석은 완전히 거지꼴이었다. 옷 군데군데에는 흙도 많이 묻어 있었다.

"잠깐, 잠깐 기다려봐… 후우…"

녀석은 진정하기 힘들다는듯 심호흡한다. 그러고는 이내 진정하는게 힘들었는지 교복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눈에 익은 케이스, 담배였다. 담배도 피우는건가, 오늘 처음 알았다. 그동안 숨겨왔던것인듯 녀석은 한개피를 꺼내더니 부들부들 떨며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녀석은 진짜로 겁먹어 있는것 같았다. 그리고 한모금 깊게 빨아들이고 다시 내뱉으며 말했다.녀석의 입에서는 약간의 술냄새도 같이 나고 있었다

"나…… 따먹힐뻔했어"

"에?"

이해할수 없었다. 따먹는(?) 건 가능해 보여도 도저히 따먹힐것처럼 생기지는 않은 이녀석이 따먹힐번했다니, 어폐다.

하지만 이렇게나 겁에 질려있는것같은 모습을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닌것 같았다. 어디부터 믿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일단 사실인것 같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던 녀석이 얘기를 시작했다.

"저기… 그 뭐냐, 이현지라고 내가 아는애가 있거든? 그년이 날 좋아하는데…"

"그래서?"

"그게… 난 여자친구가 있다고"

녀석은 잠시 말하기를 주저하는듯했다. 여자친구가 있기는 있었던건가, 나야 상관없다. 난 그저 이녀석의 친구정도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방금 전화 왔잖아, 맨날 전화해서 귀찮게 해서 안받은거야"

"어떻게?"

"뭐 잡담밖에 없어, 지도 나 좋아하는거 자기 스스로 숨기려고 하는것 같기는 한데 너무 티난다고, 자꾸 말거는거 보면 모르겠냐… 하아…"

녀석은 답답하다는듯 한숨을 내쉰다.

"방금 전에 전화 받았더니 나와서 술을 갇이 마시자는거야, 좀 취해있는것 같더라고, 불안해서 나가기 싫었는데 일단 받았으니까 체면상 나가야 되잖아, 그래서 나갔는데…"

취한 그녀석한테 따먹힐뻔했다 이건가?내 생각에 그건 나름대로 행복한 고민이 아닐까 싶다. 

"다 좋은데, 가니까 지 친구랑 둘밖에 없는데다가 완전히 꼴아가지고 혀까지 꼬여서 말도 안나오는주제에 내 여자친구한테 전화를 걸어서 막 포기하라고 나보다 니가 더 선우 사랑하냐고 그런걸 물어보는거야 막 그리고 갑자기 내 옷을 막 벗기려 드는데 진짜 그대로 따먹히는줄 알았다니까? 진짜 내가 조금만 더 먹었으면 나 진짜 따먹혔을걸"

"큭큭…"

"뭐가웃겨! 나는 심각하다고!"

내가 피식 웃어보이자 녀석이 내게 소리쳤다. 왠지 우스운 상황이 되어있었던 걸까. 하지만 나도 어느새 그 상황에 몰입해 있었다.

"그래서 여자친구는 어떻게 대답했어?"

"뭐 어떻게 대답해, 다 응 응 응 이러더라고, 뭐 솔직히 나 좋아한다는데 싫은건 아니지, 그런데 솔직히 불안하더라고 그년 완전히 미친년같았다니까 그대로 놔뒀다간 칼들고 찾아가서 선아… 아니, 여자친구 이름이야, 선아를 죽이기라도 할것같았다니까?"

"설마… 두명 있었다며, 안말렸어?"

"둘다 한통속이라 현지 말고 다른애는 내 팔목에 칼 들이대면서 가면 그어버린다고 협박하고 있었는데……"

말을 안해도 공포가 표정에 다 드러나는 녀석을 보니 왠지 귀여워 보였다. 뭐 내가 상황의 심각함 자체를 너무 모르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공포영화에 들어온 기분이었다니까? 내가 계속 그만하라고 소리치는데 듣지도 않고… 씨발"

혼자 계속해서 욕설을 내뱉으며 기분을 풀기라도 하려는듯 녀석은 담배연기를 깊숙히 빨아들이고는 회색빛 연기를 내뿜는다. 녀석의 눈에는 눈물자국 비슷한것도 어느정도 남아있었다.

"너… 울었어?"

"……썅, 니가 내 상황에 처해봐"

녀석은 고개를 돌리고 말을 잇지 못한다.

"계속 말해봐, 어땟는데?"

그 말에 녀석은 마치 어린아이라도 된것처럼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는 음성은 많이 겁먹어있는것 같았다.

"그래서 막 나중에는 선아를 죽여버린다고 막 어디로 가는거야 그래서 붙잡으러 가는데 다른년은 뒤에서 칼들고 쫒아오고 그래서 도리어 내가 막 도망쳤다니까? 문자로 숨어있으라고 선아한테 말한 다음에 가지 말라고 잡았는데 자꾸 소리치고 지랄을 하길래…"

"때렸어?"

"……"

녀석은 말이 없었다. 여자를 때렸다는것 자체에 녀석은 약간 충격을 받은것 같기도 했다.

"뺨을 때렸는데… 그대로 주저앉아서 울고불고 난리가 나는거야 죽어버린다고 칼들고 설치는데 무서워서 바로 도망온거야 지금"

"으응… 그래…"

"미치겠어 지금, 다른애들이 와서 달래주고는 있는데… 만약에 그짓 했으면 다음날 책임지라고 했을거야 분명히"

"설마…"

"그러고도 남는다니까?"

아무렴, 자기 몸을 무기처럼 쓸까, 하지만 녀석의 공포는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지 녀석은 다 피우기도 전의 담배개피를 꺼버리고는 날 품에 안는게 아니라 내 품에 안겨왔다. 늘 날 안기만 하던 녀석이 내 품에 안겨오니 기분이 묘했다.

"무서웠어?"

녀석은 말이 없었다.

"잠깐… 이대로 있어줘…"

"아…응…"

녀석은 그대로 품에 안겨서 가만히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문득 묘한 생각이 들었다.

"여자친구한테 가봐야되는거 아니야?, 위험할수도 있을텐데…"

"……몰라"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날 더 강하게 안겨온다. 어느새 날 눕혀버리고 옆에서 끌어안는다. 이상한 생각을 하고있는것 같지는 않지만 기분이 묘하게 들뜨는것같다.

"지금은 너랑 있고싶어"

위험한 여자친구보다 나와 있는게 좋은걸까. 녀석은 그 자세 그대로 멍하니 있었다. 녀석이 가슴에 불어넣는 뜨거운 숨결이 묘하게 날 도취시킨다.

저번에 녀석이 나에게 했던 말 아직 기억하고 있다. 나에게서 엄마의 체취가 난다는 그 말… 그것에 안정을 얻고있는 걸까, 녀석은 내 향기에 취한건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녀석은 잠들어 있었다. 부담감과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서 그런듯하다.

나도 이제 집에 가야하지 않을까. 많이 늦었다. 옷을 다시 입고 방문을 나서며 가만히 잠들어있는 녀석이 왠지 신경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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