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산동 반도는 본시 한반도나 또는 요동과 가까운 지역이다. 발해나 황해 바다가 잔잔한 내해라 고래(古來)부터 서로 간에 배를 이용해 쉽게 오가던 곳이다.
명나라는 본래 보다 더욱 혼란한 난세로 접어들었다. 남명에서는 헌강왕이 야심을 품고 큰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또한 산동 반도에는 제태국이 생겨 독립적으로 국가라고 선포해 혼란은 더욱 심했다. ‘난세에는 영웅호걸이 나타나고 인재들이 태어난다.’는 말처럼 인걸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었다.
세상은 항상 음이 있으면 양이 존재하는 이치와 같이 자연스럽게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최인범은 이주한다고 신청한 명단 속에서 산동 반도의 등주 지휘참사인 척경통과 그의 아들인 척계광의 이름을 보고 놀랐다.
‘허! 척계광을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역사를 잘 알고 있으니 척계광을 단번에 알아 본 것이다. 척계광을 쉽게 표현하면 조선에 이순신이 있다면 명나라에는 척계광이 있다고 평할 수 있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지휘첨사 가족을 데리고 오라.”
“넷!”
척계광의 가문은 주원장과 같이 전장을 누비고 다닌 조상 덕분에 등주에서 세습제로 지휘첨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졸지에 반역의 무리들이 산동 지역을 장악하자 이곳으로 도망친 것이다.
척령통과 척계광이 몇 명의 갑옷을 입은 군관들과 나타나자 최인범은 넌지시 물었다.
“척씨가 희귀한 성인데. 혹시 고려의 척준경과도 관계가 있는 집안인가?”
이런 물음에 척계광은 아무 대답을 못하고 늙은 척령통은 재빠르게 답했다.
“전하, 고려의 척준경 장군이라면 잘 아옵니다. 족보의 기록으로 남지 않아 잘은 모르오나 구전으로 들리기는 고려의 척준경 장군이 저의 조상이라는 말도 있었사옵니다.”
최인범은 빠르게 답하는 척령통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으며 응수했다.
“흠, 그러니까 고려 장군인 척준경의 후손일 수도 있고 아니면 먼 친척일 수도 있다는 소리군.”
“전하, 그러하옵니다.”
어차피 살아남기 위해 몸을 의탁하러 온 이주민으로 어딘가 기대야 하는 판국이다.
사람이란 워낙 다급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된다. 그런데 생각지 못하게 군왕이 오래전 고려의 장군인 척준경을 들먹이자 척령통은 재빠르게 자신들과 같은 성씨라는 이유로 척준경(拓俊京)이 조상일 수 있다고 답했다. 늙었지만 순발력이 있고 사태 파악을 빠르게 하고 있었다.
‘흠! 본시 머리가 좋은 집안이야.’
최인범은 척령통이 지금 어떤 처지인지 정확하게 파악했다. 척령통의 척(戚)과 척준경의 (拓)은 전혀 다른 글자라 같은 조상일 수는 없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는 이지함 내무장관은 주군께서 명나라에서 오게 된 이주민의 허언에 너무 쉽게 넘어간다고 판단해 슬며시 물었다.
“전하, 성에 적힌 한자가 다소 이상한데요?”
이런 이지함의 지적에 최인범은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조선의 선비 출신이 아니라고 할까 까칠하게 지적하는군.’
물론 이런 지적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위치고 또 그래야 나라꼴이 정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목적이 있으니 이지함의 지적은 무시했다.
“허! 내부 장관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다른 거야 당연한 거지. 본시 척준경의 후손이 대륙으로 넘어가 음만 같은 다른 글자를 사용해서 그런 거지. 고려가 망하며 살아남기 위해 왕씨들이 전씨나 또는 김씨나 또는 강씨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도 장관은 들어 보지 못했나?”
이런 말에 이지함은 다소 어이가 없어 즉시 반문했다.
“전하, 하오나, 그런 경우와 조금 다르지 않사옵니까?”
“내무 장관은 이제 보니 가문이란 허울 좋은 굴래만 따지는 고리타분한 사람이군. 젊은 사람이 융통성이 없어. 본인들이 그렇다고 이미 인정했고 과인이 그것이 타당하다고 인정했으면 되는 거지. 아무튼 음이 같으니 앞으로 주울 척(拓)으로 기록하도록 하시오.”
“에이.”
군왕이란 얼마든지 새로운 성을 하사하기도 하니 내무장관으로는 더 이상 다른 이의를 달 수 없었다. 아무튼 말 한마디 잘해서 척령통은 어려운 처지에 그래도 한반도에 있는 척씨와 같은 조상을 가진 신분으로 변했다.
이곳으로 이주해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처럼 마음이 넓고 이주민들에게 후하게 대하는군. 앞으로 여기는 크게 발전될 거야.’
최인범은 잠시 이지함의 충언을 듣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본래 이름이나 성이야 어찌 되었건 뛰어난 자질을 가진 척계광을 쉽게 주었으니 주을 척이란 성이 제일 적당해.’
주을 척(拓)은 그 외에 넓히다 확장한다는 뜻도 있으니 척계광의 가문이나 자신이나 마찬가지로 서로 좋은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아비야 이미 골골해 써먹기 틀렸고 어린 척계광이야 두루두루 써먹을 곳이 많았다.
‘어리니 잘 조련만 하면 오래 써먹기가 좋아.’
최인범이 요즈음 들어 제일 급하고 아쉬워하는 점은 주변에 뛰어난 인물이 적다는 점이다. 나라가 어느 한두 사람으로 돌아가는 기구가 아니라 주변에 믿고 맡길 인재들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자리는 많으나 검증된 사람이 주변에 별로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대충 검증하고 함부로 중용할 수도 없으니 역사를 아는 처지라 되도록 역사서에서 검증된 인물을 선호하고 있었다.
‘현재로는 그것이 제일 안전해.’
그래서 이지함을 어렵게 포섭해 어리지만 내무장관으로 발탁했다. 이순신이 있다면 무조건 포섭해 해군총사령관을 시킬 마음이 있지만 그는 아직 태어나기도 전이다.
잠시 이런 생각을 하던 최인범은 이미 오래전에 반군의 수중으로 떨어진 산동 반도에서 어떻게 이곳으로 이제야 오게 된 것이 궁금해 물었다.
“척 첨사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전하, 반란군과 대적하다가 세가 불리해 어쩔 수 없이 깊은 숲속으로 숨어들어가 겨우 겨우 목숨부지하고 살았사옵니다.”
“허, 그렇다면 산적처럼 살았다는 말이군.”
“전하, 그러하옵니다.”
지휘첨사는 정4품인 벼슬로 연대장 정도나 대대장 정도인 무관벼슬이다. 척춘경이 역사서에 기록된 뛰어난 인물이라지만 아직 어리고 아비도 살아 있었다. 그래서 우선 옆에 데리고 있으며 충성심도 확인하고 또 능력도 조금은 검증해볼 생각이다.
“척 지휘참사는 그동안 반군무리 속에서 도망 다니느라 고생도 했고 몸도 쇠약하니 집에서 병이나 치료하시오. 척계광은 소령을 달고 우선 염창 시의 교도소의 부소장으로 나가서 근무하도록 해.”
“명을 따르겠나이다.”
하고 많은 직책 중에 죄수들에게 강제노역으로 염부로 부려야 하는 직책을 맡긴 이유가 있었다. 척계광이 본시 둔전을 잘 관리했다는 점을 알기에 최악의 환경에서 그가 어찌 행동하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교도소 부소장은 뭐고 소령은 뭐지?’
처음 들어보는 계급이고 보직이라 척계광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같이 이주해온 군관들도 마찬가지고 다른 이주민들도 전혀 모르는 직급과 보직이라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다.
계급사회인 왕조시대에서 직급과 품계를 잘 모른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아주 곤욕스러운 일이 자주 벌어질 여지가 많았다.
‘여기는 다른 식인가? 이것 부지런히 배워야 되겠네.’
국가 형태로 통치기구를 만들고 있지만 진국(眞國)은 아직 정식으로 국가라고 선포하지 않은 상황이다. 기존에 정착한 사람들도 군인의 계급을 도통 어떻게 대우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최인범은 마침 각 부처의 장관들도 모여 있는 자리고 이주민들도 있으니 이번 기회에 한번은 설명해줄 필요가 있어 지시했다.
“내무 장관이 품계와 계급을 정리해서 지금 발표하시오.”
“예이.”
이지함은 이미 머릿속에 집어넣은 듯이 빠르고 크게 외쳤다.
“모두 잘 들으시오. 대명률과 경국대전을 참고한 품계이니 별로 어렵지는 않을 거요. 품계는 정1품부터 종9품까지로 18단계로 나눕니다. 그리고 군대의 계급은 모두 23단계로 18단계까지는 나라에서 녹봉을 주는 직업군인이고 나머지 19에서 22단계의 계급은 의무 복무병입니다.”
이렇게 설명하고 이지함은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 무슨 시조라도 토하듯이 빠르게 군대의 계급을 나열했다.
“이병, 일병, 상병, 병장은 의무 복무병이고 그 위로는 하사, 중사, 상사, 원사를 준사관이라고 칭합니다. 그리고 이후는 장교로 준위, 소위, 중위. 상위, 대위, 소령, 중령, 상령, 대령, 소장, 중장, 상장, 대장, 원수로 구분됩니다. 제일 위에 있는 대원수야 전하께서 하시니 직급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원수가 정1품이고 하사가 종9품으로 품계와 계급을 조정해 놓았다. 그러자 다들 쉽게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별로 어려운 계급 명칭이 아니군.”
척계광도 이런 설명을 듣자 자신에게 부여된 소령의 계급이 그리 낮지는 않다고 판단했다.
지휘첨사가 정4품이라 다소 높지만 이주민 신세로 와서 두 단계 낮은 정5품 계급이니 상당히 높은 편이다. 더구나 아비가 죽어야 세습제인 지휘첨사를 이어 받게 되니 더욱 그렇다. 나이도 자신은 이제 겨우 성인으로 대접을 받는 16세에 불과했다. 사실 파격적인 임명을 하고 있었다.
최인범은 이왕에 능력 검증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를 고려해 추가로 명령했다.
“반란군에게 쫓겨 이제야 이주해서 처음 살림이라 어려울 것이니 척령통 첨사는 교도소장인 상령으로 녹봉을 지급하도록 하시오.”
“명을 따르겠나이다.”
결국 척령통은 본시 직급에 해당하는 계급을 받고 녹봉이 지급되어 그런대로 대우를 받게 되었다. 결국 어린 척계광에게 교도소장의 업무를 대행하도록 조치를 내린 셈이다.
‘어리지만 거친 죄수들을 다루다 보면 능력은 검증될 거야.’
지금 진국의 조세 수익이나 통치자금에서 소금이 차지하는 부분은 상당했다. 그런데 그런 소금을 생산하는 주된 노동력을 제공하는 교도소장을 대행하라고 어린 척계광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이지함 내무장관은 너무 놀라 뭐라고 이의를 제기하려고 입을 열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최인범은 더 이상 토를 달지 마라는 뜻으로 이지함에게 즉시 지시했다.
“내무 장관은 빨리 시장 군수를 정하고 발령을 내보내는 업무를 수행하시오. 그리고 법령집을 만들어야 되고 다른 업무도 많아 바쁠 것 같으니 어서 나가 보시오.”
“에이.”
최인범은 한동안 군대 양성에 힘을 쓰다가 다시 주된 수입원인 천일염 생산에 신경을 쓸 생각이다. 하고 싶은 사업이야 많지만 자금이 있어야 집행하기 때문에 소금 생산을 더 해볼 생각이다.
염창시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많았다. 하지만 이미 조선의 함경북도나 평안북도까지 팔려나가니 판매량에 비해 생산량이 부족한 실정이다.
조선의 전라남도 지역보다 일조량도 그렇고 염도도 낮아 여건이 매우 불리하니 생산성은 전라도에 비해 상당히 뒤떨어진 상태다.
척계광은 어리지만 이미 가장으로 가족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봉황성에 집을 마련하고 아비와 가족이 지낼 터를 마련해 놓고 그제야 최인범을 찾아와 보고했다.
“전하, 임지로 떠날까 하옵니다.”
“가족들이 지낼 곳은 잘 마련했나?”
“예이.”
“그렇다면 나와 같이 염창 시로 떠나면 되겠군.”
최인범은 근접 경호원들과 같이 척계광과 대마불을 대동하고 염창시로 떠나게 되었다. 이제 봄이 되니 본격적으로 파종도 하고 천일염 생산에 박차를 가해볼 생각이다.
‘어디서 한바탕 전투를 벌여야 포로를 잡아 염전에 투입하는데 주변에 만만한 상대가 없어.’
염전의 일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아무래도 정상적인 인건비를 줘야하는 염부로는 수익성이 떨어진다. 그러니 무임금 노동력을 제공하는 전쟁포로나 무슨 중죄를 저지른 죄수들이 늘어나야 수익이 늘게 생겨서 해보는 생각이다.
‘나도 전라도 무안 군수처럼 점점 이상하게 변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