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사내는 서대문 밖의 주막으로 가서 잠을 잤다. 아침에 일찍 서대문이 열리자 급하게 도성 안 시전의 대형 비단가게로 들어갔다.
대형 비단가게는 최월녀가 운영하는 백두상단이다. 백삼수를 감시하던 사내는 최인범이 명수사관으로 높이 평가하던 풍기에서 살던 최복동이다.
최복동은 아침 일찍 가게로 들어와 장부를 살피고 있는 최월녀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급하게 보고했다.
“아씨, 백삼수 그놈이 큰일을 저지르려고 합니다.”
“뭐예요? 그놈이 또 무슨 일을 저질렀어요?”
“아씨,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곤란하니 안으로 들어가세요.”
“그러죠.”
최월녀는 최복동의 요구에 살펴보던 장부를 밀쳐놓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와 연결된 길고 다소 복잡한 통로를 지나면 그녀가 기거하는 안방이 나온다.
조선의 전통 방식이 아니고 조금은 왜나 명나라 양식의 건축 구조다. 상점과 연결해 편하게 사용하려고 개조해서 독특한 형태다. 조선 방식은 야간에 자객이 침투하면 바로 위험해 지지만 여기는 복잡한 문 때문에 비교적 안전했다.
안방에 들어간 월녀가 비단 보료 위에 앉자 최복동은 자신이 감시하던 백삼수의 행동이나 언행에 대해 보고했다.
“어마나, 그놈이 북경에서 감히 고귀하신 오라버니를 암살하려고 시도해도 내가 살려주니 또 다시 천인공노할 못된 짓을 꾸미는 군요.”
“아씨, 그놈이 노리는 여자가 윤 과부라고 했으니 정말 심각합니다.”
“그렇다고 백삼수가 칭한 윤 과부가 그분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겠군요. 요즈음은 윤 과부라고 부르는 여자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아씨,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단정하는 이유가 뭐죠?”
“아씨께서 백삼수와 김 상궁을 감시하라고 지시해 제가 백삼수를 먼저 조사하다 보니 오늘에야 무당과 연결된 김 상궁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제 판단으로는 분명히 대비전의 김 상궁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백삼수가 노리는 윤 과부는 그분이 확실합니다.”
이렇게 답하자 최월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답해 주었다.
“포도부장님,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았어요. 하지만 과부가 전처럼 재혼을 못하는 시절도 아니고 사안이 너무 중대하니 더 신중해야 합니다. 아직은 쉽게 윤 과부가 그분이라고 너무 쉽게 단정하지 마세요. 그냥 평범한 돈 많은 윤 과부일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더 조사해서 보고를 드리죠.”
최복동은 현재 좌포청 소속으로 품계는 종6품이지만 급료는 전혀 없는 무료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최복동의 신분 상승은 당연히 최인범 때문이다.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최월녀의 재력이나 인맥이 만든 벼슬이다.
최인범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군왕으로 봉해지자 조선의 주상께서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에게 뭔가 해주려다 보니 그가 의동생으로 삼은 최월녀가 마음에 걸렸다. 최인범이 유독 그녀를 애지중지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래서 최월녀를 이미 죽어서 절손된 최 참판댁의 족보로 올리는 신분세탁을 해주게 되었다. 남자라면 벼슬을 시켜서 신분 상승을 해주겠지만 여자라 그렇게는 못하니 백골양자(白骨養子)라는 방법을 선택했다.
본래 월녀는 아비가 누군지 정확하게 모르지만 오라버니께서 주신 성이라고 해서 최씨 성을 고집스럽게 주장해 결국 최월녀라는 이름은 유지되었다.
경주 최씨인 참판 댁 친척들은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말이 있듯이 재물이 많은 최월녀가 자신들의 집안으로 입적되는 조치에 대해서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다투듯이 그녀에게 선물을 보내주며 아부하고 있었다.
그러자 최월녀는 그것을 계기로 풍기에 있던 최복동을 불러 집안에서 같이 지내며 그에게 포도청에서 근무하는 무료부장으로 만들어 줬다. 그녀가 벼슬을 얻어 내려고 줄을 댄 사람은 최인범에게 무척 호의적인 한정문 병조참판이다.
“최 부장께서는 얼마든지 조사가 가능하니 조금 더 세밀하게 조사해서 전하께서 한양으로 올라오시면 백가 놈에 대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아씨.”
조선은 노비를 면천시키고 새로운 제도를 많이 발표해 전에 비해 상당히 변했다. 하지만 조선은 여전히 신분이 엄격한 사회다. 주상께서는 평소 자신이 생각하던 바를 새롭게 발표한 시점이다.
여자의 절개를 미덕으로 아는 조선 사회에 상당히 충격적인 발표가 있었다. 그것은 과부의 재혼금지법을 완전히 풀어버린 것이다.
그와 더불어 부모가 함부로 어려서 정혼해 벌어지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남녀 당사자의 서명이 있어야 정혼하게 된다는 새로운 법도 만들었다.
반대하는 신료가 나오자 주상은 큰 소리를 쳤다.
“왕실에서 먼저 시행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예? 왕실에서 먼저요?”
“그렇소. 왕실에서 우선 50세가 넘지 않은 여자는 모두 재혼시키겠다는 말이오.”
“전하, 누구라도 시킨다는 건가요?”
“그렇소. 왜 젊은 나이에 여자 혼자 외롭게 살도록 놔두나요? 더구나 봉황성과 대마도로 떠나간 이주민도 많아 농사철에 일할 사람이 모자라다고 아우성치는 판국인데요. 40대는 충분히 재혼해도 출산이 가능한 나이라 문제가 될 것이 없소.”
“알겠습니다. 그럼 시행하도록 하죠.”
그래서 몇몇 왕실에 속한 여자들이 먼저 재혼하게 되었다. 일부는 삼강오륜이 무너졌다고 통탄하고 일부는 아주 잘한 일로 칭찬이 자자했다.
왕실에 속한 여자란 꼭 왕족이 아니더라도 많았다. 궁녀들이 그에 속해 모시던 왕족이 죽게 되면 사가로 나가서 얼마든지 혼인할 수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이 과정 중에서도 대윤파는 윤리 도덕이 무너진다고 반대하고 소윤파는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소윤은 약자가 계속 지낼 수가 없으니 주상이 하고자 하는 새로운 개혁 정책에 동조해 줌으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다.
왜에 다녀온 윤임은 드디어 병권을 지니는 좌의정으로 바뀌고 다시 전처럼 정계에서 등장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과부재혼허가법이 반포되자 조정의 권세에서 약간 밀리자 열을 받은 대윤 파들은 서로 만나서 술을 마시면 이렇게 소윤을 조롱했다.
“그래 윤 대비도 과부이고 40대니 재혼시켜서 대궐에서 내보내 버려.”
“암, 왕실이 먼저 예외 없이 시범을 보인다고 했으니 그래야지.”
그런 비밀스런 말들이 한양 저잣거리로 흘러나오자 윤 대비는 이후로 윤 과부로 불리며 시정잡배들의 술안주 거리로 번지고 있었다.
윤 과부라는 말이 유행되자 저잣거리의 주모들은 너나 나나 윤 과부로 칭하고 있었다. 그러니 술꾼들이 은근히 수작을 걸며 말했다.
“윤 과부, 오늘 나와. 어때?”
“험! 이놈아. 너는 벼슬도 너무 낮고 덩치가 작아서 싫어. 나는 입이 커서 봉황 성에게 계신 전하처럼 덩치가 호랑이처럼 큰 사람이 좋아.”
“자네는 요즈음 유행하는 작은 고추가 더 맵다는 소문도 모르나?”
“이놈아, 너는 튼실한 고구마를 한입 꽉 물어서 먹는 맛이 너무 좋다는 것도 모르냐?”
이런 소문이 떠돌기 때문에 최월녀가 최복동에게 함부로 단정하지 말라고 충고한 것이다. 자칫하면 이상한 구설수에 휘말리고 사실이 아닌 것을 유포한 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 경국대전에 나오는 16세 이상 혼인에 대한 조항도 전보다 더 강한 법으로 시행해 조혼의 풍습을 금지하도록 조치를 내렸다.
그 때문에 일부의 신료나 선비들이 반대하고 나섰지만 주상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기어이 그런 법령을 반포해 많은 젊은 과부들이 재혼하고 조혼하는 풍습은 많이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주상은 조선의 도량형도 약간 손을 보았다. 비단이나 면포에서 사용하는 주된 자는 이미 백두상단에서 시행하고 있는 주척을 사용하도록 했다.
주척(周尺) 5척을 필목의 대자 1자로 계산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주척 1척에 207밀리미터라 대자는 1035밀리미터로 최인범이 익숙해서 사용하고자 했던 미터법과 거의 동일했다. 사실 서양에서 들어오는 미터법이 아직 유입되지 않았으니 최인범은 별로 차이를 느끼지는 못하고 있었다.
며칠 뒤에 최복동이 찾아와 윤 과부에 대한 보고를 듣던 월녀는 최복동에게 다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알았어요. 그런 정도라면 백삼수의 의중은 확실하군요. 이제 그 문제는 그냥 덮어 두세요. 다만 백삼수의 행적은 항상 파악해 두세요.”
“알겠습니다.”
“아직도 도성 안이나 마포 나루에서 주척이 아닌 영조척이나 또는 치수가 틀린 자나 되나 말을 사용하는 상인들이 많으니 그것도 같이 조사를 해보세요.”
“아씨. 그런 정신 나간 상인들이 아직도 있어요?”
“예, 분명히 크게 저울이나 자를 속이는 상인들이 있을 겁니다. 무료부장이지만 그래도 벼슬 값은 해야 한 참판님께 면목이 서죠.”
“알겠습니다. 아씨.”
“그들 때문에 정확한 주척만 사용하는 우리 백두상단이 피해를 보고 있으니 수사하셔서 깔끔하게 정리해주세요. 혹시 남들이 이상하게 바라볼지 모르니 포도청에는 다른 부장에게 귀띔을 해주어 법을 어긴 상인들을 추포해 가도록 조치를 취하시고요.”
“오라! 그런 방법이 더 좋겠네요.”
월녀가 최복동을 하필이면 포도청의 무료부장을 시키게 된 이유는 자신이 필요하면 언제고 이런 일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지만 이미 백두상단을 운영하며 많은 부하들을 부려 보아서 사람을 어찌 다루고 이용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쉽게 설명하면 최복동은 포도청의 무료부장이라 야간에도 돌아다니기가 쉽다. 또한 각종 범죄에 대해 수사 권한은 있지만 급료가 전혀 없으니 관아에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자신이 운영하는 백두상단의 일을 간접적으로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월녀는 상평통보를 한 꾸러미를 넘겨주며 추가해서 지시했다.
“심복으로 쓸 포교나 포졸도 이번 기회에 잘 사귀어 놓으세요. 물론 가까운 곳에서 사는 사람이면 필요할 때 부르기가 더 좋고요.”
“아씨, 잘 알겠습니다.”
최월녀는 아주 간덩이가 크고 배포도 남달랐다. 그리고 이제 한창 꽃피우는 나이라 미모도 뛰어났다. 그래서 도성의 한다하는 명문가에서 매파를 수시로 보내고 있었다.
자신의 본래 신분이 미천하다는 핑계로 모두 거절하고 있었다. 거절하기 힘든 매파가 찾아오면 적당히 오라버니 핑계를 대고 있었다.
“제 오라버니가 가장이시니 오라버니의 승낙이 있어야 돼요. 그러니 오라버니께 먼저 말씀드리세요.”
이렇게 거절하니 나이가 적어 만만하게 보고 접근한 매파는 욕도 못하고 다들 물러나고 있었다.
아무튼 백삼수는 조선으로 입국해 가만히 있었으면 최월녀에게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과거 신분이 천한 노비라는 것을 안다든 것을 기화로 접근했었다.
“우리 서로 볼 것 다 본 사이가 아닌가?”
철썩! 철썩!
감히 이런 헛소리를 하고 접근하다가 양쪽 볼이 얼얼하도록 따귀를 두 대나 얻어터지고 말았다. 그 일을 계기로 백삼수가 한양에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월녀는 오빠가 봐줘서 돌아왔다고 판단해 일단 최복동을 시켜 감시하게 했었다.
‘그 죽일 놈이 아직도 나를 자기의 종년으로 취급해.’
김 상궁을 감시하게 된 이유는 그녀가 자주 이상한 무당집을 드나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해 필요할지 몰라 조사를 시킨 것이다. 백두상단은 궁중으로 명나라에서 수입한 고급비단을 납품하기 때문에 궁중이 대략 어찌 돌아가는지 알 필요성이 있었다.
궁중에서는 가끔 혼사가 있을 때 궁합을 본다며 점집이나 무당을 찾는 경우가 있었다. 더구나 아직 혼인을 안 하고 있는 윤 대비 소생인 공주가 둘이 있으니 조사해둘 필요성이 있었다.
궁중에서 혼사라도 있으면 납품할 비단의 양이 많아지고 덩달아 내명부에 속한 대감 집 마나님들도 비단으로 새 옷을 해 입기 때문이다.
면포를 주로 거래하다가 명나라의 고급 비단을 거래하게 된 이유는 최인범이 명나라 사신에게서 빼앗은 비단을 그녀에게 넘겨줬기 때문이다.
이 무렵 멀리 무안군수로 떠난 윤원형에 대한 소식이 한양에서 널리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