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윤대비가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새로 왕위에 오른 주상이 조정에 어떤 변화를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세력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윤임이 전면에 나서면 상황이 변하는데.’
윤임은 여전히 우의정이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집안에만 틀어 박혀 있었다. 가끔 조정으로 나와 다소곳이 앉아만 있다가 퇴청하고 있었다.
‘그 늙은이도 이제 죽을 때가 되었나?’
윤임이 그렇게 행동을 매우 조심하는 이유는 대마도로 가있는 최인범 때문이다. 자신이 저지른 암살미수 사건은 여전히 미결된 상태로 남아 있고 당사자인 최인범의 힘이 전보다 더 강해졌다.
윤임 대감은 조정으로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 사랑방에 앉아 바둑을 두며 한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거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야.”
“대감, 제가 총병관을 한번 만나러 대마도로 가볼까요?”
“거길 가서 어쩌려고? 내 죄를 인정하라고? 그랬다가는 자칫 자복한 증거를 가지고 나를 죽이라고 주상에게 요구하면 그때는 죽을 수밖에 없어.”
남들은 조카가 왕위에 올랐으니 권세를 전보다 더 부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윤임은 지은 죄가 커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봉황성에 군사들이 늘었다고?”
“그렇습니다. 건주위 총감 소속인 좌우위의 기마병이 당초에는 2천명으로 조직이 되었는데 이제는 정원인 5천명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다른 군사도 있지 않나?”
“있지요. 도독 소속으로 보병이 이미 5천명이 넘어 간다는 소식입니다.”
자신과 원수가 되어버린 최인범이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봉황성에서 살게 되자 윤임은 노심초사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조정에서 자신을 탄핵하라고 들고 일어날지 모른다.
“그곳에 수군도 창설해 점점 수가 늘어나고 있다던데 그에 대한 소식은 있나?”
“예, 전에 개마고원 쪽으로 이주했던 하삼도 출신의 뱃사람들이 모두 봉황성으로 이주해 수군으로 합류해 그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산동 반도에서 활동하는 반란군을 토벌하겠다는 명분으로 수군을 증강하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왜구의 소굴로 지목된 대마도를 정벌한 최인범은 이제는 명나라 부마도위나 봉황성주라는 직책이 주는 위력보다 더 강력해졌다. 그가 최선봉에 서서 기마병을 몰고 대마도주를 잡았다는 것이 조선으로 알려지자 조선 백성들은 열광했다.
백성들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대부는 물론 젊은 선비들도 그를 추종하는 무리가 생기고 있었다. 특히 경상북도 북부 지역은 그를 추종해 봉황성으로 이주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백성들의 인심도 그에게 쏠렸으니 암살미수 사건이 또 표면으로 나오면 그때는 살아남기 힘들어. 그리고 그때는 주상께서도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도 나를 벌주지 않을 수 없고.”
“대감, 그러니 소인이 한번 대마도로 가서 총병관을 만나 보겠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동안 감정은 지워버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도 쉬운 일이 아니라 윤임은 그저 지금처럼 납작 엎드려 뭔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기회가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의 인심이 최인범에게 쏠리자 그를 두 번이나 죽이려고 했던 윤임은 자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주상뿐이다. 주상이 최인범과 의형제를 맺었으니 그것이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었다.
한편 대비전으로 이사한 윤 대비는 살인청부업자 조직인 검귀를 통해 이미 뭔가 중요한 지시를 내렸다. 은밀하게 내린 지시는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그러나 아직 검귀로부터 좋은 소식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 놈들이 잘해야 하는데 어찌 되어가는 지 알 수 없네.’
남편인 중종이 죽었으니 다소곳이 자중해야 함에도 윤 대비는 성품상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외부에서 보는 눈은 있으니 윤 대비는 부왕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긴 주상에게 김 상궁을 보내 주청을 드렸다.
“전하, 대비마마께옵서 선왕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서대문 밖의 반야사로 불공을 드리러 가길 원하옵니다.”
“그런가? 알았네. 자네가 잘 모시고 다녀오시게.”
효심이 깊은 주상은 대비께서 선왕을 위해 불공을 드린다는 말에 그저 고마울 뿐이다. 어린 나이에 왕후가 되어 어려서 자신을 키워준 분이라 친어미 같았다.
어린 경원대군을 왕위로 올리려고 때로 자신에게 모질게 대하기도 했다. 후덕하고 효심이 깊은 주상은 그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이해했다.
‘부왕께서 승하하셔서 제일 힘든 분이 대비 마마야.’
주상은 이렇게 생각하고 내수사에 명해 대비가 불공을 드리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넉넉하게 준비를 해주도록 배려했다. 주상의 허락이 떨어지자 대비는 김 상궁이나 궁인들을 데리고 서대문 밖의 반야사로 향했다.
이제 이른 여름이 되는 시기라 가마꾼들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윤 대비는 추후의 출입도 생각해 일반 양반들이 타는 가마를 타고 이동 중이다.
‘출입을 허락 받았으니 자주 밖으로 나와야 해.’
권력을 부리는 중전의 자리에서 대비로 물러나니 가슴도 답답하고 신경도 날카로워져 대궐의 높은 담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 앞으로 불공을 핑계로 대궐 밖으로 자주 나올 생각이다.
반야사는 후일 봉원사로 불리는 안산 남쪽 산자락에 위치한 사찰이다. 태고종의 총본산이라 불교의 정통파라고 주장하는 조계종과 약간은 대립하는 곳이다.
가마를 타고 서대문을 지나 봉원사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냇가에서 멈추었다. 윤 대비는 가마의 문을 열고 김 상궁에게 조용히 물었다.
“김 상궁, 무당에게 연락은 했지?”
“예, 마마. 아마 반야사 근처에서 기다릴 겁니다.”
“알았어.”
윤 대비는 반야사 입구에서 만난 늙은 무당에게서 비방을 받았다. 짚으로 형태를 만들어 비단으로 감싸고 주상과 중전의 사주가 적힌 인형 2개와 대침을 여러 개다.
남을 해하기 위해 인형을 만들어 그 사람의 이름이나 사주를 쓰고 대침으로 찌르며 저주하는 무당이 하는 잔악한 주술이다.
군왕의 관심을 독차지하려는 여인들로 가득한 궁중에서 가장 흔하게 쓰는 방법이다. 그러나 조선 왕실에서는 철저하게 금기시하는 미풍양속을 해치는 잔악한 행동이다. 그런 비방을 쓰면 그가 설사 왕후의 몸이라도 조정 중신들의 탄핵을 받아 폐위되는 사태에 이를 정도의 못된 행동이다.
윤 대비는 권력을 차지할 욕심으로 주상과 중전에게 저주를 내리는 비방을 들고 대비전으로 들어왔다. 윤 대비는 밤이 깊어 자정이 되면 무당이 알려준 주술을 외우며 대침으로 인형의 몸을 찌르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표독스럽고 사악한 표정으로 인형을 찌르는 윤 대비의 얼굴은 잔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죽어라! 죽어!’
아직은 40대라 몸은 가끔 뜨거운 욕정이 불끈 불끈 치밀기도 한다. 별로 쓸모없던 주상마저 죽어버렸으니 앞으로 남은 인생을 독수공방하며 현주상의 눈치만 슬금슬금 봐야 하는 상황이 너무 싫었다.
‘원수! 죽어! 죽어!’
대침으로 인형을 깊이 찌를 때마다 묘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양반가의 수절 과부의 경우 대침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찌르지만 그 대신 윤 대비는 주술과 함께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사람의 정신세계는 매우 복잡해 평소에는 멀쩡하던 사람도 돌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정한 사건이 일어난 뒤나 또는 어떤 시간대에는 성품이 전혀 다르게 변하기도 한다.
윤 대비는 특히 그 증상이 심해서 가임이 가능한 시기에는 불같이 욕정이 치밀며 더욱 잔악한 성품으로 변했다. 더구나 자신의 처지를 도가 넘치도록 비관하다 보니 이미 한계점이 다다르도록 성격이 변해 버렸다.
아무튼 윤 대비의 이런 처방이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주상이나 중전이 몸에 조금 이상이 생겼다. 두 사람 모두 딱히 어디가 아픈 곳은 없으나 밤에는 가위에 눌려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았다.
“허억! 휴우! 꿈이네.”
잠을 자다가 주상이 벌떡 일어나자 침방 상궁이 급하게 다가와 물었다.
“전하, 어찌 놀라시는지?”
“후우! 몸이 벌게진 시체들이 나를 잡아먹는다고 달려들어서.”
“전하, 아무래도 어의를 들여야겠사옵니다.”
침방 상궁은 재빨리 어의를 불러 주상의 용안을 살피게 했다. 그러나 어의는 그저 너무 놀라서 밤에 악몽을 꾸는 것이라며 잠을 잘 자는 처방만 내리고 있었다. 주상의 몸에는 질병도 거의 없고 전혀 이상이 없었다.
새로 등극한 젊은 주상께서 밤에 고함을 치며 놀래 깨서 자주 어의를 부르게 되자 조정의 분위기가 약간 뒤숭숭해지고 있었다.
“이러다 주상께서 오래 살지 못하겠어.”
“그게 무슨 막말인가? 전과 달라서 이제는 아주 건강하신 몸인데.”
“그렇지 않아. 요즈음 주상 전하는 밤에 잠을 잘 주무시지 못해.”
사실 심약하고 다소 여린 성품인 주상은 북경에서 날아온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대마도를 병합하고 대마도주나 그이 가족들은 모두 북경으로 보냈다.
대마도 정벌 자체가 명나라의 가정제 명령으로 벌어진 군사작전이라 전리품인 그들을 북경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수장이나 남자들만 처형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북경에서는 정말 상상하기 힘든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자금성 밖의 넓은 공지에 커다란 가마솥에 기름을 가득 넣고 불을 지폈다. 대마도에서 압송된 도주를 비롯한 남녀노소를 모조리 던져 넣어 기름에 튀겨서 죽여 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북경에서는 황제가 인육을 너무 좋아해 자신이 먹기 위해 왜구인 죄수들을 모조리 기름에 튀겼다는 소문이 퍼졌다.
주상은 북경에서 일어난 끔찍한 처형 소식을 들은 이후로 심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원귀가 되어 나를 죽이려고 하는군.”
전에 비해 몸도 좋아지고 조금 강단이 생겼다. 하지만 본시 글을 좋아하고 유약한 성품이다 보니 북경에서 벌어진 처형 소식은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마음의 병이 깊어질까 염려한 주상은 나름 해결 방법을 찾았다.
영의정을 편전으로 부른 주상은 전국에 산발되어 관노비로 일하게 된 대마도 주민들에 대해 전면적인 사면령을 내렸다.
“전하, 벌써 풀어주면 아니 되옵니다. 그러니 풀더라도 조금 늦추는 것이 좋사옵니다.”
“그렇다면 기간을 정해 주는 것은 어떻소?”
주상은 영의정과 상의 끝에 대마도 섬에서 넘어와 관노비가 된 사람들에 대해 3년이 지나면 정상적으로 백성인 양민으로 풀어 주기로 발표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주상의 악몽은 끝이 났다. 심적 부담에서 다소간 벗어나자 주상은 처음으로 인사를 단행하게 되었다.
또한 대비 전에도 인형에 대침을 찌르는 잔악한 주술 행위도 멈추었다. 틈만 나면 대침으로 인형을 너무 찌르다 보니 너무 너덜거려 더 이상 찌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김 상궁. 무당을 만나서 인형을 새로 만들어 와야 되겠다. 이번에 나가면 하룻밤 주막에서 자고 들어오자.”
“예이.”
윤 대비는 이번에는 나가서 부당도 만나지만 검귀 조직의 두목도 직접 만나볼 심산이다. 자신이 직접 만나서 지시해야 일이 성사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한양에서 이런 저런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북경에서 벌어진 잔악한 처형 소식이 대마도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최인범은 그런 소식을 듣자 대마불을 불러 슬며시 물었다.
“너, 네 아비의 소식을 들었냐?”
“예. 그래서 근처의 절로 가서 불공을 드렸습니다.”
“그랬냐?”
대마불은 아비의 처참한 죽음을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최인범은 대마불이 대견해 보이기도 하고 더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자신은 규슈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대마불에게 지시했다.
“우리 판옥선 타고 훈련이나 살피러 가자.”
“넷!”
최인범은 대마불과 철씨 형제를 대동하고 판옥선에 올라 함포사격 훈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점검을 끝내면 규슈로 떠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