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이주민들은 조선의 군왕이나 기타 관리를 전혀 믿지 않았다. 오직 자신들에게 살 길을 열어준 최인범만 추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발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분은 백두산에서 내려온 신선이야.”
“도인이 수련한다는 동자공도 익혔다고 하던데.”
“그러니 여자도 잘 탐하지 않지.”
이주민들은 차츰 최인범을 살아 있는 고고한 산신처럼 여기고 있었다. 물론 평소에는 그리 보이고 전투에서는 아주 뛰어난 무력으로 적을 제압하니 마치 신처럼 보였다.
이주를 시킨다고 할 때는 마음이 조금은 불안했다. 하지만 막상 개마고원에 들어와 보니 넓은 초지가 있고 많은 가축을 스스럼없이 이주민 소유로 만들어 줬다.
그래서 이주민들은 최인범을 마치 살아 있는 산신처럼 추앙하고 있었다. 본시 백성들이란 어려운 살림살이를 면하게 해주는 사람이 최고다. 그 때문에 여진족들은 최인범을 높이 떠받들고 있었다.
한편 개마중앙목장과 가까운 숲에서 혼자 지내다가 농장들을 모조리 돌아본 최인범은 새해가 되자 중앙에 있는 목장으로 돌아왔다.
혜산진에서 있던 칠복이 형제도 중앙목장으로 돌아와서 같이 지내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조상들께 차례를 지내고 난 최인범은 부하들과 식사를 하며 이인철 행정병에게 물었다.
“아직도 혜산진에서 연락이 없나?”
“넷! 하지만 연초에는 조정에서 교지가 내려올 것 같다는 소식은 있사옵니다.”
교지가 내려올 것이라는 말에 순간 부마도위가 떠오르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조선의 공주를 생각하면 아주 못난 추녀로 떠오르니 더욱 그렇다.
골이 흔들리자 최인범은 애써 다른 쪽으로 대화를 바꾸었다.
“강변에 개설되는 가축시장은 잘 운영되고?”
“넷! 10일마다 열리는 가축시장이지만 아주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여기도 인구가 늘었지만 혜산진도 점차 인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주민들이 가축을 많이 사가 가축시장은 잘 운영됩니다.”
“가축을 너무 많이 내다 팔지는 말아. 그러다가 자칫 개마 농장으로 가축을 다시 사와야 하는 경우가 생기니까.”
“넷! 조정을 잘 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만주에서 많은 가축이나 재물을 약탈하고 이주민들도 데리고 왔다. 포로로 잡혀 있던 군인이나 청장년 100명과 부녀자를 200명을 데리고 오는 전적을 거두었다.
“여기도 사람도 많아지고 이사를 가는 사람도 많군.”
“넷! 아직도 유동 인구가 제법 많습니다.”
개마목장에도 약간 이주민들이 교체되는 변화가 있었다.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이 개마고원의 목장으로 일부가 들어왔다. 이곳에 있던 여자들이 50명이나 혜산진으로 일시에 시집을 가게 되어 약간 변동되었다.
“시집가는 여자들은 뭐를 줘서 보냈나?”
“보통 소 한 마리를 줘서 보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새끼 돼지 20마리를 주기도 하고요.”
“양은 모자라서 주지 못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양은 계속 늘려야 돼서.”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낸 여자들은 처녀도 있지만 과부도 있었다. 또한 여진 땅에 남편이 있으나 해어진 여자들도 포함되어 혜산진에서 근무하는 갑사나 군졸들과 혼인해 떠났다. 여진에서 이주한 주민들의 성별 비율이 여자들이 많아 일부를 시집보낸 것이다.
지참금에 해당하는 가축을 주는 풍습은 여진족의 오랜 전통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시집을 가서도 홀대 받지도 않고 가정생활이 완만해 진다고 믿고 있어 그렇게 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이주민이 부자들이라고 알려져 개마고원으로 시집을 오겠다는 처자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농장을 관리하던 행정병들도 이곳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어 떠나야 한다. 그 때문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풀려난 갑사출신들이 이곳으로 와서 목장 관리인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5개 목장에 목부가 여진족 출신으로 40명씩이다. 관리직은 감목 1명, 부감목 2명은 갑사출신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총괄하는 감목관은 50대인 기마갑사출신으로 여진 땅에서 노예로 20년간 말을 돌보던 사람이다.
최인범은 감목관으로 결정된 임권수에게 조용히 지시했다.
“감목관은 전에 여진족의 포로로 고생한 원한이 있겠지만 이곳에 정착한 여진족들에게 잘 대해 주세요. 그들도 대부분 전에는 한 핏줄로 같은 나라를 이루며 살았던 한민족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식사를 끝내고 나자 최인범은 밖으로 나왔다. 축사를 돌아보며 옆에서 따라다니는 감목관에게 매우 중요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북쪽에서 정착한 흑풍대에서 약탈한 가축을 가축시장으로 가져오고 면포나 소금을 가져가려고 할 겁니다.”
“그렇게 약속이 됐나요?”
“예, 그런 조건으로 그들을 그쪽에 놔둔 겁니다. 그러니 내가 덕원부로 가서 소금을 많이 사서 보낼 것이니 개마목장에서도 사용하고 그것을 흑풍대에게 넘겨주고 대신 말을 받아서 목장별로 똑 같이 말의 수를 계속해서 늘리도록 하세요.”
“소대장님, 얼마 정도나 늘려야 하죠?”
“목장별로 최소한 500필씩은 되어야 하니 당분간 품종이 워낙 나쁜 말이나 수말 이외에는 개인이 소유한 말도 잘 챙겨서 외부로 반출하지 마세요.”
“갑자기 혼인 등으로 재물이 필요하면 어쩌죠?”
“만약 이주민 중에서 갑자기 재물이 필요하다고 개인들이 말을 팔게 되면 목장에서 모두 사들여 가축 수를 늘려주세요. 감목관께서 잘하리라 믿고 떠나니 최선을 다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본시 감목관(종6품)이란 조정에서 관리하는 목장의 책임자를 칭한다. 널리 알려진 벼슬 이름이라 보편적으로 사용하기 편리해 감목관으로 명칭을 정했다.
“일단 나와 행정병들이 근처를 돌아다니며 늑대나 표범 등 말을 노릴만한 맹수들은 모조리 잡아주고 떠나겠지만 감목관은 수시로 주변을 수색해 사냥하도록 해요. 목자들의 군사훈련을 대신해서요.”
“잘 알겠습니다.”
“혹시 여진족이 이곳 목장에 대한 정보를 알면 공격해 올지도 모르니 압록강 쪽의 입구인 계곡에는 목책이나 또는 작은 관문을 설치하고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방어 시설을 해두도록 하죠.”
최인범은 임권수 감목관에게 모든 업무를 맡기고 나자 부하들을 이끌고 실로 오랜만에 사냥을 떠났다.
중앙목장을 떠나 커다란 소나무가 가득한 숲속으로 들여와 야영했다. 사냥을 한다고는 말했지만 사실은 다시 풍기로 돌아가야 하니 지금까지 벌였던 사업도 부하들과 정리하고 또한 추후의 일에 대해 논의하려는 것이다.
“이번에 풍기로 돌아가면 모두 면천시켜줄 것이니 그리 알아.”
“면천요? 그러면 오히려 불편하지 않나요?”
“왜?”
“평민 신분이 되면 항상 소대장님을 보좌하며 따라 다니기가 곤란하잖아요. 그러니 지금 그대로 사노비로 있게 놔두세요.”
면천시켜준다는 것을 행정병들이 거절하자 최인범은 약간 놀랐다. 하지만 나중에 행정병들의 자식을 생각하면 꼭 지금 해줘야 된다.
“그럼, 이렇게 결정하지. 일단은 지금 그대로 놔두고 나중에 혼인하고 싶으면 반드시 그때 면천해서 양민처녀와 같이 분가해 살도록 해.”
“넷!”
최인범이 혼인을 거론하자 다들 얼굴이 환해졌다. 자신들이 제일 원하는 소망인 혼인까지 시켜준다니 입이 떡 벌어졌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이인철이 급하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빠른 시기에 면천해서 혼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장가를 보내 준다니 면천한다고 서두르는군.”
“소대장님, 저희들이야 장가를 가는 것이 제일 좋지요.”
“알았어. 이번에 풍기로 가면 면천도 하고 장가도 가도록해.”
“감사합니다.”
최인범은 부하들의 장래를 대비해 면포 1000필씩에 해당하는 말을 5필씩 넘겨주기로 했다. 방법은 이곳에서 좋은 말 50필을 골라서 운반해 풍기의 동물농장에 판매하는 형식으로 면포로 바꾼다는 것이다. 모두 7명을 면천시켜야 되고 장가도 보내야 되니 상당히 많은 재물이 필요했다.
당초에는 측근들은 모두 사노비로 계속 부리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은 법에 의해 강제로 충성을 담보하는 행위다. 그러니 진심으로 대해 마음의 깊은 속에서 우러나오는 충성심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판단해 바꾼 것이다.
칠복이가 나서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대장님, 여진족 중에 쓸 만한 녀석들을 풍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떤가요?”
“왜? 간다는 놈이 있더냐?”
“예, 풍기에도 목장이 있다고 하니 그곳으로 가서 살고 싶다는 녀석도 있사옵니다.”
이런 건의에 최인범은 잠시 생각했다.
여진족인 청년들이 스스로 따라가길 원한다니 데리고 갈 수는 있다. 하지만 풍기라는 고장이 워낙 드세서 자신의 행적을 시시콜콜 따지는 양반들이 많았다.
그러니 범법 행위인 월경과 약탈한 증인에 해당하는 여진족을 굳이 데리고 가서 분란의 여지를 남길 필요가 없었다.
“그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 같으니 조금 시간이 지나서 이주민 중에서 완전히 조선말을 익히면 그때는 덕원부에 정착시켜 준다고 설득해.”
“알겠습니다.”
부의 집중은 관리나 또는 재산 증식에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나 만약을 대비하려면 자신의 재산은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최인범은 그런 부의 분산을 위해 덕원부에 별도로 목장이나 또는 농장을 만들 계획이다. 풍기에는 더 이상 투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풍기에 더 투자할 필요는 없어.’
풍기는 자신이 양자로 양반이 되었다는 이유로 시기하는 무리가 의외로 많았다. 물론 그에 반해 추종하는 무리도 많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보면 풍기에서 계속 재산을 불리거나 세력을 더 키우기는 곤란했다.
자칫 무장력을 지닌 부하들을 많이 데리고 있으면 역적모의한다는 누명을 쓰기가 딱이다. 사실 자신을 추종하는 여진족들 일부를 북쪽에 남겨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흑풍대가 잘하는지 모르겠군.’
흑풍대가 이도백하를 중심으로 계속 활동하면 여진족의 의심을 피하게 된다. 또한 조선의 조정에서 벌이는 의혹어린 눈초리도 피할 수 있기에 그렇게 조치했다.
더구나 조선 조정과의 관계가 너무 요상하게 꼬여버리면 그쪽으로 달아날 길도 있으니 아주 잘 처리해둔 대비책이다.
‘여차하면 도망칠 구멍은 항상 있어야 해.’
본시 아주 특별한 사연으로 조선시대로 떨어진 입장이다 보니 항상 조심스럽다. 더구나 왕조시대에서 군왕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다.
‘얼굴도 박색인 공주와 결혼하라고 강요하면 달아나 버리자고.’
물론 변명할 적당한 구실을 가지고 피해 버렸으나 그저 직급만 높고 아무것도 못하는 부마도위를 하기는 정말 싫었다. 공주가 불평하면 자유롭게 여행하기도 어렵다.
왕가 사람은 무슨 사업도 개인적으로 벌이기 어려운 처지고 벼슬에서 실직을 받지도 못한다. 공주의 남편인 부마도위야 말로 직급만 거창한 빛 좋은 개살구나 다름이 없었다.
‘새로 사는 인생 멋진 여자와 살아 보자고.’
여기서 멋진 여자의 기준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미모가 뛰어난 여자는 기본으로 정했다. 평생을 보면서 살아야 하니 제일 먼저 미모를 고려했다. 물론 싸가지 없는 성품인 여자야 질색이지만 미인이라고 모두 싹수가 없는 것은 아니라 일단 이렇게 기준을 잡았다.
‘조선의 공주는 미모가 별로 더라고.’
별로 잘 알지 못하는 공주들에 대한 상식이지만 꼭 그럴 것 같아 이렇게 판단했다. 그래서 자칫하면 죽어도 하기 싫은 부마도위로 진짜 낙점될까봐 한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