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산적들 사이에는 최인범을 ‘풍기 악귀’라고 칭했다. 그리고 산적들의 천적에 해당하는 그와는 절대로 맞서지 말자는 불문율이 정해졌다. 이런 소문은 산적들 사이에만 퍼진 것이 아니다. 백두상단을 통해서도 왈짜패나 일반 백성들 무당들 사이에도 널리 퍼졌다.
“풍기 악귀가 우리를 토벌하기 위해 나섰다면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야.”
“암! 납치된 여자들을 모조리 풀어주고 재물을 조금 놔두면 더 이상 우릴 추적하지 않으니 우리도 그렇게 처리해놓고 빨리 도망치자.”
산채를 발견하면 보초들의 목만 댕강 잘라서 사라지니 그것이 더욱 무섭다. 그래서 왕눈이가 알려준 그대로 납치해온 여자들과 약간의 재물은 놔두고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산적들도 최인범이 이끄는 부대가 일종에 용병처럼 재물을 벌거나 공적을 올리기 위해 동원되는 급조된 부대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들을 풀어주어 어느 정도의 공적을 올리게 해주고 재물을 적당히 남겨주는 타협점을 찾기로 한 것이다.
“어디로 가지?”
“왕눈이 패가 있는 월악산으로 들어가야지.”
“그 패거리들이 우릴 받아 줄까?”
“터줏대감이라고 우릴 안 받아 주면 그 패거리와 박이 터지는 전쟁이지. 지금은 우선 풍기 악귀부터 피하는 것이 최선이니 짐을 싸.”
어차피 허약한 여자들을 끌고 높은 산자락을 넘어 멀리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인정상 여자들을 데리고 가다가 중간에 떨어트릴 경우 자신들의 행적만 드러나게 된다. 그러니 모두 여자들을 버리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곳에 터를 잡은 지 오래되어 납치된 여자들의 몸에서 태어난 어린 자식들도 있었다. 산적의 자식이라도 모두 죽이지는 않으니 아이들도 그냥 놔두기로 했다. 앞으로 자신의 자식들은 평생 관노비로 살겠지만 아무튼 자신의 손으로 자식을 죽일 수는 없으니 이런 방법이 최선이다.
“서방님, 저도 데리고 가주세요.”
“안돼요. 나중에 저승에서나 만납시다.”
어찌 되었건 정을 붙이고 살던 여자들은 울면서 남편을 따라 간다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체력이 좋은 몇몇 여자만 남자들과 같이 떠나게 되고 대부분의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은 모두 남게 되었다.
“출발!”
우두머리의 명령으로 산적들은 빠르게 산채를 떠나 높은 산으로 향했다. 이제는 관군이 먼저 도착하느냐 아니면 자신들이 먼저 포위망을 벗어나느냐가 생사의 갈림길이다.
산적들이 모두 높은 산의 고개에 도착할 무렵. 산채 부근에 드디어 사나운 풍산개들이 몰려왔다.
컹! 컹! 월! 월!
칼등에 톱날이 달려 무섭게 생긴 장검을 든 최인범과 그의 부하들이 산채 입구의 높은 언덕에 도착했다.
“헉! 헉!”
숨을 헐떡이지만 여전히 주변을 삼엄하게 경계했다. 그들의 뒤를 따르던 포졸이나 장정 그리고 단양군수나 아전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워낙 빠르게 산길을 타고 풍산개를 따라 급하게 이동해 풍기군수가 이끄는 무리는 한참 뒤에 처져 버린 것이다.
“군수가 이끄는 무리는 우리들 발자국을 보고 잘 따라는 오겠지?”
“그렇겠죠.”
단양의 포졸 무리는 체력조건도 워낙 뒤떨어지지만 산적들이 너무 겁나서 슬며시 후방에서 따라오는 중이다.
최인범이나 부하들은 그런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전에 호랑이 사냥에서도 관아의 패거리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뒤에서 따라왔었다.
최인범 일행은 다소 높은 언덕에 올라와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산채에서 보초를 세우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지형 상으로 보아 반드시 보초를 세워야 되는 장소인데 보초가 없어 너무 이상했다. 부하들은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최인범의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산채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너무 좋은 곳이다. 배도치는 작은 움막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채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대장님, 어쩌죠? 우리가 먼저 산채의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나요?”
최인범은 어째 텅 비어있는 것 같은 산채를 자세하게 살피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잠깐. 기다려 봐. 보아하니 남자들은 모두 도망친 것 같아.”
최인범의 말에 배도치가 다시 자세하게 살피고 산채에 남자들이 보이지 않자 답했다.
“어라, 정말 그렇군요. 산채에 남자들은 전혀 보이지 않네요.”
일단 심한 교전은 없겠다고 판단한 최인범은 칠복이 형제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매복이 있는지 산채의 좌우를 수색해. 나머지는 사주경계하며 정면으로 들어가.”
“넷!”
풍산개들을 앞세우고 산채로 천천히 들어갔다.
골짜기에 널려 있는 작은 움막에서 여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꾸역꾸역 기어 나왔다. 그들은 매우 낙심하고 두려운 표정으로 산채의 작은 공간으로 옹기종기 모여 들었다.
“남자들은?”
“우릴 버리고 벌써 멀리 떠났어요.”
“언제?”
“이미 반나절이 지났어요. 아마 산 너머로 멀리 도망쳤을 겁니다.”
반나절이나 먼저 떠났다면 그들을 추적하는 것은 힘들었다. 이미 산을 넘어 멀리 사라진 것이 확실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주변을 살피다가 외곽을 수색하고 돌아 온 칠복이 형제에게 지시했다.
“발자국을 추적해.”
“넷!”
“추적해 봐서 따라가기가 어렵다고 판단되면 더 이상 추적하지 말고, 늦은 밤이 되기 전에 반드시 대강주막으로 돌아와.”
“알겠습니다.”
칠복이 형제에게 추적을 해보라고 지시하고 나서 그제야 여자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인원파악을 했다. 여자들은 모두 20명이고 아이들도 15명이나 되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어린 젖먹이들이다. 여자들은 40대부터 10대 후반으로 다양하고 얼굴도 천태만상이다.
‘이런 정도면 남자들인 산적은 적어도 30명 이상이 되겠어.’
일단 산채는 모두 불을 태워야 한다고 단양군수가 명령했으니 여자들에게 지시했다.
“옷이나 기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모두 챙기시오. 병사들도 같이 짐을 챙겨주고.”
“알겠습니다.”
산에서 내려가야 하니 많은 짐은 챙길 수 없었다. 당장 입어야 하는 옷이나 그나마 귀한 물건이라고 판단되는 것들만 챙겼다. 물론 먹고는 살아야 하니 식량들도 챙겨놓고 기다렸다.
움집들을 수색하던 배도치가 작은 보따리 하나를 가져와 남들은 보이지 않도록 슬며시 보여주며 말했다.
“소대장님, 이놈들이 목숨 값을 내놓고 갔네요.”
척보니 모두 금은 그리고 귀한 보석으로 만든 패물들이다. 도망치며 이런 귀한 물건을 일부러 흘린 것이 확실했다. 이런 것을 보며 최인범은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그러냐? 제법 머리도 있고 보기보다는 무척 약은 놈들이군. 우리보고 이것이나 받아먹고 더 이상 추적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야.”
“그러내요. 제가 잘 챙겨서 가지고 가겠습니다.”
배도치는 이렇게 말하고 작은 보따리를 자신의 품속에 슬며시 집어넣었다. 그런 배도치를 보며 최인범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동작도 빠르네.’
자신이 하기가 곤란하거나 너무 거북스러워해 어려워하는 이런 치졸한 행동들은 배도치는 스스로 알아서 척척 챙겼다.
세상이란 그저 밝고 깨끗하게 만은 살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나마 어두운 구석의 업무는 배도치가 알아서 적당히 잘 챙기고 있었다. 녀석은 최인범의 명령이라면 그 누구를 죽이라고 해도 거침없이 할 만한 심복이다.
최인범은 여자들에게 지시했다.
“여긴 이제 단양군수가 오면 움막은 모조리 불태우니 혹시 빠트린 중요한 것이 없나 살펴서 챙기시오.”
여자들은 모조리 불태운 다는 말에 급하게 움막으로 들어가 그나마 남은 살림살이들도 바쁘게 챙겼다. 남들이 보면 매우 하찮은 것들이지만 그녀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들이다.
한참을 기다리자 드디어 단양군수가 포졸, 아전들 그리고 장정들과 산채에 도착했다. 단양군수는 산채에 여자들만 있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
“최 사맹, 산적은 한 명도 잡지 못했나?”
“이미 남자들은 한나절 전에 산 너머로 모조리 도망쳤더군요. 우린 여자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아래로 내려갈 것이니 나머지는 군수께서 처리하세요.”
“알았네. 그럼 자네는 먼저 내려가게.”
“눈이 내리니 속히 내려오세요. 밤이 되면 길을 잃기 쉽습니다.”
“그렇게 하지.”
단양군수에게 속히 뒤따라 내려오라고 당부한 최인범은 산적 패거리의 아녀자와 아이들을 데리고 산채에서 떠났다.
최인범 일행이 산채를 떠나자 포졸들은 빠르게 움막에 불을 질렀다. 움막을 그대로 놔두면 또 다시 산적들이 모여들 것이라 파괴하는 것이다.
화르륵. 화르륵.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오르자 최인범은 이상하게 마음이 무척 아팠다. 비록 산적들이 사는 소굴이라 소각해서 처리하지만 뭔가 사람들의 삶을 잔인하게 파괴해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후우! 진짜로 큰 도적놈들은 한양에 다 모여 있는데.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지.’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움막들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보니 문뜩 이런 생각이 치밀었다.
천천히 산에서 내려오면서 최인범은 산적들을 쉽게 물리쳐 신이 나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왜지? 내가 무엇 때문에 신나지 않지?’
백삼수가 항상 하던 말이 생각났다.
‘아직도 백두산에서 하시던 동자공을 수련하세요?’하는 물음을 여전히 답하지 못하는 자신이다. 그런 이유는 이제 조금은 정확하게 알 것 같았다.
어찌 되었건 전생을 기준하면 어떤 삶을 살던 그들은 최인범의 조상님들이다. 그러다 보니 여자도 조금은 꺼리는 기색이 있었다.
또한 어떤 죄를 지었던 자신의 조상들이라 죽이거나 막 대하는 것이 조금 꺼리는 마음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후우! 그저 사는 정도로 정착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정신자세가 정착이 아직 안된 거야.’
자신이 어떤 성과를 이루어도 별로 흥이 덜 났던 이유를 이제야 정확하게 알았다. 그런 전생의 정신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여자들도 쉽게 접하지 못했다. 이미 접한 여자도 겨우 술이 취해서 엉겁결에 취했다.
‘이거야 말로 내가 적응해서 사는 게 아니야.’
그래서 문뜩 앞으로 조금 더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세계에서 확실하게 적응해 살아볼 생각이다.
‘그래, 삶이란 희로애락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 동안 너무 무의미하고 무척 건조한 삶을 살았어. 슬프면 슬퍼야 되고 기쁘면 기뻐야 되는 거야.’
이렇게 마음을 먹은 최인범은 그저 끌리는 그대로 젊은 아낙이 안고 등에 다른 아이를 업고 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머리에는 보따리를 지고 있었다.
최인범은 젊은 아낙에게 슬며시 다가가 말했다.
“아이는 내가 업고 가죠.”
“예? 나리 그게 무슨?”
“너무 힘들어 보이니 아니 하나는 내가 업고 간다고요. 그러니 아이를 넘겨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