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정적을 제거할 생각인 윤임 무리들이 음모를 은밀하게 꾸미는 것 같았다.
도박하다가 잡힌 윤태길이 포도청에서 헛소리하는 정보를 듣자 두 윤씨 형제와 연결시켜 보려고 뭔가를 획책하는 것 같았다.
단순한 도박 행위와 관료에게 뇌물을 준 혐의와는 전혀 다르다.
‘음! 의금부로 끌려가서 뇌물을 가져다 준 사실을 불면 사건이 더욱 커지겠어.’
그저 추측이지만 정황이나 역사적 사실로 볼 때 거의 확실할 정도로 분석해냈다.
어차피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면 한 달은 족히 결릴 일이라 도박하는 셈치고 과감하게 단언했다.
“진사 어르신, 서둘러야 합니다. 늦으면 아드님은 반드시 죽습니다.”
“뭐? 죽다니? 왜 죽는다는 건가?”
최인범은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이번 사건을 판단해보니 아드님이 윤씨 형제에게 바친 뇌물의 증좌를 의금부에서 찾아내게 되면 아드님이야 죽게 됩니다.”
“뭐라? 죽는다고?”
윤 진사는 눈이 동그래지면서 놀라고 말았다. 그런 윤 진사를 바라보며 속으로 ‘너는 이제 내 밥이다.’하며 자세하게 설명했다.
“진사 어르신. 제가 보기에 아드님이 윤씨 형제에게 뇌물을 준 증거나 자백이 없어도 반드시 어떤 식이라도 죽게 됩니다.”
“이래저래 죽는다니?”
“진사 어르신, 또한 아드님이 자백해도 윤임 일파들은 중전마마께서 나중에 친정의 형제분들을 탄핵하기 위해 모략했다고 보복할 것을 대비해서라도 자백 사실을 번복이 가능한 아드님을 죽이게 됩니다.”
계속해서 아들이 죽는다는 말에 윤 진사는 얼굴색이 하얗게 변하며 더욱 놀라고 말았다.
“죽다니?”
“그렇습니다. 아드님이 연루되면 두 윤씨 형제는 귀양살이를 더 오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의금부로 끌려가면 어떤 패거리의 농간이라도 반드시 죽게 됩니다.”
이런 냉철한 분석에 윤 진사는 눈이 더욱 동그래지며 놀랐다. 약간 늘어진 볼 살이 부들부들 떨렸다.
윤 진사는 혹시 해서 한양에서 내려온 머슴인 조도칠에게 급히 물었다.
“지금 중전마마 친정의 형제분들은 어디에 있냐?”
“소인이 잘은 모르나 들리는 이야기로는 의금부 옥사에 갇혀 있다고 하옵니다.”
“뭐? 그게 정말이야?”
“예. 소인이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이런 조도칠의 대답에 윤 진사는 머리가 띵하며 현기증으로 눈앞에서 아주 작은 별똥별들이 어른거렸다. 상황이 실제로 이러하고 최 진사의 설명을 들어보니 어떤 쪽이라도 아들은 꼼짝 없이 죽이게 생겼다.
죄를 자복하라고 고문당하다가 죽거나 또는 자복하지 못하게 죽여 버릴 수도 있었다. 또 자복한 이후에도 나중에 조작이 드러날까 염려해 죽일 수도 있으니 이래저래 아들은 이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윤 진사는 너무 두려워서 덜덜 떨렸다. 어떻게 얻은 아들인데, 노름하다가 잡혀서 끔찍한 고문 끝에 죽게 생겼다. 윤 진사는 재물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다. 하지만 하나뿐인 아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으니 너무 다급했다.
윤 진사는 급하게 매달렸다.
“최 진사, 내 아들 좀 살려주시오. 뭐든 원하는 것은 다 들어드리리다.”
“전 재산을 준다고요?”
“그렇소?”
진사에 불과한 자신에게 이렇게 절실하게 매달리는 것으로 보아 윤 진사는 재물만 많지 중앙에 배경은 전혀 없는 위인이 틀림없었다. 하긴 그러니 많은 재물을 가지고도 혼탁한 조선시절인 지금 허접한 벼슬자리 하나도 차지 못했다.
이렇게 분석만 했지 당장 해결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신이 나서서 해결해 준다고 나섰다가 일이 틀어지면 앞날만 자칫 심하게 꼬이게 생겼다. 그래서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둔한 제가 무슨 방법이 있나요. 저는 재물도 없고 배경도 전혀 없어서 계책이 있더라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적당히 한 발은 빼놓는 수작을 걸었다.
이런 말에 윤 진사는 눈빛을 반짝였다.
‘이 놈의 말하는 투로 보아 분명히 방법이 있어.’
많은 재물을 모은 사람이 바보일리는 없었다. 남다른 재주가 있고 나름 판단력도 빠르고 과감한 결단력도 있어야 많은 재물을 모을 수 있다.
윤 진사는 선친에게 유산으로 물려받은 재물은 젊어서 주색잡기로 거의 대부분을 탕진했었다. 그 후에 다시 유산의 두 배 이상으로 새롭게 재물을 모은 인물이다. 들어보니 방법은 분명 있지만 재물이 문제라는 소리다.
살릴 계책이 있다는 최인범의 조부가 사헌부 지평이란 벼슬을 했으니 아무래도 한양에는 아들을 살릴 수 있는 연줄이 분명 있다고 판단되었다.
‘친가가 없으면 외가라도 있겠지.’
이렇게 판단한 윤 진사는 과감하게 보다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최 진사, 내 재산의 반이라도 달라면 주겠소. 그러니 아들만 살려주시오.”
“예? 재산의 반을 저에게 쓰시겠다고요?”
“그렇소!”
전에는 반말 비슷하게 하더니 얼마나 다급한지 약간 경어를 쓰고 있었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소리다. 그러나 다시 되물었다.
“진사 어르신, 재산의 모두는 아니고요?”
“뭐요? 내 재산의 모두가 필요하다는 거요?”
이런 반문에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제 이야기는 그만한 각오는 하시라는 겁니다. 자칫 일이 틀어지면 아들의 목숨은 물론 역적으로 몰려 가문 자체가 풍비박산 난다는 뜻입니다.”
“그렇군.”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어디 역적이 꼭 역적질을 해서 역적인가? 왕권국가에서 세력다툼이나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역적으로 몰려 죽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아무튼 역적 소리에 윤 진사는 더욱 다급해졌다. 망나니의 무서운 칼날이 아들의 목덜미에서 날름거리는 장면이 저절로 연상되니 식은땀이 저절로 흐르고 있었다.
다급해진 윤 진사는 최인범의 응수에 아들이 살아날 방법은 있다고 판단해 제안했다.
“좋소! 아들만 무사하다면 내 재산의 모두를 달라면 주겠소. 그 대신 내 요구를 하나만 들어 주시오.”
“요구요?”
“그렇소. 내가 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재물을 다 버리면 재산을 물려받지 못한 딸이 큰 문제가 되니 그때는 그 딸을 책임져 주면 되는 거요.”
“따님을 책임지라고요?”
“그렇다네.”
이런 윤 진사의 제안에 아주 능구렁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와중에도 수를 쓰는군.’
결국 지금의 제안은 재물은 못주고 딸이나 가져가라는 뜻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달리 생각하면 아들을 구할 능력이 있다면 재주가 비상하니 대릴 사위로 삼겠다는 뜻으로도 해석됐다. 아무튼 재물이야 필요하지만 조금 요사해 보이는 딸을 원하지는 않으니 다른 방식으로 말했다.
“저야 그저 방법만 말해주는 거지 실행은 다른 사람이 해야 합니다. 저는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으니 진사 어르신께서 잘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알겠소. 그럼 어떤 사람이 필요하오?”
대화 도중에 이미 방법을 생각해 두고 있으니 쉽게 결정을 내려 주었다.
“우선은 말을 잘 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글공부를 조금 한 사람도 따로 필요하고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두 믿을 수 있어야 됩니다.”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하자 윤 진사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사람만 있으면 되는 거요? 그런 사람은 이미 있으니 염려 마시오.”
“표시가 나지 않는 재물도 많이 필요합니다. 거래 증거가 남는 표 나는 재물이 아니고 흔적 없이 사용하기 좋아야 합니다.”
최인범의 말에 윤 진사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너무도 쉽게 대답했다.
“알겠소. 그럼 작은 금이나 은으로 준비하면 되겠군.”
“급하니 서둘러야 합니다.”
윤 진사가 추천한 한양으로 갈 사람은 착호갑사를 따라 다녔다는 큰 마름인 임영팔이다. 그리고 글을 써야 하는 사람으로는 박 초시가 나서게 됐다.
윤 진사는 필요한 재물을 준비해야 한다면서 사랑방에서 급하게 나갔다.
“내가 잠시 어딜 좀 다녀옴세.”
“그렇게 하세요.”
박 초시만 남게 되자 부드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초시어르신은 제가 불러주는 그대로 정난정이란 여인에게 보낼 서찰을 쓰세요.”
“정난정요?”
“예. 그 여인에게 서찰을 쓰시면 됩니다.”
이렇게 말하자 박 초시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여자가 도대체 누굽니까?”
그저 흘리듯이 답해 주었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아녀자의 이름이니 모르시는 것이 당연하죠. 신경 쓰지 마시고 제가 불러주면 잘 정리해서 서찰을 쓰세요.”
“진사님께서 서찰을 직접 안 쓰시고요?”
“저는 작년에 한양으로 가서 진사시를 봐서 곤란해요. 한양에는 제가 쓴 글씨가 여기 저기 많이 남아 있어요. 잘못해 저도 연루되면 일이 틀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겠군요.”
박 초시에게 이렇게 구구하게 설명했지만 진짜는 다른 이유 때문이다. 실제로는 자신의 한문 실력이 미천해 이런 술수를 쓰고 있었다. 직접 서찰을 쓰기가 어려운 한문 실력이니 이런 식으로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이다. 더구나 언문 서찰도 자신은 쓸 수 없는 처지다.
또한 약간은 개인의 명예도 생각했다. 후대에도 조선을 어지럽힌 타락한 여성으로 평가 받던 정난정과 결탁한 사실을 흔적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뭐! 치사해도 할 수 없지.’
한양에 있는 윤원형의 첩인 정난정에게 보내는 서찰에 쓸 내용을 나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아직은 정난정이란 인물이 조선팔도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윤원형의 권세가 그리 크지 않고 그의 첩실에 불과한 여인을 남들이 주목할 리가 없었다.
다른 것 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정난정이 정말 미인인지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라는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혹시 직접보고 너무 실망스러우면 안 보니 만 못하지.’
대략 자신의 조선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역사적인 기록이 현실에서는 똑 같을 수 없는 노릇이라 장담하기는 곤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