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임트레인-16화 (16/519)

16화

아이들이 들고 있는 감은 자신이 보기에 아주 작은 감들이다. 아마도 품종 개량이 전혀 안 되어 저런 작은 감이 보편적으로 재배되는 것 같았다.

잠시 뒤에 6-7세 가량 되는 사내아이가 손에 커다란 홍시를 들고 와 큰 목소리로 신이 나서 자랑했다.

“봐라! 내 감이 제일 크지?”

사내아이의 말에 감을 가지고 크기를 다투던 아이들이 모두 감탄했다.

“와! 정말 크다. 너 이 감 어디서 땄어?”

“우리 아버지가 먼 산으로 나무하러 갔다가 따온 감이야.”

“진짜로?”

“응! 그런데 호랑이 때문에 겁나서 못 가게 됐어.”

이렇게 말하는 사내아이의 말에 최인범은 눈빛을 빛냈다.

조선시대에는 작물에 대한 품종 개량의 개념이 별로 없던 때다. 그러나 조선에 있는 작물 중에서 변종처럼 아주 우수한 품종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우수한 품종을 대량으로 이식하거나 또는 접목해 집단으로 재배한다면 돈을 벌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좋았어! 내가 그나마 조금 아는 농업기술이라도 그것을 이용해 돈을 벌어 보자고.’

산업 중에 제일 발전 속도가 느린 1차 산업인 농업을 통한 돈벌이를 구상했다. 농업을 통한 돈 벌이를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과, 배, 감 그리고 나중에는 인삼재배 등도 생각났다.

모두 자신이 조금은 해보던 것들이다. 물론 별로 큰돈을 벌어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여기서는 통할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들었다.

‘내가 아는 농법으로 재배하면 여기서는 첨단 농법이야.’

그러나 그런 사업을 하자면 우선 많은 토지가 필요했다. 또한 농사를 지어야할 인력도 충분하게 있어야 한다. 인력이 부족하면 축력을 이용해야 하니 사실 자금이 많이 든다. 이런 정도까지 생각이 떠오르자 결국 재력이 또 문제다. 자금 조달 문제가 생기자 은행이 떠오르고 담보물이 없으니 대출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휴! 은행을 털 수도 없고.’

무심코 은행을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은행에서 대출을 받거나 턴다는 발상을 떠올리는지 너무 어이가 없었다.

아직도 현실을 완전히 직시하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이제 과거의 잔상에서 빨리 벗어나야 살길이 나온다. 그래서 쓸 때 없는 잡념보다는 하시라도 빨리 여기의 생활 모습을 살펴서 적응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아주 천천히 남이 눈치 채지 않도록 조심하며 마을을 돌아다녔다. 농가를 기웃거리며 외양간이나 농기구가 있는 헛간 그리고 부엌도 살폈다.

그저 겉으로 보아서는 별로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양반 체면을 버리고 기웃거렸다. 그러자 집안에 있던 아낙네들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저 양반이 왜 여기를 와서 살펴?”

“아직 나이가 어리시니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가 보지.”

“볼 것도 없는데 자세히도 살피네.”

돌아다니며 구경한 농가의 삶은 그가 그동안 알고 있던 것보다 더욱 열악했다. 민속박물관이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조선의 생활 모습은 대부분 조선 후기가 분명했다.

농기구도 대부분 나무이고 흔하던 놋그릇은 백성들의 삶에는 보물급에 해당됐다. 처음에는 그저 구경만 하다가 만만한 아낙네나 사내를 만나면 묻기도 했다.

물음이야 매우 다양했다.

소의 시세, 장정의 하루 품삯, 논이나 밭의 시세, 목수의 품삯, 농기구 가격 등 그가 알고 싶은 것은 너무도 많았다. 처음에는 화폐가치로 계산을 해보고 또는 쌀로 계산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그러나 품목이 점점 많아지자 완전히 흐리멍덩해졌다.

사업이고 나발이고 당장 하루하루의 생활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너무 힘들어 보였다.

쉬워 보이는 문제가 너무 어렵게만 느껴졌다. 이런 상태로 사업을 벌이면 남에게 사기 당하기 십상이다. 물론 사업 벌일 재력도 없지만 설사 있더라도 문제다.

‘쩝! 이거 적응하기가 힘들겠어.’

더구나 어떤 사람은 같은 물건을 두고 미곡으로 계산해 말했다.

어떤 사람은 면포로 계산해 답하니 더욱 혼란스럽다. 화폐사용에 익숙해 하나하나가 암호 풀이와 같이 복잡할 뿐이다. 더구나 척관법을 사용하니 혼란 정도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무튼 제일 난감해 보이는 것은 지금은 화폐가 전혀 유통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이미 역사적 지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참으로 난형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썩을 것들······. 왕이나 고관대작이란 놈들은 도대체 뭐를 한 거야? 이런 것이라도 해두고 물 말아 먹던 말든지 하지.’

조선 전기에 화폐를 발행해 사용하려고 시도는 여러 번 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나중에야 상평통보를 만들어 보급해 어느 정도 유통이 되었지만 조선 말기까지 면포나 미곡이 화폐구실을 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하나라도 더 배우려 노력했다. 학문에 자신이 없고 무력에 자신이 없으니 결국 자신이 갈 길은 한 가지뿐이다.

‘어떤 방법을 구상하던 재물을 벌어야 해.’

흔히 재물만 많으면 저승사자도 부린다니 일단 돈을 많이 벌기로 작정했다.

자신이 아직 어리지만 수족처럼 부릴 부하에 해당하는 행랑아범 부부가 있었다. 머리만 잘 쓰면 뭔가 좋은 사업 거리를 찾을 것 같았다.

적응만 된다면 자신이 뒤에서 조정하고 누군가 이용해도 된다.

마을을 어느 정도 돌아보았다고 판단했다. 그러자 사랑방에서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윤 진사도 그렇지만 박 초시도 정직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바둑 실력을 속이고 내기바둑으로 쌀을 챙기니 호감이 조금 사라졌다. 그러나 약간의 실망감이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박 초시는 농사를 지을 토지도 없고 힘도 없는 늙은 몸이다. 그러니 그런 방법이 유일한 호구지책이라고 생각하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돈이 전혀 없는 신세였다면 영주기원에서 박 초시처럼 행동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좋은 것이 좋다고 생각하며 윤 진사 댁으로 가는 그의 눈에 마을로 급하게 뛰어오는 떠꺼머리총각 녀석이 보였다.

다다다다.

시쳇말로 다리사이에서 뭐가 떨어질 정도로 급하게 내달려 마을로 다가왔다. 너무 급하게 달리다 보니 논두렁에서 고꾸라지기도 했다.

‘무슨 일이지? 호랑이가 나타났나?’

호기심이 생겼으나 남의 일에 관심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천천히 윤 진사 댁으로 향했다. 총각은 빠르게 마을로 오자 윤 진사 댁으로 들어갔다.

윤 진사 댁으로 뛰어 들어간 총각은 사랑채 앞에서 숨을 헐떡이다가 조금 진정되자 크게 외쳤다.

“진사 어르신! 소인 도칠이옵니다. 큰일 났어요.”

그러자 사랑방 문이 와다닥 열리며 윤 진사가 밖을 바라봤다.

안마당에 서서 읍소하고 있는 녀석은 한양에서 아들이 데리고 있는 머슴인 조도칠이다. 그런 그가 여기로 왔으니 너무도 이상했다.

조도칠이 풍기로 내려오는 이유는 아들이 재물을 보내 달라고 연락하기 위해서다.

벼슬자리를 사기위해 선을 댄다는 윤씨 형제가 귀양을 가게 생겼다는 소리를 조금 전에 이미 들었다. 그동안 보낸 재물이 다 날아가 버렸다는 뜻이라 짜증이 나서 신경질적으로 호통 쳤다.

“네가 웬일이냐? 여길 다 오고.”

“진사 어르신! 서방님이 포청으로 끌려갔어요.”

“뭐?”

귀한 아들이 포도청에 끌려갔다니 윤 진사는 누가 들을세라 급하게 지시했다.

“안으로 들어와서 자세하게 말해.”

“예이!”

조도칠은 눈치를 보며 사랑방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윤 진사는 사랑방으로 들어온 조도칠로부터 아들인 윤태길이 보낸 언문 서찰을 받았다.

서찰의 내용은 자신이 억울하게 포도청에 잡혀있으니 손을 써서 빼달라는 것이다. 무슨 죄로 끌려갔는지 내용은 전혀 없었다.

윤 진사는 아들의 행동을 어느 정도 짐작해 추궁했다.

“또 투전하다가 포교에게 잡혔냐?”

이렇게 정확하게 묻자 조도칠은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답을 못했다.

투전판에 같이 갔던 터라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답은 해야 하니 조도칠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인은 잘 모르고 들리는 이야기로는 그런가 하옵니다. 그런데 문제가 조금 심각하옵니다.”

“뭐가 문제야? 벌금을 물고 포청에 뇌물 좀 쓰면 나오는데.”

“진사 어르신. 이번에는 그게 잘 안되게 됐습니다. 전에는 중전마마 남동생 분을 거론하면 그냥도 풀렸는데 그것이 더 이상하게 되어 잘못하면 의금부로 끌려가게 생겼답니다.”

한양의 포도청(捕盜廳)은 보통 일반 범죄를 다룬다.

의금부(義禁府)의 경우 왕권에 도전하거나 또는 국왕의 명령에 의해 조사되는 범죄를 다룬다. 그래서 대부분 양반이 저지른 범죄행위는 의금부에서 다루고 있다.

일반 잡범에 해당하는 도박은 벌금만 내면 되는데 다소 이상했다. 더구나 양반이지만 초시도 못한 아들을 의금부에서 압송해 갈지 모른다니 일이 요상하게 됐다.

상황이 어떤지 전혀 모르니 참으로 난감하고 귀한 아들이 포도청에서 문초를 받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먼 한양에 자신이 노구를 끌고 가기도 어렵다. 젊어서 호색한 죄가 이제야 나타나는 것인지 아무리 보약을 먹어도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왕복하려면 한 달은 걸리는 한양을 가다가는 객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윤 진사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밖에 있던 최인범이 슬며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방안 한쪽에 조용히 앉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사 어르신, 본의 아니게 밖에서 아드님의 일에 대해서 듣게 되었는데, 아드님이 왜 의금부로 압송될 위기에 닥친 것인지 짐작이 갑니다.”

난감한 상황에서 이런 소리를 듣자 윤 진사는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귀신도 아니고 신통력이 있는 사람인가? 어찌 한양에서 벌어진 일을 알 수 있단 말인가?

너무 막막하던 처지라 일단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고 싶었다.

“자네가 알 것 같다니 어서 말해보게.”

윤 진사의 독촉에 뜸을 들이며 잠시 생각했다.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듯이 뭔가 혼자 중얼거렸다. 역사책이나 혹은 야사 그리고 드라마에서 보았던 사실을 곰곰이 생각하며 기억을 떠올려 연도를 따졌다.

살자고 해서 그러다 보니 흐릿하던 사실도 또릿하게 떠올랐다.

‘드라마나 역사책 내용과 비슷할까?’

사업자금도 필요하고 또한 재물이 많은 윤 진사를 어떤 식으로라도 이용할 요량이다. 그래서 이런 일이 절호에 찬스라고 판단해 뭔가 구상했다.

아직은 중종시대니 문정왕후의 힘이 다소 약했다.

그리고 친정식구인 윤원형이나 윤원로가 크게 권세를 부리지는 못했다. 분명 자신이 예측한 그대로 두 형제가 지금 의금부로 끌려가 있는 상황이 분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