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힌 왕자님-23화 (23/24)

외전 1. 아스터의 즉위 (3)#키쿠절갠

베스나 신전에서 출발한 새로운 국왕 부처가 왕궁에 도착하자 이미 전갈이 갔었는지 시종관이 가장 먼저 달려 나왔다.

왕궁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새 국왕을 맞이하기 위해 질서정연하게 나와있었다.

아스터는 마리안과 함께 그들의 축하 인사를 받으며 왕세자궁으로 갔다.

당장 내일 궁을 옮기겠다며 어떤 방을 사용하고 싶은지 말해달라고 달라붙는 시종관을 간신히 물리치고 난 뒤에야 아스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정말 긴 하루였어.”

아스터의 목소리는 조금 지쳐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스터는 오늘 정말로 힘든 하루를 보냈다.

아침 사냥을 위해 새벽 4시에 기상한 이래 마리안과 함께했던 오전 중의 아주 잠깐을 제외하면 제대로 휴식조차 취해보지 못했다.

“마리도 많이 힘들…….”

신성력의 가호를 받는 자신마저 이런 지경이니 마리안은 얼마나 피곤할지 걱정스러워서 돌아보던 아스터는 말을 마저 끝맺지 못했다.

침실 한쪽 벽에 놓여있는 기다란 의자 등받이에 기댄 마리안이 새근새근 숨을 몰아쉬며 잠들어 있었다. 침실에 들어오는 순간 졸음을 이겨내지 못한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해서 아스터는 잠들어 있는 마리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한참이나 마리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마리안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아무래도 아스터가 즉위한 덕분에 마음 한구석의 짐을 덜었기 때문일 것이다.

왕세자가 된 이후 아스터의 자리가 위태로웠던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클로타르를 몰아내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아스터가 헤쳐 나가야 할 난관은 수없이 많았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마리안이 내심 마음을 졸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스터가 몰랐을 리 없었다.

“마리, 나는 이런 날이 오다니 꿈만 같아.”

아스터는 잠든 마리안이 깨지 않도록 속삭이듯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로 아스터는 해와 달의 성역에서 나온 이래 계속 꿈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마리안이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아주지 않았다면 아마 몇 번이나 자신의 팔이나 뺨을 꼬집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아무도 우리를 괴롭히지 못해.”

아스터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내 눈을 뜨고는 잠든 마리안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그녀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마리안의 잠든 얼굴과 평온한 숨소리가 흥분으로 세차게 뛰고 있던 아스터의 가슴을 진정시켜 주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마리안이 가슴을 졸이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두 번 다시 그들을 방해하고 떼어놓으려 할 수 없다.

사실 지난 2년 동안 아스터는 그와 마리안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은근한 견제를 여러 차례나 겪었다.

왕비와 클로타르와 한편인 무리들이 공격할 대상을 마리안으로 잡고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러나 마리안은 그 모든 공격을 의연하게 이겨냈다.

‘신경 쓸 거 없어요.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우리를 괴롭힌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행동에 전전긍긍할 날이 오겠죠.’

아스터는 새삼 그런 마리안이 고마웠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그녀를 바라보면서 전에 없는 애정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마리안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스터는 그녀를 바라보는 자신의 입꼬리가 조금씩 위로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살짝 손을 뻗어 마리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장미 꽃잎 같은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오늘 아침에 잠든 그녀를 봤을 때도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을 살살 핥자 마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졸린 나머지 눈도 뜨지 못하면서 웃어주는 그녀의 반응이 기뻐서, 아스터는 좀 더 마리안을 끌어당겼다.

“응…….”

마리안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손을 뻗어 아스터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많이 졸려, 마리?”

“조금……. 아스터는 피곤하지 않아요?”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묻는 마리안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아스터가 대답했다.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그의 입술이 다시 한번 마리안의 입술 위에 닿았다.

“지금은 마리랑 하고 싶어.”

어딘가 절박함이 느껴지는 그 말에 마리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 아스터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느릿하게 나타나는 광경을 황홀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침실의 조명은 살짝 어두워서 마리안의 눈은 밤바다처럼 깊고 짙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졸음이 가시지 않아 잠시 몽롱하던 그녀의 눈은 자신을 열렬하게 바라보는 아스터의 눈빛에 차차 선명해졌다.

“미안해, 마리. 너무 졸리면 그냥 자도 좋아.”

자는 사람을 끝내 억지로 깨워놓고 할 말은 아니었지만, 아스터는 마리안이 너무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러자 마리안이 웃었다.

“졸리긴 하지만 그냥 자는 게 아쉽긴 하네요.”

마리안은 손을 뻗어 아스터의 이마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머리카락 한 가닥을 넘겨주며 그의 눈을 응시한 채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좀 특별하잖아요, 국왕 전하.”

“내 마음을 받아줘서 기쁩니다, 나의 왕비 전하.”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말한 뒤 함께 웃었다.

“즉위를 축하해요, 아스터.”

“고마워, 마리.”

아스터는 마리안의 입술에 다시금 키스했다. 이번에는 상당히 깊고 진한 키스였다.

그는 마리안의 아랫입술을 살살 핥고는 그녀가 살짝 입술을 벌린 틈을 파고들었다.

“으응…….”

마리안이 한숨처럼 작은 소리를 냈다.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열정적인 키스였다. 아스터는 마리안의 혀를 살짝 깨물고는 적극적으로 그녀의 혀에 자신의 것을 감았다.

왕세자의 자리에 오르고 석 달 뒤에 바로 마리안과 결혼식을 올린 뒤로 아스터는 매일매일 마리안에게 키스했다. 하지만 아무리 키스해도 질리는 일 따위는 없었다.

마리안에게서는 언제나 달콤한 향과 맛이 났다. 그녀의 달콤함은 결코 몸에 바른 향유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 키스가 깊어질수록 그 달콤한 향내와 단맛은 더욱 짙어졌다.

아스터는 헐떡이면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었다. 약간 몽롱한 기분마저 드는 것이 마치 꽃향기에 취한 꿀벌이라도 된 것 같았다.

살짝 입술을 떼자 마리안이 가슴을 들썩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전에 없이 선명하게 반짝였다.

그 푸른 바다 같은 눈동자가 상당한 열기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아스터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눈을 보며 아스터는 문득 말했다.

“사랑해, 마리.”

꽤나 뜬금없는 갑작스러운 고백이었지만 마리안은 마주 웃어주며 대답했다.

“사랑해요, 아스터.”

말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다시금 아스터의 목덜미에 팔을 감으며 매달려 왔다.

“다시 키스해 줘요.”

이번에는 마리안이 직접 아스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파묻었다.

아스터의 두 팔이 자신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쳐주는 것을 느끼며 마리안은 그에게 아까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아스터로서는 마리안의 몸을 좀 더 가까이 끌어안은 채 키스하는 셈이었다. 자연히 몸이 한층 더 뜨거워졌다.

더욱이 마리안은 이제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손을 풀고는 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 나긋나긋한 손길만으로도 아스터는 자신의 전신에 뜨거운 불길이 휩쓰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스터는 더욱 마리안에게 파고들었다. 삼켜버릴 듯이 그녀의 입술을 물고 강하게 그녀의 혀에 자신의 것을 얽었다.

“으응…….”

키스가 깊어질수록 마리안의 목에서 작게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아스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마리안은 숨을 몰아쉬며 아스터의 가슴을 살짝 밀어냈다.

“…숨이 막혀요.”

그렇게 말하는 마리안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의 손이 한결 더 뜨거워진 것을 느끼며 아스터 역시 달아오른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

그러자 마리안이 살짝 눈을 흘겼다.

“그런 건 하나하나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달뜬 숨을 내뱉는 마리안의 입술은 평소보다 훨씬 고혹적인 붉은색이었다.

그리고 마리안의 가슴은 아까보다 훨씬 격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날씨도 더워졌는데 옷이 몸을 너무 조이고 있잖아. 이쪽으로 와, 마리. 옷을 벗는 게 좋겠어.”

아스터는 그런 마리안의 입술에 한 번 더 짧게 입을 맞춘 뒤, 그녀의 드레스를 벗기기 시작했다.

“허리 살짝 들어봐.”

그는 이제 상당히 빠르게 드레스의 장식 단추와 끈을 풀기 시작했다.

“능숙해졌는데요.”

“이제는 능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마리안의 칭찬에 아스터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왕궁에 들어오면서 옷차림이 훨씬 화려해지는 바람에 옷을 입고 벗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 두 사람이었다.

평소에야 시중을 드는 사람이 여럿 달라붙어 옷을 벗기고 입혔으니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둘만의 시간을 보낼 때는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들은 거추장스러운 짐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나 마리안의 화려한 드레스가 문제였다. 모양을 내기 위해 억지로 몸을 졸라매는 것들이 많아서 키스하던 도중에 마리안이 숨이 가쁜 나머지 기절할 뻔해서 아스터가 경악한 일도 있었다.

아스터는 그 뒤로 마리안이 과하게 몸을 졸라매는 옷을 입지 못하게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리안의 옷을 벗기는 일은 전에 비해 복잡하고 힘들었다.

여자 옷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남자의 옷도 복잡하고 화려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마리안도 처음에는 아스터의 옷을 벗기는 데 꽤 애를 먹었다.

하지만 이제는 두 사람 다 제법 요령이 생긴 참이라 지금 아스터는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능숙하게 마리안의 옷을 벗길 수 있었다.

“마리가 요즘 힘들어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아.”

“어째서죠?”

마리안이 옷을 벗기기 편하도록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묻자 아스터가 한숨을 쉬었다.

“날이 더워졌는데 옷이 여전히 너무 두껍고 무겁잖아.”

“그건 아스터의 옷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해요. 한여름이 문제죠.”

“마법으로 좀 더 시원하게 하는 방법을 고안해 봐야겠어.”

아스터의 말에 마리안이 웃었다.

“그건 정말로 기대가 되네요, 국왕 전하.”

“그나마 우리 대관식은 한겨울에 치러질 것 같아서 다행이네.”

그 말에 마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터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낸 탓이었다.

“그러네요. 더운 것보다야 추운 게 낫죠.”

지금부터 6개월쯤 뒤라면 다행히 한겨울이었다.

대관식이야말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날이라 그 날 입을 옷은 엄청나게 화려하고 복잡할 게 뻔했다. 왕궁 안에 걸려있는 역대 국왕의 대관식 장면을 묘사한 초상화만 봐도 질릴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옷을 준비하는 데만 반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호화로울지 막연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당장 내일부터라도 한여름과 한겨울에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마법을 고안해야겠어. 시르안이랑 위르나에게도 도와달라고 해야지. 지금까지는 괴롭고 힘든 대관식을 치렀는지 몰라도 우리는 화려하면서도 쾌적한 대관식을 치르도록 하자고.”

“겨울 의상이니까 실용성을 추구해서 조금 간소화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건 안 돼.”

뜻밖에도 단호한 아스터의 대답에 마리안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까지 아스터가 마리안의 제안에 이렇게 바로 안 된다고 말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대관식을 간소하게 할 생각이 없어, 마리. 오히려 이전보다 더 화려하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야. 이건 보여주기 위한 행사니까. 앞으로 르샤베의 국왕이 누구인지 사람들에게 각인시켜야 해.”

“아…….”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아스터가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고 해도 클로타르가 살아있는 이상 여러 가지 의혹이 한동안 계속해서 떠오를 것이다.

“대신에 어떻게든 마법을 연구해 볼게.”

마리안은 피식 웃었다.

“괜찮아요. 한여름에 모피를 두르라고 해도 씩씩하게 입고 버틸 거니까요. 게다가…….”

마리안은 정말로 씩씩하게 말했다.

“새로운 국왕 전하의 왕비가 어떤 사람인지 저도 당당하게 보여줘야겠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왕비 전하.”

그 말에 아스터는 활짝 웃었다. 그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한 얼굴로 마리안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이제 속살이 드러난 그녀의 속옷 사이로 슬며시 손을 밀어 넣었다.

그 바람에 마리안은 여전히 달아오른 얼굴이 좀 더 붉게 상기되는 것을 느꼈다.

아스터의 손은 상당히 뜨거웠지만 그래서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리안은 아스터의 손이 뜨거워서 좋았다. 자신을 이토록 원하는 그의 진심이 이 온도로 표현되는 것 같아서였다.

아스터의 손길이 마리안의 매끄러운 피부 위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마리안은 가슴을 더듬으며 그녀의 목덜미에서 쇄골로 그리고 가슴으로 입술을 옮기는 그의 뜨거운 숨결에 숨을 삼켰다. 그 접촉만으로도 그녀는 벌써부터 몸의 깊숙한 안쪽이 젖어 드는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아스터가 그녀를 원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그를 원하게 되는 마리안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방금 전 마리안의 옷을 벗기면서 함께 자신의 옷을 벗은 아스터의 가슴 위를 손끝으로 살며시 더듬었다.

얇은 셔츠 한 장을 남겨둔 그의 가슴 위로, 이제는 앙상하게 마른 대신 제법 근육이 잡힌 윤곽을 따라 손을 옮기고, 단추가 하나 풀려 벌어진 틈 사이로 밀어 넣었다.

아스터가 마리안의 몸을 만지며 그 부드러운 촉감에 기뻐하는 것만큼이나 마리안 역시 아스터를 만지는 순간이 좋았다. 그녀의 뺨이 앞으로의 쾌락을 상상하며 좀 더 붉게 달아올랐을 때였다.

“아!”

아스터의 뜨거운 입술이 간신히 드러난 마리안의 맨 가슴을 베어 물었다.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몸을 떨었다.

아스터가 그녀의 가슴을 베어 문 것으로도 모자라 도드라진 유두를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그것만으로도 단전 안쪽에 열기가 치솟는 느낌에 마리안은 전율했다.

아스터의 애무는 늘 그렇듯 부드러웠지만 강렬했다. 그의 손이 가슴을 움켜쥐거나, 뜨거운 손끝이 이미 단단하게 달아오른 가슴의 정점을 마찰할 때마다 마리안은 숨을 삼켰다.

이제 마리안에게는 아스터의 손길이 무척 익숙했는데도, 이런 순간 몸에 닿는 아스터의 뜨거운 손길에는 정신없이 가슴이 뛰었다.

“흣.”

더욱이 아스터는 이제 마리안이 잘 느끼는 곳이 어디인지 전부 알고 있었다.

“마리, 사랑해.”

귓가에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며 가슴을 어루만진 남자의 손길이 유두를 간질이자 마리안은 작게 신음했다.

목덜미에 닿는 아스터의 숨결이 뜨거웠다. 그리고 마리안은 자신의 호흡도 꽤나 뜨겁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한참이나 가슴을 어루만지던 아스터의 손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리안은 그 느릿한 움직임에 안달이 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스터는 마리안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다. 마리안이 한결 가빠진 호흡을 다스리려 애를 쓰며 몸을 뒤척이고 있다는 사실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역시 피곤해하는 마리안을 억지로 깨울 만큼 그녀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풍성하다 못해 묵직한 속치마를 걷어 올린 아스터가 마리안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손에 감기는 것 같은 매끄러운 피부의 감촉은 언제나 그를 황홀하게 했다.

마리안을 기다란 의자에 남겨둔 채 아스터는 바닥으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바로 마지막 속옷 한 장에 감싸인 그녀의 밀부가 있었다.

“아…….”

마리안은 아스터의 시선이 어디에 닿았는지를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옷자락으로 몸을 가리려고 했지만, 아스터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왜 숨기려는 거야.”

마리안의 가느다란 손목을 낚아챈 아스터는 웃으며 그녀의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춘 뒤 그녀가 옷자락을 쥐지 못하게 했다.

“이미 볼 만큼 봤는걸.”

“하지만 그래도 부끄럽다고요.”

마리안이 조그맣게 항의했지만 아스터는 눈가를 휘었다.

“하긴, 난 그런 마리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어.”

“무슨 말을 못 해.”

마리안이 눈을 살짝 흘기자 아스터는 한 번 더 웃으며 말했다.

“등받이에 편히 등을 기대는 게 좋을 거야. 마리가 그만해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핥아줄 거니까.”

마리는 얼굴을 더욱 붉혔지만 아스터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는 쿠션까지 잘 끼워 받쳤다.

“준비됐어요.”

그렇게 말하는 마리안의 목소리에는 장난기와 기대감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내게 애원할 준비가 된 거야?”

“그런 말은 안 했는데요.”

마리안이 딱 잘라 대답하자 아스터는 웃으며 그녀의 하얀 허벅지에 입을 맞췄다.

“흣.”

그 느닷없는 키스에 마리안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었다. 아스터의 손길이 감질이 날 정도로 천천히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그는 아주 느긋하게 마리안의 허벅지에 몇 번이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때마다 마리안은 몸을 움찔거렸다. 아스터의 입술이 뜨거운 탓에 마치 허벅지에 화인을 찍는 것 같았다.

이제 겨우 허벅지를 어루만졌을 뿐인데 그녀는 한 겹만 남아있는 속옷이 이미 흥건할 정도로 젖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젖었네.”

아스터가 그 모습을 확인하고 눈가를 휘며 말하자 마리안은 얼굴이 새빨갛게 된 채 외면했다.

아무리 아스터와 밤을 보내는 일이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아직 이럴 때는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마리안이었다.

능숙하게 받아치고 싶었지만 뺨이 너무 화끈거리는 바람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 흣!”

아스터의 손가락이 젖어있는 속옷 위를 덧그리자 마리안은 작게 소리를 냈다.

달아오른 그곳은 손가락이 살짝 닿는 것만으로도 예민하게 그 감각을 받아들였다.

아스터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속옷 위를 천천히 문질렀다. 그녀의 꽃잎이 위치한 지점을 몇 번이나 부드럽게 문지르자 얇은 속옷이 더욱 젖어 드는 모습이 그의 눈에도 확연히 보였다.

자신의 아주 사소한 행동에 마리안이 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랫배가 아플 정도로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 꾹 눌러 참은 채 그는 마리안의 반응을 보며 좀 더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아, 읏.”

마리안의 호흡이 조금 거칠어진 것을 확인한 아스터는 천천히 그녀의 마지막 속옷을 벗겼다.

그러자 붉게 달아오른 젖은 꽃잎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리안이 속치마로 다시 감추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은 아스터는 마리안의 허벅지를 쥔 채 장밋빛 꽃잎에 입술을 댔다.

“아!”

마리안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매끄러운 혀끝이 꽃잎을 핥는 감각에 마리안은 허리 아래에서 단번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이 순간에 느끼는 쾌락만큼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쾌락만큼이나 부끄럽다는 감정도 항상 어떻게 갈무리를 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웠다.

이렇게 매번 부끄러운 것이 과연 맞는지도 알 수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부끄럽지 않은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난감하기만 했다.

더욱이 단순히 부끄럽기만 한 게 아니라 숨이 막히며 몸이 달아오른다는 점이 문제였다.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신음이 흘러나올 것 같아서 그녀는 이제 입술마저 깨물고 있었다.

아스터의 혀가 꽃잎 위를 진득하게 핥았다. 애원하게 만들어 주겠다더니, 그는 정말로 작심한 듯 평소보다 더 열정적이었다.

한층 더 붉어진 꽃잎을 핥고 통통하게 달아오른 핵을 문지르느라 여념이 없는 중에도 그는 이따금 마리안의 얼굴을 살폈다.

마리안이 정말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치맛자락을 꽉 쥐고 있는 모습이 그의 마음을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동굴 안쪽으로 혀를 밀어 넣자 마리안의 몸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미 뭉근하게 풀어진 내벽은 그의 혀를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아스터는 그 비밀스러운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다디단 물을 찾기 위해 계속 파고들었다. 이제는 숨을 몰아쉬기 시작한 마리안의 단전이 제법 가파르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츱, 츠읍, 하고 민망한 소리가 나는 것에 마리안은 입술을 꽉 깨물고만 있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걷잡을 수 없는 신음이 새어 나갈 것 같았다.

계속 계곡 아래가 젖어 드는 것과 반대로 몸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만 있었다. 두 뺨이 너무나 뜨거워진 나머지 마리안은 치맛자락을 쥔 손의 힘을 풀고 자신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도 뜨거웠지만 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서늘하게 느껴졌다.

“아앗!”

문득 마리안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 계곡 안쪽을 깊숙이 파고들던 아스터의 혀가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진득하게 꽃잎의 안쪽을 핥았다.

순간 숨이 너무 가빠져서 마리안은 아스터의 애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아스터는 마리안이 피할 수 없도록 이미 그녀의 허벅지를 단단하게 붙잡고 있었다.

“아, 아스터!”

마리안이 기어이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의 수풀에 코끝까지 파묻은 채 꽃잎을 물고 빨던 아스터가 고개를 쳐들었다.

“조금은 애원할 생각이 들었어?”

“아, 아앗!”

하지만 마리안은 대체 뭐라고 애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몸이 너무 뜨거워서 머릿속까지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녀가 대답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자 아스터는 눈가를 휘었다.

“고집이 세긴.”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 손가락 하나가 깊숙이 안쪽으로 들어왔다.

“아!”

마리안은 그대로 눈을 크게 뜬 채 숨을 삼켰다.

“마리는 항상 이쯤을 자극해 주면 좋아하니까.”

말뿐만이 아니라 아스터가 다시 그녀의 계곡을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혀와 손가락을 모두 이용한 그 집요한 애무에 마리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아아!”

안쪽을 파고드는 감각에 몸 안쪽에서 불이 붙은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미칠 것 같은 욕망을 느꼈다. 감질나는 이런 애무가 아니라 아스터를 원했다.

하지만 오늘 작정한 그의 애무는 상당히 집요하고 농밀해서 마리안은 아스터에게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기는커녕 숨을 몰아쉬는 게 고작이었다.

단전 안쪽에서부터 시작된 열기는 이제 걷잡을 수 없었다. 마리안은 아스터가 하는 대로 내맡긴 채 숨을 헐떡이는 수밖에 없었다.

몸 안쪽에서 끝없이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이 불꽃은 좀처럼 수그러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꾸만 더 몸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끓어도 정점에 달하지는 않는 것 같은, 채워지지 않는 안타까움이 마리안을 조바심 나게 했다.

마리안의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모습을 바라보는 아스터도 점점 한계에 달하고 있음을 느꼈다.

마리안의 모습 어디든 그를 자극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잇자국이 날 정도로 깨물고 있는 그녀의 붉은 입술과 그 입술 사이로 간간이 흘러나오는 신음은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 박동을 빨라지게 하고 있었다.

손끝에 감기는 마리안의 피부의 감촉은 비단 이불을 만질 때만큼이나 부드럽고 매끄러웠으며, 특히 손안에 가득 담긴 그녀의 가슴을 만질 때는 이대로 영원히 그녀를 놔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버릴 만큼 황홀했다.

더욱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그녀의 체온 때문에 아스터는 자신의 몸도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몸이 달아오르는 만큼 그는 갈증을 느꼈다. 아스터는 허겁지겁 마리안의 깊은 계곡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을 마셨지만, 그 물이 너무 달아서인지 갈증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사막에서 며칠을 물 없이 헤맨 끝에 갈급증이 난 사람처럼 한 방울의 물이라도 더 마시기 위해 그녀의 밀부를 한층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아아!”

순간 마리안이 꽤 길고 높은 교성을 흘렸지만 아스터는 그 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하반신이 욱신거릴 정도로 아프고, 그와 동시에 그 역시 온몸이 타오를 것 같은 열기를 느꼈다.

“마리…….”

그제야 아스터는 마리안을 다시 바라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누가 애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그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절박했다.

“아아, 아스터!”

그리고 그런 아스터의 목을 끌어안으며 마리안은 흐느끼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아스터의 애무가 통증처럼 느껴지는 마리안이었다.

“아, 안 돼. 제발…….”

결국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제발, 그만하고 이젠 넣어줘요. 아아!”

온몸을 부르르 떨며 매달리는 마리안을 보면서 아스터는 숨을 삼켰다. 그녀가 애원하며 매달렸다는 사실에 그는 그 어떤 만족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럴 만한 여유가 전혀 없었다. 아스터는 정신없이 몸을 일으켜 마리안을 끌어안았다. 그녀를 기다란 의자에서 안아 올려 화려하고 아름다운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스터, 빨리!”

그리고 마리안은 허리가 서늘한 침대 시트에 닿는 순간, 이불자락을 필사적으로 움켜쥐며 외쳤다.

아스터는 바로 그녀의 요구에 응답했다. 그는 다급한 손길로 자신의 마지막 속옷을 벗고, 이제는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꼿꼿하게 발기한 성기를 꺼냈다.

“아아아!”

“흐읍.”

삽입과 동시에 마리안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아스터는 아스터대로 마리안의 안으로 들어가며 다급하게 숨을 삼켰다.

각자 애타게 기다려왔던 쾌락이 두 사람을 덮쳤다. 마리안은 멍하니 눈을 뜬 채 그저 호흡을 하기 위해 입으로 숨을 쉬며 침대 시트를 쥐어뜯었다.

그리고 아스터는 이를 악물고 마리안의 가느다란 허리를 쥔 채 거칠게 몸을 움직였다.

대여섯 명은 충분히 굴러다닐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침대가 삐걱삐걱하는 소리를 냈다.

이 침대를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아스터와 마리안은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탑에서 아스터가 썼던 빈약한 침대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왕족을 위해 최상등품의 원목으로 만든 침대였으니 그런 반응은 당연했다.

이런 침대라면 아무리 굴러다녀도 절대로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격렬하게 뛴다고 해도 소리 같은 건 조금도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침대는 지금 삐걱거리며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만큼 아스터의 움직임은 격렬했다.

마리안은 아스터의 얼굴을 바라보려고 했지만 자꾸만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듯한 감각에 쉽지 않았다. 아스터 역시 마리안의 푸른 눈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평소의 아스터라면 마리안의 아주 섬세하고 세밀한 반응까지 바로바로 잡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아스터는 마리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가 얼마만큼의 쾌락을 느끼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아스터를 품고 있는 그녀의 몸이 너무 뜨거운 탓에 이대로 타죽어 버리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정말로 뇌까지 열기에 익어버릴 것 같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흐릿한 시야에 마리안의 바다처럼 깊은 푸른 눈이 간신히 들어왔다.

그들의 몸이 이렇게나 불타오르고 있는데도 마리안의 눈은 잔잔하고 고요하기만 했다.

사실 마리안은 그녀를 당장에라도 미칠 듯이 만드는 뜨거운 열기에 눈물까지 고인 눈으로 아스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스터에게는 그런 마리안의 눈이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마리.”

그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마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몇 번이나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리안이 눈을 깜빡이며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스터.”

마리안은 손을 뻗어 아스터의 목을 끌어안았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으며 두 사람의 몸이 한층 더 밀착되었다.

그 순간 아스터가 숨을 토해냈다. 절정에 달한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동안 마리안 역시 쌕쌕 숨을 몰아쉬었다.

아스터는 그대로 마리안을 끌어안고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격렬한 정사의 끝에 상기된 마리안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아스터는 마리안이 이제 정말로 자신의 여자라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고는 했다.

마리안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자신의 곁에 늘 함께해 준다는 사실에 그는 엄청난 행복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마리안의 몸속에 자신을 파묻은 채 바로 빠져나가지 않고 그녀의 정수리와 이마와 코와 입술에 차례차례 입을 맞췄다.

그 애정 어린 입맞춤에 멍한 얼굴로 숨을 쉬던 마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는 평소의 반짝이는 이성이 되돌아와 있었다.

“사랑해, 마리.”

“저도 정말 사랑해요, 아스터.”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를 사랑한다는 말이었지만 마리안은 다정하게 대꾸하며 아스터의 입술을 손으로 더듬었다.

마음 같아서는 몸을 조금 일으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춰주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로 온몸에서 힘이 전부 빠져나간 기분이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정사가 끝나고 나자 마리안은 조금 추위를 느꼈다.

남부의 뜨거운 열기에 비하면 왕성의 날씨는 아직 한여름이라고 할 만한 수준이 아닌 데다, 밤바람은 상당히 서늘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에라도 열기에 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던 마리안은 지금은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마리, 괜찮아?”

마리안의 피부에 소름이 돋은 것을 본 아스터가 얼른 이불로 그녀의 몸을 덮었다.

“조금 춥네요. 너무 덥지 않다면 창문을 좀 닫아주겠어요?”

“잠깐만 기다려.”

아스터는 조심스럽게 마리안에게서 빠져나왔다. 그는 더 이상 침대가 엉망이 되지 않도록 얼른 수건을 가져와 흘러내리는 체액을 가볍게 닦고는 창문을 향해 손을 까딱했다.

그러자 침실의 거대한 창문들이 차례로 소리 없이 닫히기 시작했다.

“저도 마법을 할 줄 알면 좋을 텐데요. 정말로 편해 보여요.”

그 광경에 마리안이 투덜댔다. 그동안 마리안은 마법을 배워보려고 여러 차례 노력했지만, 결국 자신에게는 마법적 재능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법이 필요하다면 분부만 내려주세요, 왕비 전하.”

아스터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마리안은 피식 웃었다. 이제 아스터는 따뜻한 물수건을 만들어내서 그걸로 마리안의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

“아, 기분 좋다.”

땀과 체액으로 끈적해진 몸을 부드럽고 따뜻한 수건이 닦아주자 마리안은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팔다리를 쭉 펴고 아스터의 시중을 받은 뒤 얼른 이불로 몸을 둘둘 감았다. 이번에는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정말로 추워서였다.

마리안의 몸과 자신의 몸을 대강 닦은 아스터는 다시 한번 마리안을 끌어안았다. 얇은 이불 속에서 맞닿은 서로의 체온은 무척이나 기분 좋게 느껴졌다.

사실 평소 같으면 이즈음에서 한 번 더 격렬한 정사를 벌였겠지만, 그날따라 마리안과 아스터는 서로를 끌어안고 누워 상대의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직도 두근두근하고 격렬하게 뛰는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끌어안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아스터는 숨이 막힐 듯한 행복감을 느꼈다.

참을 수 없어진 그의 입술이 마리안의 입술을 찾았다. 그러자 마리안은 짧게 웃으며 두 팔로 아스터의 목을 끌어안았다. 누운 자세 그대로 두 사람은 한참이나 서로에게 입을 맞췄다.

단지 평소처럼 격한 키스가 아니라 그저 애정을 나누는 따스한 키스였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렬한 키스도 좋았지만 지금 이 순간처럼 달콤한 키스도 좋았다.

입술이 닿은 것만으로도 아까와는 또 다른 달콤하고 뜨거운 느낌에 아스터와 마리안은 무아지경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금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끌어안은 채 키스를 나눴다.

아스터가 마리안을 다시 돌아봤을 때는 마리안이 오랜 키스 탓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거친 호흡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아스터의 품 안에 자신의 몸을 좀 더 밀착시킨 마리안이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그 귀여운 모습에 아스터의 얼굴에 홍조가 다시 떠올랐을 무렵, 마리안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아스터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마리안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사실 그는 마리안을 재울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오늘은 그에게도 무척 특별한 날이지 않은가. 평생을 먼 북방의 탑에 유폐되어 살다가 간신히 2년 전에야 왕세자의 자리를 되찾았던 그가 마침내 왕좌에 앉은 날이었다.

비록 아직 전통과 격식을 갖춘 대관식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아스터가 자기 자신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날이었다.

이런 기념비적인 날, 그는 가장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정사를 통해 기쁨을 더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마리안은 정말로 피곤했는지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피곤한 그녀를 굳이 깨워서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아스터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욕구 따위를 위해 마리안을 깨워서 억지로 한다는 생각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에 아스터는 손을 뻗어 마리안의 이마에 살짝 얹었다. 곧 그의 손에서 따뜻한 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요 며칠 무리한 것으로도 모자라 오늘 종일 긴장하느라 시달렸을 그녀를 위해 아스터는 신성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한동안 그렇게 하고 나자 마리안의 얼굴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스터는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 동안 벌어진 일들이 그의 머릿속에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스터는 사람들에게 담담한 모습을 보여줬던 것과 달리 오늘 일어난 일로 매우 긴장하고 흥분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드디어 자신의 자리를 완전히 되찾았다는 것에 무척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어떤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마리안과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그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해야만 했다.

다음 날, 아스터는 밖에서 우는 맑은 새소리에 깨어났다. 밝은 햇살이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서 그는 눈이 부신 듯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간밤에는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도저히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푹 잠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스터는 정말로 편안하고 행복한 잠자리를 만끽했다. 그 증거로 온몸이 날아갈 듯이 가뿐하고 개운했다.

옆자리를 돌아보자 아스터의 팔을 끌어안은 마리안이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신성력을 불어넣은 덕분에 혈색은 전날보다 훨씬 좋았다.

주의 깊게 마리안을 살피고 안심한 아스터가 그녀를 살살 흔들어 깨웠다.

“마리, 마리. 일어나.”

“아스…터. 벌써 일어났나요? 몇 시죠?”

“7시야. 이제 슬슬 일어나야 해.”

하지만 마리안은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그녀는 마치 아주 어린 아이처럼 가운을 걸치려다 말고 침대에 앉아 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아스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서 웃었지만, 잠시 후 마리안이 일어서려고 몸을 일으키려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한 모습을 보자 안색이 변했다.

“마리?”

그도 그럴 것이 아스터가 아는 마리안은 매우 튼튼하고 건강했다. 왕성에서 상당히 먼 에르베 지방까지 다녀오는 일정이 피곤하긴 했다지만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힘들어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욱이 아스터는 간밤에도 그녀에게 꽤 오랜 시간 동안 신성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 정도의 신성력이라면 가벼운 감기 기운이 있었다 하더라도 한 번에 나아야 했다.

“마리, 괜찮아?”

그러나 마리안은 지금 현기증을 느끼는지 눈을 꼭 감고 있을 뿐이었다.

놀라고 당황한 아스터는 아침에 만나기로 했던 재상과의 면담을 취소한 채 당장 왕궁의 어의를 불러들였다.

어의는 바로 달려왔다. 그는 르샤베 왕국 최고의 명의로 이름 높은 사람이었는데, 바로 베르트의 스승이기도했다.

아스터는 마리안의 갑작스러운 증세에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하며 그녀의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자 머리가 백발로 하얗게 뒤덮인 어의는 심각한 얼굴로 설명을 듣더니 이내 침실 안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마리안을 진찰하기 시작했다.

아스터는 가슴이 타들어 가는 심정으로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의 표정은 매우 좋지 못했다.

드디어 르샤베의 왕이 되었다. 이제부터 모든 게 시작이었다. 아스터는 마리안을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여인으로 만든 뒤, 그녀와 어떻게 행복한 삶을 누려갈 것인지 밤새 고민했다.

그리고 오늘은 바로 그 행복한 미래를 위한 기운찬 첫날이 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마리안의 상태가 나빠진 것이다. 아스터로서는 가슴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갈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가, 왕비의 상태는?”

마침내 의사가 진료를 끝내고 나오자 아스터는 성급하게 질문했다. 의사는 그런 아스터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스터가 대체 의사가 어떤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고 저렇게까지 나오는가 하고 겁을 집어먹었을 때였다. 의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경하드립니다, 국왕 전하. 왕비 전하께서 회임하셨습니다.”

“…뭐?”

너무나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아스터는 멍한 얼굴로 어의를 바라보았다. 의사의 얼굴에는 여전히 밝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대략 회임한 지 두세 달 정도 되신 것 같습니다. 임신을 하면 피로를 쉽게 느끼기 때문에 그동안의 피로가 모두 누적되어 힘들어하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 점을 제외하면 현재로서는 왕비 전하의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마리, 마리가 임신을 했다고?”

멍하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아스터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럼 왕비에게 다른 이상은 없는 건가?”

“푹 쉬시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드시면 괜찮을 겁니다.”

의사의 말에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이만 밖으로 나가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직접 왕비 전하를 살펴보도록 하시지요.”

아스터는 꿈을 꾸는 기분이라 의사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마저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마리안이 누워있는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방 안에서 마리안을 돌보고 있던 시녀들이 모두 환한 미소로 아스터에게 인사했다.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전하.”

“…다들 잠시 나가보거라.”

“예, 혹시 필요한 일이 있다면 바로 불러주십시오.”

시녀들은 다시 한번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절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스터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마리안이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마리?”

마리안은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제야 아스터는 마리안 역시 자신 만큼이나 매우 놀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괜찮아?”

“아스터.”

마리안은 아스터가 다가가 손을 잡자 그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너무 놀라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지금도 꿈을 꾸는 것 같아.”

그러자 마리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래요. 사실 생리가 멎어서 혹시?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긴 했었는데, 근래 워낙 바빠서 잊고 있었어요. 의사의 질문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지 뭐예요. 아스터, 얼굴이 왜 그래요?”

아스터의 얼굴은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이런, 그렇게 놀랐어요?”

“마리.”

아스터는 마리안을 끌어안았다. 그는 울지는 않았지만 한참이나 마리안을 끌어안고 움직이지 않았다.

마리안은 가만히 아스터의 가슴에 기대 그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그녀 자신도 여전히 잘 실감나지 않아서 아스터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마리는 항상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줘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정말 고마워.”

마침내 아스터는 속삭이듯 말했다.

“정말, 정말 고마워. 마리. 오늘처럼 기뻤던 적은 처음이야.”

“그러게요. 어제오늘 큰 선물을 받는 기분이에요.”

마리안도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러나 아스터는 그제야 마리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제의 일은 선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내 자리를 찾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뿐이야. 그 이상의 감흥은 없어.”

마리안은 아스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내 아버지란 사람은 마치 날 위해 후계 구도에 문제가 생기지 않게 정리해 주겠다는 듯이 클로타르와 어머니를 불러들여 왕권을 포기하게 했지. 하지만 사실 그런 것보다는 그동안 미안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어.”

“아스터…….”

“클로타르가 왕좌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어. 어차피 클로타르는 나를 이기지 못했을 테니까. 어머니도 마찬가지지.”

“그건 그래요.”

마리안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사실 어제 국왕이 해와 달의 성역에서 한 일은 앞으로 아스터의 즉위에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종지부를 찍었다는 데 의의가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비록 아스터가 귀족들을 전부 장악한 게 아니라고 해도 클로타르에게는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사실상 없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그 어떤 귀족도 감히 반역자라는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클로타르의 편에 서지는 못할 것이다.

차라리 국왕은 아스터에게 그동안 돌아보지 않았던 것에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되었다.

자신이 아스터를 돌본 적도 없으니 도와달라는 말도 하지 않겠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정식으로 사과를 하지 않겠다는 오만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마리안은 아스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왕이면 쌍둥이를 낳았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자신의 배를 살짝 만져보며 말했다.

“초산이라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아스터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마리안은 생긋 웃어 보였다.

“전 세상 사람들에게 라베인 왕가가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보여주고 싶어요. 우리가 쌍둥이를 낳고도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면 감히 아무도 쌍둥이에 얽힌 저주 따위는 이야기하지 못할 테니까요.”

아스터는 그 말에 망연한 얼굴로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내가 과연 제대로 된 부모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부모님의 사랑이 뭔지 전혀 알지 못하는데.”

“그런 건 보고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어요. 지금 당신이 절 사랑해 주듯이 앞으로도 계속 사랑해 주면 돼요. 그리고 절 사랑하는 만큼 우리 아이들을 사랑해 주면 되는 거예요. 그게 어려울 것 같나요?”

그 말에 아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는 마리안을 사랑하는 일이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니 그녀와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는 일 또한 당연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스터는 미소를 지었다. 마리안이 가장 사랑하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런 거라면 어렵지 않아.”

“정말로 어렵지 않을 거예요. 쌍둥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 아이잖아요. 아마 처음 만나자마자 우리는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될 거예요.”

마리안은 생긋 웃으며 아스터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사랑해요, 아스터. 키스해 줘요.”

아스터는 즉시 마리안에게 키스했다. 두 사람은 마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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