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힌 왕자님-22화 (22/24)

외전 1. 아스터의 즉위 (2)

일행이 해와 달의 성역에 도착했을 때는 시르안의 말대로 블랑디르 백작이 왕성에 머물고 있는 귀족연합 가문의 사병 백여 명을 이끌고 한 무리의 왕궁 기사단과 대치 상태였다. 그러나 당장에라도 한바탕 전투가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왕궁 기사단의 기사들은 한결같이 굳은 얼굴을 하고 꼿꼿이 서있었지만, 쓸데없이 적의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보다 왕실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왕궁 기사단의 기사들로서는 굳이 아스터의 주변인이자 그의 지지 세력인 사람들을 적대해 척을 질 필요가 없었다.

블랑디르 백작 역시 허리를 곧게 편 채 의연하고 당당하게 그 자리에 서있었을 뿐, 왕궁 기사단에 맞서 위협을 가하고 있지는 않았다.

“왕세자 저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먼저 아스터의 도착을 깨달은 쪽은 블랑디르 백작이었다.

“비 저하를 오랜만에 뵙습니다. 먼 길을 다녀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별말씀을요. 오히려 외숙부께서 고생이 많으셨죠.”

마리안은 블랑디르 백작이 집안의 윗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가신의 예로서 무릎을 꿇고 인사하자 얼른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이미 지난 2년 동안 이런 궁정 예법에는 꽤 익숙해진 마리안이었지만, 그래도 외숙부가 무릎까지 꿇고 자신에게 인사를 할 때는 어색함을 어쩔 길이 없었다.

“기다려줘서 고맙습니다, 블랑디르 백작.”

아스터 역시 블랑디르 백작에게 인사한 뒤 이번에는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국왕 전하께서 쓰러지셨다는 말에 전하를 만나 뵈러 왔습니다. 왕궁 기사단은 왕세자인 내 앞을 가로막을 생각입니까?”

기사단장은 상당히 긴장한 얼굴로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매우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아닙니다, 저하. 국왕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스터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

그가 손을 내밀자 마리안은 망설임 없이 아스터의 손을 잡았다.

이 중요한 순간, 아스터가 가장 먼저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이 마리안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사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마리안은 아스터를 전혀 도울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아스터는 마리안을 가장 우선적으로 원한 것이다.

“죄송하지만 마법사와 다른 분들은 함께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마리안 다음으로 베이퍼스 공작이 위르나와 함께 뒤따르자 기사단장이 여전히 정중한 목소리로 제지했다.

말없이 바라보는 아스터를 향해 기사단장은 다소 난감하다는 얼굴로 덧붙였다.

“국왕 전하께서 왕세자 저하와 왕세자비 저하의 출입만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인 뒤 베이퍼스 공작과 위르나, 그리고 시르안과 블랑디르 백작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

모두를 대신해 시르안이 작게 속삭였다.

“알겠습니다.”

아스터는 짧게 대답하고는 마리안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

“들어가자.”

“네.”

마리안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발을 내디뎠다. 기사단장은 아스터와 마리안을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

해와 달의 성역은 이제는 마리안에게도 꽤 익숙한 곳이었다. 지난 2년 동안 마리안은 이곳에서 몇 번이나 왕실의 연례행사를 지켜봤다.

중앙의 제단 한가운데 커다란 의자가 놓여있었고, 그곳에 국왕이 앉아있었다.

그 의자는 상당히 거대했지만, 옥좌의 위엄을 갖춘 대신 무척 편안해 보였다. 실제로 국왕은 편하게 등을 기대 의자에 앉아있었다.

마리안은 국왕의 그와 같은 모습을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스터와 함께 왕궁에서 살게 된 이후로 마리안은 거의 매일같이 국왕과 대면했지만, 그는 항상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꼿꼿한 자세로 바르게 앉아 차갑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지배자의 위엄과 차가움이 느껴졌지만, 그가 아스터의 아버지라서 이제는 마리안과도 한 가족이 되었다는 생각 같은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국왕의 현재 모습은 꽤 충격적이었다. 마리안과 아스터가 이곳저곳을 시찰하면서 느긋하게 에르베 지방으로 내려갔다고는 해도 왕성에서 떠나온 지 겨우 3주가 지났을 뿐인데, 그 사이에 국왕은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마리안은 처음으로 그가 늙고 약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동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눈앞의 남자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차가운 사람인지 마리안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마리안의 성격이라면 친구나 가족이 갑자기 쓰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달려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자신이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묻고 주저 없이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마리안은 자신의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졌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혹시라도 아버지가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마리안은 그저 묵묵히 서서 국왕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갑자기 늙어 보이는 국왕의 모습에 충격을 받긴 했지만 그 어떤 연민의 감정도 느낄 수 없었던 탓이었다.

단지 마리안은 묵묵히 국왕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 냉담해 보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고개를 돌려 아스터를 바라본 마리안은 아스터 역시 자신과 거의 비슷한 심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스터가 줄곧 말없이 국왕을 바라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스터의 시선은 꽤 차가웠다. 아스터는 그저 살피는 눈초리로 국왕을 바라볼 뿐, 마리안처럼 갑자기 변한 국왕의 모습에서 충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다.

마리안은 자신이 조금만 다쳐도 아스터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아버지에게 저런 시선을 보낸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팠다. 아스터에게 부모는 정말로 남보다 못한 존재였던 것이다.

‘아스터…….’

마리안은 그런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마리안은 아스터가 왕세자가 되면 국왕과 왕비가 지금까지의 잘못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져주길 바랐었다.

왕비가 아스터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적어도 아스터를 후계자로 내세운 국왕만이라도 아버지의 역할을 해주길 원했다.

하지만 국왕이 아스터를 왕세자의 자리에 세운 것을 제외하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왔구나.”

심지어 창백하고 핼쑥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는 국왕의 시선과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기만 했다.

“쓰러지셨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서 아스터의 목소리 또한 무미건조했다. 국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다. 너는 내가 빨리 죽길 원하겠지만.”

“그런 건 아닙니다.”

아스터는 여전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르베 지방에 갔었다지. 남부의 끈 떨어진 놈들이 너에게 살랑거리며 아부하는 모습을 본 소감이 어떻더냐?”

“잘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만끽해 보기도 전에 전하께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는 바람에 부랴부랴 달려와야 해서요.”

그 말에 국왕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는 것은 아니었지만 즐거워서 웃는 웃음도 아니었다. 정말로 인간미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웃음이었다.

“그런 말도 할 줄 알다니 제법이구나.”

그러나 국왕은 곧 웃음을 멈추고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느냐?”

“후계를 확실히 정하기 위해서 오셨겠죠.”

아스터는 담담하게 말했다.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구나.”

“전하의 의중은 어느 쪽입니까? 저입니까, 아니면 클로타르입니까?”

“네가 보기엔 어느 쪽인 것 같으냐?”

국왕이 어딘가 흥미롭다는 투로 물었다.

“클로타르를 후계로 정하실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제가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스터의 대답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네 어머니에게 클로타르를 데려오라고 전갈을 보냈다. 네 어머니는 내가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그 애에게 달려갔지만.”

“…….”

마리안은 그 이야기에 조금 놀랐다.

아까 시르안은 분명 국왕이 클로타르에게 연락을 보내지는 않았다고 했는데, 아마 시르안이 파악하지 못한 것이 있었던 듯싶었다.

저 시르안마저 깨닫지 못했을 정도로 왕비에게 은밀히 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체 국왕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마리안은 혼란스러웠다.

그때 국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에르베 지방에 내려간 너에게 내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는 말을 듣자마자 네가 바로 올 거라고 확신했지. 그래서 클로타르도 불러들였다. 난 너희를 둘 다 만날 생각이었거든.”

아스터가 그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국왕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물었다.

“내가 왜 그렇게 한 것 같으냐?”

아스터는 한동안 국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전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국왕의 얼굴에서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네 어머니는 내 뜻을 아마 왜곡해서 이해하고 있겠지. 아쉽게도 왕비와 나의 뜻은 다르니까.”

“…….”

아스터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리안은 국왕의 그 말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지만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국왕이 자신의 후계를 다시 바꿀 생각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국왕은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았다. 신전에서는 촛불을 잔뜩 밝혀뒀지만 해와 달의 성역이 워낙 넓은 곳이라 중앙 제단을 제외한 곳은 새카만 어둠 속에 잠겨있었다.

바람이 한차례 불어오자 촛불이 일렁이는 모습을 보고 있던 국왕이 혀를 차며 말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군. 무능하다, 무능해.”

국왕이 무능하다고 말하는 상대가 왕비인지 그것도 아니면 클로타르인지는 알 수 없었다.

쿠르스 산맥은 에르베 지방보다는 왕성에서 가까웠고, 왕비는 국왕이 쓰러지자마자 클로타르에게 달려갔다.

그러한 사실을 생각해보면 적어도 클로타르에게 시르안이나 위르나 같은 출중한 마법사가 없다는 점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그러나 아스터는 그와 같은 비교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제 와서 국왕에게서 클로타르보다 낫다는 이야기를 들어봤자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단지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자 그는 품 안에서 자그마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국왕이 다시금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아스터는 개의치 않은 채 손바닥에 종이를 올려놓고 그림을 그렸다. 아주 간단한 마법진이었다.

아스터가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향해 작게 속삭이자 마법진이 푸른빛을 내며 빛나기 시작했다.

그가 종이를 가볍게 훅하고 불자 종이는 그대로 날아가 팔랑팔랑 하며 마리안의 앞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종이가 떨어진 곳에서 편안해 보이는 기다란 의자가 나타났다.

마리안은 조금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의자를 바라본 뒤 아스터를 쳐다보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국왕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나 아스터는 마리안은 물론 국왕의 표정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마리안에게 손짓했다.

“길어질지도 모르니까 앉아서 기다려, 마리. 피곤하잖아.”

자상한 목소리로 손짓하는 아스터 때문에 마리안은 잠시 망설이다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아스터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신성력을 불어넣어 주기까지 했다.

국왕은 그런 아스터를 상당히 의외라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마리안도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화 내용만으로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국왕이 전적으로 클로타르를 지지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러니 아스터가 당연히 국왕의 몸 상태를 살펴보고 신성력을 불어넣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스터는 국왕의 상태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마리안을 자리에 앉히자 그 옆에 섰다.

국왕은 혀를 차긴 했지만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아스터 역시 침묵했다.

마리안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아스터를 올려다봤다. 아스터는 가만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결국 마리안은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클로타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클로타르와 왕비가 나타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기다렸을 무렵, 밖에서 약간의 소동이 일어났다.

마리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 때, 기사단장이 직접 왕비와 클로타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서던 왕비는 아스터와 마리안이 국왕의 곁에 있는 모습을 보고 경악한 얼굴로 멈춰 섰다. 어두워서 그녀의 뒤에 서있는 클로타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전하.”

기사단장이 낮은 목소리로 재촉했지만 왕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 경계심이 가득했다.

“이쪽으로 가까이 오시오, 왕비.”

왕비에게 말을 건넨 사람은 다름 아닌 국왕이었다. 왕비는 그제야 얼굴을 굳힌 채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무척 차가운 눈빛으로 아스터를 훑어봤으며,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는 마리안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클로타르가 그런 왕비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스터와 마리안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으며, 심지어 국왕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마리안은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클로타르의 얼굴을 말없이 응시했다.

제단 가까이 다가오자 환하게 밝힌 촛불 사이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건장하고 다부진 느낌이었던 그는 2년 사이에 꽤 앙상하게 말랐고, 머리카락이 어깨를 덮을 정도로 길어져 있었다.

탑 꼭대기 층이 햇빛이 매우 잘 들긴 하지만 그래도 직접 밖에 나갈 수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어서인지 얼굴도 훨씬 창백해졌다. 무엇보다 표정 자체가 음울하게 바뀌어 있었다.

과거의 클로타르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는 그 시절의 광채와 생기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자업자득이지만…….’

마리안은 어쩐지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지금 해와 달의 성역에서 마주하고 있는 아스터의 가족 중에서 그녀가 가장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클로타르였다.

마리안은 국왕과 왕비를 용서할 수 없었고 용서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은 아스터의 불행한 과거의 원흉이었다.

그러나 클로타르는 마리안의 눈앞에서 직접 잔인한 방법으로 아스터를 학대했고, 마리안에게는 온갖 굴욕을 안겨줬던 당사자였다. 마리안은 매번 클로타르를 볼 때마다 공포를 느껴야 했다.

하지만 아스터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 창백하고 수척해진 모습을 보자 마음이 좋을 리는 없었다.

마리안은 클로타르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아스터의 얼굴로 찌들어 있는 듯한 그를 보는 것은 괴로웠다. 동시에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아스터는 정말로 대단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구나.’

고작 2년 동안 폐인 같은 몰골로 변한 클로타르와 달리 아스터는 마리안과 만나기 전까지 오랜 시간을 유폐당한 채 학대를 받았다.

하지만 아스터는 학대와 고문으로 앙상하게 말라있긴 했어도 지금의 클로타르처럼 망가졌다는 느낌이 들진 않았다.

오히려 마리안은 아스터를 처음 만났을 때, 마치 상처 입은 맹수처럼 사나워 보이는 그에게 겁을 먹었다. 아스터는 낯선 마리안을 경계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만신창이가 되어 피를 흘리면서도 그의 영혼은 자신의 불행과 고통에 잠식되지 않았다.

‘그 차이가 이런 결과를 가져왔는지도 모르지.’

마리안은 이제는 묵묵히 자신의 부모를 바라보고 있는 아스터를 보며 생각했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아스터는 결코 꺾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 르샤베 왕국의 왕세자로서 서있었다.

반면 왕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나 탑에 갇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클로타르는 온 세상을 다 잃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상 클로타르는 탑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할 뿐이지 아스터처럼 꼭대기 층에만 감금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아스터처럼 주기적으로 채찍질을 당하지도 않았다.

그의 곁에는 2주에 한 번씩 탑을 찾아가는 세레나가 남아있었고, 그의 건강이 조금이라도 상할까 봐 걱정하는 왕비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유모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지켜본 뒤로 마리안을 만날 때까지 홀로 지내야 했던 아스터와는 차원이 달랐다.

물론 클로타르가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저렇게 망가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스터는 자신이 평생 탑에 갇혀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는걸.’

가장 높고 찬란한 자리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클로타르의 마음의 고통이 심했다고는 해도, 아스터가 당했던 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마리안은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차고는 국왕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전하, 몸 상태는 좀 어떠십니까?”

왕비가 국왕에게 딱딱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훨씬 좋아졌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소.”

국왕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는 왕비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는데, 왕비 또한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그러한 국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왕비의 눈에는 국왕의 건강 상태에 대한 염려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클로타르를 데려오라 전갈을 보내셨으면서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무엇입니까?”

왕비는 얼음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침에 국왕이 쓰러졌을 때, 왕비는 남편을 보살피기는커녕 경악하는 좌중을 무시한 채 홀로 유유히 자리에서 빠져나와 클로타르가 있는 탑으로 향했다.

국왕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떠올린 대상은 오로지 클로타르뿐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그녀의 아들이 저 자리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탑에 당도해서 아들에게 이 사실을 말했을 무렵, 왕비에게 국왕의 전언이 도착했다. 그는 의식을 되찾자마자 왕비에게 클로타르를 데리고 베스나 신전으로 오라고 했다.

왕비로서는 그 전언이 지방으로 내려가 국왕의 곁을 비워둔 아스터 대신 클로타르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말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왕비는 정신없이 클로타르를 데리고 해와 달의 성역으로 달려왔다. 너무나 마음이 급한 나머지 클로타르의 아내, 세레나마저 부르지 못했다.

마침 세레나는 한때 마리안이 그랬던 것처럼 한동안 클로타르와 함께 탑에서 지내다가 부모님의 집에 돌아가 쉬고 있었다.

사실 세레나는 그동안 무척 헌신적으로 클로타르를 대해왔다. 하지만 왕비는 이런 순간에 며느리를 불러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듯싶었다.

국왕은 왕비의 차가운 시선과 목소리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 보였다.

“고작 쿠르스의 탑에서 오는 사람이 에르베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보다 늦어서야 되겠소. 연락도 훨씬 먼저 받았을 텐데.”

비웃음을 머금은 대답이었지만 왕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전하께서 그토록 보고 싶어 하신 클로타르를 데려왔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전하의 맏아들 말입니다.”

왕비는 자신의 뒤편에 있는 클로타르를 가리키며 말했을 뿐이다. 국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구나.”

그러고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클로타르에게 말을 걸었다.

“쓰러지셨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클로타르의 목소리 또한 메말라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부자간의 대화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클로타르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왕은 그를 버리고 아스터를 선택한 매정한 아버지였다.

더욱이 국왕은 클로타르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신성력이 없는 그에게 실망한 나머지 끊임없이 클로타르의 자질을 의심해 왔다.

“그래. 유감스럽겠지만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다.”

심지어 국왕은 매우 심술궂게 대답했다.

“큰일이 아니라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그러나 클로타르는 매끄럽게 대답했다. 딱히 잘 보이려고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차피 클로타르는 이제 와서 국왕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

아스터는 왕비와 클로타르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건넬 말도 없었고, 그들과 대화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클로타르를 다시 만나는 정도로 괴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면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 아스터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묵묵히 국왕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의 의중을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믿을 수는 없었으니까.

“어쨌든 다들 해와 달의 성역까지 찾아오느라 수고했다.”

다시 말을 꺼낸 사람은 국왕이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까딱여 보이고는 아스터와 클로타르, 그리고 왕비와 마리안의 얼굴에 차례로 시선을 주었다.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한 시선이었다.

“이 자리에 모두를 부른 건 물론 라베인 왕가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하기 위해서지.”

국왕은 아스터와 클로타르를 찬찬히 뜯어보며 말했다. 마리안은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국왕 역시 미약하게나마 신성력을 다룰 수 있으니 그에게 이런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아스터는 여전히 담담하게 서있었다. 그는 똑바로 국왕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서늘한 눈빛은 어서 더 말해보란 듯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국왕의 그 같은 말에 의외의 행동을 보인 쪽은 클로타르였다. 그는 어째서인지 국왕의 눈길을 피한 채 바닥을 바라보았다.

마리안은 그 모습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아는 교활한 클로타르라면 여전히 안색이 좋지 못한 국왕의 상태를 매우 걱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아스터보다 자신이 차기 국왕에 어울린다고 주장해야 했다.

“물론 클로타르야말로 전하의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보다 못한 왕비가 나섰는데도 클로타르는 침묵하고 있었다.

마리안은 숨을 삼켰다. 왕비가 클로타르를 대신해 대답했으니 자신이라도 아스터를 위해 나서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녀는 고민하고 있었다.

‘저 국왕 전하라면 오히려 내가 괜히 끼어들었다고 트집을 잡을지도 모르니까…….’

괜히 나섰다가 본전도 찾지 못할 확률도 매우 높아 보여서 마리안은 망설였다.

“내 생각은 다르오, 왕비.”

그때 국왕이 주변의 무거운 침묵을 깨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제야 클로타르는 고개를 들어 올려 국왕을 바라보았다. 생기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던 금빛 눈동자가 일순간 활활 타오르는 듯이 보였다. 분명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마리안은 다시 한번 숨을 삼켰다. 주변의 공기가 아플 정도로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이 느껴졌다.

왕비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국왕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왕비와 클로타르를 데리고 들어온 기사단장이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국왕은 그녀를 조롱하듯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클로타르?”

그 말에 클로타르가 국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 밑이 푹 들어간 그의 얼굴은 초췌하고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국왕은 한때 아끼던 아들의 그런 몰골을 보면서도 티끌만큼의 동정심도 내비치지 않았다.

클로타르는 이를 악물고 국왕과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러나 클로타르의 눈에서 활활 타오르던 분노는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는 맥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다.

“국왕 전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클로타르!”

그 뜻밖의 대답에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왕비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클로타르?”

클로타르는 분명하게 말했다.

“저는 제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겠습니다. 이후로도 르샤베의 왕위에 그 어떤 사심도 갖지 않겠다고 아라크 신께 맹세하겠습니다.”

“클로타르!”

왕비가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내질렀지만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흡족한 얼굴로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좋아. 아스터, 너는 내 뜻을 이어받겠느냐?”

국왕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스터는 즉시 국왕에게 다가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손을 잡았다.

“전하의 뜻을 이어받겠습니다.”

아스터는 주름진 국왕의 손에 입을 맞췄다.

“어질고 현명한 왕이 되어라.”

“명심하겠습니다.”

“이것은 나의 부왕께서 남겨주신 것이다. 찬찬히 읽고 그 뜻을 따르도록 노력하거라.”

“가슴에 새기고 받들겠습니다.”

아스터는 국왕이 건네주는 금장을 입힌 작은 책을 조심스럽게 건네받았다.

본래 르샤베의 국왕들은 다음 국왕이 될 자신의 후계자에게 한평생 자신이 왕으로서 느꼈던 경험담과 자신의 후계자가 앞으로 이뤄야 할 대업에 대해 글을 남겼다. 일종의 유언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그 글을 책으로 펴내 다음 왕이 대관식 때 전해 받도록 했다.

국왕은 아스터를 위해 따로 글을 쓰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가 단순히 아스터에게 관심과 애정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지금의 국왕은 차갑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런 국왕마저도 라베인의 핏줄이 대대로 르샤베 왕국을 지배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음 대에서 왕실이 무너진다면 그건 자신의 실패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당장 자신이 잘못되리라고는 생각을 못 해 미리 글을 써두지 않은 데다 오늘은 그럴 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다.

국왕은 냉소를 흘리며 자신의 가족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고 안색은 창백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자리에서 아스터에게 책을 건네며 양위의 뜻을 밝힌 것은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였다.

“르샤베의 다음 국왕이 될 내 아들은 아스터 시엘라 라베인이다. 아라크 신께서 너의 앞날을 축복해 주실 것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아스터는 그저 머리를 숙였다.

“아…….”

지켜보고 있던 마리안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장면이기도 했고, 그래서 더욱 감개무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는 아스터가 어째서 담담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애정은 없어도 국왕이 다음 왕으로 자신을 내세우리라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리안은 도무지 국왕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가 정식으로 이렇게 공표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실상 국왕은 왕위 계승을 놓고 아스터와 클로타르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길 바라지 않았다. 아스터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한평생 일궈온 대업이 그로 인해 물거품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왕비가 감히 자신의 뜻을 거슬러 클로타르를 왕으로 내세우는 작태를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왕비가 클로타르를 포기하지 못해 그를 감싸고도는 것을 지금껏 방관하긴 했지만, 더 이상 그녀가 왕위 계승에 개입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지금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 라베인 왕가의 권위가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이 해와 달의 성역에서 자신의 뜻은 아스터에게 있음을 확고히 밝혔다.

“이로써 아스터 시엘라 라베인이 정당한 계승 절차를 통해 르샤베의 28대 왕으로 즉위했음을 선언하노라.”

그 말에는 마리안과 기사단장을 비롯해서 클로타르마저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왕비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국왕을 노려보았다.

“어머니.”

그 모습에 눈에 띄게 당황한 것은 뜻밖에도 클로타르였다.

“그만하세요.”

그는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서 자신의 어머니를 다독이려 했지만 왕비는 눈에 독기를 가득 담고 클로타르마저 노려보았다.

“너야말로 이게 무슨 짓이냐? 어떻게 저런 것에게 왕위를 넘겨준다고 할 수가 있어? 클로타르, 바로 너란 말이다. 너야말로 차기 국왕에 어울리는 사람이야.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네가 포기할 수 있어?”

극도로 흥분한 왕비는 클로타르를 흔들며 소리쳤다. 늘 차갑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그녀는 뜨거운 눈물마저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클로타르는 냉정했다. 그는 자신을 흔드는 왕비의 양팔을 잡으며 물었다.

“제발 이제 그만하세요. 어머니는 저를 끝내 죽게 하실 생각입니까?”

순간 상기되어 있던 왕비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으로 클로타르를 보고 그 다음으로 국왕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며 국왕은 냉담하게 말했다.

“그대는 라베인 왕가가 왕좌를 놓고 그동안 얼마나 처절한 골육상쟁을 벌여왔는지 잊고 있는 것 같군.”

“…….”

왕비도 그 말에는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자신이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국왕은 아스터와 손을 잡고 클로타르를 죽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클로타르를 바로 죽일 것이다.

마리안은 씁쓸한 기분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사실 마리안으로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귀족이라고는 해도 평민과 다를 바 없이 성장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바빴던 마리안이었다. 그녀에게 왕위를 둘러싼 왕족들의 치열한 싸움 같은 것은 머나먼 세계의 이야기였다.

그런 마리안의 감각으로는 왕좌 때문에 다른 가족을 죽일 수 있다는 현실이 받아들이기 쉬울 리 없었다.

그래서 아스터를 괴롭혔던 클로타르를 증오하면서도 그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마리안이 원한 것은 클로타르가 아스터를 고통스럽게 한 만큼의 죗값을 치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마리안은 눈앞의 국왕이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도 남을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 더 왕비가 고집을 피운다면 그는 정말로 클로타르를 죽일 것이다. 그런 것이 바로 라베인 왕가가 찬란한 왕관을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되풀이해 온 피비린내 나는 역사였다.

‘그래서 클로타르가…….’

그래서 클로타르는 즉시 무릎을 꿇고 왕위를 포기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탑 안에 유폐되어 평생을 보내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대로 끌려 나가 죽음을 당하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더욱이 아스터는 클로타르에게 그 어떤 신체적 위해를 가한 적이 없었다. 차라리 클로타르가 여기서 깔끔하게 왕위를 포기하면 언젠가는 탑에서 나오게 해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영리한 클로타르라면 그 모든 계산을 끝내고 국왕의 권위 앞에 복종한 게 분명했다.

“아아…….”

그때 왕비가 긴 탄식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그녀가 울기 시작했다.

마리안은 착잡한 기분으로 왕비를 바라보았다. 동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이 시원한 것도 아니었다.

아스터가 이대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기쁨이 앞서지도 않았다. 오히려 마리안의 가슴속을 채우고 있는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아스터와 그녀 자신이 국왕의 제거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안도감 말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자 씁쓸함은 더욱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왕비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시끄럽군. 대체 언제까지 눈물을 보일 것인가?”

국왕이 차갑게 내뱉었지만 그의 그런 말투가 왕비를 더욱 서럽게 만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물은 국왕의 목소리에 그대로 쏙 들어가고 말았다.

“클로타르, 새로운 국왕의 앞에 신하의 예를 다한다고 맹세하라.”

왕비는 너무나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 말에 클로타르는 묵묵히 아스터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저 클로타르 리엘 라베인은 새로운 르샤베 왕국의 국왕이신 아스터 시엘라 라베인 전하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될 것을 아라크 신의 앞에서 맹세합니다.”

클로타르는 이제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맹세를 받아들인다.”

간결하게 대답한 아스터가 이내 덧붙였다.

“클로타르, 나는 네가 내게 한 짓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다.”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하지만 아스터는 담담하게 자기가 할 말을 다 했다.

“그러나 네가 내게 대적하려 하지 않는다면 아라크 신 앞에 맹세코 널 죽일 생각은 없다. 그게 나의 뜻이다.”

“…전하의 넓디넓은 아량과 배려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결국 클로타르는 바닥에 이마를 대고 굴종을 맹세했다.

클로타르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왕비는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클로타르를 향해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내딛다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깜짝 놀란 클로타르가 얼른 왕비를 받아 안았다. 다행히 왕비는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탈력감에 몸에서 힘이 빠졌을 뿐이었다.

국왕은 그런 모습을 차갑게 바라보며 클로타르에게 명했다.

“네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쉬게 하도록. 오늘 하루만큼은 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좋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클로타르가 허리를 숙이고 대답하자 국왕은 여전히 차가운 어조로 덧붙였다.

“네 외가는 물론 처가의 힘을 믿고 몸을 숨기거나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는 않길 바란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저는 오늘 밤 내내 어머니의 궁에 조용히 머물겠습니다.”

“좋아.”

클로타르가 이제는 힘이 빠진 나머지 눈을 감고 있는 왕비를 부축해 해와 달의 성역에서 느린 발걸음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국왕은 다시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이제 모두 끝난 것 같구나. 지금 이 시간부터 이 나라의 왕은 바로 너다, 아스터.”

말뿐만이 아니라 국왕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아스터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 광경에는 마리안은 물론 아스터조차 깜짝 놀랐다. 당황한 아스터가 만류하며 부축하려 하자 국왕은 그 손길을 거부했다.

그는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무척 괴로웠는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 숨을 고르자 다시금 차갑게 말했다.

“대관식을 준비하게 하겠다. 왕관도 개조하고 의전 의상도 마련해야 하니 아마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려면 반년은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장 내일부터 정사를 돌보는 일은 너의 몫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아스터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피곤하구나. 먼저 돌아가도 좋다. 나가면서 의사를 들여보내라고 전하라.”

그러자 아스터가 처음으로 머뭇거리며 물었다.

“허락해 주신다면 제 치유력으로 전하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국왕은 고개를 저었다.

“네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미 네가 오기 전에 세 명의 신관에게서 충분히 치유를 받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신성력이 아니라 나를 돌봐줄 의사다.”

“…그래도 혹시 제 힘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바로 치유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스터가 주저하며 말하자 국왕은 그날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아스터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미소였다.

“네 힘은 필요하지 않다. 지금껏 너를 돌본 적이 없는데 죽을 날이 다 되어 네게 도와달라고 하고 싶지는 않구나.”

그 말에 아스터는 크게 당황했다.

“전하…….”

“네 비와 함께 이제 그만 가보거라.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귀족들에게 이제부터 네가 이 나라의 왕이라는 사실을 공표하거라. 나를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국왕은 단호하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그는 무척이나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아스터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황망한 눈으로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리안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녀는 아스터에게 다가가 긴장으로 차가워진 그의 손을 잡았다.

“전하께서 쉬실 수 있도록 이제 그만 돌아가요.”

그제야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국왕 부처는 이전 국왕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해와 달의 성역을 빠져나왔다.

문밖으로 나가자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재상과 몇몇 귀족들이 베이퍼스 공작과 마법사들의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선왕의 지시를 받고 와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새로운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아스터 국왕 전하 만세!”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재상이었다. 그의 말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귀족과 병사 일동이 모두 아스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모두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일어나시오.”

아스터는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르샤베 왕국의 국왕은 나 아스터 시엘라 라베인이오. 경들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르샤베 왕국을 위해 내게 충성을 바치리라 믿겠소.”

“아라크 신께 맹세코 전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아스터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맹세를 받았다. 그는 모든 맹세가 끝나자 해와 달의 성역을 바라보며 잠시 한숨을 쉬고 말했다.

“선왕 전하께서 힘겨워하고 계시니 속히 의사를 부르도록 하시오. 재상은 내일 아침 9시에 나와 이야기를 합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국왕 전하.”

아스터는 먼저 귀족들을 물린 뒤 베이퍼스 공작과 블랑디르 백작, 그리고 두 명의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베이퍼스 공작과 블랑디르 백작은 감격에 젖은 얼굴이었고, 시르안은 늘 그렇듯 무심했으며 위르나는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즉위를 경하드립니다, 전하.”

이들 중에서는 베이퍼스 공작이 가장 먼저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축하의 말들이 이어지자 아스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이 모든 일이 전부 여러분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앞으로도 왕국을 다스리는 데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스터의 말에 다시 한번 남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내일 오전 중에 재상과 면담한 뒤 회의를 할 겁니다. 여러분과는 오후에 이야기를 했으면 합니다. 점심시간 이후에 왕궁으로 와주십시오.”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마리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왕비 전하, 궁으로 돌아갈까요?”

그가 웃으며 손을 내밀자 그제야 지금까지 긴장하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들은 모두 정말로 기쁘다는 얼굴로 아스터와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그 따뜻하고 밝은 분위기에 마리안도 지금까지의 긴장을 풀고 얼굴 가득 밝은 미소를 지었다.

“네, 국왕 전하.”

그녀는 아스터의 손을 붙잡으며 생긋 웃었다.

문득 아스터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눈을 가리고 칼멘 후작의 마차를 타고 탑에 가서 클로타르와 처음 대면했을 때 어떤 공포를 느꼈었는지, 그리고 피에 젖어 의식을 잃은 아스터를 보고 얼마나 경악했었는지.

그 모든 일이 지금은 아득히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왕궁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아스터와 마리안은 각자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맞잡은 두 손을 꽉 잡고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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