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힌 왕자님-2화 (2/24)

2장 동쪽 탑의 주인

마리안이 겁먹은 얼굴로 피투성이 남자를 바라보다가 칼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핏기가 싹 가셔 창백했고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칼멘은 그런 마리안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천천히 말했다.

“네가 앞으로 시중을 들 분이다.”

마리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쓰러져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금 보니 그는 거의 넝마가 되어버린 얇은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등에서부터 갈가리 찢어져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 제가요? 저분에게는 제가 아니라 의사가 필요한 게 아닌가요?”

마리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의사는 조금 있으면 올 거다. 나중에는 치유 능력이 있는 신관도 올 테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마리안의 눈이 동요로 흔들렸다. 대체 무엇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거의 빈사 상태였다. 그러나 칼멘의 목소리는 침착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네가 할 일은 저분을 돌보고 저분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일단은 더운물을 가져오게 할 테니 의사가 올 때까지 상처를 돌보고 있도록.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천천히 알려주겠다.”

그렇게 말한 칼멘은 마리안이 붙잡을 새도 없이 방을 나가버렸다. 밖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마리안은 돌처럼 굳어서 쓰러진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남자의 팔다리는 수갑으로 묶여 기다란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설마 죄수인 거야?’

갑자기 마리안의 눈에 두려운 빛이 떠올랐다. 당연하게도 마리안은 가까이에서 죄수를 본 적이 없었다.

소득이 형편없이 줄어들면서 위세는 예전만 못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일상을 영위해 가던 알리체 남작가는 마리안이 열두 살 때 알리체 남작이 병으로 쓰러지면서 본격적인 몰락의 길을 걸었다.

오랜 시간을 병석에 누워있던 아버지가 끝내 세상을 떠난 것이 불과 5년 전의 일이었다. 마리안은 그때 열일곱 살이었다. 그렇게 마리안은 열일곱의 나이로 가장이 되었다.

그 후로 돈을 벌기 위해 안 해본 일이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영지민들을 독려해 영지에서 수확한 농작물을 내다 파는 일을 했다. 영지를 잃고 그마저도 불가능해졌을 때는 귀족가의 영애로서 교육받은 경험을 살려 부유한 평민 가정에서 가정교사로 일했다.

하지만 아직 성년도 되지 못한 어린 아가씨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마리안이 아무리 노력해도 돈은 늘 부족했다.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리안은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실력이나마 삯바느질도 해보고, 부모가 일하러 나간 인근 평민 가정의 어린아이들을 돌봐주기도 했다.

저택을 돌보는 고용인들의 월급마저 내줄 수 없게 되어 그들을 모두 내보낸 뒤로는 직접 하녀처럼 물을 긷고, 청소와 빨래를 했다.

그처럼 힘들고 고생스러웠지만 마리안이 했던 일들은 모두 합법적이고 안전한 것들이었다. 남의 돈을 벌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서러울 정도로 겪어봤지만 다행스럽게도 범죄와 연관된 적은 없었다.

따라서 남자가 범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왈칵 두려움이 솟구쳤다. 마리안에게 범죄란 늘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다.

‘이 사람은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지?’

남자의 옷이 모두 갈가리 찢긴 데다 등가죽이 벗겨져 피가 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척 심한 매질을 당한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상처가 심각한 것을 보면 아마 채찍질을 당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젊은 남자가 쇠사슬에 묶여 피 칠갑이 될 때까지 채찍질을 당했다면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도 왕세자와 후작이 가둬뒀을 정도라면 반역죄에 해당할 만큼 엄청나게 무거운 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마리안이 남자가 무섭고 꺼려지는 것은 당연했다.

“으…….”

그때 괴로운 듯한 작은 신음이 들렸다.

마리안은 화들짝 놀라 남자에게서 떨어졌지만, 이내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의식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는지 조금씩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저렇게나 아파하는데…….’

남자는 정말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선량하고 다정한 성격의 마리안으로서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사람을 도저히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그래서 마리안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남자의 곁에 주저앉았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마리안의 얼굴이 한층 더 찌푸려졌다.

남자의 상태는 빈말로도 괜찮다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팔다리에 수갑과 기다란 쇠사슬이 채워져 있는 바람에 손목과 팔목이 피멍으로 얼룩져 있었고, 살점이 찢겨나간 등은 너덜너덜했다.

마리안은 상처에서 배어 나오는 선연한 피 냄새에 속이 거북해졌다. 피가 멎지 않고 줄줄 흘러내리는 상처를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등이 아려올 지경이었다.

남자는 작게 앓는 소리를 낼 뿐 엎어진 채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마리안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칼멘이 한시라도 빨리 사람을 보내주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이 방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 어떡하지…….”

그녀는 여전히 흔들리는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돌과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방은 처음에는 텅 비어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잘 살펴보니 방 한구석에 깨끗한 물이 담겨있는 주전자와 세숫대야 그리고 마른 수건이 놓여있었다.

물이 얼음처럼 차가운 것이 흠이긴 했지만 남자의 등에 난 상처를 빨리 닦아내고 어떻게든 지혈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을 다잡은 마리안은 세숫대야에 물을 부었다. 마른 수건 한 장을 물에 적신 뒤 최대한 물기를 짜냈다.

하지만 수건을 들고 남자에게 다가가도 도저히 상처를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보다는 출혈이 줄어들었지만 남자의 등에서는 여전히 새빨간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마리안은 이렇게나 심한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도 다쳐본 적이 있었지만 고작해야 저녁 식사를 준비하다가 실수로 손을 몇 번 베었던 것이 전부였다.

“차가울 텐데…….”

물기를 최대한 짜내긴 했지만 물수건도, 그리고 그것을 들고 있는 자신의 손도 얼음장 같았다.

마리안은 남자가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손을 비벼서 따뜻하게 한 뒤, 상처에 자극이 가지 않도록 남자의 몸을 조금 움직여 보았다. 일단 호흡이 좀 더 편해질 수 있도록 자세부터 바꿔줘야 할 것 같았다.

“아…….”

마리안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안 그래도 쓰러져 있는 남자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보면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서 확인한 남자의 얼굴은 왕세자와 너무나 똑같았다.

높은 콧날, 새하얀 뺨, 각진 턱선, 모양 좋은 붉은 입술마저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곳곳에 피가 튄 남자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푸르게 보일 지경이었고, 채찍질을 당하며 입술을 깨물었는지 입술이 전부 다 터져 피딱지가 맺혀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날렵해 보이는 한편으로 강인하게 느껴졌던 클로타르에 비하면 남자는 상당히 마른 체격이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마리안은 혼란에 빠져 저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 클로타르와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쇠사슬에 묶여 피를 흘리는 남자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불현듯 눈앞의 남자가 클로타르의 형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나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쌍둥이 형제가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았다.

마리안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갔다. 알아서는 안 되는 엄청난 비밀을 알아버린 것 같다는 공포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으…….”

그때 남자의 잇새로 앓는 소리가 한 번 더 흘러나왔다.

마리안은 그제야 화들짝 놀라서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칼멘 후작님이 의사가 금방 올 거라고 했어요.”

마리안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남자의 갈가리 찢긴 셔츠를 벗겨냈다. 일단 환부를 깨끗하게 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가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데다 피가 엉긴 천 조각이 제멋대로 피부에 달라붙어 있어서 셔츠를 벗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간신히 넝마조각 같은 셔츠를 벗겨냈을 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두세 사람의 발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기사 둘과 의사 그리고 뜨거운 물이 담겨 김이 나는 커다란 주전자를 들고 있는 하인처럼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저어…….”

마리안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먼저 말을 건 쪽은 의사로 보이는 남자였다.

“아, 옷을 벗겼군요. 잘했어요.”

의사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마리안이 뭘 어떻게 할 새도 없이 기사 두 사람이 다가와 남자를 양옆에서 일으켜 세웠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당황한 마리안이 묻자 희끗희끗한 갈색 머리의 의사가 그녀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다른 방으로 옮겨서 치료를 시작할 겁니다. 따라와요.”

의사가 고갯짓을 하고는 남자를 옮기는 기사들을 따라 성큼성큼 방 밖으로 나갔다.

마리안은 여전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얼른 사람들의 뒤를 따랐다.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칼멘은 몇 겹으로 된 검은 천으로 마리안의 눈을 가렸다. 하지만 지금 찾아온 사람들은 마리안이 주위를 살펴보는 것에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마리안은 종종걸음으로 사람들을 뒤따르면서 열심히 주변을 바라보았다. 짐작했던 대로 마리안이 눈을 가리고 걸어 올라왔던 이곳은 종탑 같은 건물의 나선형 돌계단이었다.

사람들이 남자를 부축한 채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앞서가는 사람들을 따라 계단을 여러 개 더 올라가자 병사 두 명이 지키고 있는 쇠창살로 만들어진 철문이 나타났다. 철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일행을 확인하고는 큼지막한 열쇠로 철문을 열었다.

그 철문 안쪽으로 계단을 몇 개 더 올라가자 의사가 두꺼운 나무로 만든 문을 열었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돌과 벽돌로 만들어져 있지만 그래도 비교적 사람이 사는 곳처럼 보이는 방이 나타났다. 자그마한 창문이 여러 개 있어서 방 안은 비교적 밝았다.

기사들이 의사의 지시에 따라 남자를 방 한구석의 침대에 엎드린 자세로 눕히는 모습을 보며 마리안은 재빨리 창밖의 풍경을 확인했다. 그것만으로도 마리안은 자신이 성채의 탑 꼭대기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방이 있는 맞은편에 또 다른 탑이 우뚝 솟아있었다. 아마 저쪽 탑에 있는 방에서 클로타르를 만난 것 같았다.

하지만 창밖에 오래도록 시선을 주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남자를 눕힌 기사 두 명이 나가버리고, 하인으로 보이는 남자도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를 옆에 놓은 뒤 마찬가지로 기사들을 따라 나간 것이다.

이어서 다시 한번 밖에서 철문이 잠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저어…, 의사 선생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뜨거운 물수건으로 상처를 깨끗이 닦아봐요.”

마리안은 의사에게 지금 상황을 물어보려고 했지만 의사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고 지시했다.

마리안은 의사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고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얼른 방 안 구석에 놓인 세숫대야를 가져와서 뜨거운 물을 붓고 수건을 담갔다. 최대한 물기를 짜내고 다가가자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은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좀 더 밝은 곳에서 보니 남자의 등에 난 상처는 더욱 처참했다. 등판의 살점이 거의 다 찢겨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온몸에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대체 이런 상처를 입으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마리안은 손을 떨면서도 상처를 살살 눌러 벌써 찐득하게 굳어가는 피를 닦았다.

남자가 몇 번인가 몸을 움찔거리며 떨어서 그때마다 화들짝 놀라긴 했지만, 남자는 더는 움직일 기운이 없는지 그 이상으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깨끗한 수건을 세 장쯤 써서 간신히 환부를 닦아냈다. 의사가 그녀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하고는 들고 온 왕진 가방에서 약과 다양한 기구들을 이것저것 꺼내놓았다.

의사가 진찰하고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마리안은 멍하니 구경만 할 수 없어서 다시 따뜻한 물수건을 만들어 남자의 몸을 마저 닦았다. 마리안이 남자의 뺨과 이마에 튄 피를 닦고 팔다리를 닦는 동안 의사는 환부에 약을 발랐다.

“날 좀 도와주겠습니까?”

의사의 말에 마리안이 돌아보자 그는 면적이 넓은 붕대를 마리안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붙잡고 있을 테니 붕대를 감아줘요.”

마리안은 얼른 다가가 붕대를 받아 들었다. 의사가 남자의 양팔을 들어 상체를 조금 들어 올렸다. 마리안은 얼른 그의 등과 가슴에 붕대를 감았다.

“솜씨가 좋군요.”

마리안이 붕대를 매듭짓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의사가 칭찬하듯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초보자치고는 그녀는 솜씨가 꽤 좋았다.

마리안은 의사를 돌아보았다. 칭찬이라고 하기에는 의사의 목소리가 지극히 건조했고 얼굴 또한 무표정했다.

“상처에 딱지가 내려앉을 때까지 당분간 매일 약을 바르고 규칙적으로 붕대를 갈아주도록 하세요. 저쪽에 설렁줄이 있는 게 보이죠? 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저걸 당기면 아래에서 사람들이 가져다줄 겁니다. 붕대나 수건 같은 것도 충분히 가져다줄 거예요. 약은 이걸 바르면 됩니다. 깨끗한 손으로 환부에 얇게 펴 바르면 돼요. 아까 내가 한 걸 잘 봤겠죠?”

의사가 약병을 흔들어 보이는 모습에 마리안은 마른 침을 삼켰다.

“저어, 그것만으로 되는 건가요?”

남자의 모습이 너무 처참해서 마리안은 주저하며 물었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다고 해결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자 의사가 그녀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가방에서 약병을 하나 더 꺼냈다.

“아마 며칠 동안은 열도 심할 겁니다. 통증을 호소하면 한 숟가락씩 먹게 해요. 하지만 상당히 독한 약이니 하루에 세 번 넘게 복용하면 안 됩니다.”

마리안은 약병을 받아든 채 의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저 남자가 누구인지, 왜 저런 상처를 입은 것인지, 자신은 여기에 왜 끌려왔으며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전부 질문하고 싶었다.

의사의 옷차림은 수수해 보였지만 옷감의 재질은 매우 고급스러웠고 마감도 꼼꼼했다. 그가 들고 있는 왕진 가방 또한 질 좋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데다 꺼내 보인 각종 의료 도구와 약병도 관리가 매우 잘 되어있었다. 의사는 적어도 귀족 이상의 사람만 상대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 의사가 돌보는 상대라면 눈앞의 남자는 살인이나 강도 같은 중범죄를 저지른 죄수 같지는 않았다. 아니, 애초에 왕세자와 같은 얼굴을 가진 남자가 그런 범죄자일 리 없었다.

“저어, 의사 선생님. 제가 오늘 갑자기 이곳에 와서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데요. 혹시 대답해 주실 수 있나요?”

몇 번 더 마른 침을 삼키던 마리안이 간절한 눈으로 의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의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 이름은 베르트입니다. 하지만 내 이름 빼고는 아가씨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게 없군요. 내게는 그럴 만한 권한이 없으니까요.”

“그, 그러면 베르트 선생님께서는 언제 다시 오시는 건가요? 설마 이대로 더는 안 오시는 건 아니겠죠?”

“주기적으로 상태를 확인하러 오긴 할 겁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처치는 완벽하게 끝났으니 간호만 잘한다면 별다른 일은 없을 겁니다.”

마리안은 절박한 얼굴로 물었다.

“저 상처가 낫는 데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아가씨가 2주 정도만 상처를 돌보면 될 겁니다. 어느 정도 호전된 뒤에는 신관이 올 테니까요.”

“신관이요?”

르샤베 왕국의 신관은 성스러운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신관이 그러한 힘을 가진 것은 아니고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위급 신관에 한정되어 있었다.

자연히 병을 치료하는 데 신관을 부르는 것은 신분이 매우 높고 부유한 귀족이나 왕족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리안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관님이 오실 수 있다면 왜 당장 오시지 않는 거죠? 지금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당장 오셔서 치료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자 베르트가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표정을 드러냈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신관은 빨라도 열흘 뒤에나 오게 될 겁니다. 지금으로서는 이유를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겁니다.”

그의 어조에는 그 이상 묻지 말라는 단호함이 담겨있었다. 마리안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상처가 꽤 심하긴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분에게는 당장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니까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의사는 마리안을 다독이듯 그렇게 말하고는 방을 나섰다. 나무 문 너머에서 다시금 철문이 철컹하는 소리를 내고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마리안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 상처가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가 아니라고?’

마리안이 보기에 남자의 등에 난 상처는 매우 심각했다. 운 나쁘게 상처가 덧나기라도 하면 사경을 헤매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남자에게는 그 정도로 심하지 않다니…….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지만 의사가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기 때문에 마리안은 일단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아무런 지식이 없는 자신이 앞서 걱정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의사의 말을 믿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아…….”

마리안은 의사가 사라지자 잠시 망설이다가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기사들이 남자를 눕히면서 손목과 발목의 쇠사슬을 벗기고 갔는데, 수갑과 사슬이 채워져 있던 곳의 피부가 피멍이 들어 점점 새카맣게 변해가고 있었다.

남자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 것을 보며 마리안은 담요를 좀 더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이 방은 그렇게까지 한기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남자는 열이 나서 추울 것이다.

그래도 치료를 받은 덕분인지 남자는 아까보다는 한결 편해 보였다. 초라한 침대이긴 해도 차갑고 딱딱한 돌바닥에 비하면 엎드려 누워있는 편이 몸도 훨씬 편할 터였다.

손을 뻗어 남자의 이마를 한 번 만져보았다. 뜨뜻했지만 아직 심각하게 열이 나는 것 같지는 않아서 마리안은 조금 안심했다.

마음을 놓자 그제야 방 안의 풍경이 눈에 새로 들어왔다. 이 방은 탑의 최상층 같았다. 아래층에 있던 감옥 같던 방보다는 훨씬 넓었고, 좁다란 유리창이 앞뒤 좌우로 다섯 개가 나있었다.

유리창 덕분에 채광이 꽤 좋아서 어느덧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햇빛이 방 안으로 여과 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럭저럭 필요한 시설은 다 갖춰져 있어서 불을 피울 수 있는 난로와 굴뚝도 있었고, 간단한 세면 시설도 있었다.

침대 근처와 벽난로 근처의 바닥에는 한기를 막기 위해서인지 빛바랜 카펫이 두툼하게 깔려있고, 창가의 한쪽 구석에는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탁자도 있었다.

하지만 방 안은 여전히 살풍경했다. 돌과 벽돌 그리고 회칠한 벽으로 만들어진 널찍한 방 안에 최소한의 필요한 물품만 놓여있어서 더욱 썰렁하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방 안을 다 둘러본 마리안은 이번에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시선을 끈 것은 아까 이 방에 처음 들어오자마자 확인한 맞은편에 있는 탑이었다.

‘저기가 제일 처음 갔던 곳이겠지.’

자신의 짐작이 맞는다면 왕세자 클로타르를 만난 곳이 아마 저 탑일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곳은 작은 성채로 보였다. 눈을 가리고 있긴 했지만 마차를 그렇게 오래 달렸던 것 같지는 않은데 이곳이 어디인지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아마 민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왕성 근방에서 수도를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바람이 불 때마다 출렁이는 끝없는 나무숲의 물결이었다.

마리안은 천천히 다섯 개의 창문을 돌아가며 주변을 살폈다. 위에서 내려다본 바로는 성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루켄의 3층 저택이 아무것도 없는 평원 한가운데 있었던 것처럼 이 성채도 수해(樹海)의 한가운데 있었다. 아마 말이나 마차 같은 교통수단이 있어도 길을 모르면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마리안은 왕성과 알리체가의 영지 밖으로 나가본 경험이 없었지만 왕성의 근처에 이만한 수해가 펼쳐져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칼멘의 마차는 마법을 이용해서 게이트를 통과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마리안의 눈을 가렸는지도 모른다.

‘5월인데도 이렇게 추운 걸 보면 왕성에서 북쪽으로 한참 올라온 게 아닐까.’

마리안은 르샤베 왕국의 북쪽 지역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특별히 떠오르는 지명 같은 것은 없었다. 사실 그녀는 북쪽 지역에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난 여기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걸까?”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눈앞의 남자가 어째서 탑에 감금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이제는 그녀 자신도 탑에 갇힌 셈이었다.

루켄에게 팔려 갈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루켄에게서 받은 계약서를 찢을 때 마리안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어난 일은 그녀의 예상을 가뿐하게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침대 위에 죽은 듯이 엎드려 다소 거칠게 숨을 쉬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뜯어봐도 그의 얼굴은 왕세자 클로타르와 똑같았다.

왕성에서 떨어진 비밀스러운 탑에 갇혀있는 왕세자와 얼굴이 판박이인 남자.

더욱이 그는 평범하게 갇혀있는 것도 아니고 등 전체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채찍질을 당해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아마도 남자의 존재는 르샤베 왕국 내에서도 극비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마리안이 앞으로 살아서 이 탑을 나갈 수 있을지의 여부는 알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머리 아파.”

마리안은 작게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평범하게 허드렛일을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루켄을 따라나선 것이지만 그때 자신은 크나큰 실수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너무나 지긋지긋했다. 밤잠도 못 자면서 삯바느질을 하고, 인근의 아이들을 모아다가 가르치거나 돌보고, 하녀처럼 손이 부르트도록 일하고,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직접 텃밭을 가꾸는 것까지는 그래도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비록 몸은 힘들고 괴로웠지만 마리안은 아직 젊었고, 별 도움은 되지 않아도 어머니와 동생은 그녀를 도우려 노력했다. 그래서 그저 수중에 돈이 없어 가난하기만 한 거라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루켄에게 진 빚은 달랐다. 이자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도저히 갚을 재간이 없었다. 마리안이 나서지 않았다면 루켄은 정말로 어린 리아나를 끌고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악덕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빚진 상황에서는 아무도 나서서 도와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리안은 잘 알고 있었다.

‘후회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인걸.’

마리안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루켄을 따라 나선 것을 후회하기에는 그녀는 이미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 후회해 봐야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덧 해는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서쪽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마리안은 잠시 넋을 놓고 서쪽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전에는 한 번도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와 본 적이 없었다. 높이로 보면 이곳은 왕성에서 가장 큰 바엘리안 성당의 종탑보다도 높아 보였다. 이런 곳에서 나무의 숲 사이로 저물어가는 해를 보는 것은 장관이라 할 만했다.

마리안은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게 어디냐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로 했다. 그런 사소한 장점이라도 찾아내지 않으면 불안하고 무서워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남자는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눈을 뜨지 못했다. 마리안은 몇 번이나 물에 적신 수건으로 땀이 배어나는 얼굴을 닦아주고, 춥지 않도록 담요를 조심해서 고쳐 덮어주었다.

중간에 병사 하나가 들어와서 난로에 불을 피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해가 떨어지자 5월인데도 불을 피워야 할 정도로 탑의 꼭대기 층은 매우 추웠다. 마리안은 담요를 하나 두르고 덜덜 떨면서 방 안의 공기가 빨리 훈훈해지기만을 기다렸다.

이어서 뜨거운 물을 가지고 올라왔던 하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2인분의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호화로움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가져다준 식사는 꽤 풍족했다.

마리안은 눈을 뜨지 않는 남자를 보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감자 수프와 하얀 밀 빵, 구운 채소, 소시지와 계란 등을 놓고 잠시 고민하다가 먼저 식사를 했다. 남자의 상태가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데다 종일 너무 긴장했던 탓에 허기가 졌다.

뜨거운 감자 수프를 한 그릇 다 비우자 비로소 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난로 앞에서 손을 쭉 펴며 마리안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계속 이 사람을 돌보려면 앞으로는 잠도 이 방에서 자야 하는 걸까.’

상대방이 비록 거동도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긴 했지만 낯선 남자와 밤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불편했다.

‘이름이라도 알면 좋을 텐데…….’

할 일이 없으니 생각만 많아졌다. 난로의 불꽃을 한참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남자의 상태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러고 난 뒤에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자 깜깜해진 하늘에는 온갖 별자리의 별들이 가득했다. 별이 너무 많은 나머지 당장에라도 쏟아질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척 아름다운 야경이었지만 마음이 불안한 탓인지 마리안은 그마저도 무섭게 느껴졌다. 별이 다 쏟아져 내리면 어떡하나 하는 어린아이나 할 법한 생각마저 들었다.

남자의 상태를 한 번 더 들여다본 뒤 마리안은 담요를 뒤집어쓴 채 난로 앞에서 꾸벅꾸벅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깨어난 것은 한밤중에서 새벽으로 넘어갈 무렵이었다. 반복되는 작은 신음에 깜짝 놀라 일어난 마리안은 순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지 못해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희미하게 꺼져가는 난로 불빛에 낯선 돌바닥과 탑의 방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녀는 번쩍 눈을 뜨고 자리에서 바로 일어났다.

남자가 작게 끙끙거리고 있었다. 이마를 짚어보자 열이 꽤 심했다.

“어쩌지…….”

잠시 갈피를 못 잡고 방 안을 헤매고 있는 마리안의 눈에 의사가 주고 간 약병이 들어왔다.

마리안은 조심스럽게 약을 한 스푼 따라 남자에게 가져갔다. 엎드려 있어서 입을 벌려 약을 흘려 넣기가 쉽지 않았다.

얼마나 짓씹었던지 피딱지가 얼룩진 입술 사이로 조심조심 약을 흘려 넣었다. 그러다가 잘못 넘어갔는지 남자가 심하게 기침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기침이었다.

“아…….”

순간 마리안은 너무나 당황하고 말았다.

“…어떡해. 저기, 괜찮으세요? 물을 좀 드시겠어요?”

등이라도 쓸어주면 좋겠지만 상처 입은 남자의 몸에는 감히 손조차 함부로 댈 수가 없었다.

그때 남자가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켰다. 마리안은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남자에게 손목을 붙잡혀서 그에게 끌려갔다.

“아!”

놀란 나머지 마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순간 마치 깊은 숲속에서 도사리고 있던 맹수에게 낚아채진 듯한 공포가 몰려왔다.

남자와 한방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게 불편하긴 했지만, 마리안은 내심 이렇게 상처를 입은 남자가 자신에게 당장 어떤 짓을 할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남자는 손목을 잡는 것만으로도 마리안의 몸을 자신의 쪽으로 단번에 끌어당길 수 있었다. 너무 쉽게 끌려가는 바람에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방 안은 상당히 어두워서 색상을 구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남자의 눈이 금색으로 번쩍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낮에 봤던 왕세자의 눈과 똑같은 금빛이었다.

하지만 클로타르의 눈이 파충류의 그것처럼 차갑고 섬뜩하다면, 남자의 눈은 포식자의 그것처럼 사납고 강렬했다. 사자의 앞발에 채인 작은 토끼가 아마 이런 기분일지도 모른다.

마리안은 잔뜩 얼어붙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금빛 눈이 마치 꿰뚫어 볼 것처럼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상처 입은 맹수가 인간을 바라본다면 저런 눈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신과 적대감이 가득한, 맹렬하게 사나운 시선에 가슴속이 선뜩해졌다.

남자에게서 짙은 피 냄새가 나서일까. 여기서 잘못했다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잡아먹힐 것 같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것은 마리안이 이성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아주 원색적인 공포였다.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저, 저는 마리안 알리체라고 해요.”

마리안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큰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남자의 눈에서 시선을 돌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시선을 돌리는 순간 바로 덤벼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 사납게 타오르는 눈을 똑바로 보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마리안은 필사적으로 말했다.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은 저를 마리라고 부르죠. 당신을 돌보기 위해 이곳에 왔어요.”

과연 자신의 말이 남자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리안은 가지고 있는 모든 용기를 다 쥐어 짜냈다.

“당신을 해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마리안은 남자를 자극하지 않고 그가 자신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말했다.

“조금 전에 드린 건 약이었어요. 베르트라는 이름의 의사 선생님이 주고 가셨는데, 하루에 세 번까지만 먹을 수 있는 진통제라고 했어요. 그걸 먹으면 조금 나아질 거예요.”

남자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마리안은 팔목이 매우 아프다는 것을 자각했다. 왼쪽 팔목이 여전히 남자에게 붙들린 상태로 그녀의 몸무게를 지탱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 이걸 좀 놔주시겠어요? 팔이 좀 아프네요.”

하지만 남자는 아프다는 마리안의 말에도 불구하고 한참이나 놔주지 않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남자의 모습은 마리안의 말에서 진위를 가리는 듯 보이기도 했고,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 갑자기 남자가 괴로운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목 안쪽 깊은 곳에서 신음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맹수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

실상은 마리안을 붙잡느라 등의 상처에 자극이 가해지자 고통스러워서 숨을 고르는 소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마리안은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바짝 굳어진 채 남자를 계속 응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놓아줬다. 마리안은 여전히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말했다.

“…고마워요.”

“…….”

대꾸하지 않는 그를 보며 마리안은 오른손으로 남자에게 붙들려 있던 왼쪽 손목을 감싸 쥐었다. 강한 힘으로 꽉 잡혀있었던 까닭에 손목이 꽤 아팠다. 아마 밝은 불빛 아래에서 보면 빨갛게 변해있을 것이다.

“필요한 게 있다면 말씀하세요. 혹시 배가 고프지는 않으세요?”

마리안은 떨지 않으려고 애쓰며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남자는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 입술을 달싹였다.

“물…….”

입술이 말라서인지 발음이 불분명했지만 분명 남자는 물을 찾고 있었다.

“잠시만요. 물을 드릴게요.”

마리안은 황급히 몸을 움직여 컵에 물을 따랐다. 가까이 다가가 컵을 남자의 입가에 대고 기울였지만 그는 물조차 마음대로 삼키지 못해 괴로워했다.

“으…….”

고통스러워하는 낮은 신음에 마리안은 자신도 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남자가 한 번 더 물을 마시려고 노력하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힘겹게 기침했다. 그러다가 침대 위로 무너지듯 쓰러지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마리안은 고민 끝에 먼저 수건에 물을 적셔서 그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놀란 듯한 남자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수건을 천천히 빨아보는 게 좋겠어요. 이 정도로는 갈증이 가시지 않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을 거예요. 천천히…….”

남자는 여전히 마리안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까처럼 사나운 눈빛은 아니었다. 그는 가만히 마리안이 입가에 대주는 수건을 입술로 물었다.

마리안은 조금 안도하는 기분으로 몇 번이고 수건을 적셔 그의 입술에 대주었다. 잔뜩 마른 입술이 간신히 부드럽게 젖어 들었을 때쯤 마리안은 스푼으로 천천히 남자에게 물을 떠주었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물을 마셨다. 남자가 그런대로 만족했을 때는 그도, 내내 긴장해 있던 마리안도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마리안은 남자가 다시 누울 수 있도록 도운 뒤 이불을 고쳐 주고는 이제는 꺼지기 직전인 난로에 장작을 몇 개 더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그 앞에 앉아 담요를 다시 둘렀다.

마리안은 최대한 담요로 자신을 감싸기 위해 애쓰며 몸을 웅크렸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무척 피곤했다.

시선을 돌리자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리안은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확신했다.

“눈 감고 쉬세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저도 여기서 조금 눈을 붙일 테니까…….”

왜 해치지 않는다는 말을 반복해서 내뱉었는지는 마리안도 잘 알지 못했다. 단지 남자를 안심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녀는 부드러운 말투로 덧붙였다.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부르세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괴로운 듯 몇 번인가 숨을 고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리안도 담요를 좀 더 고쳐 덮으며 모로 누웠다. 이대로는 잠들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난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고 말았다.

그래서 마리안은 그날 날이 밝을 때까지 고통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남자가 어둠 속에서 계속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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