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힌 왕자님-1화 (1/24)

탑에 갇힌 왕자님 1권#키쿠절갠

1장 팔려 가는 귀족 아가씨

“당신들이 아직도 명문 귀족인 줄 알아?”

와장창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낡은 대저택에서 중년 남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정말로 수중에 한 푼도 없어요. 열흘 뒤에 오시면 어떻게 해서든 빌린 돈의 일부라도 꼭 갚겠습니다.”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틀어 올린 알리체 남작 부인이 애원했지만 남자는 험상궂은 얼굴을 한층 더 구겼다.

“아니 진짜로 이분들이 말귀를 못 알아듣네. 출신이 워낙 고귀한 분들이라 나같이 미천한 것과는 쓰는 말이 달라서 그런가? 내가 지금 애들 장난하러 온 줄 알아? 내 돈 갚으라고, 내 돈! 지금 당장!”

고함을 지르는 남자는 루켄 바사먼이라는 고리대금업자였다. 육중한 덩치의 루켄이 얼굴까지 시뻘겋게 물들이며 주먹이라도 휘두를 듯 위협하자 남작 부인의 깡마른 어깨가 움찔거렸다.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 남작 부인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겁먹은 어린 동생이 울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던 알리체 남작가의 장녀, 마리안 알리체가 더는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제발 그만하세요. 돈을 안 갚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없어서 그러는 걸 어떡하라고요.”

“어쭈, 이것 봐라? 남의 돈 빌려 가서 떼어먹는 주제에 뭘 잘했다고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어? 야, 이걸 진짜, 확!”

눈꼬리를 치켜뜬 루켄이 당장 한 대 후려칠 것처럼 손을 올리자 남작 부인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마리안, 무슨 짓이니! 바사먼 씨, 정말로 죄송합니다. 딸아이가 뭘 몰라서 그러니 부디 용서를…….”

루켄이 혹시나 딸에게 행패라도 부릴까 봐 겁을 집어먹은 남작 부인이 어떻게든 딸을 뒤로 밀어내려 했지만 마리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이자를 제때 꼬박꼬박 냈잖아요. 단 한 번도 밀린 적이 없어요. 원금 상환 기간은 아직 8개월이나 남아있는데 갑자기 찾아와서 갚으라고 하면 어쩌자는 건가요?”

“에잇, 재수가 없으려니까.”

마리안의 항의는 정당했지만 루켄은 불쾌하다는 듯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지금은 이런 불한당 같은 남자가 찾아와 소동을 일으키고 있지만, 알리체 남작가는 3백 년도 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명문 귀족이었다.

작위는 그리 높지 않지만 영지에는 격조 높은 고성을, 왕성에는 무척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대저택을 소유한 것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불과 두 세대 전까지만 해도 왕성의 귀족들은 해마다 여름이 되면 알리체가의 대저택에서 열리는 음악 콘서트에 초대받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런 역사와 위엄을 갖춘 대저택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가래침을 뱉는 루켄을 보자 마리안은 분노로 숨이 막혀서 입술을 깨물었다. 낡아서 해진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손이 어찌나 힘을 줬는지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하지만 그 손은 더 이상 귀족 영애의 손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잔뜩 부르트고 거칠어져 있었다.

“이봐, 아가씨. 돈 빌려 갈 때 계약서 썼잖아. 열 달 후부터 원금을 같이 갚기로 했고.”

“이자가 열 달 뒤부터 이렇게 늘어날 거라고는 안 했잖아요. 원금의 8할이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자가 어디 있어요?”

“저기 계신 남작 부인께서 서명했잖아. 이게 눈에 안 보여? 당신 어머니가 서명했다고. 누가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 서명해 놓고 왜 이제 와서 딴소리야?”

루켄이 눈을 부라리자 마리안은 너무나 화가 나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기울던 가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급격하게 나빠졌다.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낡은 고성과 거대한 정원이 있는 대저택을 관리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유지비가 들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남작 부인이 급한 김에 여기저기서 돈을 빌린 것까지는 좋았지만, 제때 갚지 못하면서 알리체가를 위해 돈을 빌려주려는 사람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알리체가가 당장 파산하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작 부인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부여잡은 상대는 하필 악덕 고리대금업자였다. 그리고 마리안이 이들의 수법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알리체가는 파산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빚을 짊어지게 되었다. 결국 영지도 친척들에게 빼앗기다시피 넘겨 정리해야 했고 남은 것은 이 대저택 하나뿐이었다.

그동안 마리안은 빚을 갚기 위해 해보지 않은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자 때문에 마리안의 노력만으로는 돈을 갚을 재간이 없었다. 최후에는 저택을 관리하는 고용인들을 모두 해고하고 귀족다운 삶도 포기했다.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고 몸이 부서져라 일해서 근근이 살아가며 열심히 이자를 갚고 있었는데, 갑자기 루켄이 찾아와서 이제는 원금까지 한꺼번에 갚으라며 행패를 부리는 것이다.

너무나 억울했지만 상대는 채권자였다. 마리안이 분노로 몸을 떨면서도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못하자 고함을 질러대던 루켄이 갑자기 헛기침을 하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흠흠, 돈이 없으면 어떻게든 만들어볼 생각을 해야지 뻗대기나 하니까 서로 언성이 높아지잖아. 나도 연약한 여자들을 상대로 이러고 싶지는 않다고. 하지만 갖다 팔 물건이 없으면 몸이라도 팔아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아가씨?”

루켄이 징그러운 시선으로 마리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차피 이 집안에서 쓸모 있는 건 아가씨밖에 없잖아? 크기라도 좀 작으면 모를까 이 크고 낡아빠진 저택은 사 가려는 사람도 없을 테고. 마침 아가씨는 얼굴도 반반하고 몸매도 좋잖아. 고작해야 푼돈이나 받는 허드렛일 말고 돈이 될 만한 일을 해보라고.”

마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악덕 고리대금업자가 왜 갑자기 쳐들어왔는지 알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이 남자는 돈을 주고 그녀를 사기 위해 찾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만약 아가씨가 싫다면 말이야. 그래, 저 아이도 괜찮겠군. 아직 어리긴 해도 몰락한 귀족 가문의 꼬마 아가씨라고 하면 수요가 없는 건 아니거든.”

루켄의 손이 남작 부인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떨고 있는 어린 소녀를 가리켰다. 마리안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알리체 남작 부인은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열 살이 된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러자 루켄은 비열한 웃음을 띤 채 마리안에게 성큼 다가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럼 아가씨로 하지, 어때? 아가씨 정도라면 내가 비싸게 쳐주지.”

말뿐만이 아니라 루켄은 실제로 품 안에서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꺼내 마리안의 코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잘 생각해 봐, 아가씨. 어머니께서 몸도 안 좋은데 아가씨 형편에 의사는 어떻게 부를 거야? 저 어린것의 파리한 얼굴을 보라고. 어린애를 언제까지 굶겨가며 키울 수 있겠어. 아가씨가 우리 쪽으로 와주기만 하면 가족은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잖아, 안 그래?”

마리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장에라도 루켄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몸이 딱딱하게 굳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팔을 붙잡은 남자의 거친 손이 무척 기분 나빴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가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아득한 절망감이 마리안을 덮쳤다. 남자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점이 그녀를 더욱 괴롭게 했다.

새삼 마리안은 집안이 망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던 날에, 그리고 친척이나 친분이 있던 귀족들이 하나둘씩 그들을 외면했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긴 했었다. 빚을 진 알리체가의 영지를 가로채기 위해 친척들이 탐욕스러운 본색을 숨기지 않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절망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정말로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마리안은 그토록 힘들게 살면서도 집안이 망했다는 사실을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싫어도 인정해야 했다.

르샤베 왕국에서 명성 높던 알리체 남작 가문은 정말로 망했다. 그리고 마리안에게 남은 것은 부양해야 할 가족과 그녀의 능력으로는 갚을 수 없는 빚뿐이었다.

마리안은 한동안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침내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그녀의 눈에는 굳은 결심이 담겨있었다.

“좋아요. 당신과 같이 가겠어요.”

“마, 마리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니?”

깜짝 놀란 남작 부인이 비명처럼 외쳤지만 마리안은 루켄을 노려보며 물었다.

“나 정도라면 얼마나 쳐줄 거예요?”

루켄이 이를 드러내며 비릿하게 웃었다.

“아가씨 정도라면 남은 빚을 전부 탕감해 주지.”

루켄은 마치 물건을 감정하듯 마리안을 다시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보며 싱글거렸다.

“여기서 즉시 이 빌어먹을 계약서를 찢고 원금과 이자를 모두 갚은 걸로 해주지. 그리고 금화 50개를 더 얹어주겠어.”

“금화 50개를 더 준다고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돈에 깜짝 놀라는 마리안에게 루켄이 웃어 보였다.

“아가씨에겐 그럴 만한 가치가 있거든. 젊은 아가씨들 몸값이야 누가 사 가느냐에 달린 거니까.”

그 말에 일그러지는 마리안의 얼굴을 보며 루켄이 계속 말했다.

“얼굴까지 반반한 아가씨들 같은 경우에는 꽤 괜찮은 집안에 하녀로 들어가기도 하고, 늙은 재산가나 귀족의 애첩으로 팔려 가기도 해. 다들 처음에는 울며불며 가지만 생각보다 대우가 나쁘진 않단 말이지. 그런데 아가씨의 경우는 좀 더 운이 좋아.”

루켄은 눈을 찡긋거리기까지 했다.

“아가씨를 원할 만한 사람을 알고 있거든. 게다가 조건도 훨씬 좋지. 그러니 아가씨도 날 따라오면 그렇게 후회하지는 않을 거야. 어때? 금화 50개면 이 거대한 집을 돌봐줄 사람을 한두 명 정도 고용해도 몇 년은 버틸 수 있을 텐데. 어머니랑 동생이 좀 더 아늑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마리안은 루켄의 그 말에 생각을 정했다.

“가겠어요.”

차분하지만 단호한 대답에 루켄이 씨익 웃었다. 소름 끼치는 미소였지만 마리안은 그 미소를 무시한 채 루켄의 손에서 그가 흔들어 보인 계약서와 돈주머니를 낚아챘다.

루켄은 마리안이 계약서가 원본인지를 꼼꼼하게 확인한 뒤 세로로 가늘게 찢는 모습을 낄낄대며 보고 있었다.

마리안은 돈주머니를 열고 그 안에 든 금화가 정확히 50개라는 사실까지 확인한 뒤, 그것을 남작 부인에게 건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알리체 남작 부인은 뒷걸음질 치며 그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안 된다, 마리안. 이건 말도 안 돼. 난 그 돈을 받을 수 없어. 어떻게 나에게 딸을 판 돈으로 살라고 하는 거니? 이건 말도 안 돼.”

마리안은 표정을 굳힌 채 남작 부인의 손에 억지로 돈주머니를 쥐여주었다.

“받으세요. 전 괜찮아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자 루켄이 끼어들었다.

“그럼, 그럼. 당장은 힘들지 몰라도 시간이 좀 지나면 편지 같은 것도 보낼 수 있을 거야. 뭐, 당신 같은 귀족네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가난한 평민 중에서 자식을 팔아서 빚을 갚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고. 따지고 보면 귀족 나리들은 정략결혼으로 자식을 팔아버리니까 비슷하지 않아? 원래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인 거라고.”

마리안은 루켄의 말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남작 부인을 마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들으셨죠? 전 괜찮아요. 어떻게든 잘할 거예요. 자리를 좀 잡으면 연락할게요. 그러니까 제 연락을 기다리고 계세요. 몇 년이 걸리더라도 전 반드시 여기로 돌아올 거니까요.”

남작 부인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갑자기 더 늙고 지쳐 보였다.

동생 리아나마저 상황을 잘 모르면서도 눈물을 흘리며 마리안에게 매달렸다.

“언니, 언니. 안 돼, 우릴 버리고 가지 마. 언니가 가는 건 싫어.”

리아나의 말에 마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하지만 마리안은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리아나를 끌어안고 속삭이듯 말했다.

“언니는 꼭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언니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 리아나가 엄마 말씀 잘 들으면서 언니를 대신해서 엄마를 잘 보살펴 드려야 해. 알았지?”

“…응.”

아무리 어린아이라고는 해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다. 리아나는 눈물을 펑펑 쏟았지만 마리안에게 차마 그 이상 떼를 쓰지는 못했다. 그저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언니의 낡은 드레스 자락을 꼭 쥐고 있다가 어쩔 수 없이 놓았을 뿐이다.

마리안은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 남작 부인을 한 번 더 끌어안고는 루켄을 돌아보았다. 그가 씩 웃었다.

“가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루켄이 손을 내밀었다. 마리안은 별수 없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루켄이 마치 에스코트를 하듯 마리안을 이끌고 걸었다.

마리안은 루켄을 따라 걸으며 마지막으로 집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낡고 제대로 손질이 되지 않아 엉망인, 그러나 마리안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대저택의 익숙한 정경이 눈에 담겼다.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과연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현관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뒤편에서 남작 부인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통곡이 들려왔다. 마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집 밖으로 나오자 루켄이 알리체 남작가까지 몰고 온 마차를 가리켰다.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

언제 씨익 웃었냐는 듯 안면을 싹 바꾼 루켄이 위협하듯 말해서 마리안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돈을 받았으니까 그런 짓은 안 해요. 그러니 우리 엄마랑 동생도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줘요.”

“아가씨가 제대로만 해주면 그럴 일은 없어. 나라고 해서 어린애까지 내다 팔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런 건 꿈자리가 사납거든.”

루켄의 표정은 여전히 비열했지만 마리안은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인지 그 말만큼은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고리대금업자는 분명 비열하고 추악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마리안은 그가 자신에게 얼마든지 더 심하게 굴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허드렛일을 하면서 가난한 평민 아가씨들이 어떤 수모를 겪는지 질릴 정도로 봐왔던 마리안이었다.

마리안이 마차에 올라타자 루켄이 바로 마부석에 뛰어올라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마리안은 알리체가의 대저택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동화 속의 요정들이 사는 것처럼 아름다웠던 정원에는 잡초가 엉망으로 자라나 있었다. 저택은 여기저기 창문이 깨지고 돌조각이 떨어져 나간 외관 탓에 당장에라도 유령이 나타날 것처럼 음산해 보였다.

조금씩 저택이 멀어지자 마리안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그녀는 더 이상 창밖을 바라보지 않은 채 두 손으로 힘껏 자신의 옷자락을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루켄이 마리안을 데려간 곳은 외곽 지역의 3층짜리 저택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집 한 채가 있는 게 전부인 곳이었다. 심지어 정원도 없었다.

마리안은 마차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인신매매한 사람들을 끌고 오기에는 이보다 더 기가 막힌 장소가 없을 듯싶었다.

저택의 근처에는 우거진 수풀은커녕 나무 한 그루조차 없어서 도망치려고 해도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전혀 없었다. 왕성에서도 마차로 거의 반나절 이상 거리가 떨어져 있는 까닭에 말이나 마차 없이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었다.

마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안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마리안이 흠칫 놀라자 루켄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겁먹을 것 없어. 도망치려 하지만 않는다면 여기서 아가씨를 해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 말, 믿어도 되는 건가요?”

“아가씨는 귀한 상품이잖아. 상품에 흠집을 내는 상인은 없어.”

참으로 대단한 상도덕이라고 비꼬고 싶었지만 험상궂은 남자들이 가득한 곳에서 그런 말을 할 용기는 없었다.

마리안이 잠자코 루켄을 따라가자 그는 마리안을 2층의 방 한곳으로 안내했다.

“보통은 지하에 가두지만 아가씨는 진짜 특별 대우 해주는 거야.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잠깐만요.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마리안은 루켄을 붙잡았다. 이 남자와는 단 1분도 함께 있고 싶지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정도는 알아야만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쪽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말했잖아. 아가씨를 원할 만한 사람이 있다고 말이야. 오늘 바로 그분에게 연락을 넣을 거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절 원할 만한 사람이 있다고요? 대체 어떤 사람인데요?”

이미 여기까지 온 마당이긴 했지만 루켄의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루켄은 굳은 얼굴로 묻는 마리안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가씨, 원래 이런 데 끌려오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그 볼품없는 드레스 따위는 찢어발긴 채 발가벗겨서 알몸으로 경매에 부치지. 그런 용도로 쓰일 여자를 원하는 사람은 아주 많거든.”

“…….”

“귀족 여자도 여자일 뿐인데 몰락한 귀족 영애라고 하면 대체 뭔 환상들을 그렇게 품고 있는지 있는 돈 없는 돈 다 부어가며 환장하는 놈팡이들이 엄청 많아.”

마리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운 좋게도 아가씨한테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 아가씨를 원할 만한 사람은 아주 점잖고 고귀한 분이니까. 물론 그분이 아가씨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그때는 어쩔 수 없겠지. 아가씨도 홀딱 벗고 경매에 나가야지.”

루켄이 놀리듯 말하자 마리안은 창백해졌다. 새삼 그녀는 자신의 신세가 비참했고, 무엇보다 앞으로의 일이 두려워졌다. 하지만 루켄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분이 내건 조건이 매우 까다로웠는데 아가씨를 본 순간 바로 감이 왔지. 딱 적격인 사람이 나타났구나, 하고 말이야. 그러니 그분에게 연락하는 동안 당분간 이곳에서 얌전히 있어. 괜히 험한 꼴 당할 일을 자초하지 말고.”

마리안은 입술을 깨문 채 눈앞에서 닫히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동안 꼼짝 않고 닫힌 문을 바라봤지만 이내 기운이 빠져서 힘없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간소한 침대와 탁자 한 개가 전부인 아주 작은 방이었다. 뜻밖에도 방 안은 먼지 한 톨 없이 청결했다.

마리안은 허물어지듯 침대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울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루켄을 따라온 것은 그녀 자신의 의지였다.

요즘 들어 어머니가 기침을 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의사를 두어 차례 불러봤지만 진료비와 약값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비쌌다.

삯바느질을 하거나 인근의 아이들을 돌봐주고 가르치는 허드렛일로는 어머니의 약값을 댈 수 없었다. 더욱이 고리대금업자가 작정하고 늘린 이자를 갚기는 더욱 힘들었다.

어머니가 처음부터 고리대금업자에게 큰 빚을 졌던 것은 아니었다. 터무니없는 이자만 아니었다면 부지런히 일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덧붙여 늘어난 이자 때문에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을 갚을 길은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서 마리안은 빚을 탕감하고 금화를 50개나 준다는 말에 자신을 내던졌다. 루켄이 제안했던 그 찰나의 순간 그녀의 머리는 바쁘게 돌아갔다. 이대로는 어머니와 동생까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가 마리안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어떻게든 되겠지.”

마리안은 방 안에 앉아 가만히 되뇌었다. 어떻게든 되긴 할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생계를 책임지고 일하면서 마리안이 배운 것은 세상이 참 웃긴다는 사실이었다. 당장 죽을 것같이 궁지에 몰려도 사람은 의외로 쉽게 죽지 않았다. 극적으로 상황이 좋아지는 일 따위는 없었지만 그대로 죽으라는 법도 없었다.

이번 일만 해도 루켄은 꽤 후한 돈을 내줬다. 아무리 몰락한 귀족가의 여자라고 해도 아무것도 없는 여자의 몸값으로 금화 50개에 빚을 변제해 주는 조건은 퍽 파격적이었다.

루켄의 말대로 남작 부인이 제대로만 한다면 금화 50개로 남작 부인과 리아나는 몇 년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녀로 팔려 가든 어딘가의 늙고 부유한 남자의 애첩으로 팔려 가든 간에 몇 년만 참고 견디면 가족의 곁으로 다시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될 거야.”

마리안은 마치 스스로에게 들려주려는 듯 다시 한번 중얼거리고는 기도하듯 두 손을 포개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밋밋한 벌판을 바라보며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몸도 마음도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마리안은 그대로 지친 듯이 눈을 감았다.

루켄이 말한 마리안을 마음에 들어 할 만한 사람이 나타나는 데는 사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루켄이 말한 점잖고 고귀하다는 사람이 찾아온 날, 마리안은 점심을 먹은 뒤 좁고 딱딱한 침대에 누워있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녀가 깨어난 것은 마차가 다가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마차 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킨 마리안은 별다른 특징이 없는 평범한 마차가 저택을 향해 다가오는 광경을 목격했다.

지난 사흘 동안 저택에는 매일같이 수많은 마차가 드나들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차는 항상 해 질 무렵에 왔기 때문에 태양이 이렇게 높이 떠있는 시간에 찾아오는 마차는 처음이었다.

“대체 누구지?”

창문에 바짝 붙어 마차를 관찰하던 마리안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말했다.

평범한 줄 알았는데 가까이 다가올수록 보통 마차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특별히 장식을 달고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을 뿐 다가오는 검은 마차는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다.

심지어 마차를 끌고 있는 말들도 매우 훌륭했다. 윤기가 흐르는 짙은 갈색의 말 두 필이 마차를 끌고 있었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짐말이 아니었다. 아마도 어떤 부유한 귀족이 그다지 떳떳하지 않은 놀이를 위해 만든 비밀스러운 마차가 아닐까 싶었다.

마리안은 긴장으로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마차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있어서 남자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저택을 지키는 험상궂은 남자들이 얼른 달려가 하인처럼 굽신대고 있었다.

마리안은 남자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고 마차가 건물 뒤편으로 사라지자 침대 위에 도로 앉았다.

지난 사흘 동안 그녀는 이 작은 방 안에 갇혀있었다. 사실상 감금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별로 힘들지는 않았다. 빵과 수프 그리고 스튜와 과일 몇 조각처럼 간소한 것이긴 했지만 식사는 충분히 주어졌고, 딱딱하긴 해도 침대는 깨끗했다.

덕분에 마리안은 지난 사흘간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계속해서 잠을 잤다. 그동안 일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피로가 쌓였는지 당장 할 일이 없어지자 잠이 밀려왔던 탓이다. 잠을 자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신경이 곤두서서 다시 잠을 청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지난 사흘 동안 그토록 많은 마차가 들락거렸지만 루켄은 단 한 번도 마리안을 찾지 않았다.

그러나 저 마차를 보자 드디어 루켄이 말한, 그녀를 원할 만한 점잖고 고귀하다는 신사가 찾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감은 적중했다. 잠시 후, 마리안은 문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열쇠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루켄과 함께 검은 로브를 푹 뒤집어쓴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쪽입니다, 후작님.”

“흐음.”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남자는 깡마르고 키가 상당히 컸다.

마리안은 후작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마리안이 살고 있는 르샤베 왕국에는 여섯 개의 후작 가문이 있었다. 어느 집안의 후작 나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리안은 후작씩이나 되는 높은 사람이 자신을 찾을 거라고는 정말로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알리체 남작가의 영애라고?”

“그렇습니다, 후작님.”

후작이라는 남자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고 건조했다.

루켄은 그의 앞에서 지나칠 정도로 공손하게 허리를 굽신거리고 있었다.

“이름은?”

후작의 질문에 마리안은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루켄처럼 굽신거리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아서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마리안 알리체.”

“어이, 아가씨. 대체 어느 안전이라고 말을 그런 식으로 해!”

깜짝 놀란 루켄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후작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 루켄을 저지했다.

그가 로브를 벗었다. 젊어서는 갈색이었을 것 같은, 하얗게 세어버린 짧은 머리가 가장 먼저 마리안의 눈길을 끌었다.

후작이라 불린 남자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었고, 색이 바랜 듯한 연하늘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흐릿한 인상과 달리 후작의 눈은 매우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제법 강단 있는 아가씨로군. 몇 살이지?”

“스물둘입니다.”

마리안은 여전히 짧게 대답했다.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딱 아가씨처럼 심지가 굳건한 여자를 찾고 있었어. 게다가 영애의 외모가 무척 마음에 드는군.”

후작은 마리안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얇은 입술을 끌어 올려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눈이 웃고 있지 않은 탓인지 온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리안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 자신은 저 늙은 후작에게 팔려 가는 것이리라. 그녀가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애쓰는 동안 후작이 루켄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가 제법 괜찮은 아가씨를 구해 왔군.”

“마음에 드십니까?”

“괜찮은 것 같아. 일단 알리체 영애를 데려가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후작님!”

루켄이 신이 난 듯 90도 각도로 꺾어지게 절을 하자, 후작은 품 안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내 그에게 던졌다. 루켄은 그것을 받아 들고는 다시 한번 후작을 향해 깊숙이 절했다.

그 모습을 보며 마리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 몸값은 얼마인가요?”

후작이 그 질문에 웃었다.

“재미있는 영애로군. 그런 게 궁금한가?”

“네. 제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긴 해서요.”

마리안은 여전히 후작을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녀는 정말로 궁금했다. 알리체 남작 부인이 루켄에게 진 빚은 이자를 포함해서 금화 130개가 되었다. 그러나 루켄은 그 빚을 탕감해 주고도 50개의 금화를 더 주었다.

“저건 수고비를 챙겨준 거지 아직 결정된 게 아니야.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할 사람이 남아있거든. 지금부터 그 최종 결정권자를 만나러 갈 거야.”

“최종 결정권자요?”

뜻밖의 이야기에 마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후작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곧 알게 될 걸세. 설명하는 것보다는 아가씨가 직접 눈으로 보는 게 낫겠지.”

그 말과 함께 후작이 눈짓하자 루켄이 다가왔다.

“잠시 눈을 가릴 거야. 가만히 있어, 아가씨.”

마리안은 루켄의 손에 들려있는 검은 안대를 보고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루켄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래도 루켄이 마리안을 사 갈 사람이 점잖다고 여러 번에 걸쳐 말한 데다, 계속 특별 대우를 해주는 거라고 해서 조금쯤 긴장을 풀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돌아가는 걸 보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단순한 인신매매가 아닌 것 같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공포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빠져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마리안이 두려움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굳어진 얼굴로 가만히 서있자, 루켄은 마리안의 눈에 안대를 두른 뒤 한 번 더 검은 천으로 눈 주위를 꽁꽁 싸맸다. 이로써 마리안은 정말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내 손을 잡도록, 알리체 영애. 이제부터 마차를 타러 갈 거니까 겁먹을 것 없어. 자네를 해치려는 게 아니니까.”

건조한 후작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마리안은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끼고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자 작은 통증이 느껴졌다. 마리안은 깊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후작이 바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루켄이나 저택을 감시하던 험상궂은 남자들과 달리 그 손은 주름살이 있긴 해도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후작은 앞이 보이지 않아 더듬더듬 걷는 마리안을 이끌어 마차에 태웠다. 마차는 바로 출발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덜 흔들리는 데다 편안함마저 느껴지는 승차감에 마리안은 자신이 후작이 몰고 온 고급스러운 마차에 탔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승차감이 좋다고 해서 안심한 것은 아니었다. 눈을 가린 탓에 쓸데없이 감각이 예민해지면서 더 큰 불안감이 밀려왔다.

마리안은 입술을 계속 깨문 채 두 손을 꽉 쥐고 있었다. 뭐라도 좋으니까 후작이 떠들기라도 하면 안심이 될 텐데 정작 후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마차는 한참 동안 달렸다. 눈을 가려서 그런지 시간은 더욱 더디게 흘러갔다.

문득 마리안은 길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루켄의 집에서 나와 들판을 달리던 마차는 왕성의 잘 정돈된 돌길에 접어들었는지 한동안 부드럽게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덜컹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주변도 급격히 조용해진 것을 보면 왕성에서 다시 벗어난 것 같기도 했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마리안에게 어디로 가는지 알릴 생각이 없으니 눈을 가렸겠지만 그녀는 행선지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어딘지 알 수 없는 장소로 끌려간다는 공포는 생각보다 컸다.

마리안은 필사적으로 후작의 동태를 살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후작이 맞은편에 앉아있는 게 맞는지조차 알 수 없어졌다.

후작은 잠이 든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창밖을 바라보는지는 몰라도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래서 마리안은 마차 좌석에 등을 곧게 기댄 채 가만히 앉아 견딜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가린 답답함과 공포감에 더해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 마차가 계속 흔들린 탓에 멀미가 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더는 견딜 수 없어져서 잠깐이라도 좋으니 마차를 세워달라고 말하려던 무렵이었다. 갑자기 마차가 멎었다.

“다 왔군.”

그제야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서 마리안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몰라도 후작의 목소리가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마차에서 내릴 거야. 손을 잡아줄 테니 조심하도록.”

그 말에 마리안이 멈칫거리며 손을 내밀자 후작은 그녀의 손을 잡아 마차에서 내리도록 도와주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오싹한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마리안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바야흐로 때는 이미 5월이라 더 이상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계절인데, 마치 차가운 겨울바람을 맨몸으로 맞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발밑에는 평평하고 단단한 바닥이 깔려있었다. 아마 돌이나 벽돌로 만든 길인 듯싶었다.

“따라오도록.”

후작이 마리안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마치 나이든 후견인이 어린 아가씨의 손을 잡고 이끌어주는 듯한 태도였다. 눈까지 가려서 끌고 간 곳에서 에스코트해 주는 것도 신사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래도 후작이 그녀를 함부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마리안에게는 한 가닥 위안이 되었다.

육중한 문이 열리는 소리와 경비인 듯한 사람들이 후작에게 인사를 건네는 소리가 들리고 마침내 실내로 들어갔다.

실내라고 해도 바깥과 마찬가지로 공기는 여전히 싸늘했다. 천장이 높은 곳인지 성당을 지날 때처럼 소리가 울려 퍼져서 마리안은 더욱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그녀와 후작을 에워싸고 따라오는 것 같았다. 가죽으로 만든 구둣발 소리 외에도 갑옷을 걸치고 걷는 듯한 절그럭거리는 철갑 소리가 들렸다.

“지금부터는 계단을 올라갈 거야. 천천히 올라갈 거니까 잘 따라오도록.”

어느 한 지점에 도달했을 때 후작이 말했다.

마리안은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대체 얼마나 높은 곳으로 가는지는 몰라도 일행은 한참 동안 나선형 계단을 올라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후작이 마리안과 보폭을 맞춰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데다, 계단의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아서 걷는 데 불편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탑?’

그때 문득 마리안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나선형으로 된 계단을 계속 오르는 게 마치 대성당의 종탑을 오르는 것과 비슷했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고 있기는 했지만 조금씩 숨이 가빠졌다. 눈을 가린 탓에 현기증마저 느껴져서 마리안이 비틀거리자 후작이 붙잡아 주며 말했다.

“다 왔다. 이 앞으로는 더 이상 계단이 없으니 주의하도록.”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공을 내딛지 않도록 발걸음을 주의했다.

후작이 그녀를 데리고 어떤 방으로 들어섰다. 지금까지 지나쳐 온 장소들보다 훨씬 온기가 느껴지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뒤에서 문이 철컥하고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그녀의 손을 놓은 후작이 앞쪽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후보를 데려왔습니다.”

‘후보?’

마리안이 뜻밖의 단어에 의아해했을 때였다.

“수고했다.”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순간 마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녀가 서있는 곳에서는 더 이상 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이유를 알 수 없이 몸이 떨려왔다.

“이번에는 좀 번듯한 후보였으면 하는데.”

“아마 만족하실 겁니다. 알리체 남작가의 딸이라고 하더군요.”

후작이 지시를 내렸는지 누군가가 옆으로 다가와 마리안의 눈을 가린 검은 천을 풀고 안대를 벗겨냈다.

갑작스럽게 쏟아져 들어온 환한 빛에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빛을 가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강렬한 빛이 마치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

차츰 빛에 익숙해지자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소리가 들려왔던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얼어붙었다.

눈앞에는 금발의 젊은 미남자가 나른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빛이 내리쬐는 가운데 남자는 마치 후광이 덧씌워지기라도 한 듯 정말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진한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고, 피부는 방금 내린 눈처럼 티 한 점 없이 새하얬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나른하게 풀어진 남자의 짙은 금안이었다. 마치 빨려들 것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운 색상이었다.

마리안은 눈앞의 미남자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얼굴을 보자마자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나라에서 황금빛 금발에 금안을 가진 사람은 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

“…왕세자 저하?”

자기도 모르게 신음하듯 중얼거리자 남자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알리체 남작가의 여식이라더니 나를 알고 있나 보지? 우리가 어딘가에서 만난 적이 있던가?”

부정하지 않는 말에 마리안은 당황하여 얼른 무릎을 굽혀 절을 했다.

마차 안에서 같은 자세로 장시간 앉아있던 데다 추운 곳에서 더듬거리며 계단을 오르느라 무릎이 아직 굳은 채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리안은 어린 시절부터 엄하게 교육받았던 대로 우아하게 절하는 데 성공했다.

“직접 존안을 뵌 적은 없습니다만 르샤베 왕국의 백성 된 자로서 저하를 모를 수는 없으니까요.”

“하기야, 그건 그렇겠지.”

가볍게 눈가를 휘는 남자를 보자 마리안은 감히 고개를 쳐들지 못하고 좀 더 숙였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다른 사람도 아닌 왕세자 클로타르 리엘 라베인이었다.

진한 황금빛 금발에 금안은 라베인 왕가 직계 혈통의 상징이었다. 왕가의 직계가 그런 특징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어마어마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르샤베 왕국에서 금발에 금안을 가진 사람은 현 국왕과 왕세자 그리고 왕세자보다 세 살 어린 공주가 전부였다.

그러나 공주는 작년에 이웃 나라의 왕족과 결혼해서 그 나라로 가버린 까닭에 현재 이 왕국에서 금발에 금안을 소유한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 이것은 르샤베 왕국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하필 왕세자를 만나게 되다니…….’

마리안은 왕세자를 만난 것이 너무나 의외라고 생각했다.

클로타르에게 말한 대로 마리안은 지금까지 그를 만나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유서 깊은 남작가의 영애라고는 하지만 알리체가의 몰락은 마리안의 아버지가 젊었을 때부터 시작된 탓이다.

마리안이 태어났을 때만 해도 상황이 좋지는 않았지만 최악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리안이 열두 살이 될 무렵부터 알리체가는 본격적인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덕분에 마리안은 철이 든 뒤로 귀족다운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자연히 왕성의 무도회나 사교계 모임에 초대받아도 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마리안에게도 여느 아가씨들처럼 남몰래 왕세자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은 있었다. 왕세자의 아름다움은 시와 노래로 찬양될 만큼 독보적이었던 데다 그의 행적 또한 신성력을 가진 왕국의 후계자에 걸맞은 미담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왕세자비를 들이고 나서야 르샤베 왕국의 어린 아가씨들 사이에서 왕세자를 향한 환상은 간신히 사라졌다.

그러나 한때의 열병이었다고는 해도 막연하게나마 꿈꿔왔던 대상이 하필 그녀를 노예처럼 돈으로 사기 위해 나타났다고 생각하자 마리안은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왜 나 같은 여자를 사려고 하는 거지?’

왕세자에게는 왕세자비가 있었다. 그녀는 결혼 전까지 르샤베 왕국 사교계의 꽃으로 이름이 높은 미인이었고, 왕세자와는 금실이 좋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마리안으로서는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리안이 그런 생각에 빠져있는데 클로타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가늘고 유려한 손가락을 뻗어 마리안의 턱을 치켜올렸다.

“이름이 무엇이지?”

움찔하는 마리안에게 그는 가벼운 어조로 질문했다.

순간 마리안은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뜻밖에도 따뜻하고 성스러울 거라 생각했던 금안은 가까이에서 보자 파충류의 그것처럼 날카롭고 섬뜩했다.

마리안은 자신이 독사 앞에서 굳어버린 생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왕세자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온몸이 얼어붙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 마리안입니다.”

그녀의 턱을 치켜든 클로타르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마리안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마리안 알리체인가. 이름은 평범하군. 하지만 네 얼굴은 꽤 마음에 들어. 아주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본바탕이 좋고 영리해 보여. 그 크고 짙은 푸른 눈도 인상적이고 말이야.”

분명 이것도 외모에 대한 칭찬이라면 칭찬일 텐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클로타르의 말투가 매우 무례했지만 단순히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말투나 어휘의 문제 이전에 마치 물건처럼 품평당하는 기분이 들었던 탓이었다. 거기에는 루켄이 그녀의 몸을 품평하던 것과는 또 다른 노골적인 멸시가 담겨있었다.

“제법 잘 골라왔군그래, 칼멘 후작. 마음에 들어. 이걸로 하겠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칼멘 후작은 어딘가 안도하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리안은 그제야 자신을 데려온 사람이 칼멘 후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칼멘 후작에게로 향했지만 왕세자는 개의치 않고 후작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던졌다.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알리체 영애의 몸값으로 이 정도면 차고 넘칠 거다.”

“황공합니다, 저하.”

“수하들에게도 넉넉하게 돌려서 입막음을 잘 하도록.”

칼멘은 공손히 주머니를 받아들여 무게를 가늠해 본 뒤 품 안에 넣고 클로타르를 향해 절했다.

그 모습에 마리안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손을 옷자락 사이로 숨겼다.

감히 클로타르에게는 자신의 몸값이 얼마냐는 질문 따위는 꺼낼 수도 없었다. 그런 걸 물었다가는 아름답지만 뱀처럼 사악하고 표독해 보이는 왕세자가 자신에게 무슨 일을 할지 몰라 두려웠다.

“난 네가 생긴 것만큼이나 일도 영리하게 잘해줬으면 좋겠어.”

왕세자는 얼어붙은 마리안을 바라보며 생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시 의자로 돌아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성스럽고 아름다워 보여서 마치 빛이 내리는 옥좌 위에 앉은 신들의 왕을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마리안은 더 이상 그 모습에 속지 않았다. 마리안은 입 안의 침이 마르는 것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모든 용기를 짜내어 물었다.

“제, 제가 앞으로 왕세자 저하를 모시게 되는 건가요?”

이것만은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마리안은 클로타르의 입에서 나올 말이 너무 무서웠다. 왕세자가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마리안은 그의 곁에서 일할 자신이 없었다.

“아, 그건 아니야. 내가 굳이 너 같은 거에게 시중을 받을 이유가 없잖아?”

그러자 마리안의 질문에 클로타르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어.”

마리안은 숨을 삼켰다. 왕세자의 얼굴에는 조롱하는 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저런 사람의 곁에 있어야 한다면 마리안은 한시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클로타르는 가벼운 어조로 칼멘을 향해 명령했다.

“이제부터 알리체 영애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려주도록. 데려가.”

“알겠습니다, 저하.”

칼멘이 깊숙이 허리를 숙여 절하고는 마리안에게 다가왔다.

그가 다시 자신의 눈을 가리는 것을 보며 마리안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정말로 끔찍하게 싫었다. 하지만 마리안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못한 채 칼멘이 눈을 가리는 것을 참아냈다.

마리안은 자신이 어떤 정신으로 그 방에서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왕세자에게 인사는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클로타르는 그녀가 제대로 인사하지 않고 물러가는 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애초에 클로타르는 마리안에게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다시 한참 동안 계단을 내려와서 복도 같은 곳을 따라 걸었다. 뒤따라오는 기사들의 발소리 때문에 마리안은 자신이 어디를 걷고 있는지 가늠하기 쉽지 않았다.

단지 소리가 울리는 것으로 봐서 여전히 대성당처럼 천장이 높은 곳을 걷고 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다시 계단을 올라갈 거다. 주의하도록.”

칼멘의 말에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올랐던 것과 똑같은 나선형 계단이 시작되었다. 아마도 커다란 건물의 동쪽과 서쪽 혹은 남쪽과 북쪽쯤에 있는 탑에 올라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묵묵히 계단을 올랐지만 곧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평소의 마리안이라면 이 정도로 지치지는 않겠지만, 너무 긴장을 한 데다 앞도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리안은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애써 다리에 힘을 주고 최선을 다해서 걸었다.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 같은 것이 열린 뒤로도 그녀는 한참 더 계단을 올라가야만 했다.

호흡이 상당히 거칠어졌을 무렵, 칼멘이 드디어 도착했다고 말해주었다.

마리안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여기다.”

등이 떠밀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릿한 냄새가 코끝에 확 끼쳤다. 그 냄새가 역한 나머지 마리안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칼멘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눈을 가린 천과 안대를 풀었다.

방 안이 비교적 어두워서 이번에는 눈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순간 마리안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마리안은 덜덜 떨면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돌벽으로 만들어진 방 안에 거의 헐벗은 진한 황금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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