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2 11 / 친애하는 내 친구 카르티에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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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론 선제후가 누구인지는 소문으로도 들은 적이 없다.
막연하게 높은 사람이라는 정도만 어렴풋이 느끼는 정도.
“선제후(???)… 선제후란 말이지. 엄청나게 높은 사람이겠네.”
선제후… 저쪽에서 유럽사를 공부할 때 배웠던 기억이 난다.
황제의 선출권을 가진 특별한 영주인 것으로 아는데. 근데 여기는 애초에 왕을 선거로 뽑지도 않는 모양이던데, 왜 선제후람.
“초기 알트슈타인은 당대의 대영주들이 모여서 왕을 선출하는 체제였다고 해요. 아마 그때부터 왕정이 공고해진 지금까지 선제후의 칭호는 이어진 게 아닐까요?”
척, 하고 안경을 꺼내 쓰면서 웬즈데이가 신빙성 있는 추측을 내놓았다.
대체 그 안경을 어디에서 꺼냈는지는 차치하고, 당장 그 추측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수 없으니.
“나중에 루시탄을 만나면 물어보든가 해야지. 어차피… 그 높은 분을 만날 때는 같이 가야할 테고…. 조용히 숨어지낼 수가 없네.”
위가 따끔따끔하다… 생각해보니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내 슬로우라이프 계획은 대체 언제쯤이나 실현될 수 있을까, 정말로.
바츠 경과 오래 얼굴 마주보고 있는 것도 지금은 솔직히 불편했다.
‘이 사람이 어쩌면….’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루시탄이나 미하도르, 둘 중 한 명의 아버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으으, 아냐. 그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머리가 복잡해지는 건 사양이다.
그렇게, 얼마 전에 갔었던 그 가게에 도착했던 참인데…
“…여기야?”
“음… 어. 여기…”
카르티가 뚱하게 말했고,
나는 조금 얼버무리듯이 대답해야 했다.
“…였는데 말야. 분명히.”
“닫았네요.”
깔끔하게 한 단어로 정리해버리는 웬즈데이를 괜히 노려보았다.
[내부 수리중이라 당분간 휴업합니다.]
걸리버가 만들고 걸리버를 상대로 영업하는 가게답게 굉장히 친숙한 문구가 문 앞에 붙어서 반겨주고 있었다. 아니, 반겨준다는 말보다는 문전박대당했다는 말이 더… 와닿나.
“늘 생각하지만 넌 진짜 운이라곤 없어.”
오히려 카르티가 측은하게 보면서 중얼거렸다.
…맞는 말이라서 더 짜증 나. 뭔가… 무슨 일이든 속 시원하게 풀리는 꼴을 보지를 못했다.
속이 라면국물마냥 부글부글 끓는 가운데, 즈왈트의 거대한 손이 툭 하고 어깨를 쳤다.
“저기 선술집은 연 것 같은데, 가서 속이나 푸는 게 좋지 않겠나?”
“즈왈트 씨는 그저 한잔하고 싶은 게 아닌가 모르겠지만요.”
웬즈데이가 작게 투덜거렸지만 일단 즈왈트의 제안이 그나마 지금은 최선으로 보인다.
괜히 우중충하게 있기보다는 뭐라도 먹으면서 기분을 푸는 게 낫겠지.
그래도 일단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베어링턴을 떠나기 전에 라면을 한번 더 먹고 싶었는데.
“난 상관없어. 뭐, 언제고 들러서 먹을 수 있잖아? 일단 가자고, 가.”
카르티까지 동조하고 나서야, 아쉬운 마음을 털고 가게 앞을 떠날 수 있었다.
술집 안은 꽤 북적였다. 상업 지구의 가게들이 줄지어 휴업하는 가운데, 그 가게로 갈 예정이었던 손님들이 몇 군데 안 되는, 문을 연 가게들로 모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서 오십쇼. 네 분이십니까요?”
“여기 적당히 맥주랑 안주 주세요.”
100 탈랭짜리 은화 3개를 먼저 지불하고 자리에 앉자, 점원이 굽신거리며 떠나갔다.
주변에서 음식 먹는 소리와 냄새가 위장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기다리기가 꽤 고역이었다.
“그론 선제후라… 으음.”
탁자에 받친 손으로 턱을 괸 카르티가, 케케묵은 화제를 다시 꺼냈다.
눈알을 심상치 않게 굴리는 걸 보니, 그에 관련해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인데.
“왜? 그 사람이 누군지 뭔가 좀 알아?”
“나도 일단 영감이랑 여기저기 다녔을 때 이야기를 조금 들어서. 별로 좋은 소문은 아닌데….”
혹여 누가 듣기라도 할까봐 걱정하는듯 카르티가 목소리를 낮췄다.
뭐, 선제후에 대한 나쁜 소문을 말할 때는 자연스럽게, 아무리 깡다구가 좋은 카르티라도 조금쯤은 긴장하기 마련일 테니까.
“…소문난 호색한이래. 정식으로 결혼을 한 여자만 여섯에, 밤중에 몰래몰래 들이는 정부도 데리고 있고 사생아는 셀 수도 없을 정도라나.”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았다.
아니, 바츠 경은 나한테 그런 사람을 만나보라고 권한 거야?
나한테 대체 뭔 억하심정이 있어서?
“호색한이라니… 그것 말고 뭐 다른 소문은 없어?”
“그것 말고는 나름대로 휘하 영주들을 잘 다독이고 또 다스리는 유능한 선제후라더라. 높으신 분들이… 뭘 얼마나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다스리는 직할지의 평판도 제법 나쁘지 않대.”
카르티는 없는 말을 하지 않으니, 대충 그론 선제후라는 사람의 인물상이 어떤지 알 것 같았다. 사생활이 문란하지만 뭐, 자기 일에는 나름대로 충실한 사람이라 그런 건가.
부정이나 사심과는 담을 쌓은 듯한 바츠 경과는… 좀 거리가 있는 사람인가보다. 그러면서 꽤 친근감이 보였지만.
나중에 루시탄에게 한번 슬쩍 물어봐야지.
“그렇지. 호색한인 것 말고도, 유독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더라고. 음유시인들을 자주 불러들이면서 노래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그쪽으로도 돈을 많이 써서 꽤 평판이 괜찮아. 내 친구 가운데에는 음유시인도 좀 있는데, 인심이 꽤 후하대.”
그냥 놀기 좋아하는 아저씨 아닌가, 그 정도면?
흐응, 하고 걱정 반 별생각 없음 반 정도의 비율로 듣고 있노라니, 쟁반에 받쳐진 음식과 술이 나왔다.
언제나 묵묵한 즈왈트가 술잔을 보고는 눈을 빛냈다…. 그는 아마 육신으로 쓰고 있는 골렘의 다양한 기능 중 술을 마실 수 있는 기능을 가장 반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무튼 네 개의 맥주잔이 허공에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일단 무사히 살아남은 것에 대해 건배.”
카르티가 키득거리며 건배했고, 내 생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목숨을 건 싸움 후에 마시는 맥주는 꽤 달게 느껴졌다. 저번에, 우루 늪지에서 돌아왔을 때 가졌던 술자리도 꽤 즐거웠는데.
“지난번 생각나네…. 그때는 케라우노스 씨가 같이 있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드래곤 상대했다는 건 똑같네.”
압박감은 비교조차 안 되었지만.
그때는 나와 즈왈트, 케라우노스 씨, 카르티… 넷만으로도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었던 미성숙한 드래곤이었지만 이번에는 온 도시와 대마법사, 이 나라 제일의 검사까지 나서야 했던 상황이었다. 몸 성히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지.
“그러게. 우루 늪지에서 돌아왔을 땐 술 마시다가 아예 꼴아버려서 다음 날까지 정신도 못 차렸어. 일어나 보니까, 여기 카르티랑 같이 자고 있었더라니…”
“…그 얘기를 좀 자세하게!”
웬즈데이가 도끼눈을 뜨면서 몸을 불쑥 내밀었다. 흉흉한 표정에 눈에 핏발까지 선 것 같다. 이상하다, 그런 기능을 넣은 적 없는데.
“앉아. 웬즈데이. 네가 상상하는 그런 일 아니었으니까. 그냥, 나도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얘 말로는 어… 그냥 내가 자다가 술기운에 더워서 벗었다는 모양이야.”
“……진짜에요, 카르티 씨?”
웬즈데이의 날카로운 추궁이 이번에는 카르티를 향했다.
“어? 어, 어. 진짜고말고, 그게 다야. 다라고.”
‘어’를 세 번이나 말했다.
나라도… 뭔가 지금 카르티가 무지 수상하다는 사실만은 어째 짐작이 가는데….
하지만. 그건 차치하고 웬즈데이, 너무 나댄다.
“그만둬, 웬즈데이. 카르티는 내 친구야. 너무 그렇게 몰아세우듯이 말하면 나도 좀 불편해. 카르티도 그게 다라고 하니까….”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 카르티를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카르티는 지금 안절부절못한 채, 타는 목을 맥주로 달래는 것처럼 보였다.
“…설마 카르티가 나한테 거짓말을 하거나 하면, 난 그날 밤에 뭔 일이 있었다는 것보다 더 화가 날 것 같으니 말야. 그치, 어때? 나한테 거짓말 안 한 거지, 카르티?”
“그, 그게 말야….”
카르티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뭔가 있긴 있었군. 카르티가 슬금슬금 눈을 굴리면서 나와 웬즈데이, 즈왈트… 셋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었다.
카르티가 솔직하게 말해준다면 난 새삼 화를 낼 생각은 없다… 뭐,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 잠 한번 잤다고 화를 낼 정도로 난 깨끗하지 않아.
으르릉거리는 건 오히려 웬즈데이 쪽이고.
즈왈트는 아무래도 좋다는 양… 아니, 그냥 이 화제에서 조금 빠져있고 싶은 모양이었다. 거푸 술을 들이킨다. …빈 게 분명한 술잔을 마시는 시늉만 하는 걸로 봐선 아마 맞겠지.
“…알았어! 말할게, 젠장. 말하면 되잖아. 끄… 진짜, 이건 나만 잘못한 게 아니거든?!”
“화를 냈어요?! 카르티 씨, 지금 방귀 뀌어놓곤 화를 낸 거에요?!”
“웬즈데이”
나지막하게 부르면서, 생긋 웃는다.
그 이상 입 놀리면 너 진짜 가만 안 둔다. 그런 의사를 강하게 어필하자, 웬즈데이는 끽소리 못하고 얌전히 앉았다. 하지만 맥주를 홀짝이면서도 카르티를 보는 눈 사이에, 미간에 주름을 깊게 잡았다.
“하아… 어디부터 얘기해야 좋을지, 진짜.”
카르티가 머리를 긁적였다. 무척이나 곤란하다는 표정의 카르티가 마음의 준비를 갖추길 조금 더 기다렸다.
내가 상상하는 이상의 일이야 뭐, 설마 없었겠지.
그렇게 달게 마셨던 맥주가, 조금 씁쓰레한 맛으로 변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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