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2 9 / 베어링턴에서 가장 긴 하루 (5)
* * *
(5)
지옥의 지표면이 저런 꼴이려나.
얼굴의 반을 수포가 부글거리는 화상이 뒤덮은 모습은 정말로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악귀와도 같아서 뭐라 할 말을 잊게 했다.
“발스턴….”
“오랜만이군. 1년 조금 넘었나? 레짐의 창녀 계집아.”
뭣보다 그 눈에서 유황불 같은 증오가 들끓고 있었으니.
번짓수를 잘못 찾았다고 단언하고 싶어진다. 누가 누굴 증오해야 하는 상황인데.
“…그러게. 진즉에 뒈진 줄 알았는데 말야.”
“로제… 누구야, 저 자식? 아는 사이야? 척 봐도 나쁜 놈이라는 것만은 알겠는데.”
카르티가 창을 움켜쥔 채로 내 바로 옆에서 중얼거렸다. 한 발을 내디뎌 내 앞을 막아선 목소리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내 눈 하나를 해 먹은 자식.”
“아하. 저 자식이 그…. 네 원수라던 그 새끼였구만.”
“응. 아주 빌어처먹을 씹쌔끼야.”
왕도에서 베어링턴까지 오는 동안 아주 간단히 얘기해 준 적은 있었던가.
그때는 당연히 죽었으리라 생각했었기에 다시 저 얼굴을 보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용의 불길을 뒤집어쓰고 바다에 빠진 인간이, 살아남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게 더 어렵다.
“진짜, 거기서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하지만….”
지난번 그 ‘불로초’ 인간의 스킬에 당했을 때에도 이 새끼가 튀어나왔었던가.
아무래도 내 머릿속에 단단히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차라리 그때가 더 무서웠는데. 뭐야. 예방접종 같은 거였어? 그거. 그보다 꽤 와일드해졌는데. 나름대로 잘생긴 축이었는데 이제는… 어, ‘나이트메어’라는 영화를 알라나 모르겠네. 알 리가 없지.”
악몽에서 기어나온 괴인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별로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생각했던 것보다 발스턴의 앞에 서는 것이 그다지… 괴롭지 않았다.
공포감은 있다. 압박감도 있고, 심장이 조여오듯 한 긴장감도 있었지만, 발스턴보다는 이 상황에 더더욱 쫓기고 있었으니까.
그도 알고 있다는 듯이 칼을 늘어뜨린 채 기괴하게 변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대로 지껄여라. 계집. ”
“나야 늘 마음대로 사는 년이니까. 그보다 거기에서 비켜. 네 녀석이랑 실랑이할 시간이 없어. 피차 회포를 풀 사이도 아니잖아?”
발스턴이 일그러진 입가를 더더욱 일그러뜨렸다.
얼굴의 반쪽 조금 못 되게 멀쩡한 부분이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그것이 웃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켜줄 것이었다면 여기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거라 여기지 않나?”
“그러시겠지. 더럽게 성실한 새끼니까.”
욕설을 툭 내뱉으면서 지팡이를 겨누었다. 말 그대로 시간이 없었다. 여기는 무슈마헤트의 등 위다. 아직도 발스턴과 한가롭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등에 개미가 올라탄 것을, 이 드래곤이 눈치채지 못한 탓일 뿐이다.
아니, 그보다…
하나 남은 눈이 놈이 들고 있는 검을 보았다.
심상치 않게 일그러지는 마력의 요동침이 보인다. 칼자루 부분의… 붉은 보석에서부터 공기를 썩게 하는 듯한 마력이 팽배해, 칼날에 독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언뜻언뜻 눈에 스치는 마력의 흐름이 발스턴과 무슈마헤트를 잇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설마 하는 의혹이 점점 실체를 이루어갔다.
“…마검?”
카르티가 중얼거렸고,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들고 있는 검은 마(?)에 속한 물건이다.
아주 드물게 발견되는… 이 세상의 저면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89위의 마왕’의 힘을 일부 담은 무구 중, 검의 형상을 갖춘 것을 마검이라고 불렀다.
그런 물건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이제 슬슬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우루 늪지에서의 키메라 사태. 그리고 미쳐버린 무슈마헤트. 그리고 발스턴을 되살려낸 배후. 일련의 사태가 왕도에서 시작되었던 일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발스턴, 너는… 대체 언제부터 ‘복음회’와 한통속이었던 거지?”
처음부터… 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까 레짐에서 창녀 노릇을 했을 때의 그는 루시탄에게 충성을 바치던 기사였고, 불타는 배에서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조차도 그 충성심을 버리지는 않았었다.
“대답해줄 필요는 없다.”
“그러시겠지.”
지팡이를 꽈악 움켜쥐면서, 마력을 끌어모았다.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내게도 용의 심장이 있지만… 발스턴에게도 ‘마검’이 있으니.
“아니.”
하지만 잠자코 듣고 있던 카르티가 나선 것은 의외였다.
금색 창을 꽈악 움켜쥔 채로 한 발자국 나선 카르티는, 표정을 일절 없앤 얼굴로 발스턴을 노려보았다.
“네 상대는 내가 해 주겠어. 로제, 너는 얼른 가.”
“하지만, 카르…”
“시간이 없다고 말한 건 너잖아?”
물론 그렇게 말했고, 1분 1초가 흐를수록 드래곤을 막는 것도, 피해를 줄이는 것도 요원해져간다. 하지만 다른 문제도 있었다… 마검을 보통의 무기로 상대할 수는 없는데.
“너… 자신 있어? 네 솜씨를 얕보거나 하는 건 아닌데, 무기가….”
“엉? 뭐야. 내 걱정이 아니라 그쪽 걱정이었어?”
카르티가 조금 퉁명스레, 하지만 동시에 특유의 건방진 웃음을 씩 지었다.
손에 쥔 창을 퉁, 하고 맑은 소리와 함께 세우면서 카르티는 자신있게 말했다.
“이 창은 말야, 그 센 영감이 만들어준 거라고. 그 고집불통 외곬수 영감이 드래곤과 싸울 때 쓰라고 내준 거라고. 그런 창이… 마검 따위에 뒤질 리가 없지.”
“야, 너…. 쉽게 말하지 말고. 좀 객관적인 시각에서…”
발스턴이 비웃었다.
분명 카르티가 쥐고 있는 창은 척 보기에도, 문외한인 내가 봐도 잘 만들어진 명품이라고 할 만했지만 마검과 동격의 무기인지는… 만든 센과, 쓰는 카르티만이 알 것 같은데.
아니, 지금은 카르티를 믿을 수밖에.
“…아, 정말! 카르티, 너 죽지 마! 죽으면 강령술로 불러내서 골렘으로 써버릴 거야!”
“너야말로 죽지 마, 로제.”
“이야기는 다 끝났나?”
서로 죽지 말라고 다그치는 기묘한 상황을 보고 있다가, 결국 내가 움직일 낌새를 보이자 발스턴이 한 발 먼저 움직였다. 읏, 하고 숨을 삼킨 순간, 하나 남은 눈만으로는 녀석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데 경악했다.
“그럼 죽어라.”
카아아앙!
날카로운 금속성이 목 뒤에서 부딪혔다.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목이 잘렸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오싹하다. 지난번 전사장 돌프였던가… 그도 한 합만에 발스턴의 검에 목이 달아났었지.
“죽긴 누가 죽어!”
하지만 카르티는 그 검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칼날과 창날이 부딪혔다가 날카롭게 서로 튕겨져나가며, 카르티는 양손으로 창대를 쥔 채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발끝이 용의 비늘을 딛고, 화살처럼 몸을 던졌다.
“호오. 제법 쓸 만한 눈을 갖고 있군. 이름이 카르티라고 했던가.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데….”
“헹. 나는 네놈을 조금도 모르는데 말야… 내 이름은 카르티케야, 대마법사 케라우노스의 전위이자, 자식이다!”
당당히 이름을 밝히는 카르티에 맞서, 발스턴이 아주 조금 감탄의 소리를 냈다.
눕혀 쏘아진 칼끝이 창날에 부딪혀 불꽃이 튀었다.
아니, 멍하게 있을 틈이 없지. 지금밖에는… 지금밖에는 용을 멈출 기회가 없다. 카르티를 향해 소리지르면서, 발을 움직였다.
등 뒤에서 연거푸 쇳소리가 울렸다.
음산하면서도 날카로운 공기가 휘몰아치는 게 느껴질 정도다.
“너 진짜 죽지 마…! 죽으면 골렘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거 헛소리 아냐!”
기운차게 대답하는 소리가 무기 부딪히는 소리 너머로 먹먹하게 들려왔다.
사실 걱정되어 죽겠다. 하지만 지금은 이를 악물고, 드래곤의 등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비늘을 밟으며 달렸다.
왕관처럼 이어진 뿔이 지척처럼 느껴지는데, 길게 이어진 굵직한 목 끄트머리의 머리는 왜 이렇게 먼지. 학학, 숨이 가쁜 와중…
드래곤의 머리가 움직였다. 황금색 눈이, 마주쳤다.
순간 머리가, 다리가, 눈이 얼어붙는 것 같은 위압감에 걸음이 멎어버렸다.
[네, 년…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거냐?!]
나를 드디어 인지한 용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좌우로 펼쳐진 거대한 날개가 불길하게 퍼덕인 순간, 오싹한 예감이 등 뒤를 내달렸다.
“카르티, 조심해! 뭐든… 붙잡아!”
용의 몸이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바닥에 굵직굵직하게 돋아난 비늘을 붙들고 늘어지지 않았다면 그대로 옆으로 쓸어내려가 떨어졌을 것이다.
[내 등에서… 떨어지란, 말이다!]
“그렇게는 못 해…!”
등에 달라붙어있는 이상 자기 몸에 브레스를 쏠 수는 없는 노릇이겠으나… 거칠게 흔들리는 몸이 마치 로데오에 올라탄 것 같았다. 하지만 멀미를 느낄 만한 정신적 여유조차 없었다.
토악질할 것처럼 뱃속이 울렁거리며 비늘을 붙잡은 채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낑낑거렸다. 조금만 더, 앞으로 가면… 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렇게 해 주마!]
비늘 사이에서 핏방울이 튀어올랐다. 상처로 인한 출혈이 아니라… 마치 독사가 독을 뱉듯이 자신의 몸에서 피를 분출한 것이다.
튀어오른 핏덩어리가 빠르게 굳어져서… 꿈틀거리는 사지를 갖춘 골렘으로 변한 순간,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마법의 생물인 드래곤. 이 정도는 말 그대로 숨쉬듯이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드래곤에게 타격을 가할 방법이 없어도, 드래곤은 이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나를 공격할 수 있다. 자신과 무슈마헤트의, 마법사로서의 격의 차이를 실감하는 순간이었지만…
“하필이면 골렘을 고른 건 실수였어…!”
나는 밀리더라도, 내 지팡이는 밀리지 않는다.
희대의 골렘 마스터, 가브롤의 지팡이는 골렘 조종에 특화된 물건이다. 그것이 내 골렘이건, 남의 골렘이건 상관없다. 즉시 지팡이를 겨누어 조종을 시도했다.
드래곤이 만들어낸 골렘까지 조종할 수 있을지는… 별로 자신은 없었지만,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하, 가소롭구나!]
총 세 기의 골렘 중 한 기만은 어떻게든… 내 수중에 넣었지만, 나머지 두 기는 도저히 손이 딸려서 조종할 수 없다. 아니, 고룡의 피로 만들어진 골렘을 한 기라도 조종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두 기의 골렘이 쿵쿵거리며 달려온다. 거기에 더하여… 공간이 일렁거렸다. 물결치듯 허공에 인 파문에서 무엇인가가 기어나왔다.
“우웩… 뭐, 저렇게 생겨먹었어…!”
진녹색의 살결에서 찐득이는 체액을 흘리면서, 길고 깡마른 몸을 따라 눈이 다닥다닥 돋아난 그 징그러운 생명체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이제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적어도 내게 호의적인 몬스터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골렘 두 기와 함께, 철퍼덕 하고 바닥에 널부러진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몸을 일으켰다. 좌우로 벌어지는 턱에는 다닥다닥, 톱니 같은 이빨이 오밀조밀하게 붙었다. 그런 놈이… 네 마리.
이제 어쩌면 좋지?
혼자 대처할 수 없을 듯이 밀려온 위협 앞에, 나는 무력하게 지팡이를 꽉 붙들었을 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