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2 8 / 미쳐버린 드래곤 무슈마헤트에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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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객관적으로 볼 때 상황은 그다지 호전되지 않았지만, 새로 합류한 두 얼굴은 적어도 이 자리에… 아니 내게는 전의를 일으키는 데에 충분했다.
“정말… 오랜만이야. 1년 만이네. 거의.”
잠깐 꽈악 끌어안았다가 팔을 풀고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도, 그리고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동자도 살짝 젖어있어서야 웃지 않을 수가 없지.
“페리링.”
“로즈 씨.”
“어이~ 이보세요. 애틋하신 두 분. 나는 아예 찬밥 취급이야?”
누군가가 주목받으면 자연히 누군가는 조금 소외받게 마련이다.
하지만 주목받지 못하면 죽…진 않아도 심각하게 타격을 받는 인종도 있는 법이지.
“어… 대충 얼마 만이더라, 키르케?”
“한 달도 안 됐는데 잊어버린 거야?!”
페리링의 눈도 조금 식었다.
아, 저거… 레짐에서 주로 미카 씨에게 했던 그 눈이다.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미카 씨는.
“키르케 씨… 이럴 때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지 말아 주세요.”
“내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한숨 푹 내쉬고 성실하게 딴지까지 한마디 보탠 다음 키르케는 표정을 바로했다. 이러고 놀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점에는 십분 동의한다.
“당주는 알다시피 왕도에 소환되어 계셔서 내가 대신 왔어. 음… 루시탄 왕자 전하와, 그 외에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뒤죽박죽 많은 여러분들, 반갑습니다. 나는 흑마법 협회 소속 ‘발톱의 마녀’ 키르케. 여기 있는 로제이아와는 대충 동문의 마녀에요.”
스커트 끝을 들어올리면서 살짝 인사를 하는 키르케를 향한 모두의 시선이… 어쩐지 이 순간 뭔가를 납득한 것 같았다.
‘무릇 마녀라면 이래야지’ 같은 눈이다… 아니, 그럼 뭔데. 그럼 난 마녀도 뭣도 아니란 거야? 아니, 괜한 자격지심인가? 뭐 아무튼. 조금 낯을 가리는 페리링 대신 그녀를 소개해주는 게 내 일…
“그리고 안녕하세요, 여러분. 로즈 씨의 친구분들이신 것 같네요. 저는 궁정마법사 술라 님의 직계 제자인 페리링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페리링은 당당히 제 신분을 밝히면서 목소리를 냈고, 마치 아이의 성장에 기뻐하는 아빠의 기분으로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왜 아빠냐면, 난 엄마라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좋은 추억이 없기 때문이겠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요. 좋은 소식은, 스승님으로부터 드래곤이 왕도를 지나쳤다는 전갈이 도착했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왕도를 그냥 휙 날아서 통과하는 바람에 몬스터들이 미쳐 날뛰고 있어서, 그 토벌에 할애하느라 스승님께서 바로 와주시긴 어려울 거란 사실이에요.”
“그나마 좋은 소식 쪽도 이쪽에 있어서는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네.”
카르티가 중얼거렸다.
의자에 털푸덕, 주저앉으면서 카르티는 연신 볼멘소리를 냈다.
“아아, 미친 용이 대체 어디에 내려앉을지를 조마조마해하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거야? 난, 이제, 정말로, 드래곤이랑, 기다림이라면, 지긋지긋한데.”
드래곤과 기다림을 가장 싫어하게 되어버린 카르티.
우루 늪지에서의 일은 그야말로 트라우마가 될 법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센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불이라는 건 애초에 기다리지 못하면 다룰 수 없어. 한 번쯤 더 드래곤을 벼려보고 싶었는데 나로선 잘 됐지. 어디에 내려앉든 난 그쪽으로 옮겨가서 드래곤을 잡는 데 참여해야겠어.”
“지, 진심이야?! 아니, 댁은 목숨이 몇 개쯤 되는 거슈?!”
“너도 대장장이라면 그 정도 욕심은 가져야 하지 않겠냐.”
“목숨 날리기보단 욕심 좀 누르는 게 낫지 않냐고!”
“죽기 전에 드래곤을 죽이면 될 일이지.”
그렇게 쉽다면 여기 한데 모아서 전전긍긍할 일도 없겠지.
자, 이렇게 우울해하고 있을 때만은 아냐. 정신 차리자. 제 뺨을 탁 때리곤 얼얼한 아픔으로 다시 마음을 평상심으로 되돌렸다. 그 때였다.
또 문이 열렸다.
아니, 여기는 나름 안전가옥인데 이 사람 저 사람 이렇게 막 드나들어도 되는 거야?
좌중의 시선이 문을 열고 들어온 쪽으로 몰렸다가,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후드를 깊게 내려쓰고 몸에 갖가지 장신구를 두른 우아하고 성숙한 몸짓의 여인은… 나를 제외하면 여기 사람들이 알 턱이 없을 것이다. 아니, 그나마 나도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었고, 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귀가 아니라 머릿속에 메아리가 작게 울렸다.
[안녕하신지요, 여러분.]
보고 말았다.
루시탄이 이제껏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그리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점쟁이’ 또한, 입가에 손가락을 살짝 대어 루시탄에게 무엇인가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뭐야,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야?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추궁은 나중에 하도록 하고, 왜 저 사람이 여기에 있는지부터 알아야지.
“그… 길드에 계셨던 점쟁이시죠? 이제 라오후는 더 활동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쪽과의 계약도 무사히 끝난 건데.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거죠?”
[로제이아 씨. 아시다시피 지금 성 밖으로 나가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고, 전 아직 몬스터들에게 습격당하기엔 아직 젊답니다. 습격당한 뒤에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을 당하고 말 텐데, 그런 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짓이라니, 그게 뭔데?!
아니, 이 여자 페이스에 말려들면 안 된다. 내 이름은 대체 어떻게 알았고… 아, 골치 아파.
일동이 대체 저 여자 뭐냐… 같은 눈을 하고 있는 것도 이해한다.
“자, 잠깐. 당신 혹시…”
키르케가 드물게 당황해서는 말을 더듬거렸다.
여자는 서둘러 키르케에게도 입술에 손가락을 대어 신호를 보냈고, 키르케가 완전 당황해서 제 입을 손으로 막는 것을 보았다. 왕자도 알고 있고, 키르케도 알고 있다. 이 여자… 대체 정체가 뭐지?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부디 잠시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기에는 육성으로 말하는 게 아니긴 했지만, 어쩐지 이 점쟁이의 말에는 그다지 의심이 들지 않게 하는 신비로운 분위기 같은 게 있었다. 다소 의뭉스러워하면서도 일단 들어나 보자, 같은 공감대가 형성됐다.
[지금 날아오고 있는 드래곤의 이름은 무슈마헤트. 아주 오래전 ‘탐욕의 전쟁’ 당시부터 살아있던 고룡 중 한 마리입니다. 대다수의 드래곤은 세계의 보호라는 책무를 다섯 왕에게 맡기고 틈새 너머로 떠났지만, 몇몇 드래곤은 떠나지 않고 이 세상에 남았습니다. 무슈마헤트, ‘신의 맹독’이라고 불리는 이 용도 그러한 남은 이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룡….”
한층 더 침울한 분위기로 가라앉았다. 일반 드래곤과 고룡 사이의 간극은, 와이번과 드래곤만큼의 차이가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리고 드래곤은 모래 아침에, 이 도시에 내려앉을 것입니다.]
“그럼 이미 얘기는 끝났네. 우리 모두 내일 중으로 근처에서 누울 무덤이나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도 무리라면 말이지.”
잠자코 듣고 있던 잭이 투덜거렸다. 그와 래핑 크로우 유적단은 어디까지나 부외자였으니, 이 사태에서 발을 빼고 싶은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키에리 씨의 독을 해독할 방법 또한 무슈마헤트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독샘에는 이 세상의 거의 모든 독을 풀 수 있는 혈청이 포함되어있죠.]
“그럼 할 수밖에 없구만. 그래서, 박학다식한 점쟁이 양반. 그 드래곤을 잡을 방법은 있는 거야?”
[그것에 대해선 제가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점쟁이들의 직업병 비슷한 건가? 천기누설을 못 하는 거.
정작 가장 듣고 싶어하는 건 말해주지 못한다는 태도에 조금 고조되려던 분위기가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직은 여러분의 전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아직 두 번의 조력을 더 받아야 합니다. 저는 여기까지만 말씀드릴 수 있어요.]
두 번의 조력…?
어디에서 더 조력을 얻어야 하지? 지금 여기 모인 이들이, 날 보고 모여준 전력인데.
이 이상의 전력을 끌어모을 방법 같은 건 내게는 없다. 다른 이들도 그러할지는 모르겠지만… 주위를 둘러보았다.
루시탄. 웬즈데이. 즈왈트.
카르티. 센 씨. 늑대원숭이.
잭 단장. 꼬마 도령 토마스. 그리고 페리링과 키르케.
그리고 이 자리에는 없지만, 칼 프레드릭 바츠 경까지.
여기서 더 뭘 어떻게 전력을 끌어모아야 할지… 솔직히 말하자면 막막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줄 수는 없나, 하고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점쟁이는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렸을 뿐이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사흘 후의 아침을 모두 살아서 맞이할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겠습니다.]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점쟁이는 총총히 떠나갔고, 조금 넋이 나간 듯이 그 뒷모습을 보고 있는 루시탄과 키르케의 거동이 암만 봐도 수상했다.
만약, 이 위기를 잘 넘길 수만 있다면… 저 둘을 족쳐서 수상한 점쟁이에 대해 조금 물어봐야겠다. 플래그 같은 발언이 되고 말았지만, 당장은 아무래도 좋다. 적이 아닌 게 어디냐고.
“…뭐 아무튼. 그래도… 드래곤 토벌을 반드시 해야만 할 이유는 생겼네.”
그 드래곤을 쓰러뜨리면 키에리를 구할 수 있다.
누군가는 드래곤을 벼리길 원하고, 누군가는 기꺼이 날 돕자고, 이 사지까지 달려와주었다.
동기는 제각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작전 회의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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