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98화 (98/157)

〈 98화 〉 2 ­ 8 / 미쳐버린 드래곤 무슈마헤트에게 (2)

* * *

(2)

산 넘어 산. 호랑이굴에서 빠져나왔더니 이번엔 드래곤의 레어.

사공이 너무 많으면 산을 넘어도 산이 나온다.

이게 아닌가, 하는 딴지는 잠시만 접어두길 바란다.

하지만 멍때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던 것도 사실.

연락소에 들러 서둘러 독수리를 보내고 두어 시간 후 약속 장소에 전부 모였다. …모이고 보니 꽤 장관이다. 바글바글한 대인원이 되었다.

“…일단 다들 혼란스러운 와중에 이렇게 전부 모여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데, 또 골치아픈 상황이 생겨서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어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모인 곳은 루시탄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안전가옥 겸 술집이었다.

꽤 많은 시선이 이쪽에 쏠리고 있는 건… 꽤… 부담스럽네.

“대체 무슨 일로 여기에 모이라고 한 거야? 마녀 아가씨.”

성벽 밖에서 야영하고 있던… 본인들 왈 유쾌한 도적 일당, ‘래핑 크로우 유적단’의 리더인 잭 씨가 벌써 한잔 들이킨 술잔을 찰랑거리면서 물었다. 그 옆에는 꼬마 도령 토마스가 함께였다. 토마스는 키에리가 걱정되었는지, 며칠째 잠을 못 잔 것처럼 눈밑이 거뭇거뭇했다.

“키에리를 위해서도 지금은 성내에 머무르는 게 나을 것이고, 또… 사안이 사안인지라 어쩔 수 없었어요.”

“그 사안이라는 건 뭐지?”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의문이 제기되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땋아 내린 젊은 남자. 하지만 사실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연장자일 것 같은 센이 팔짱을 낀 채 물었다. 그 뒤로 검사 늑대원숭이와 센에게 기술을 배우고 있는 카르티가 있었고.

“내가 대신 얘기하겠소. 나는 이 나라, 알트슈타인의 둘째 왕자인 루시탄 알브레히트 알트슈타인 팔케요.”

반응은 썰렁했다.

하나같이 한 성질들 하는 사람들인지라 그래서 뭐, 라는 반응이었다. 루시탄은 기대한 반응이 아니었는지 조금 당황해했고…. 꽤 상황이 심각한데 이렇게 분위기가 붕 떠 있어도 되나 싶다.

“지금 우루 늪지에서부터 이 베어링턴을 향해… 드래곤 한 마리가 날아오고 있다고 첩보가 왔소. 그래서 이 사람의 친구인 여러분과 상의하고자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오.”

그제야 조금 반응이 있었다.

주목하고 있던 이들 가운데 웅성거림이 일었고, 목소리를 낮추어 저들끼리 귀엣말을 주고받는 표정들에는 아직 신뢰가 부족했다. 이해한다. 나도 아직도 믿지 못하겠거든.

“그 정도는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겁니까? 그, 왕자 전하 나리.”

“나는 개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정보통을 좀 가진 편이거든.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봐도 좋을 거요.”

낭보이길 바랐던 이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왕자가 보증하는 사실인 이상 진위를 따지는 것은 이미 아무 의미가 없었다. 센이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구했다.

“그 드래곤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르는 건가?”

카르티가 거침없이 반말을 내뱉는 센의 태도에 놀라 눈을 치떴지만, 정작 그 반말을 내뱉은 이도, 받은 이도 별 생각은 없어보였다.

“만약 여기라고 하면 오는 데는 얼마나 걸리지?”

“드래곤이 마음만 먹으면 세상의 끝이라도 하루 안에는 도달할 수 있겠죠. 우루 늪지에서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내일쯤이면 도착할 겁니다.”

“즉 인제 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여신에게 여기가 아니길 비는 것밖에 없단 얘기군.”

센의 말투는 노골적으로 이죽거리는 투였지만 이 자리에서 용기 있게 나서서 규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드래곤이란 그런 존재니까.

“그런데 프레드릭 씨는?”

“시장을 만나러 갔어. 이 사태에 대해서도 알아야 영병과 길드에도 협력을 구하겠지. 라오후 토벌은 그 이후가 되겠군.”

이 자리에 없었던 프레드릭의 행방에 대해 물으니 루시탄은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잠시, 이 자리에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잊었다.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총대를 멘 것은 카르티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대체 두 사람은 무슨 사이야? 그쪽 왕자님과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지만 얘기는 나도 대충 들었거든. 아무리 생각해 봐도 평범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단 말이지?”

“카르티… 지금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잖아.”

“아니, 오늘이 아니면 물어둘 기회가 아예 없을지도 모르잖아.”

불길한 소리를.

한숨을 푹 쉬는 순간, 루시탄이 손을 내려서 내리고 있던 내 손을 붙잡았다. 히죽거리는 입가에 장난기가 보인 순간, 이 녀석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너도냐!

“이런 사이.”

내 손을 붙잡은 채로 흔들거리는 루시탄의 행동에 좌중의 눈이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지라도 흥미로 반짝였다. 조금 볼을 붉히곤, 녀석의 손에서 내 손을 빼냈다.

“적당히들 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대책을 세우자고 모인 자리야, 대책을.”

“대책이라….”

루시탄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일단 왕도에서 보낸 사람이 도착했을 시간이다. 대마법사는 아니어도 나름의 전력이 되어줄 것이고. 만약 드래곤이 얌전히 왕도를 지나치면 곧바로 궁정 대마법사 술라가 여기로 합류하기로 했다.”

궁정마법사 술라.

말 그대로 이 나라의 히든카드. 드래곤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전력이 거론되자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지만, 그 다음 이어지는 루시탄의 말은 그 누그러진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기에 충분했다.

“…만약을 대비해 드래곤이 지나간 뒤 하루 후에 바로 온다고 하니… 그 두 사람의 조력과 베어링턴의 전력으로 드래곤을 맞아 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얘기가 되지.”

“드래곤을 상대로 하루를 알아서 버티라니… 그건 우리더러 그냥 타죽으라는 얘기나 다름없는데. 차라리 지금이라도 성을 빠져나가는 게 낫지 않아요?”

카르티의 말에 잭과 토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말을 부정할 만한 정보를 내가 갖고 있었다.

“무리야. 미친 용이 지나간 자리에는 몬스터들도 미쳐 날뛰거든. 드래곤이 여기를 그냥 지나갈 비는 거랑 가는 곳마다 미친 몬스터랑 만나는 것 중 뭘 고를래?”

“내가 해 준 말이잖아.”

“나도 마녀야. 배운 게 있다고.”

드래곤은 그 존재만으로 주위의 환경을 적지 않게 변화시킨다.

드래곤이 잠든 곳 근처에만 가도 강한 몬스터들이 드래곤의 영향을 받아 강해지거나 사나워지는데, 분노로 날뛰는 드래곤이 지나간 자리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지.

헤카이트 당주에게 들었던 드래곤의 생태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예를 들면, 이 세계의 드래곤은 알이나 새끼를 낳지 않는다는 것.

그럼 어떻게 번식할까? 놀랍게도, 여기의 드래곤은 말 그대로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혈족을 늘릴 수 있다고 한다.

드래곤이 날아간 자리에는 마치 나비가 인분을 뿌리며 비행하는 것처럼 드래곤이 분출하는 파장이 주위의 자연원소 ‘에이트(Eitr)’를 변질시키는데, 여기에 노출된 동물, 식물, 심지어는 광물까지도, 아주 드물게 드래곤으로 자라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물론 날아간 자리가 아니라고 해도 드래곤의 둥지 근처에서도 같은 현상이 관측되지만 그렇게 자연발생한 드래곤이 한 마리의 완전한 성룡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말 그대로 천차만별, 개체차가 크다고 했다. 그래도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그 때문에 이 세계의 드래곤은 그 본체에 성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고, 거의 일평생 잠을 자는 본체 대신 ‘유희’로서 활동하는 분신 또한 단순한 취향, 오락적인 영역에서 성별을 선택한다나.

더불어 그런 생태를 사는 특성상 부모가 새끼를 보호하는 본능 역시 드래곤에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한데, 지금 당장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 이야기군.”

센이 가볍게 촌평하고는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뒤에 선 늑대원숭이는 이제껏 단 한 마디도 없었는데, 오로지 그만이 조용히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설마, 늑대원숭이는 드래곤과 싸울 생각… 인가?

‘잠깐… 이렇게 되면, 그건 어떻게 되는 거지?’

원점으로 돌아와서, 이 도시에 왔을 때 가장 먼저 만났던 점쟁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라오후는 이제 사실상 궤멸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상황이 이런 이상, 그녀는 자신의 목적… 이 도시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보류해야 했다. 혹시 지금의 이 상황까지 알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자리가 파하는 대로, 한번 길드에 얼굴을 몰래 내밀어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을 굳혔을 즈음, 출입구의 경첩이 녹슨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

덩치가 커다란 남자가 하나. 그리고 그보다 작은 여자 둘이 뒤따라 들어왔다.

가장 앞에 선 사람은 두 사람을 인솔해서 여기로 데리고 온 듯한 노기사 칼 프레드릭 바츠 경이었고, 뒤따라 오는 두 사람도 눈에 익었다. 아니, 익다 뿐일까.

“너희들… 이었어? 루시탄이 말한 왕도에서 보낸 사람들이라는 게?”

두 사람의 마법사가 웃었다.

한 명은 살짝 바들거리는 입가에 희미하게, 한 사람은 자신만만한 웃음을.

“잘 있었어? 꽤 지인이 늘었네.”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고 있는 마녀가 제 허리에 당당히 손을 짚고, 와인 같은 머리카락을 훑어냈다.

“오랜만이에요, 로즈 씨. 그동안 잘 지내신 것 같아서… 기뻐요.”

그리고 그 옆에 선 한 명.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길게 기른 물색의 머리카락 사이로, 투박한 뿔테 안경이 엿보였다.

지팡이를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가, 내게 달려오는 그 작은 몸을 끌어안아주었다.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반가움에, 내 손끝도 떨리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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