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2 4 / 걸리버들의 도시, 베어링턴에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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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령 같은 늑대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지도, 그렇다고 곁을 내주지도 않았다.
그저 안개 속에서 희미한 실루엣을 놓치지만 않게끔 거리를 유지하면서 앞서갈 따름으로, 덕분에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 기묘한 동행이 몇 분간 이어졌다.
사방을 둘러싼 안개가 짙게 들어찬 동굴 앞에서, 늑대는 걸음을 세웠다.
턱을 들어올리고, 얇게 울음소리를 울린 영물은 그대로 구슬프게 처연한 울림을 남기며 사라졌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동굴 앞에서 침을 꼴깍 삼켰다.
들어가자,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다급함이 전해져오는 목소리는 귀에 익었다.
안쪽에서 번뜩이는 반사광이 무엇인지도.
“나야, 나.”
…말해놓고 보니 한때 유행했던 사기가 떠올라버렸지만, 알아들었으면 문제야 없겠지.
조금 안도하는 기색이 느껴져서, 툭 하고 뭔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대답처럼 들렸다.
“마녀… 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가 말하는 본새 한번 참 곱디곱네.
순간 욱해서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콱 찍었다.
“그래, 마녀다. 이 버르장머리라곤 뽑아서 물약으로 만들래도 없는 망할 꼬마야.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윽….”
분명 바락바락 대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주눅이 든 반응이 돌아왔다.
조금 더 동굴 안쪽으로, 녀석의 윤곽이 어슴푸레 비치는 안쪽까지 들어가보니 어깨를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뭐야, 설마 울어?
“울렸군.”
“울렸네요.”
“시끄러!”
좌우에서 한마디씩 토를 다는 골렘들을 윽박지르고는 조금 켕기는 게 없지는 않은지라 어흠, 헛숨을 내뱉었다.
“화내서 미안. 나도 모르게 조금 욱해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말해봐.”
“키르… 누나가….”
키에리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이쯤 되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욱하고만 있을 순 없다. 지팡이를 들어 간단한 빛 주문을 외우자, 골프공 정도 크기의 빛구슬이 지팡이 위로 떠올랐다.
“즈왈트, 입구를 지켜.”
“알았다.”
즈왈트가 등을 돌려 입구를 노려보는 사이 가까이 다가갔다. 꼬마는 웃옷을 벗고 있었는데, 그 옆에 누워있는 키에리의 낯빛은… 조명 탓이 아니더라도 하얗게 질려서 볼만이 열에 들뜬 것처럼 불그레했다. 꼬마가 벗어서 덮은 웃옷으로도 체온을 유지하는 것이 슬슬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헐떡이는 숨을 불규칙하게 내면서 몸을 떠는 것으로 보아 갑작스럽게 닥친 열병이나 감기로는 보이지 않았다.
“…독?”
짧게 물으니, 꼬마 도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깨물고, 금방이라도 넘칠 것 같은 울음을 한주먹 눈에 매단 채로, 용케 그것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이 세계에도… 그런 게 있나? 남자는 울면 안 된다, 뭐 그런 거?
“생전 처음 보는 몬스터들에게… 습격당해서… 윽… 키르 누나가, 날 감싸다가….”
“혹시 그 몬스터, 털북숭이에 꼬리는 넙데데하고 손발이 짧은 놈이었어?”
여전히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을 뿐인 우는 얼굴로 꼬마 도령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바츄… 정말이지, 물불 안 가리고 사람을 보이는 대로 습격하는 모양이다. 독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지만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지. 오리너구리처럼 생겼기도 했고.
“…무슨 독인지만 알면 해독하겠는데 여기서는….”
이래봬도 식물 계통의 마법사다. 독에는 나름대로 조예가 있었다.
어떤 독인지만 알면 어떻게든 해독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도구도 시간도 없었다.
급한 대로 무한 주머니를 탈탈 뒤져서 꺼낸 범용 해독 포션을 키에리의 입에 부었다. 이걸로 어떻게든 되면 다행이겠지만…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걸로 해독할 수 있는 것은 뱀이나 벌의 독 정도라고.
…그런데 키에리의 표정이 아주 약간 편안해졌다. 들뜬 채 허덕이던 숨소리도 아주 조금이나마 잦아들어서, 조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즈왈트, 키에리를 업어줘.”
즈왈트의 등에 업힌 키에리가 숨을 쌕쌕 몰아쉬는 게 애처로움을 느끼게 했다. 불그레하게 달아오른 뺨을 타고 땀방울이 주륵 흘러내리는 것이 오래 시간을 끌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차피 범용 해독제는 말 그대로 임시방편. 서둘러 숲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동굴 밖으로 나오자 안개는 조금 옅어져 있었다. 아마 그 늑대가, 이 동굴을 도바츄들로부터 가리기 위해 안개를 불러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설마, 하는 생각과 거의 그럴 거라는 확신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침을 꼴깍 삼키고 골렘을 불러냈다. …지난번의 실패를 교훈 삼은 바위 골렘으로, 이번에는 타버리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 늑대는 왜 자꾸 우리를 돕는 걸까요?”
“그 생각은 나중에 하자.”
물론 신경은 쓰인다.
무리의 위기에 나타난다고 하는 늑대가 한가롭게 키에리가 가엾어서 도와줬을 거라고 생각하긴 어렵지 않은가. 왔던 길을 되짚어 나아가면서 걸음을 서둘렀다. 길을 따라 옅게 이어지고 있는 안개 덕에, 길을 잃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짐승, 혹은 몬스터한테라지만, 빚을 지는 것 같아서 영 기분이 찜찜했다.
“꼬마. 그때 상황을 자세히 말해봐.”
조금 다그치는 듯한 어투가 되어버렸지만, 뒤따르면서 심하게 풀이 죽은 꼬마에게는 그 정도의 충격요법은 효과가 있을 것이다.
“…내가 토끼를 발견해서 키르 누나랑 같이 숲으로 들어갔어.”
“거기까지는 아주 대충 들었어.”
들었다기보단 짐작이었지만.
그때를 떠올렸는지, 꼬마 도령은 눈을 꽉 감고 아직도 뽑아든 터인 커틀러스의 손잡이를 더 바투 움켜쥐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깊이 들어와서 토끼를 잡긴 잡았는데, 그 녀석들이 나타났어. 대략 열 마리 정도… 키르 누나가 두 마리, 내가 한 마리를 해치웠지만, 키르 누나가… 놈들의 칼에 팔을 베였어. 그리고 쓰러졌고.”
…키에리가 두 마리를 상대했다는 건 조금 의외였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지.
정황상 키에리를 베었다는 도바츄의 칼에 어떤 독이 묻어있었고, 그 때문에 지금 이 상황에 빠졌다는 얘기지.
“그리고. 그 다음은?”
“키르 누나가 쓰러지고, 내가 어떻게든 한 마리를 더 해치웠는데…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했어. 젠장, 젠자앙…!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그런 소리는 나중에 해.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사실 그 다음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하지만 본인의 증언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확신이 필요했다. 녀석은 고개를 조금 떨구더니,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곤 입술을 한번 더 깨물었다.
“…그 늑대가 나타났어. 안개가 꼈고… 녀석들이 무서워하면서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늑대가 순식간에 네 마리를 해치워버리자 남은 녀석들은… 도망갔어. 늑대가 키르 누나를 태우고 동굴에 데려다줬고… 그, 못 믿겠지만… 무리를 데려오겠다고 늑대가 그랬어. 정말이야.”
“아니, 나도 비슷한 일을 겪었으니까 그건 믿겠는데.”
그 순간, 그 늑대는 분명 ‘따라오라’고 의사를 전달했었다.
목소리가 아닌 무엇인가… 영적인 의사 전달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그 늑대는 뭔가 다른 얘기는 없었어? 왜 도와주는지에 대한 거라든가, 하다못해 키에리가 당한 독이 뭔가라든가.”
솔직히 늑대가 그렇게까지 친절하게 얘기해줬을 거라곤 생각하기 어렵지.
소년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답답했지만 꼬마 도령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안개가 가려준 덕인지는 모르겠으나, 숲을 빠져나올 때까지 도바츄나 다른 몬스터와 마주치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다른 일행들이 반색했다.
“어이, 로제 너!”
“그렇게 멋대로 뛰쳐들어가면 안… 무슨 일이 있었나?”
카르티는 화를 냈고, 잭 단장은 뭐라 타이르려다가 숨이 턱에 닿은 채 헐떡이는 나와 꼬마 토미의 표정을, 그리고 즈왈트의 등에 업혀있는 키에리의 안색이 심상찮은 것을 보고는 어느 정도 사태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설명은 나중에 해요. 지금은 일단 키에리를 살리고 보자고요.”
“치유 마법사도 같이 불러야겠군. 독수리를 보내놓겠네.”
“부탁해요.”
치유 마법사… 문득 페리링이 생각났다.
미치도록, 지금은 그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담 윕의 창관의 치유 마법사 페리링은 이 자리에 없다. 베어링턴에서 치유 마법사가 올 때까지는…
“키르 누나…”
결국 참았던 눈물을 쏟는 꼬마 도령의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그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손을 들어서 제 양뺨을 짝 때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헤카이트 당주에게서 치유 주문을 하나라도 더 들어둘걸, 하고 후회하고 있을 짬 따위는 없다.
“괜찮아. 넌 좀 물러나 있어. 이제 키에리는 나한테 맡겨.”
툭툭, 소년의 어깨를 두들겨주고는 필사적으로 머릿속의 지식을 뒤졌다.
뭔가, 뭔가 하나라도… 지금 상황에서 쓸 수 있는 건 없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있었다. 한 가지, 있었지 않은가.
지난 1년 동안 헤카이트 당주가 엄금했었던 주문인 강령술…. 이유를 말해준 적 없지만, 그녀는 강령술을 사용하는 것을 엄금했고 관련 지식을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이 어디 물불 가릴 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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