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68화 (68/157)

〈 68화 〉 2 ­ 4 / 걸리버들의 도시, 베어링턴에서 (3)

* * *

(3)

약속했던 4시를 조금 넘겨서 잭 단장도 뒤늦게 도착했다.

서글서글한 웃음을 문 그대로, 손을 흔들면서 느릿느릿 걸어오는 것이 딱 약속 시각에 늦은 사람의 전형적인 태도로.

“아, 미안미안. 이게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려서.”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

“이야기는 얼추 되어서 독수리를 보내놨네. 여기까지 오는 정도는 문제없겠지. 성 외곽에 대놓으면 그쪽으로 기사를 보내준다더군.”

관청에도 들렀다 온 건가? 그래서야 늦을 법도 했다.

정체불명의 비행선이 성에 가까이 온다면 당장 주민들이 긴장할 테니까. 그런데 성 외곽이라고 하면 설마…

“어, 르누레르 숲 어귀에.”

또 거기냐고. 뭐 어쩔 수 없겠지만.

설마 도바츄들이 숲 어귀에까지 출몰하진 않을 거라고 태평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이쪽도 슬슬 이동해야 할 텐데.

“남은 쪽한테서는 이렇다 할 연락이 없었나요?”

카르티와 키에리, 그리고… 꼬마 도령. 이름이 토미였나, 토니였나 헷갈린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토미야, 토미. 이름 정도는 기억해 주라고. 이제껏 특별한 연락은 오지 않았어. 뭐, 별일이야 있었으랴만. 그나저나…”

잭 단장의 눈이, 내 옆에 서 있는 웬즈데이에게 향했다.

그러고보니 이 모습으로 보게 된 건 처음이었던가.

“누구야, 그 쪽의 작은 아가씨는…?”

“…뭐, 설명하자면 긴데 그냥 쉽게 말하자면 제 사역마에요. 이름은 웬즈데이.”

“안녕하세요. 단장님.”

“오, 오. 잘 부탁한다고. 아가씨. 웬즈데이? 이름 멋지네.”

참으로 어정쩡한 통성명을 마치고 나자, 슬슬 출발하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

잭 단장도 느긋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기에, 천천히 르누레르 숲 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가는 동안 모은 정보를 한번 취합해보도록 할까.

가장 첫 번째로 얻었던 정보. 죽어가는 도바츄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면서… 조금 엿본 기억에서 그들은 아마 우루 늪지에서 이 숲에 온 것 같았다. 그 시기는 아마 일주일쯤 전.

그리고 이 숲에 살고 있던 흰 털의 늑대 무리와 마찰을 빚었고, 웬즈데이의 정보에 따르면 매우 교활하고 영리하다는 그 흰 늑대 무리가 도바츄 무리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밀리고 있는 상황인 모양이다.

어떻게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느냐면… 무리가 위기에 처하면 나타난다는 ‘울포그’라는 늑대 정령을 눈앞에서 봤었기 때문에.

분명 도바츄 무리는 호전적이고 사나웠지만, 숲의 터주대감 노릇을 하던 늑대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정도로 대단한 녀석들이었나? 라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리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뭘 놓치고 있는 거지? 찜찜해서 머릿속에 거스러미가 낀 것 같았다.

“아, 답답해. 아무래도 맞물리지 않아, 대체 뭘 모르는 거지… 뭘 놓친 거지?”

머리를 북북 긁으면서 짜증을 내니 즈왈트가 걱정스러운 양 내려다보고 웬즈데이는 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좌우 양쪽의 온도차가 너무 명확해서 뺨이 따가울 정도다.

휴우, 웬즈데이는 호흡도 하지 않는 주제에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저기요, 장미 씨.”

“…잭 단장이 이상하게 들을지 모르니까 이제 슬슬 그 호칭은 그만하고.”

윤장미, 라는 이름은 분명히 자신의 이름이긴 했지만 이제 슬슬 그것도 과거의 것…이라고 해야 할지. 요즈음 점점 그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변하고 있다. 저쪽에서의 나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면서, 이쪽에서의 삶과 생활에 점점… 집착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시다면요. 그럼 마스터로.”

“…뭐, 그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왜?”

“오지랖 부리려는 얼굴 하고 계신데, 그러지 마시라구요.”

난 그렇게 표정이 쉽게 읽히는 타입인가?

“이래봬도 이쪽에서 마스터와 가장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게 바로 저에요. 가끔 저한테 무심하지만 말이에요.”

“뭐야. 지금 시위하는 거야?”

“반쯤은요. 저는 어쨌든 마스터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구요.”

제 왼쪽 눈을 톡톡 건드리는 웬즈데이가 조금은 얄미웠지만, 일단 하는 말 자체는 귀담아들어야겠다고는 생각했다. 눈 하나를 날려먹은 것도 결국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지랖 때문이라고 생각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결국, 그 때의 루시탄을 내버려둘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원인이었지. 지금도 가끔 왼쪽 눈이 쑤셔오는 것으로 그 때의 상황을 반추하노라면, 어찌됐든 웬즈데이의 걱정도 마냥 기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게 천성이라니까.

“우리는 그런 분을 호구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너 너무 까분다?”

메롱, 하고 혀를 내미는 웬즈데이를 한 대 쥐어박아줄까 생각했지만 골렘에게 꿀밤을 날려봤자 내 손만 아프겠지.

“아무튼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알았으니까 자제할게. 잔소리 좀 그만해.”

“웬즈데이도 주인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 너무 고깝게 듣지는 말도록.”

니들이 내 엄마아빠냐.

양옆의 골렘들에게 번갈아 잔소리를 듣고 있으니 걸음이 죽죽 처지는 것 같다. 아니, 순수하게 그 마음만은 고맙지만.

잭 단장은 골렘들에게 잡혀사는 이쪽의 대화에 끼어들지는 않았지만 흥미롭다는 듯이 듣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걸음걸이가 묘하게 신나보였거든.

뭐 아무튼, 그렇게 이야기를 잇고 잇다 보니 삼나무 숲이 가까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삼나무 숲 앞에 서 있는… 전혀 그 목가적인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비행선 한 척도.

큰까마귀호는 별일 없이 도착한 모양이다. 저 멀리서 이쪽으로 손을 흔드는 카르티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졌다.

“별일 없었어?”

“뭐, 이렇다 할 정도로 큰일은 없었어.”

“…어라. 그런데 왜 혼자야?”

카르티 혼자인가?

키에리와 꼬마 도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뭐야, 둘은 어디 갔어?

카르티는 눈을 깜빡이고는 바위에 걸터앉은 채로 느긋하게 하품을 했다.

“이쪽은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고. 사냥이라도 해 온다고 둘이서 숲에 잠깐 들어갔어. 곧 올 거야.”

“잠깐… 저 숲에 들어갔다고?”

“왜? 뭔 일 있어?”

…아 젠장. 뭔가 일이 귀찮아질 것 같다.

잭 단장을 돌아보았다. 그도 댄디하고 표표하던 표정을 조금 무너뜨리곤 적잖이 당혹해하고 있었다.

“왜 그래? 저 숲에 늑대가 좀 돌아다닌다는 정도는 알고 있어. 하지만 이런 낮에는 오히려 만나기가 더 힘들…”

“그게 아니야!”

아무래도, 잭 단장이 독수리를 통해 소식을 보낼 때 르누레르 숲에 도바츄가 출몰한다는 얘기는 쏙 빼놓은 모양이었다. 그야 빼놓을 만도 했겠지! 그 사이 숲에 들어갈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옅게 안개가 낀 숲 너머를 바라보면서 발을 동동거렸다.

영문을 몰라 눈을 휘둥그레 뜨는 카르티에게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와중, 즈왈트가 내 어깨에 손을 짚었다.

“설명보다는 지금은 두 사람을 찾는 것이 더 급하다.”

“그, 그렇지. 아무튼, 긴말할 시간이 없어. 저 숲은 지금 좀 위험해. 빨리 둘을 찾아서 숲 밖으로 데리고 나와야 하니까.”

오지랖이든 뭐든…

아무튼,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막는 게 먼저일 것이다.

“잭 단장, 여기를 부탁해요. 카르티도 여기 남아줘, 내가 두 사람을 찾아올 테니까!”

“어이, 로즈?! 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 아 좀!”

답답해하는 카르티의 목소리가 등 뒤로 따라와 달라붙었지만, 미안하게도 지금은 길게 설명할 틈이 없다. 불길한 예감이 거미처럼 슬금슬금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초조감이 족쇄처럼 발목을 붙드는 것 같았다.

안개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솟아올라 사방에 가지와 뿌리를 뻗친 삼나무가 마치 유령 들린 나무처럼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에 불안함이 줄기를 기어오르는 애벌레처럼 스멀거렸다.

“즈왈트, 뭔가 보여?”

“주인. 너무 초조해하고 있다. 마음을 가라앉혀라.”

옆에서 보기에도 조금 신경이 곤두섰던 모양인지 즈왈트가 낮게 진정시키듯이 말했다.

하지만… 아까 괜히 카테르네에 대해 생각했던 탓인지는 몰라도 불길한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꿈틀거리는 게 신경쓰이고 있다고.

“조금 진정하세요, 마스터. 아직 그렇게 깊이 들어갔을 시간은 아니에요.”

“어? 어… 어.”

자박자박, 발밑에 웃자란 풀들을 밟고 나무를 헤쳐가며 지나치게 기세를 타서 들어온 모양이다. 조금 초조해한 나머지 깊이 들어온 모양이다. 다행히 가는 길은 즈왈트나 웬즈데이가 기억하고 있다고 하지만.

“…기다려라, 주인.”

별안간 즈왈트가 표정을 굳히고 앞으로 나섰다. …혹시 도바츄가 나타나기라도 한 건가? 슬쩍 몸이 긴장감에 굳어졌고, 웬즈데이를 대신해서 마련해둔 완드를 꺼내 손에 쥐었다.

“…도바츄라도 나타났어?”

“아니… 그들이 아니다. 이건.”

눈치채지 못하던 사이 갑자기 음산함이 느껴지는 안개가 훅 짙어져서, 우리 주위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서늘하면서도 날카롭게 살갗을 스치는 듯한 안개. 그 안개 사이로 어른거리는 검은 형체가 비치고 있었다. 네발 달린 짐승의 윤곽이 어렴풋했다.

“…그 늑대?”

조금 멍하니 입을 떼자, 안개 너머의 실루엣이 주둥이를 들었다.

유령이 우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차가운 안개를 뚫고 귀에 먹먹하게 스며들었다가, 짐승이 고개를 돌리고 등을 보였다. 뒤를 돌아본 채인, 그 늑대의 의도가 어째서인지 전해져왔다.

따라와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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