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2 3 /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꼬맹이에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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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 손에는 커틀러스를, 다른 손에는 짧은 심지가 달린 둥근 폭탄을 던졌다 받았다 하며 갖고 노는 철부지 꼬마.
그리고 그 꼬마를 올려다보는 자신의 표정이 어땠을지는, 잘 상상은 가지 않았다.
“아… 또 귀찮은 일이 될 느낌인데.”
하지만 마냥 낙관할 수 없는 것도 사실. 매복을 두기에는 딱 좋은 장소이긴 하다. 길 양옆으로 숲이 우거진 언덕이 조금 높게 솟아있는데다 이쪽은 발이 둔한 짐마차가 네 대. 크라수스도 난감한 표정으로 좌우를 둘러보고 있었다.
“포위했다는 말은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군요….”
크라수스가 허탈하게 중얼거린 이유는 사방에서 가끔 반짝거리는 금속의 반사광 때문이었다. 아마 화살촉을 일부러 보이게 노리고 있어서겠지.
즈왈트와 웬즈데이가 내 주변을 감싸듯이 섰다. 골렘들이라 화살 정도로 타격을 입지 않겠지만 눈먼 화살이 내게 날아왔다간 바로 비명횡사할 테니까.
“어떻게 할 거야?”
카르티가 방패 손잡이를 초조한 듯 쥐었다폈다 하면서 내게 가까이 붙어서 빠르게 소곤거렸다. 나라고 알 턱이 있겠냐고요. 그냥 우리끼리 빠져나가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그럴 때 남아있는 크라수스 씨나 짐마차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강행돌파할까?”
…근질근질해하지 마. 크라수스 씨가 곤란해한다고.
묘하게 제 아버지를 닮은 방법론을 제안하는 카르티를 잠시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건 제발 좀 최후의 방법으로 남겨놓도록 하자.
“물론 이 짐들을 내놓을 순 없습니다만….”
크라수스는 어지간히도 곤혹스러운 눈치였다.
행상인이 어쭙잖은 협박으로 상품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가 칼을 들이대며 어설픈 협박을 했다고 짐을 넙죽 내놓았다는 소문이 퍼지면 앞으로 어떻게 장사를 하겠는가. 상인끼리의 소문은 화살이나 새보다도 빠른 법이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사이, 돌덩어리 위에 선 꼬맹이가 발끝을 바닥에 톡톡톡 두드리면서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얼굴을 했다.
“얼른 결정하라고! 짐을 내놓고 지나갈지… 아니면 한바탕 혼이 난 다음에 내놓을지 말야!”
“구체적으로 어떻게 혼을 낼 건데?”
하도 기가 막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물으니 소년의 얼굴에 음? 하고 반응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혼낼지를 잠시 고민고민하다가, 결국 적절한 벌을 생각해내지 못한 모양이어서, 벌컥 화를 냈다.
“그건 지금부터 천천히 생각해도 상관없잖아!”
…뭐 좋다고 치고.
어차피 짐마차 주인은 크라수스이니 선택도 그의 몫이다.
평판에 흠집이 갈 것을 감수하고 짐을 양도할지. 아니면 협상을 할지.
협상을 한다면 누구와 할지도 중요하다. 적어도 저 꼬맹이와는 하지 않는 게 맞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크라수스가 앞서가던 짐마차의 마부들과 한데 모여서 무언가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꼬맹이의 장난에 어울려주는 것치곤 조금 심각한 표정이라는 게 의외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그냥 즈왈트 형씨 정도면 슥삭 해버리고 가는 것도 문제 될 건 없겠는데. 저 꼬마, 도적이래잖아?”
재미없어하는 얼굴의 카르티는 왜인지 즈왈트를 꽤 신뢰하게 된 모양이었다.
괴물의 뱃속에서 보낸 며칠이 둘의 유대를 뭐, 끈끈하게 이어놔주기라도 했나…? 주인인 나보다도 내 골렘을 고평가한다니, 조금 찜찜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잠시 기다린 끝에, 크라수스가 먼저 나섰다.
“그쪽의 책임자와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수상한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니겠지?”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 될 만한 대화를 나누고자 할 따름이죠.”
결국 이렇게 되는 수순인가.
상품을 안전하게 운송하기 위해 약간의 손해를 감수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선택이지만 그 정도면 체면과 신용을 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김이 팍 샜는지 카르티가 조금 궁시렁거렸지만 나로선 조금 안도가 된다. 남모르게 웬즈데이에게 불어넣고 있던 마력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여차하면 저 돌벽을 골렘으로 잠깐 만들어 길을 치우고 지나갈 생각이었다.
카드는 정말로 필요할 때가 아니면 내지 않는다.
이 세계에 와서 배운 것 중 하나다.
“그럼 그쪽의 턱수염이랑, 그 마차에 타고 있던 녀석들. 따라와.”
…아, 싫다.
싫은 예감이 현실이 되었다. 하필이면 크라수스가 대표로 나서게 되는 바람에 그 마차에 타고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가 따라나서게 된 것이다.
“거기 애꾸 여자! 넌 마법사지?”
“보다시피.”
보다시피 나 마법사요, 하는 차림을 하고 있던 터라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소년의 눈이 가늘어진 채 경계의 기색이 짙어졌다.
“아무튼, 거기 짐마차에 타고 있던 녀석은 무기를 모조리 여기 놔라.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는 상상에 맡길 테니까.”
크라수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찜찜했지만 어쩔 수 없나. 저딴 꼬맹이의 말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다니. 애용하는 지팡이와 카르티의 검과 방패가 꼬마가 지정한 장소에 놓여졌다.
자신의 뜻대로 일이 풀려 기분이 좋아졌는지 꼬마는 자못 의기양양해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뭐, 성질대로 뒤엎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가물거렸다.
“우리 두목과의 협상이 끝나기 전에는 아무도 이 길목을 지나가지 못한다. 한 녀석이라도 빠져나가려고 수를 썼다간… 짐을 모조리 불살라버릴 줄 알아.”
래핑 크로우, 웃는 까마귀랬지.
과연 그 이름 그대로 까마귀가 부리를 열고 웃어대는 그림이 그려진 복면과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녀석들이 숲 사이에서 나타나 손을 묶곤 눈가리개로 시야까지 가렸다.
…나중에 두고 보자. 속으로 몇 번이고 투덜거리면서 그렇게 나귀에 태워져 산채로 옮겨졌다. 걸음 수를 세거나 하는 수작을 막아보려는 거겠지. 생각보다 주도면밀한 녀석들일지도 모르겠다. 나귀가 버티지 못할 몸을 한 즈왈트가 별수 없이 걷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한참을 간 끝에 나귀를 세운 일당이 눈가리개와 손목에 묶인 결박을 풀어주었다. 답답한 기분이었다가 겨우겨우 한숨을 쉬곤 뻐근한 손목을 돌렸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산채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거래?”
카르티가 투덜거리는 소리에 지금만은 일부 수긍.
눈이 자유로워지자 보인 거라곤 그냥 텐트 몇 채와… 커다란 천에 덮인 채 로프로 고정된 뭔지 모를 커다란 덩어리 하나. 눈을 깜빡거리며 그 커다란 덩어리를 올려다보려니 쿡, 뭔가가 등을 찔렀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꼬마가 칼집을 씌운 커틀러스 끝으로 등을 찌른 것이었다.
“어이, 너무 눈 굴리지 마. 괜히 염탐하다가 여신이 어떻게 지내시는지를 염탐하게 되는 수가 있어.”
…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고개를 홱 돌리곤 터덜터덜, 앞서가면서 이쪽을 돌아보곤 곤혹스럽게 웃는 크라수스와 조금 화를 내는 듯한 카르티의 시선을 받으면서 근처의 텐트에 들어갔다. 얼굴을 드러낸 꼬마가 막사 앞을 지키는 두 명의 석궁을 든 쫄다구들을 바짝 쪼았다.
“마법사가 하나 끼어있으니까 감시 똑바로 해. 지팡이는 뺏어뒀지만 묘한 술수를 부릴지도 모르니까 정신 차리라고.”
“넵.”
자기보다 훨씬 어릴 꼬마에게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는 쫄따구의 모습에 조금 위화감을 느끼면서 막사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다리를 쉬고 있으려니 꼬마는 커틀러스를 어깨에 걸친 채 크라수스를 가리켰다.
“거기, 행상인 나리는 따라나오슈. 나머지는 이 안에서 얌전히 얘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재미없을 줄 알아.”
한껏 으름장을 놓고는 꼬마와 크라수스가 막사 밖으로 빠졌다.
…이렇게 카르티와 즈왈트, 웬즈데이하고만 남게 되고 보니 어째 쎄한 느낌이 드는데.
크라수스, 우리를 그냥 두고 쇽 빠져나가거나 하는 거 아냐?
“뭐, 느긋이 있자구. 어차피 밖에 있는 녀석들이야 뻔해. 즈왈트 형씨와 네 솜씨 정도면 빠져나가는 건 일도 아니야.”
“그 경우에 알브레히트까지 어떻게 가느냐가 문제 아닐까?”
빠져나갈 방법 같은 건 지금이라도 다섯 가지도 넘게 세울 수 있다.
하지만 빠져나간 다음에는… 마차를 타도 닷새를 꼬박 가야 도착한다는 알브레히트까지 기약 없는 도보 여행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기다리고 있지 않나.
다행히도 일정을 잡아둔 여행이 아니긴 했지만.
“뭐 그것도 어떻게든… 히치하이킹이라도 해서.”
“히치하이킹을 할 마차가 지나가기라도 한다면 말이지.”
잊고 있는 모양인데 누누이 말했듯 알브레히트는 엄청난 깡촌이라고.
마차를 구하는 데도 애먹었던 건 머릿속에서 싹 지운 모양이지?
하나하나 정성들여 딴지를 걸자 결국 카르티는 부아가 치민 모양이었다.
“아니, 그럼 어쩌자고.”
“조금만 기다려봐. 아직 크라수스 씨와 저쪽 이야기가 시작도 안 했겠다.”
벌러덩, 주변에 굴러다니는 모포 말린 것을 베개처럼 써서 누워버리자 카르티가 짜게 식은 눈을 했다.
“난 가끔 네 그 느긋함이 참 부럽더라.”
“그럼 주저앉아 떨면서 울기라도 할까. 유적인가 뭐라던가 모르겠는 웃기는 도적 무리에 납치되었어요~ 하고 징징거리면서.”
“거참 미안하네. 웃기는 도적 무리라서.”
텐트 입구의 천을 젖히면서 들어온 톤이 살짝 높은 목소리.
붉은 물을 들인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날렵하게 묶고, 고양이상의 얼굴에서 눈이 조금 치켜올라가 뜨였다. 입가 한쪽을 슬쩍 말아올리곤 묘하게 뒤틀린 웃음을 보이는 그 얼굴.
“너, 너?!”
나는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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