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2 2 / 기억을 잃어버린 갑옷 즈왈트에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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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 있어. 딱 그런 녀석이 있다고 들었어.”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술술 풀릴 때도 있었다.
모험가 길드에 볼일이 있다고 나갔다가 저녁 무렵에 돌아온 키르케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면서 끄덕였다.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정말로?”
“정말로.”
신발을 벗고 얼얼한 다리를 쭉 뻗은 채로 지친 한숨을 내쉬는 키르케가 으음, 하고 한번 뜸을 들이고는 기억을 더듬는 듯 침음했다.
테이블에 종이 한 장이 쫙 펼쳐지고 슥슥슥 아무도 쥐지 않은 깃털펜이 그 위를 움직였다. 커다란 등판과 날카로운 주둥이, 그리고 굵직한 앞발을 가진… 거북이의 모습이 그려졌다. 키르케가 고개를 끄덕이곤 음, 하고 만족스러운 소리를 냈다.
“이렇게 생긴 녀석이랬어. 남쪽에 있는 우루 늪지에 나타난 커다란 거북이라는데 닥치는 대로 늪에 사는 다른 몬스터를 잡아먹는… 어… 생태교란종? 아무튼, 토벌 의뢰가 들어왔다나.”
제법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인데.
그거, 골렘이랑 리빙 아머랑 비전투계 마법사만으로 어떻게 되는 레벨이긴 하려나?
“아마 무리일걸?”
즉답이었다. 으으, 하고 어깨를 돌려대는 게 꽤나… 쑤시는 모양이었다. 가슴도 평범한 게 그렇게 어깨가 결리나? 웬즈데이에게 턱짓하니 키르케의 등 뒤로 다가간 웬즈데이가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우둑우둑 하고 손가락이 피부를 파고들만큼 강하게 주물러대자 키르케의 얼굴에 쾌감과 아픔이 동시에 어른거렸다.
“아, 거기거기… 좋, 아. 으… 고마워, 웬즈데이. 하여튼.”
키르케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서 본격적으로 웬즈데이에게 마사지를 받기 시작했다. 볼을 발그레하게 붉힌 채 학학 숨을 내쉬는 키르케의 모습이 조금… 야하다.
…즈왈트의 눈에는 저것보다 몇십 배는 더 창피한 꼴을 보였다. 생각하면 으으, 끔찍해.
“그럼 어떻게 하지….”
“파티가 생기길 기다려서 참가해보는 게 어때? 흑마법사면 나름대로 구하는 파티가 전혀 없지는 않아.”
“으음. 하지만 그랬다간 등껍질이 충분할 것 같지가 않아서.”
즈왈트의 몸통 노릇을 하는 갑옷은 오우거에게 입히기라도 할 모양이었는지 대단히 컸다.
우연히 큰 갑옷에 깃든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가 대단한 덩치의 전사라서 그런 갑옷에 깃들게 된 건지는 아직 불확실하고.
저런 덩치가 쓸 창을 만드는 것이다. 분명상당한 양의 소재가 필요할 것이다. 여럿이 나눠가지면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럼당주께 부탁해볼까….”
“당주는 당분간 안 올 거야. 알베레히 산맥에서 학술 연구가 있다고 해서 갔거든. 술라 경이랑 같이.”
…헤카이트 당주가 거절하면 술라에게 슬쩍 부탁해볼까 했는데. 한꺼번에 수중의 패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내며 모조리 똥패가 되어버린 기분에 머리를 긁적였다.
웬즈데이는 어디까지나 제 시중을 들게 할 말 그대로 비서다. 전투력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골렘답게 몸이 튼튼하고 부서져도 수복할 수 있기야 하지만 딱 그뿐.
즈왈트의 전투력은 아직 미지수지만 뭣보다 무기가 만전이라고 할 수 없다. 어제 사 준 미늘창은 도움이 되기야 하겠지만…. 그래봐야 기성품이라서.
키르케에게 슬쩍 운을 띄웠더니, 대번에싫은 얼굴을 했다.
“난 싫~어. 우루 늪지의 독기 섞인 공기는 피부에 몹시 나쁘단 말야. 다녀오고 나면 피부가 아주 두꺼비 피부가 되어있을지도 몰라.”
…난 그냥 커스터마이징으로 피부 상태를 조절하면 되지만 키르케는 그럴 수도 없는 모양.
한번 다녀오면 치유마법을 포함한 전신 테라피를 받아야 한다나. 여자로서 음, 그렇게 말하면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럼 어떻게 한다….”
일단 자신이 아는 인맥을 뒤져보기로 했다.
요 1년간 부지런히 왕도에 아는 사람을 늘려놓았지만 그래도 이런 걸 쉽게 부탁할 만한 사람은 없었는데… 가장 흔쾌히 부탁할 만한 페리링도 마법사인 데다가 치유마법 전공이라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고. …어, 잠깐. 한 명 짚이는 사람이 있다.
돈만 주면 움직이는 데다 싸움을 좋아하고 적당히 한가할 만한 사람이 있지 않았던가.
독수리를 보내 바로 연락해보았다.
다음 날, 만나기로 한 왕도 거리의 술집에 들어가니 그가 진즉에 한잔 걸친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고는 여어, 하고 호쾌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거 의외인데. 설마 아가씨한테서 고용 의뢰가 들어올 줄은 몰랐어. 그런데 난 알다시피 몸값이 꽤 비싼데, 주머니 사정은괜찮냐?”
“제게 필요한 걸 빼고 남은 소재를 다 드릴게요. 그걸로 부족하다면 돈으로 지불하죠.”
마주 앉은 자리에서 미리 시킨 맥주를 쭉 들이켠 사람은 요전번 마법사 자격 시험에서 만났던 남자, 케라우노스였다. …맥줏값은 이쪽에 달아놓으라고 하긴 했지만 이미 오기 전부터 몇 잔 걸친 것 같았다.
“돈, 돈이라.돈은 딱히 나도 넘치도록 있으니 신용을 유지할 정도만 지불하라고…. 대신 다른 대가를 요구하고 싶네.”
…설마 같이 자 달라는 건 아니겠지?
이런 류의 용병을 고용할 때 하룻밤 잠자리로 지불을 대신하자는 제안은 왕왕 있었다. 받아들여도 상관은 없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켕겨서 이제까지는 그런 제안은 일단 거절해놓고 있었는데.
“나중에 나랑 한 판 더 붙어보자고.”
“아니, 난 케라우노스 님한테 상대도 안 되잖아요. 저번 시험에서 한 방에 보내놓고는 더 패고 싶기라도 한 거예요?”
“오우, 한 방에 보내다니… 꽤 말이 야한데, 아가씨.”
“이봐요.”
…대충 낌새는 눈치채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답이 없는 아저씨였다.
세끼 밥이나 밤일보다 싸움을 더 좋아하는 녀석은 왕왕 있는 편인데, 용병 업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이런 사람이 그러면 고용하는 측에서도 꽤 애를 먹을 것이다.
“하아… 가능하면 돈으로 내게 해 줘요. 뭐냐고요. 나 같은 일개 마법사를 두들겨 패주고 싶다니.”
“핫하. 뭐 걸리버 중에서는 조금 두고 보면 갑자기 어마무시하게 강해지는 녀석이 종종 나오거든. 그래서 가능한 걸리버 출신은 눈여겨봐 두고 있지.”
한 모금 더, 맥주를 꿀꺽꿀꺽 꽤 그럴듯한 품으로 삼키고는 커허, 하고 내려놓았다.
나도 케라우노스보다 작은 잔에 나온 맥주를 한 모금 삼키고 안주로 나온 콩 부스러기를 씹어 우물거렸다… 맛은 저쪽 세계의 콩과 별 차이가 없었는데, 이쪽에서는 생산력과 맛이 뛰어난 품종을 마법으로 개량했다고 한다. 참 편리하다니까.
“뭐 당장 붙자는 건 아니고 나중에 아가씨가 나와 비등비등하게 붙을 수 있을 때까진 기다릴 수 있어. 그런 조건으로 어때.”
“…뭐 좋아요. 그런 조건이라면.”
어차피 저 아저씨만큼 강해질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지불은 아~주 나중이 될 것 같다.
돈이나 벌면 그때 갚아야지. 그렇게 대충 셈하면서 케라우노스가 내민 손을 붙잡고 악수를 했다.
케라우노스도 씩 웃으며 손을 마주잡아 흔들곤 놓으면서 맥주를 한 잔 더 시켰다. 살짝 밍밍한 맥주다 보니 여러 잔 마셔도 오줌이 마려운 것을 빼면 그다지 취기도 돌지 않는다. 밥통이 큰 만큼 잘 들어가고 나면 고용비보다 술값이 더 나갈 것 같다….
케라우노스는 새로 나온 맥주를 반쯤 삼키곤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언제 출발할 거야?”
“케라우노스 님의 준비가 되는 대로 출발할까 하는데요.”
“님은 빼도 돼. 케르 정도로 적당히 줄여 부르라고.”
“그러죠, 그럼. 저도 이름은 짧게 줄이는 편이 좋아요.”
흠, 하고 케라우노스가 팔짱을 꼈다. 끄어억, 하고 금색 수염 사이에서 호쾌한 트림을 냈지만 솔직히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안하무인, 방약무인이 몸에 맞춘 옷처럼 어울리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눈앞에 있는 남자도 그런 부류이고.
“그래서. 나와 아가씨뿐인가? 다른 녀석을 고용할 생각은?”
“일단 더 일행이 있긴 해요. 케르 씨랑 같이 싸울 녀석 하나. 정체도 실력도 아직 전혀 모르겠지만요.”
웬즈데이는 전~혀 전투력을 기대할 바가 못 되니 데려가도 요리 정도나 시킬 수 있겠다.
그나마 우드 골렘이라 습기가 많다는 우루 늪지에 갈 수도 없겠지만.
즈왈트에 대해 얘기해주니 흠, 하고 두꺼운 손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리빙 아머란 말이지. 뭐 좋아. 나도 내 전위를 데려가도록 할까.”
“…? 전위가 따로 있어요?”
케라우노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심으로 물어본 건데, 꽤 지긋지긋하다는 반응이었다. 이유는 알 것 같지만. 케라우노스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아가씨는 말야… 아니, 아가씨 말고도 다들내가 본직이 마법사라는 것을 까먹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아니, 누가 봐도….”
그 터질 듯이 단련된 근육이라든지, 온몸에 자욱한 흉터 자국이라든지.
누가 봐도 격투가나 전사의 풍모라고요. 마법을 쓴다면 보조 마법일 것 같고. 눈을 가늘게 뜨고 침묵으로 일관해도 다 안다는 양어깨를 과장되게 으쓱였다. 사실 그런 취급을 받는 게 그다지 드문 일도 아닌 모양이다.
“뭐 됐어. 자질구레한 건 일단 나중에 얘기하고. 내일 바로 출발하지.”
계약 성립. 나무잔과 나무잔이 딱 부딪혔다.
저런 아저씨의 전위라고 하면 무슨 오우거 같은 게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직접 만나보면 알게 될 일이지만.
트롤 같은 걸 끌고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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