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32화 (32/157)

〈 32화 〉 1 ­ 6 / 나 자신, 로즈에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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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으….”

아직 두통이 남아있었다. 머릿속에서 조금 전… 지나간 그건 대체 뭐였지?

마치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자신이 기억해낼 수 있었던 온갖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 것 같았다.

진짜 주마등이 아닌 것을 감사해야 할지 어떨지. 일단 손도 발도 움직이고, 제대로 숨도 나온다.적어도 아직 또 죽은 것 같지는 않은 것에 감사했다.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눈을 떠보니 시녀들이 분주하게 뺨에 분 묻힌 솜을 두들기고 있었다.

…뭐야. 설마 단장이 너무 빡세서 기절해버린 거였나? 으, 하고 이맛살을 찌푸린 채 시녀들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아… 정말이지 개 좆같은 꿈을 꿔버렸네. 뭐냐고 대체.

이윽고 시녀들이 조금 물러서고, 머리를 살살 흔들면서 화장대에서 일어서서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았다…

뭔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여자가 서 있었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화장으로 얼굴을 꾸미고 단정하게 매만진 머리에 조금… 이래저래 무리가 있었긴 했지만 잘록하게 몸을 받치며 둘러진 이브닝드레스까지.

일단 어찌 됐든 이걸로… 적어도 누가 말을 걸기도 전에 창피를 받을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몰라보겠군.”

문이 열렸다. 조금 이죽거리듯한 말투로 칭찬인지 조롱인지 애매모호한 말을 건네며 루시탄이 안으로 들어왔고, 시녀들이 일제히 물러섰다.

좌우로 열을 지어 물러서는 시녀들 사이에 선 루시탄은 손을 내밀었다.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지는데. 이런 거 하는 녀석이었나? 에스코트라도 하려는지 손을 내민 녀석의 손끝을 장갑 낀 손으로 쥔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살짝 오랜만에 신어보는 굽 높은 힐이 무척이나 어색하다.

“깜빡 잠들었었어. 하아, 진짜 개같은 꿈을 꿔서.”

“그만큼 긴장한 모양이지. 가기 전에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겠어?”

다가온 시녀가 접시에 받쳐온 물 한 잔을 조금 내려다보다가 받아 한 모금 입에 물고는 루시탄의 옆에서 복도를 따라 걷는다… 어째서인지 현실감이 조금 옅은 광경이다.

전생에서든, 지금이든… 병사들이 쭉 복도를 따라 깔리고, 발 아래에는 구름을 밟는 듯한 붉은 융단. 그리고 부유해보이는 복장과 인상의 내빈들이 힐끔힐끔 이쪽을 보고 있는 광경.

루시탄은 살짝 웃음을 머금은 채 그들에게 정중히, 그러나 결코 길지 않게 응대했다.

…이런 거 익숙한 녀석이었나 싶지만, 왕자라면 당연하다 싶기도.

뒤따르는 시녀에게 컵을 돌려주고는 일단 녀석의 발목이나 잡지 않게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하며 걸음을 옮겼다.

루시탄이 불쑥,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췄다.

“…로즈.”

…위화감이 훅 뒷목에까지 올라왔다.

조금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뒷목을 어루만지며 자기 어깨께에 있는 녀석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녀석은 조금,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제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말을 꺼냈다.

“이젠 정말로 어쩔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무슨 말이야?”

“결국 율황청의 도움을 받는 것도 어렵게 되었으니까.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면 순순히 왕위를 승계하는 것이 이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각, 또각, 또각.

걸음이 흐트러지지 않게 의식하며 걸으면서,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루시탄의 말투에는 체념의 기색이 짙게 배어있었다.

그렇기에 이 위화감이 거의 확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단 잠자코 들어나 보자고, 입술을 조금 분한 듯 깨물며 침묵을 지켰다.

“그렇잖아. 아바마마의 의향도 결국 변하지 않으셨다. 오늘 타국의 내빈이 얼마나 많이 참석했는지를 보면 아바마마 또한…”

“그만.”

이윽고 그 확신에 한번 더 쐐기가 박힌 순간 입을 열었다.

생긋 웃는 얼굴로 주위의 시선을 끌지 않게 적당히 연기하면서, 루시탄에게… 아니, ‘그’에게 물었다.

“너, 누구야.”

“…음?”

고개를 들고, 녀석이 내 눈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녀석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이 얼굴과 몸은 틀림없이 루시탄의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물은 절대로, 이 나라의 제 2왕자 ‘루시타니아 알브레히트 알트슈타인 팔케’가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내려다보면서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을 잇는다.

“루시탄은 한 번도 내 이름을 그냥 부른 적이 없었어.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루시탄은, 아니 그 안에 들어앉은 누군가는 침묵을 지켰다.

여전히 주위의 내빈에게 손을 흔들며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이 눈가 위로 올라가지는 않았다.

예리하게 사물을 똑바로 부감하고 이해하려 애쓰던 소년의 것이 아니라, 제 실에 꿰인 인형을 조소하고, 무대를 공작하고 인형을 조종하는 인형사의 눈.그렇게 느꼈다.

그래도 마치 시험하듯이, 루시탄은 얼버무리려고 했다. 시간을 끌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저 우연일 뿐이다.”

“우연이라. 그럼 이것도 우연일까? 넌 이제껏 한 번도 내 앞에서 국왕을 ‘아바마마’라고 부른 적도 없었지. 왜, 이것 역시 우연인가?”

세상에 우연이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우연에 또다른 우연이 거듭해서 겹치는 일 따위는 단언컨대 없다.

만약 우연과 우연이 거듭된 결과가 있다면, 그것은 그저 우연인 척 하고 싶어하는 필연이요, 기만이요, 우롱일 뿐이다.

혹은 우연을 빙자한 역겨운 변명이라던가.

"그 또한 우연이다. 피곤이 겹쳐서 머리가 잘 돌지 않아서 말야."

"…그럼 한 가지 물어둘까? 율황청에 네가 뭘 제안했었지?"

눈을 가늘게 뜨고 힘껏 내지른 비수에, 녀석은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살짝 아래쪽으로 뚱하게 일그러진 입가.

잠시 침묵을 지키던 녀석이 이윽고 큭큭거리며 입가를 양껏, 억지로 끌어올리는 웃음. 가늘게 일그러진 눈가. 루시탄은 그런 식으로 웃는 녀석이 아니었다.

“보험을 준비해두길 잘했군그래.”

“…너, 걸리버지.”

이 세계에 ‘보험’이라는 개념이 있을 리도 없다.

아니, 있다 하더라도 자신도 알고 있는 용어로서 성립할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눈치가 꽤 빠르군. 뭐, 하긴. 이 세계에 오기 전에는 죽을 때까지 눈칫밥만 먹고 살던 인생이라 그럴지도 모르지. 아, 마지막 단 한번만은 눈칫밥이 아닌 밥을 먹고 죽었던가.”

“…오랜만에 그때의개 좆같던 기분을 새삼 느끼게 해줘서 존나게 고맙다고 해 줘야 하나?”

천천히, 걸음을 늦춰 연회장에 가까이 가지 않으려는 것을, 녀석은 쥔 손에 꽈악 하고 힘을 주어 끌어내듯이 억지로 보폭을 넓혔다.

“슬슬 약효가 퍼질 시간이군. 잠시동안은 조용히 입을 다물어 줘야겠다. 괜히 성녀가 노래라도 하면 귀찮아지니 말야.”

…역시 그 물 한 잔에, 약이?

눈썹을 찌푸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이 녀석을 한 대 후려갈기면 되나?

아니, 그러고 나면 사형대에서 불경죄로 목을 늘이는 건 자신이 될 것이다.

지금은 이 녀석의 농간에 놀아날 수밖에. 입술을 뻐끔거리자, 녀석의 눈이 유쾌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꽤 날 수상하게 여긴 것 같더군? 조금은 감탄했지. 발톱의 마녀를 감시역으로 붙일 줄은 몰랐어. 따돌리는 데 좀 애를 먹었지. 결국 스킬을 써야했고.”

이쪽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약을 마셨기에, 어차피 그 약효가 다할 때쯤에는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계산한 모양이다.

있는 힘껏 녀석을 노려보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키르케를 어떻게 한 거야.

“죽였느냐고? 설마. 단지 내가 수상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뿐이지. 나도 왕의 자문역에게 직접 손을 대는 게 피곤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 말야.”

…이걸로 어느 정도 지금 제 옆에서 루시탄의 몸에 들어앉은 녀석의 ‘스킬’에 대해서 파악했다.

녀석은 아마도… 타인의 의식을 지배할 수 있는 계열의 걸리버일 것이다.

제 본체를 다른 곳에 두고 조종하는 것이든, 아니면 몸을 옮겨타며 조종하는 것이든… 둘 중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루시탄은 완벽하게 그에게 의식을 빼앗긴 뒤였다.

어쨌든, 이 연회에서 왕이 루시탄에게 왕위의 승계 의사를 물으면 이 녀석은 그것을 냉큼 수락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이 녀석 본인이든, 아니면 옮겨타는 몸이었든… 지금까지 니이냐로서 루시탄의 곁에 순종적인 시녀인 양 머무르며 이제까지의 공작을 꾸민 것이다.

꽤나 손이 가는 짓을 하는걸.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만약 자신이 추측한 대로라면 훨씬 다 간단한 방법은 존재한다.

게다가 아무도 의심하지 못할 방법이기도 하지만 니이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추측대로라면… 그럴 만한 이유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이 녀석은… 뭐 지금은 숙주라고 해 두도록 하자.

숙주가 죽으면 같이 죽게 되거나 그에 준하는 치명적인 상태가 되는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두 가지, 그 증거가 있다. 첫번째는… 만약 의식만을 잠시 지배하고 본체가 따로 있는 능력자일 경우, 루시탄을 왕위에 올리고 싶었다면 왕세자의 의식을 갈아탄 뒤 왕세자를 자결시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왕세자에게는 분명히 삶을 포기하고 싶은 동기가 있었다. 연인의 죽음과 남성으로서의 죽음.

그것을 목전에 두면 자살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도 그 진의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고, 루시탄 본인조차 저항할 방법이 없는 왕위 승계가 이루어지겠지.

두 번째는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

녀석에게는 갈아탄 몸뚱이의 주인처럼 행세하기 위해 그 주인의 기억을 읽는 능력도 부속으로 갖춰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의 커스터마이징이 또다른 능력으로 개화했듯이. 자신은 명백하게 그녀의 계획에 방해물일 뿐 아무 쓸모가 없었다.

이용가치라곤 없는 자신을 살려둘 이유라곤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녀석의 스킬은 그런 식으로는 쓸 수 없다는 단서가 되는 정황증거다.

추측해보자면, 녀석은 내 기억을 읽어내고 나서 나를 이용해 루시탄을 설득할 생각을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절대로 '이렇게 되었으니 순순히 왕위를 받아들여라'라고 할 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겠지. 그렇다면 내 몸을 차지하고 앉아있을 메리트 따위는 없다.

그러나 아직 내 안에 남아있는 성녀의 능력을 그냥 순순히 둘 수도 없다. 때문에 내게서 목소리만을 빼앗는 번거로운 작업을 벌일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동시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날 죽인 뒤 그 뒷수습을 한다고 하는 보다 확실한 방법을 모색할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반격의 기회도 아직 남아있어.

연회장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머릿속에 하나하나 단서와 계획을 짜맞추느라, 볼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그 진의를 이 녀석이 알아채지 못해야 할 텐데.

마법으로 실내를 환하게 밝혀놓은 무도회장이 눈앞이었다. 문이 열리고, 벌써부터 안에 들어찬 내빈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쏟아졌다.

…긴장된다. 이런 식으로 주목을 받은 기억은 없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꾸욱, 루시탄의 것인 손을 쥐었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후우…."

잠시 자고 있어, 재수 없는 왕자.

넌 내가 절대로 두들겨서 깨워줄 테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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