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1 4 / 푸른 장미를 노래하던 성녀 로젤라이에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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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날 오후.
왕국 제 2 왕자 ‘루시타니아 알브레히트 알트슈테인 팔케’는 왕명을 받고 마차에 올랐다.
왕궁에의 출두를 명하는 명령이었고, 루시탄은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내비쳤지만 어쨌든 왕의 명령을 마냥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참 자주도 얼굴을 비치는구나. 루시타니아.”
“공사가 다망하신데 돈벌이에 미쳐 밖으로만 나도는 불효자식 얼굴을 뭘 그리 자주 보려고 하세요?”
루시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위병과 메이드조차 물린 부왕과 독대하는 식사 자리였다.
반항기의 엇나가는 아들에게는 부모와의 겸상도 껄끄럽기 마련인데 거기에 더해 상대는 왕. 눈앞에 잘 차려진 만찬도 지금의 루시탄에게는 미니어처를 늘어놓은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자기 몫으로 차려진 식사 앞에 앉으며 왕자가 살짝 이죽거리자 왕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미간에 골이 파였다. 노기가 치밀었던 모양이나, 작게 한숨짓는 것으로 그 노기를 가라앉혔다.
“말장난은 그만둬라. 내가 왜 불렀는지 너라면 모르지도 않을 텐데.”
“제 생일 축하라도 해 주시려고요? 그러실 거 없는데. 저 그 날 밥은 밖에서 먹을 겁니다. 괜히 제 생일상 차리라고 아랫사람들 들볶고 그러지 마세요.”
“루시탄. 그만큼 놀았으면 충분하다.”
국왕, ‘울자크 4세 알트슈타인 팔케’는 포크를 내려놓고는 한숨 같은 것을 지었다.
“미하도르에게는 네 생일까지는 왕궁에 오라고 명해두었다. 너도 2년 후면 스물이니 이제 제대로 왕세자 수업을 받을 때도 됐지. 돈놀이도 슬슬 정리해라. 세간에서 좋지 않게 본다.”
“아버지.”
폐하도, 아바마마도 아니었다.
루시탄은 표정을 와락 구긴 채 옆으로 고개를 홱 돌려서 국왕을 쏘아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저더러 형한테 생일 선물로 왕세자 자리를 받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말하자면 그렇게 되는군.”
“아니, 형이 좀… 지금 몸이 당장 안 좋은 건 사실이지만, 전 누누이 왕노릇하기 싫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드렸잖아요!”
쿵, 하고 주먹이 식탁을 내리쳤다. 와인이 담긴 크리스탈 잔이 엎질러져, 흰 식탁보에 붉은 와인이 스며들어 번져갔다. 메이드나 시종이 있었다면 안절부절못하며 그 뒤처리를 하러 다가왔겠으나, 지금 이 식탁에 앉은 것은 왕과 왕자, 아버지와 아들, 오직 둘 뿐이었다.
아들의 반항이 정당하다면, 아버지의 진압 또한 정당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금색 턱수염을 여유롭게 쓰다듬으면서 국왕은 억양 하나 변하지 않고 일그러진 아들의 반항을 묵살했다.
“네가 원하든 아니든 상관없다. 미하도르는 그 날 왕세자 자리를 내놓을 것이고 그날부로 이 나라의 왕세자 자리에 앉는 건 너다, 루시타니아.”
“하…”
몸을 일으켰던 루시탄이 허탈하다는 듯이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것은 아버지이자 국왕의 결정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뭐, 로젤라이가 아버지 꿈속에 나와서 그러던가요? 죽은 여자한테 아랫도리 잡혀서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는 고자는 왕 재목이 아니더라, 뭐 그런 얘기요.”
“닥쳐라. 죽은 사람을 함부로 모독하지 마라. 천박하구나.”
“정곡이었나 보네요.”
하, 조금 비웃듯이 짧게 웃음을 터뜨리며 루시탄이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이마를 짚은 손바닥이 한 번 더, 와인 쏟은 자국이 얼룩진 식탁보를 내려쳤다.
루시탄이 씩씩거렸다.
“그럼 속 시원히 말씀이나 해 주시던가요! 대체 로젤라이는 왜 죽은 겁니까?! 그 날 별궁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형은 그날부로 남자 구실도 제대로 못 하는 불능이 된 거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형을 못 내쳐서 안달이 나신 거냐고요! 왜 두 사람 다 나한테만 짐을 떠넘기면서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딱 다물고 있는 건데요!”
왕은 놀라지도 꾸짖지도 않았다.
불기를 살짝 입힌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으면서 노기에 일그러진 아들의 시선조차 같이 삼키듯이 식사를 계속할 따름이었다.
침묵을 견디다 못해 루시탄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전 왕 같은 거 안 합니다. 형의 자리, 뺏을 생각 없어요.”
“이 자리는 이미 네 형의 자리가 아니다. 어차피 네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단지 그 시기가 조금 빨라질지 늦어질지의 여부뿐이지. 생각 정리 오래 하지 마라.”
“잘 먹었습니다.”
루시탄은 드르륵,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를 표하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을 나가려는 그 등을 감정을 누른 왕의 목소리가 잡아 세웠다.
“네가 어떤 여자를 별궁에 들였다고 들었다.”
“출처는 별궁 위병장인가요? 거기는 제 거니까 조금 더 입이 무거운 자로 교체해야겠네요.”
“네가 그냥 왕자라면 어떤 여자와 만나든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흘 후의 네 신분은 왕세자이니, 너도 왕세자에 걸맞은 품위를 갖춰둬라. 그에 어울리는 혼처도 알아봐두고 있으니, 여자를 만나고 있거든 정리하고.”
“어떡합니까. 파혼하고 나면 아바마마 체면이 말씀이 아니게 될 텐데.”
있는 힘껏 이죽거리고 난 뒤, 루시탄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식당을 나갔다.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여진 포크와 나이프. 요리에는 입도 대지 않은 채로.
식당 문을 박차고 나온 루시탄은 휴우, 하고 숨을 깊게 내쉰 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을 바라보았다.
시녀장 니이냐와 메이드 복장을 갖춘 로즈였다.
이편이 더 눈에 띄지 않을 거라는 니이냐의 조언이었고,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쓴웃음을 지은 뒤 루시탄은 복도를 걸었다. 세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자신을 향해 돌린 등, 그 어깨가 축 처져있어서 뭐라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탓이다.
자기 침실 앞에 도착하기까지 쭉 말이 없었던 루시탄은 한숨을 깊게 내쉬고는 니이냐에게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지시하고는 로즈의 손을 잡아채었다. 조금 과감하다 싶은 손길에 니이냐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어흠, 하고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등 뒤에 따라붙었다.
“…식사를 준비해둘까요?”
“부탁해. 2인분.”
“알겠습니다.”
문이 소리도 없이 닫히는 그 사이로, 니이냐가 여전히 감정이 부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분~명 내가 모르는 게 있는데 말야.”
의자를 끌어당겨 앉고서는, 루시탄은 그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어 거의 늘어지듯이 몸을 풀고 천장의 샹들리에를 올려보고 있었다. 로즈는 어땠냐면, 문에 달라붙어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문에 귀로 문 너머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정말 엿듣는 이가 없는지를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바깥이 쥐죽은 듯 조용해 아무도 없다고 확신했는지, 로즈는 이내 문에서 떨어져서 팔짱을 끼고, 의자에 늘어진 왕자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걸 알아보는 게 내 일이겠지?”
“맞아. 아버지와 형, 로젤라이. 그 세 사람 사이에 대체 뭐가 얽혀있는지를 알아내야 이 상황을 풀 수 있겠어. 안 그러면 사흘 후 내 생일은 내 인생 최악의 생일이 될 거라고.”
정말 어지간히도 왕좌에 앉기 싫은 모양이네.
로즈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남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는 말을 터놓기로 이미 합의한 뒤였기에 로즈도 더 예의 차리는 일 없이 편하게 말하고 있었다.
“일단 그럼 로젤라이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좀 알아야겠어. 뭐라도 없어? 그녀에 대한 자료라든지, 그런 거.”
“그녀에 대한 기록은 전부 왕실 장서관에 보관되어있어. 그녀가 죽은 후에는 관리하는 이들 말고는 아무도 해당 기록을 열람하지 못하게 해 놨고. 나조차도.”
이 나라의 제 2 왕자조차 볼 수 없다면 그것을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하지만 모든 보안에는 어딘가에 반드시 구멍이 있기 마련이지.
“간단하네. 그럼 네가 왕이 된 다음에 보면 되겠다.”
“농담하지 마, 본말전도도 정도가 있지.”
“어차피 너도 나랑 같은 걸 생각하고 있잖아.”
결국, 왕이 관련된 기록과 문서를 하나하나 손수 확인할 리는 없다.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 도맡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 일단 그게 누구인지부터 알아내는 게 순서겠지. 그리고 그다음에는 로즈의 스킬이 빛을 발할 시간이었다.
말로만 하면 간단하지만, 그렇게 잘 될는지… 뒷목이 따끔따끔해지는 예감이 로즈를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쉽지만은 않을 거라고, 막연한 느낌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뭐,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지.
일이 되는 쪽으로 생각하는 것. 그게 저쪽에 있었을 때도, 여기에 있을 때도 자신을 지탱해주는, 자신이 견지하는 삶의 자세였다. …그러다가 창녀노릇도 하게 된 거지만.
“방침은 정해진 것 같은데. 일단 장서관이라는 데 들어갈 수 있게 다리를 좀 놔 줘. 그럼 그다음은… 그 기록을 읽을 수 있을 법한 사람이 누군지 정도를 먼저 확인해볼 테니까. 그것만 알고 나면 그때부터는 내 독무대란 말이지.”
“어째 조금 못 미더운데… 너, 진짜 잘 할 수 있겠냐?”
“넌 이 누나만 믿으라고.”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는 로즈의 너스레에 루시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걸리버는 하나같이 다 이상한 녀석들 뿐이라니까. 아, 됐어. 아버지 속 긁느라 머리 아프니 한숨 잠이나 잘래.”
“거기서 걸리버 운운이 왜 나와? 하여간….”
아니, 점심 준비하라고 해 놓고선 그건 어떻게 하고? 의자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제 침대로 향하는 루시탄을, 로즈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보았다. 이불을 둘러쓴 채 정말로 잠들 기세라서 한숨을 쉬고는 일단 뭐라도 할 일이 없나 찾아볼 요량으로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 한발 먼저 노크 소리가 문을 두드려서 루시탄은 귀찮다는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문 너머에서 들려온 니이냐의 목소리가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로즈가 얼굴을 돌렸지만, 루시탄도 누군가가 찾아올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는지 조금 멍한 얼굴이었다.
손님이라니, 누구지?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가, 로즈는 그제야 자신이 입은 메이드복에 생각이 미쳤다. 왕자는 누워있고, 자신은 왕자의 테이블 의자에 앉아있다… 그게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뻔해서, 허둥지둥 물러서서 메이드답게,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혀를 끌끌 차며 지켜보던 루시탄은 뭔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는지 표정을 와락 구겼다. 그가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는 것을 마저 기다리지 않고,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로즈는 전혀,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루시탄 왕자 전하, 모처럼 환궁하셨다는 소식을 니이냐에게 들었…”
예의에 몸에 밴 듯한 목소리가, 중간에 툭 끊겼다.
침대에 누워있는 왕자, 그리고 어딘지 어색하게 쭈뼛거리는 메이드. 들어온 손님은 어딘지 방 안의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고, 루시탄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자기 방에 밀고들어온 손님에게 뭐라 입을 열었는데
짜악!
따귀를 때려붙이는, 날카로운 소리가 낮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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