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15화 (15/157)

〈 15화 〉 1 ­ 4 / 푸른 장미를 노래하던 성녀 로젤라이에게(1)

* * *

­ 1 ­

며칠 만에 밟는 지면의 감각이 발끝에 영 어색했다.

한동안 배 위에서 발밑이 흔들리는 데 익숙해졌던 터라, 멀미가 없었다고 해도 오히려 지면 쪽을 어색하게 느끼게 되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항구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루시탄이 그랬었는데. 주위를 둘러보자, 딱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메이드였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흰 카츄사(Katyusha) 아래, 검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해 묶고오로지 흰색과 검은색 이외의 색감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 절도있는 메이드복이 금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건널 판자를 딛고 내려오는 루시탄을 향해, 그녀는 기품있는 자세로, 자못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허리를 숙이는 시간, 각도까지 전부 계산한 것 같이.

“여행은 즐거우셨는지요, 왕자 전하.”

“어.”

루시탄은 당연하다는 듯 짧게 대답하고는 자연스럽게 메이드에게 입고 있던 외투와 모자를 맡겼다.

메이드 또한 당연하다는 듯이 외투와 모자를 받고는, 그 뒤에 멀뚱하게 서 있던 루시탄의 새 일행… 즉, 나와 페리링을 바라보았다.

표정에는 뭐라고 할까, 참 감정이 부족해보였다. 술라 같은 권태로움이 아니라, 감정을 절제한 듯한 가면 같은 무감정이.

“왕자 전하께서 청하신 분들이셨지요. 저는 왕자 전하를 모시는 니이냐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니이냐 씨. 로즈에요. 이쪽은 페리링.”

페리링이 지팡이를 짚은 채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그녀는 내 얼굴과 페리링의 얼굴을 한 번씩 각인하듯 시선을 주고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서두르는 기색이 없는 빠른 발걸음으로 루시탄의 뒤를 따랐다.

“왕자 전하. 왕궁으로 모실는지요?”

“아니, 별궁으로 가겠어. 형은?”

“왕세자 전하께서는 이틀 후까지의 일정을 소화하신 뒤 다음 날 아침에 왕도로 돌아오실 예정으로 되어있습니다.”

사흘인가, 하고 낮게 중얼거리고는 루시탄은 대기하고 있던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사두마차에 올랐다.

뭐지, 내가 같은 마차에 타도 되는 건가? 조금 멍청한 표정으로 니이냐를 보니 니이냐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에잇, 모르겠다…

일단 루시탄이 앉은 맞은편 자리에 앉자, 2인승의 마차 문이 닫히고 사두마차는 천천히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점점 속도가 붙어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어딘지 초조하게 바라보면서 루시탄이 휴, 한숨지었다.

“일정이 넉넉했으면 왕도 구경이라도 시켜주고 싶지만, 어차피 가게를 내고 나면 언제고 기회가 있겠지.

생각보다 형이 돌아오는 게 빠르니까, 일단 일을 먼저 해줘야겠어.”

“아뇨, 그건 상관은 없는데… 어디부터 시작할 생각이에요?”

“별궁에 가면 일단 네가 봐야 할 게 있어. 내 짐작대로라면 이 모든 일은 그녀로부터 비롯되었을 테니까.”

그녀?

누굴 말하는 걸까, 하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별궁에 도착하고 나면 알게 될 일. 너무 서두를 것은 없었다….

자기 생각은 그랬지만, 그와 반대로 루시탄은 눈에 띄게 초조해하고 있었다.

네 마리의 준마가 끄는 사두마차가 더 빨리 달리지 못하는 것조차 안달할 정도로.

“한 나라의 왕세자라는 사람이 여자 한 명 때문에 발기부전에 걸렸다니… 뭔가 로맨틱할지도 모르겠네요.”

“로맨틱, 인가.”

루시탄이 만난 이래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요컨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사실은 그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 거라고 짐작하고 있어. 어쩌면 너한테 못 볼 꼴을 보이게 될지도 모르겠고.”

“어차피 못 볼 꼴이라면 이미 잔뜩 보이지 않았나.”

어깨를 으쓱이면서 너스레를 떨어 보이자, 루시탄은 피식 웃고는 다리를 바꿔 꼬았다.

뭔가를 이야기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지만, 쉽게 그 이야기의 머리를 꺼낼 수 없어서 못내 답답한 모양이었다.

기묘한 침묵 속에서, 마차는 흰 담벼락을 지나 색색의 꽃이 핀 화원을 지났다…

왕실의 별궁이라 그런지, 레짐에서는… 아니, 저쪽에서도 보지 못했던 꽃이 잔뜩 피어나 있었다.

멈춰선 마차에서 마부가 문을 열자 루시탄이 한발 먼저 내리고는 마치 에스코트하겠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조금 겸연쩍은 느낌으로, 그 손을 잡고 내렸다.

“블라우로제(Blaue rose) 별궁에 온 것을 환영하지. 당분간 여기에서 머무르게 될 거야. 내 객이니까 편히 생각하고 머무르도록 해.”

“이런 데서 편히 머무를 수 있을 정도로 신경줄이 두껍질 않은데 말이죠.”

“하룻밤 자고 나면 알아서 두꺼워져 있을 테니 염려 말라고.”

손을 놓고, 그 손을 내린 뒤 루시탄이 앞장섰다.

별궁 출입문을 지키는 위병이 그에게 군례한 뒤 푸른 장미가 그려진 문을 열었고,열리는 문 너머로 보이는… ‘얼굴’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어?”

초상화 속의 여자에게서 기시감이 들었다.

구불구불하게 물결치는 곱슬곱슬한 금발.

여리여리한 속눈썹이 기다랗게 펼치진 눈꺼풀 아래 푸르게 펼쳐진 깊은 눈동자.

도톰한 입술에 복숭아 같은 온기가 도는 뺨.

저 얼굴은… 루시탄과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 그가 자신에게 요구했었던 그 얼굴이었다.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조차 모르고 옆에서 그 초상화를 올려다보고 있는 루시탄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말을 걸어야 할지, 아니, 지금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 초상화는 나와 형의 할머님이신 ‘엘레오노레 라이산더 알트슈타인 팔케’, 라이산더 공작부인을 그린 것이야.

술라가 너에게 맨 처음 보여주었던 노파를 기억하겠지? 그분이지.”

“그럼, 이건…”

“할머니의 젊으실 적의 모습이었다고 하지만, 사실 이 그림의 진짜 모델은 따로 있어.”

루시탄의 눈은 약간의 과거를 되짚고 있었다.

초상화 속에서 기품 있는 웃음을 띠고 있는 저 얼굴에, 대체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단 말이련가.

긴장감에 목이 타들어 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 그림의 진짜 모델은… 너처럼 걸리버였던 ‘노래하는 성녀’ 로젤라이. 형이 그렇게 된 원인이라고 나는 짐작하고 있고.”

“그럼 나쁜 사람… 이었나요?”

성녀라고 불릴 정도라면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들리는데.

게다가 걸리버‘였던’이라니, 과거형이라는 것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인가?

“아니.”

예상대로, 루시탄은 뭐라 말하기 복잡한 표정으로 간단하게 부정했다.

그 파란 눈동자에 휘돌고 있는 감정은 단 하나로 말하기가 매우 어렵도록 엉키고 설킨 실타래와도 같았다.

어디에서부터 풀어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정도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루시탄 또한, 초상화 속의 그녀에게 어렴풋하고 아릿한, 애매모호한 감정을 무심결에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감상이었다.

“내가 로젤라이를 안 시간은 극히 짧지만, 적어도 내 기억 속의 로젤라이는 내가 아는 한 그 누구보다도 순수함과 선함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어.”

숨이 부족했을까, 아니면 기억이, 감정이, 시간이 부족했을까.

루시탄의 입술에서 나지막하게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새었다.

“할머니는 걸리버에 불과했던 로젤라이를 당신의 친손녀처럼 생각하셨지.

젊을 적의 자신과 정말 판박이로 닮았다고 말이야. 빈말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해.

할머니를 오래 모셨던 나이 든 시녀들도 누구나 그렇게 말했으니까.”

루시탄은 눈에 띄게 힘들어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미소와는 달리, 그녀에 대한 기억은 도리어 그에게는 고통 어린 상처를 남긴 채 아직도 채 아물지 않은 모양이었다.

“왕자 전하… 루시탄, 괜찮아요?”

“나, 난 괜찮아… 계속, 얘기할게.”

잠시 이마를 짚고 근처에 놓인 의자를 끌어당겨 앉고는 루시탄은 폐에 고인 숨을 내뱉은 뒤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푸른 눈동자를 반쯤 가린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도, 형도. 그녀를 특별하게 생각했어.그녀의 노래… 그녀는 노래로 상처를 치유하는 스킬을 갖고 있었지.

어렸던 내가, 이 별궁의 2층에서 떨어져 다쳤을 때… 그녀가 노래로 내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을 본 형은…

그래. 그 날부터 로젤라이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었던 것 같아.”

더 들어줄 수가 없다.

왜인지, 이 소년이 더 자신의 기억을 헤집는 것을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너무 힘들면, 얘기하지 않아도 돼!”

“아니, 아냐. 계속 얘기하게 해 줘.”

어깨까지 떨리고 있었다. 이를 으득 갈고는 그 어깨를 붙잡아 거의 비난에 가까운 투로 말했다.

어르는 것도, 달래는 것도 아니고 야단치듯한 이쪽의 고함에 루시탄은 입가에 바들거리는 웃음 비슷한 것을 띠었다.

“로젤라이와 형은 그 뒤로 부쩍 가까워졌어.

많은 이들이 로젤라이와 형이 맺어져서 장래의 국왕과 왕비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은 눈치였고.

나는… 그래. 질투했었지만, 형이 로젤라이와 맺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어.”

질끈, 하고 그 눈이 감겼다. 눈꺼풀이 바들거렸다.

하아, 하아… 거칠어진 숨과 함께 꺼질 듯한 목소리가 겨우 새어 나왔다.

“로젤라이가 바로 내가 떨어져 다쳤던 이 별궁 정원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그날까지는.”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