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결과 없는 잔치였던 마룡쟁패가 끝나고도 꽤 여러 날이 흘렀다.
돌연 젊어져 버린 천마며, 결국 정하지 못한 후계의 문제 따위로 윗선은 시끌시끌했지만, 말단 중에서도 최말단인 외전의 하급 무인 석문평과 그의 일당들에게 그 일은 하등 상관없는 남의 일일 뿐이었다. 그들은 잔치가 끝나고도 여전히 외곽을 순찰했고, 날이 궂으면 궂다는 이유로, 날이 밝으면 밝다는 이유로 매양 술판을 벌였다.
일과는 언제나 똑같았다. 강호에는 조석으로 어린아이를 잡아먹고 술 대신 부녀자의 피를 마신다는 소문이 떠도는 무시무시한 마교인이지만 그들에게도 일상은 일상이었다. 그들이라고 날이면 날마다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건 아니었다.
“거참. 볕 한번 좋다.”
불쑥불쑥 정해진 경로를 틀며 불규칙적으로 경비 무사들의 기강을 순찰하던 석문평은, 눈이 시릴 정도로 따가운 햇볕에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늦가을이라 기온은 서늘한데 볕이 따가웠다. 봄볕엔 며느리 내놓고 가을볕엔 딸 내보낸다는데, 이 볕에 딸 내보냈다간 곤륜노崑崙奴1)처럼 되기 십상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문평은 유달리 따가운 볕이 싫지는 않았다. 이맘때면 늘 이러하다는 것을 알기에, 도리어 날이 벌써 그리됐나 싶어 반가울 따름이었다.
중원中元보다는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에 더 가까운 천산天山. 관문요새關門要塞의 바깥이라 새외塞外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고도가 높고 건조해 사시사철 날이 맑은 땅이다. 완만하다기보다는 험준하고, 풍요롭지 못해 건조한 이 땅은 극서와 극한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본디 이 땅 사람이 아니지만, 천산에 터를 잡은 지 근 십여 년이 되어가다 보니 이 모진 기후도 제법 익숙해졌다. 이제는 중원이 아니라 천산이 고향 같았다. 세월은 그렇게도 무서웠다.
“석문평 조장님. 여기 계셨습니까?”
반은 순찰, 반은 볕 구경. 살짝 나태해진 기분으로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던 문평은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는 석문평을 잘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석문평은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이지? 나에게 볼일이 있나?”
별로 더운 날씨가 아닌데도 사내의 이마에 살짝 땀이 고인 것이 보였다.
‘설마 나 찾으러 돌아다닌 건가?’
석문평은 내심을 감추고 찬찬히 사내의 행색을 훑었다. 별달리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복식이었다. 마교의 하급 무사들이면 누구나 지급받는 흑색 무복에, 같은 색으로 배색한 각반. 지위나 소속을 드러내는 문양도 없고 특별히 드러나는 무공도 없다.
눈에 띄는 특색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평범한 모습이지만 지나치게 평범하다는 사실이 외려 마음에 걸린다. 마치 일부러 특색을 지운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추밀각 소속 무인 유자생이라고 합니다. 석 조장님께 전할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정보 계통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면 저렇게 하고 다닐 리 없지.’
마음속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던 석문평은, 이내 사내가 자신을 일부러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같은 외전 소속 무인이라고는 하나 본각에 직접 소속된 무인과 적호각의 하부 무력집단에 불과한 참혼대의 무인 사이에는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존재했다.
직급상으로는 분명 문평의 지위가 더 높았지만, 실질적인 위세를 따지자면 그의 위치는 외전 삼각의 직속 무인들에 댈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자는 스스로가 하부자인 양 공손히 굴고 있었다. 자존심 높은 삼각 직속 무인이라고 하기엔 어딘지 모르게 석연찮았다.
‘이거 뭔가 이상한데.’
이 상황이 일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챈 문평은 내심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사내의 인사에 답했다.
“아. 그래요?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상대의 정체를 알았으니 태도가 바뀔 수밖에 없었다. 문평은 사내와 마찬가지로 공손히 물었다.
“각주님께서 석 조장을 찾고 계십니다. 지금 바로 봤으면 하십니다.”
“……각주님이요?”
무슨 일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마음 단단히 먹긴 했지만, 상대의 용건은 문평의 예상을 아득히 추월하고 있었다. 당혹감에 자기도 모르게 눈을 깜빡인 문평은, 자신이 들은 바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그러니까 설마하니, 추밀각주님이……?”
“예. 그분께서 부르십니다.”
사내는 선뜻 믿지 못하는 문평의 말을 자르며 단호히 대답했다.
‘진짜? 진짜 추밀각주께서 나를?’
죄지은 것도 없는데 괜히 가슴이 떨렸다. 추밀각주의 이름이라는 게 원래 그랬다. 저승사자. 생사 판관. 외전의 무인들에겐 그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바로 추밀각주였다.
‘대체 내가 뭘 했길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최근에 한 실수라곤 술 마시고 나뒹구는 최가를 잊어먹고 집에 돌아간 것밖에 없었는데……?
석문평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유자생을 따라나섰다. 뭣 때문에 그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공연히 마음이 술렁거렸다.
***
마교의 외전에는 세 개의 조직이 존재하는데, 그 하나가 석문평이 소속된 적호각赤豪閣이오, 그 둘이 수전각水田閣이오, 그 셋이 추밀각追謐閣이다. 그중에서 가장 성세를 이루는 곳이 금전을 다루는 수전각이라면, 가장 무섭고 은밀한 곳은 정보를 담당하는 추밀각이다.
추밀각은 비단 교외의 정보뿐만 아니라 교내의 정보도 수집하고 있었는데, 형벌을 담당하고 집행하는 내전의 교법당敎法堂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므로 마교의 무사들에게 있어 염라전이나 다름없이 두려운 곳이었다.
수년 전부터, 추밀각주를 맡은 사람은 다름 아닌 소비笑匕 포영의鮑迎意였다.
현 마교주 천마의 셋째 제자이자 마중사기의 일원이기도 한 포영의는 웃는 비수라는 섬뜩한 별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별호대로 일 처리가 날카롭고 성미가 냉담해 추밀각주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존재였다.
외전의 하급 무사 석문평에겐 마중사기도, 추밀각주도, 까마득한 윗사람이다. 게다가 포영의는 그 둘을 합한 존재이기까지 하니, 석문평에겐 그야말로 하늘 위의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하늘 위의 사람天人.’
석문평은 그 말이 어쩐지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앞에 선 남자는 예상과는 다른 의미로 놀라운 사람이었다.
나름 긴장한 상태로 추밀각에 들었던 석문평이 순간 혼이 빠질 정도로 놀란 데는 참으로 그럴 만한 이유가 존재했다.
남자는 희고 섬세한 손가락으로 상아처럼 매끄러운 턱 끝을 문지르듯 매만지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추수秋水처럼 맑고 깊었다. 늘씬한 몸매를 감싼 옷은 백설처럼 새하얗고, 어깨 위로 흘러내리게 묶은 머리카락은 검은 구름인 양 풍성하게 길었다.
햇살이 은은하게 비치는 창가에 선 채로 생각에 잠긴 남자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인세에 드문 미모를 가진 사람이 그림 같은 분위기로 우수에 잠겨 있으니 그야말로 한 폭의 미인도가 따로 없었다.
‘굉장하군. 미남이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이건 남잔지 여잔지도 구분이 안 되잖아.’
그 화려한 미모에 자기도 모르게 홀려버린 석문평은 포영의가 들으면 경을 칠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절세의 미인에겐 저도 모르게 약해지는 것이 사내라는 종자들이다. 석문평도 그런 일반적인 사내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눈앞에 선 미인의 자태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네가 흑야黑野 만자외萬資巍의 제자라 들었네. 그게 사실인가?”
한창 딴생각에 빠져 있던 포영의가 불쑥 질문을 던져왔다. 마찬가지로 딴 일에 정신이 팔려 있던 석문평은 뜻하지 않은 하문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굳이 따지자면 제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에게 몇 가지 무공을 배우긴 했습니다.”
부지불식간에 나온 말이라 떨떠름한 속내가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지나치게 솔직하게 대답하고는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말은 흐른 뒤였다.
포영의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대답이냐. 제자가 맞다는 게냐, 아니라는 게냐?”
냉엄히 묻는 포영의의 시선은 과연 별호만큼이나 날카로웠다. 그 섬뜩한 시선에 마음을 가라앉힌 석문평은 또렷한 태도로 자신이 왜 그런 식으로 말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미인이 좋아도 살 궁리부터 해야 했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에게 얼이 빠져 목이 달아났다간, 죽어서도 비웃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만씨 노인네, 아니 만자외는 정확히 말해 의발을 전한 스승이 아닙니다. 그분도 저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저도 그분을 길에서 거둔 것일 뿐 딱히 스승으로 모셨던 것은 아니니까요.
젊은 날 낭인으로 방랑하다 죽어가는 노인을 살렸는데, 노인이 은혜를 갚겠다고 했습니다. 본신의 무공을 다 가르쳐 준 것은 아니고, 그럴 시간도 없었지요. 배운 것이라고는 잡술이라고 할 만한 추종술追從術과 경공輕功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더는 배운 것도 익힌 것도 없습니다.”
만씨 노인네와의 인연은 악연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만남 자체는 평범했으나 뒤끝이 지독했다.
고작해야 1년 반. 목숨 빚을 지고는 살 수 없다는 노인네의 고집에 경공과 추종술을 배웠다가, 그 대가로 당문에게 추격을 받아야 했다. 당문의 인물을 추살한 죄목으로 쫓기던 만자외의 제자로 오인된 까닭이었다.
석문평은 그 일을 무척이나 억울히 여겼다. 당시 그는 만자외에게 가르침을 청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만자외가 당문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노인에게 측은지심을 발휘했다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무공을 전수받았고, 당문에 의해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
당문의 추격은 독하고 끈질겼다. 천하에 손꼽히는 경공 중 하나라는 녹수무영綠水無影을 가지고도 그들을 완전히 따돌릴 수 없었다.
문평이 이 멀고 먼 신강까지 와서 마교에 몸을 의탁한 데에는 바로 그러한 사정이 있었다. 마교의 품에 안기지 않고서는 당문의 추격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만자외에게 추종술과 경공을 배웠으면 다 배운 것이지. 자넨 참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기껏 털어놓은 사연이 무색하게도 포영의는 딴소리를 했다. 문평은 답답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아니. 다 안 배웠다니까 그러시네. 만자외의 무공을 다 배웠으면 내가 아직도 일류 주위에서 맴돌고 있겠습니까? 그래 봬도 그 노인네는 초절정 고수였다고요?’
정말이지 따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진짜로 그 말을 다 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입으로는 참 재미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말을 하는 포영의의 얼굴은 도저히 재미있어하는 표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석문평은 산 채로 사람을 얼려 죽일 듯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그의 시선에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다시 공손한 태도로 돌아가 포영의가 왜 새삼 그러한 것들을 묻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자네가 익힌 추종술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따라잡을 수 있나?”
포영의가 좀 더 세부적인 부분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석문평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한편 진지하게 대답했다.
“미종향尾縱香을 사용한다면 천 리를 따라잡습니다. 미종향 없이 흔적을 따르면 절정 고수는 사백 리, 일류 고수는 육백 리를 따라잡습니다.”
오랫동안 해 본 적이 없긴 하지만 한번 익힌 기술이 사라질 리는 없으니 아마도 그럴 터였다.
“절정 고수 이상의 고수면 어떠한가? 예를 들어 초절정이라거나, 혹은 그 이상은?”
말을 늘어트리는 태도가 어째 미심쩍었다. 설핏 미간을 찌푸린 석문평은 설마 하는 기분으로 포영의에게 물어보았다.
“설마 화경급의 고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석문평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포영의도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그래. 화경급이라고 해 두지.”
누굴 죽일 참입니까, 라고 생각했지만 얼굴만 이쁜 저승사자에게 그 말을 뱉었다간 지금 당장 목이 날아갈 것이다.
“화경 고수에겐 미종향을 묻힐 수 없습니다. 사실 초절정에게도 그것은 위험한 일인데, 그 정도 경지가 되면 따로 훈련받지 않아도 감각이 높아져 위화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흔적을 따라 행적은 쫓을 수 있지만, 따라잡는 건 불가능합니다. 백 리 안으로만 다가가도 눈치를 챌 겁니다.”
화경급 고수라니. 그냥 추종만 한다고 할지라도, 일류밖에 안 되는 그의 성취론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렇기에 석문평은 과감히 못 한다는 소리를 했다.
그의 대답을 들은 포영의는 또 한 번 턱 끝을 매만졌다. 인제 보니 저 사람은 생각에 잠길 때마다 저러는 게 버릇인 것 같았다.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지만, 행적은 쫓을 수 있다……?”
포영의가 입속으로 굴리듯 혼잣말을 했다.
석문평은 슬쩍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부터 포영의는 계속 초점이 어긋나는 소리만 했다. 흑야에게서 추종술과 경공을 배우면 다 배운 거라는 둥, 화경급 고수라면 따라잡을 수는 없으나 행적은 놓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어째 일방적인 방향의 정보만을 귀에 담고 있는 게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나한테 뭘 시키려고 그러는 거야, 이 양반이?’
석문평은 눈치가 빨랐다. 어린 시절부터 낭인으로 구르며 는 거라곤 눈치밖에 없었다. 바로 그 눈치로 판단하건대, 포영의가 자신에게 시키려고 하는 일은 절대로 보통 일이 아니었다. 쉬운 일은 더더군다나 아닐 터였다.
“자네 경공은 어떤가? 녹수무영은 그다지 빠르지는 않지만, 세상에서 제일 견고한 신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네. 한 줌의 진기로 십 리를 간다는 건 과장이라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신법에 비해 효율적인 것은 사실일 터. 어느 정도로 지속적인가?”
포영의가 이번에는 경공에 관해 물었다. 남의 밑천을 다 털어먹으려고 작정한 것일까. 석문평은 막연하던 불안감이 뚜렷한 실체로 변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그는 과장된 소문에 불과합니다. 한 줌의 진기로 십 리를 가면 녹수무영이 천하제일의 신법이게요. 발이 빠른 준마의 빠르기로 쉬지 않고 달리면 이틀은 갑니다만 그 이상은 무리입니다.”
사실은 한 줌의 진기로 십 리를 가는 게 맞다. 그 정도의 효능도 없다면 무공도 변변찮은 그가 당문의 천라지망을 빠져나올 수 있었을 리 없다.
녹수무영은 그럴듯한 이름과 달리 그다지 빠른 신법은 아니었다. 녹수무영의 장점은 빠른 게 아니라 지속적이라는 데 있었다.
적은 진기로도 쉬지 않고 달려 열흘을 버틸 수 있는 신법이니, 무위가 낮은 그에게 있어서는 한 시진에 백 리를 달릴 수 있는 신법보다 오히려 나은 점이 있었다.
“흠. 그래? 괜찮군. 나쁘지 않아.”
사실을 있는 그대로 고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포영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답이 제법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조금 더 낮춰 말할 걸 그랬나?’
석문평은 내심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포영의도 그의 무공수위에 대해 짐작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나치게 낮춘 대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괜한 의심만 사게 될 게 뻔했으니 말이다.
포영의는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판관 앞에 선 죄수의 심정으로 포영의의 처분만을 기다려야 했던 석문평에겐 죽음보다도 더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다.
한참 만에야 포영의가 고개를 들었다. 머릿속으로 분주하던 계산을 모두 마친 듯 단호하게 결심이 선 눈빛이 그에게로 향했다.
“자네. 참혼대 소속이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각주님.”
“축하하네. 승전하게 됐군. 자넨 오늘부터 마영단魔影團 소속일세. 내가 소개서를 써줄 테니 그걸 들고 내전으로 들어가게.”
포영의는 하나도 축하하는 게 아닌 기색으로 그렇게 말하더니, 서탁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석문평은 너무나도 뜻밖의 말이라 처음엔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몰라 멍청히 서 있다가 뒤늦게 ‘마영’이라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는 그만 희게 질리고 말았다.
“…저기, 각주님.”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문평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멍청하다고 죽으나 거기 가서 왜 왔냐고 맞아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였으니, 차라리 여기서 죽고 말자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말씀하신 마영단이라는 곳이, 설마 제가 아는 그 마영魔影들이 있는 곳인가요?”
과연. 포영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날카로운 눈을 들어 석문평을 짜증스럽게 바라보았다. 저런 멍청한 것이 어째 아직도 살아 있냐는 듯 번쩍이는 눈동자가 못내 흉흉하기까지 했다.
“자네가 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마교에서 마영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밖에 없지. 그곳이 바로 마영단일세.”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 아닐 수 없다. 석문평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포영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각주님!’
그는 정말이지 외치고 싶었다.
‘이 마영이 그 마영이면 제가 마영단에 승전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 아닙니까? 언감생심. 언어도단. 이걸 누가 제대로 된 인사人事라고 생각하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쌓이고 쌓여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석문평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 뜻밖의 일을 당하다 보니 말문이 막혀 어물거렸고, 그러는 사이 가슴에 웬 서찰이 하나 얹어졌고, 그걸 받자마자 바로 쫓겨나 길에 서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석문평은 망연한 얼굴로 머리 위에 시커멓게 그림자를 드리운 추밀각의 처마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르겠다. 한바탕 꿈을 꾼 것 같고, 귀신에게 쫓긴 것도 같았다. 꿈이라고 쳐도 참 보람차게 악몽이었다. 허허허. 미치겠다. 평온한 하루를 보내던 중이었는데 이게 대체 웬 사달일까.
아연한 석문평은 현실도피를 시도했지만, 불행히도 그 시도는 쉽게 좌절되었다. 머리 위의 햇볕이 너무도 쨍쨍한 데다가, 가슴팍에서는 불길한 바스락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평은 시선을 내려 앞섶에 꽂힌 서찰을 내려다보았다. 질 좋은 한지로 곱게 만든 봉투 위에는 칼같이 선명한 해서체로 ‘마영단주 친전’이란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나 정말 가는 건가, 마영단?’
글자가 눈에 보이긴 했지만, 실감은 나지 않았다.
***
같은 마교 안에 있어도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며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인 천마天魔는 그야말로 하늘 위의 하늘 같은 존재다. 천하의 추밀각주이며 마중사기인 소비 포영의조차도 지존이신 천마 교주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하다.
천하제일인.
마교 천 년의 역사에서도 고작 여섯 번밖에 나오지 않은 ‘천마’의 칭호를 받은 최강자. 어쩌면 마선으로 등선을 할지도 모르는 절대자. 호남혈사湖南血事를 일으킨 당사자이자 융중지약隆中之約의 주인공…….
마교에서는 천마를 신격화하는 소문이 많고도 많았다. 그 이야기들이 다 사실이라면 천마는 눈이 세 개고 팔은 여섯 개였으며 하룻밤에 백 명을 품고 하루에 만 리를 달리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석문평은 마교 안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밖에서 들어온 외부인이라, 그런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마교를 동경해서 들어온 것도 아니고 쫓기다 못해 몸을 피하려 어쩔 수 없이 들어온 것이었으니 마교 자체에 충성심이 있는 편도 아니었고, 강자를 동경하지도 않으니 개인적인 숭배심이 생길 리도 없었다.
그는 천마에 대한 모든 소문을 있는 그대로 믿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에 대해 좀 회의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난무하는 과장된 소문들 때문에 외려 없던 편견조차 생길 지경이기 때문이다.
‘설마 그러려고.’
‘설마 그렇게까지.’
천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렇게 되뇌곤 하던 그는, 자신이 천마에게 가진 마음이 마교인보다는 일반적인 강호인에 더 가까운 것이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아니,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뇌정전雷霆殿이라는 세 글자가 용사비등하게 쓰인 웅혼하기 짝이 없는 편액 앞에 선 석문평은,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교에서 지낸 지난 10년 동안 세뇌라도 당했던 모양인지, ‘그 사람’이 사는 건물 앞에 선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소 냉소적으로 굴었다고는 하나 그에게도 천마는 전설이었다. 단 한 번, 그것도 먼발치에서 모습을 훔쳐본 것만으로도 평생의 자랑거리가 되는 사람이 바로 천마인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양 느닷없이 천마의 측근 호위로 발령을 받다니. 도대체 현실 같지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천마의 측근 호위라니. 이건 뭐가 잘못된 거 아닌가? 천마가 손가락만 까딱해도 죽을 텐데, 나 같은 놈이 곁에 있어 봤자 무슨 도움이 된다고.’
뒤늦게나마 주제 파악을 하게 된 석문평은 도저히 뇌정전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이건 뭔가 잘못된 일이다. 포영의씩이나 되는 인물이 어째서 이런 실수를 저지른 건지 모르겠지만, 천마에게도 마영단에게도 자신은 필요 없는 존재일 게 분명했다.
혹시 또 모른다. 요강을 비우거나 청소를 하는 일 정도는 그도 할 수 있을지. 하지만 그런 건 자신이 아니라 숙련된 시비들이 더 잘한다. 그녀들은 자신보다 일을 더 잘할 뿐만 아니라 나긋나긋 부드럽고 심지어는 사랑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어서 오게나. 기다리고 있었네.”
그렇지만 뇌정전의 대문이 열리고, 그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석문평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석문평은 멍한 시선으로 자신을 환영하는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온종일 너무 많이 놀라서인지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제백도劑魄刀 호완평扈完評…….’
그를 환영하러 친히 대문 앞까지 마중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마중사기의 대형인 제백도였다. 천마 혁련상이 제일 먼저 거둬들인 제자이며, 마교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집단인 내호각內護閣의 각주이기도 한 바로 그 제백도 말이다.
“저를 기다리셨습니까?”
석문평은 어딘지 모르게 현실감이 없는 어조로 되물었다. 포영의와는 달리 사람 좋게 생긴 호인인 호완평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셋째에게서 전갈을 받았네. 자네가 올 거라고 하더군. 내게 줄 서신도 있다면서?”
‘‘내게 줄 서신’이라. ……그렇군. 제백도가 마영단주였나.’
석문평은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신비에 쌓인 마영단의 단주가 제백도임을 알았다.
“여기서 긴 이야기를 하기는 좀 뭣하군. 안으로 들어가겠나? 내게 좋은 차가 있다네.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하지.”
석문평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천마에게 마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비밀 호위대가 있다는 것 정도밖에 몰랐으나 이제 마영들이 대가 아니라 단을 구성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들의 단주가 천마의 첫째 제자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연이어 두 명이나 등장한 마중사기를 보자 실감이 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감이 났다기보다, 이건 확실한 호랑이 굴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고 봐야 했다.
설마하니 까마득하게 높은 상관들이 그 하나를 놀리자고 시간 낭비를 했을 리는 없고. 아까 느꼈던 불길함은 아무래도 실제가 될 모양이다.
‘침착하자. 석문평. 정신 제대로 차려야 해.’
느닷없이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에 얼이 빠져 있던 문평은 고개를 흔들어 얼떨떨한 정신을 털어 냈다. 짜릿한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까부터 차갑게 식었던 손끝에서도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한다. 마중사기 중 두 명이 등장한 데다, 천마의 비밀 호위인 마영단까지 나온 마당이다. 문평으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어마어마한 일임은 분명하나, 그는 이 일에 호락호락 휘말릴 마음이 없었다.
감당 못 할 거대한 힘에 쫓기는 건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가 자초한 것도 아니고, 힘이 없다는 이유로 휘말리는 건 두 번 다시 겪기 싫은 문평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복지부동이 전부였다. 그가 자신의 인생에서 추구하는 가장 큰 가치는 바로 안락함이었다.
“이쪽이네. 들어오게.”
아랫사람도 부르지 않고 직접 나서 그를 안내한 호완평이 뇌정전 안의 한 전각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열린 문 안에서는 짙은 먹 향기와 향긋한 종이 내음이 나고 있었다. 냄새로 봐서는 문사의 서재와도 같았으나 검은 옷을 휘감은 자들이 철통처럼 수비하는 것을 보니 그보다는 중요한 장소인 모양이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빠져나오리라. 석문평은 깊게 다짐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쪼르르.
맑은 물소리와 함께 은은한 다향이 번져 나왔다. 소담하게 희기만 한 백자 잔과 어울리는 담담한 향이지만, 잔향이 그윽하면서도 담백한 것을 보니 과연 예사 차가 아닌 듯했다.
“송계에서 올라온 백호은침白毫銀針일세. 맛이 약하다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난 이 은근한 향이 좋더군.”
호완평이 석문평 쪽으로 찻잔을 내밀며 조용히 웃었다. 문평은 눈을 내리깔고 살굿빛 찻물 속에서 우아한 찻잎이 마치 춤을 추듯 오르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려하리만치 섬세한 그 움직임을 잠자코 내려다보다 찻잔을 손에 쥐니, 체온이 떨어진 손안에 따끈한 온기가 도는 게 느껴졌다.
‘이런 걸 두고 일생일대의 영광이라고 하는 건가…….’
석문평은 자못 심각하게 생각하며 차를 호록 들이켰다. 마중사기 중 두 사람을 하루에 몰아 봤다는 것만으로도 심상치 않은데, 무려 호완평씩이나 되는 인물에게 손수 차까지 대접받으니 이 상황을 어떻게 파악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졌다. 황감하다 못해 얼떨떨했다. 너무 분에 넘치는 대접이다 보니 도리어 의심스러웠다.
‘대체 나한테 뭘 시키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이 순간 문평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부하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줘 신임을 얻었다는 위나라 장수에 대한 고사였다. 윗사람이 베푸는 과도한 친절에는 항상 이유가 있음을 알고 있는 문평은, 그렇지 않아도 빳빳하던 경각심에 날까지 서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레 눈을 내리깔았다.
“셋째가 내게 전할 서신이 있다고 들었는데.”
조신하게 홀짝홀짝 차만 마시는 문평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던 호완평이 문득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란 문평은 서둘러 품 안에서 서신을 꺼내 호완평에게 내밀었다.
그는 스스럼없이 서신을 받아 들고 문평의 눈앞에서 태연히 읽기 시작했다. 서신을 읽으면서도 입가에 밴 사람 좋은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정체를 몰랐다면 무골호인으로 착각할 만한 모습이었으나, 문평은 그 모습에 속지 않았다.
문평이 풍진강호에서 평생을 부대끼면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은 언제나 이름값을 한다는 사실이다.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저 단순하기만 한 사람이었다면 결코 제백도라는 무시무시한 별호의 주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문평은 그 점을 뼛속에 새겼다.
“느닷없는 승전에, 더군다나 뇌정전 행이라. 궁금한 게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꼼꼼하게 서신을 읽은 호완평이 고개를 들었다. 석문평은 이제야 본론이 나오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예의 바른 태도로 호완평의 말을 긍정했다.
“그렇습니다. 단주님. 저는 제가 이곳에서 무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셋째가 서신에 적어 보내길, 자네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무공을 익히고 있다고 하더군. 듣자 하니 흑야의 제자라지?”
같은 실수를 두 번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예. 맞습니다.”
포영의처럼 대놓고 싸늘한 사람보다 호완평처럼 호의적인 겉모습을 내보이며 사람을 간 보는 자가 더 위험한 법이다.
석문평은 아까보다 더욱 공손하게 굴었다. 호완평의 웃는 눈이 석문평을 향했다.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눈이었다.
“우리가 자네에게 맡기려고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네. 빼어난 눈썰미와 꾸준한 인내력만 있으면 되는 일이지. 마영으로 발령이 난 것을 보면 알겠지만, 그대는 그분의 호위를 맡게 될 걸세. 앞으로는 그대가 그분의 그림자가 되는 것이지.”
마영魔影이 마의 그림자, 즉 천마의 그림자를 뜻한다는 건 석문평도 잘 알았다. 마영은 천마 직속의 비밀 호위대를 지칭하는 이름이고, 포영의의 말대로 그들 외엔 아무도 쓸 수 없는 이름이다.
의문인 것은 호완평이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을 자신에게 맡기려고 하느냐는 점이다. 그가 자신 있는 분야는 은신술이 아니다. 그는 은신술을 배워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다른 마영들처럼 천마의 그림자에 녹아들어 그를 호위할 수 있겠는가? 설사 강요받는다고 할지라도 그건 석문평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선뜻 말을 꺼내진 못했지만 석문평의 표정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그 표정을 알아본 것일까. 잔잔히 미소 지은 호완평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당연한 일이지만 자네에게 일반적인 마영의 업무를 바라는 게 아니야. 스스로도 잘 알겠지만 그 업무에 자네는 걸맞지 않지. 내가 자네에게 바라는 건 그것과는 조금 다른 역할이야. 나는 자네가 그분의 그림자인 동시에 그분의 꼬리가 되어 주길 바라네.”
‘설마, ‘그분’이라는 게 내가 생각하는 바로 그 ‘그분’인 것일까?’
석문평은 혼란스러웠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호완평의 기색은 전혀 농담처럼 보이지 않았다. 석문평의 가슴이 싸늘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마영이라는 건 ‘그분’의 그림자인데, 나더러 ‘그분’의 그림자인 동시에 꼬리가 돼라 이 말이지? 꼬리라는 것은 그분의 행적을 추적하고 보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러면 지금 나더러 무려 ‘그분’을 미행하라는 건가?’
“……제가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차라리 스스로 목을 매 죽으라고 하시지 않고서요? 나보고 천마를 추적하라고요? 차라리 개미더러 호랑이를 추적하라고 하지 그러십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요. 이게 말이 되는 일인지. 당신 생각엔 내가 시킨다고 그런 일을 할 것 같습니까? 내가 미쳤어요?’
……라는 길고 긴 생각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석문평은 그것만을 되물었다.
설마겠지. 아니라고 해줘. 가련한 눈빛은 간절히 그 한마디 말을 원하고 있었지만, 호완평은 무정히도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셋째가 말하길, 마교 안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자네라고 하더군. 나는 셋째를 믿네. 셋째가 할 수 있다고 하면 할 수 있는 일인 게지.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부디 그분을 모시는 일에 성심을 다해 주게.”
호완평은 매끄러운 어조로 입바른 소리를 했다. 더도 덜도 없이 딱 석문평을 죽을 자리로 떠미는 말이었다. 다급해진 석문평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네’하고 곱게 수긍했다간 그대로 인생 종 치는 거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다 보니 예의고 뭐고 보이는 게 없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 아닌가. 어차피 죽을 거라면 살려고 발버둥은 쳐 봐야 할 것 같았다.
“어, 어떻게 제가 가장 적격이라 하십니까? 마교에는 저 말고도 추종술을 배운 자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경공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요. 저보다 더 빠르고 능숙한 자가 얼마나 많은데요. 녹수무영은 이름만 그럴싸했지 별로 빠른 신법도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발이 빠른 자가 아니야. 제아무리 신법이 빠르다고 할지라도 그분보다 빠를 수는 없는 일이고, 섣불리 따라붙었다간 그분 손에 목이 날아가기 십상일 테니 빨라 봤자 소용이 없지.
우린 멀리서나마 그분을 놓치지 않을 사람을 원하네. 그러니 자네의 녹수무영이야말로 적격이지. 자네의 신법은 효율적이고 견고해 속도가 빠르진 않아도 오래 지속된다고 들었네. 그 정도라면 그분은 따라잡지 못해도 흔적은 따라잡겠지.”
“하, 하지만 저는 무공수위도 일천합니다. 고작해야 일류에 턱걸이하는 수준으로, 실상 어찌 보면 일류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이거든요. 한데 어찌…….”
“그건 괜찮네. 신경 쓸 것 없어. 아니, 그렇기에 더욱 적임자라고 할 수 있지. 어설프게 무공이 강했다간 그분의 뒤에 붙이지도 못할 게야. 자칫 잘못해 그분의 비위를 거스르기라도 하는 날엔 호위고 뭐고 목숨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뭐, 실제로 자네 바로 전의 호위가 그런 꼴이 되긴 했지. 그분은 거추장스러운 것을 매우 싫어하시거든.”
호완평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으나 그 말을 들은 석문평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천마의 성격이 괴팍해 호위고 뭐고 가차 없이 목을 날린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찌 창백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듣자 하니 이다음엔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 모양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도 자네에겐 해당하지 않는다네. 자네의 무공수위가 절정 정도만 되었어도 자네를 선택하진 않았을 거야. 하지만 자네는 고작해야 일류 초입이고, 원래는 말단 중에서도 말단인 신분이지 않나? 교주께서 직접 손을 쓰시기엔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지. 그분은 그래 봬도 측은지심이 있으신 분이라서, 지나치게 약한 상대는 건드리지 않으신다네. 천마라는 이름값이 있는데 어찌 아무에게나 손을 쓰시겠나. 내 아까도 말했지만, 그런 의미에서 자네는 딱 적당한 인물이야. 우리가 찾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으니 말이야.”
병 주고 약 준다고 했던가. 어르고 달래며 뺨치는 수준이 제법 능수능란했다. 석문평은 호완평의 이야기를 듣고 웃어야 좋을지 울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졌다. 천마가 직접 손을 쓰기엔 너무나 가소로운 존재라서 그냥 놔둘 거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자존심이 아프긴 했지만, 덕분에 살아남긴 할 거라니 그를 불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거 뭐 이래. 왜 난데없이 나에게 이런 날벼락이 떨어지는 거야?’
불만은 이루 말도 못 할 만큼 많았지만, 석문평은 감히 그런 불평을 토해낼 수 없었다. 호완평이 무섭기도 했지만, 말해 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호완평이 말하는 투를 보니 자신을 놓아줄 것 같지가 않았다.
네가 딱이다. 이 일은 너만이 할 수 있다! 사람이 슬슬 몸을 빼는 기색을 보고도 그렇게 밀어붙이는데, 자신이 빠져나가도록 순순히 놔둘 리 없었다.
‘그러게 왜 배우기 싫다는 걸 억지로 가르쳐서 사람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냐고!’
석문평은 피눈물을 삼키며 애꿎은 만씨 노인네를 원망했다. 뒤늦은 원망이지만, 지금 이 순간 석문평에겐 포영의보다 호완평보다 그 노인네가 더 원망스러웠다. 하다못해 무공이라도 배웠다면 이리도 억울하지는 않을 터였다.
가르쳐도 왜 하필 그딴 걸 가르쳐서는 평탄하게 살던 남의 인생을 이렇게 꼬아 놓느냔 말이다. 당문에 쫓기게 하질 않나, 천마를 미행하란 명을 받게 만들질 않나. 화근도 이런 화근이 없었다.
***
당대의 마교가 이토록 성세를 이루는 것은, 첫째로는 천마 혁련상이 있기 때문이오, 둘째로는 그가 그 자신의 막강한 무력을 이용해 천산산맥을 가로지르는 천산북로와 천산남로를 완벽히 장악한 덕분이다.
고래古來로 북도北道라고 불리던 천산북로天山北路와 천산남로天山南路는 소위 말하는 비단길 중 하나로, 서역으로 향하는 육상 교역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길이다.
중원의 정파들은 막대한 이문이 쏟아지는 이 길을 마교가 관리하며 안정적으로 부를 축적하고 세를 불린다는 사실을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손쓸 여지는 달리 없었다. 신강은 안락한 중원에 몸담은 그들에겐 너무도 먼 땅이고, 천마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상 그 어마어마한 이권을 넘보려는 자는 감히 존재하지 않았다.
마교가 북도를 장악한 지도 어언 40년. 덕분에 마교에서는 이국적인 물품을 보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천산 남북로의 길을 관리하면서 받는 세금도 세금인 데다, 마교가 자체적으로 조직한 상단까지 서역을 넘나들고 있으니 서역의 물자가 교내에 풍성히 풀리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 마교에서 10년 넘도록 살아온 게 석문평이다. 그도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져서, 중원의 물품과는 완연히 다른 풍색風色의 기물들을 봐도 신기해하지 않을 정도는 된 상태였다.
천축天竺2)의 비단이 제아무리 색색이라도 비단은 비단일 뿐이고, 상아로 만든 술잔이 근사하긴 해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이미 서역의 풍색을 눈에 익힌 그는 처음처럼 모든 걸 색달라하지 않았다. 뭐든 익숙해지면 당연해지는 법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건…….’
그런 그였지만, 저 희한하기 짝이 없는 물건 앞에서는 호기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눈앞에 천마라도 있다면 또 모르겠으나 그분은 벌써 7일째 부재중이다.
마지못해 마영의 임무를 떠안고 뇌정전에 들어서야 했었던 게 지금으로부터 이레 전의 일이니, 호위 임무를 맡은 이후 단 한 번도 천마를 보지 못한 셈이다.
처음에야 곧 목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내 팔자는 대체 왜 이런 건가 싶어 속이 타고 암담했지만, 천마는커녕 그의 그림자도 보지 못한 상태로 시간이 흐르다 보니 그런 마음도 차츰 사그라졌다.
교주께서 나타나시기라도 해야 뭘 해도 하지.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있는데 계속 겁을 낸다는 건 호랑이 앞에 개미뻘에 불과한 석문평이라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석문평은 꼿꼿이 들고 있던 고개를 슬쩍 돌려 그 기이한 물건을 바라보았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풍성하게 깔린 파사波斯3)풍의 깔개도, 침상 귀퉁이에 늘어트린 하늘하늘한 천축 비단도, 날개 달린 괴상한 요수들이 잔뜩 새겨진 장도 농도 아닌 요상스러운 가구도 모두 특이하긴 했으나 저 물건만큼 대단한 볼거리는 아니었다.
똑딱똑딱. 성가신 소리를 끊임없이 내며 움직이는 물건은 각기 빠르게 혹은 늦게 움직이는 세 개의 바늘과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둥근 추를 가진 해괴한 것이었다. 납작한 판에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려 붙이고 꼬리 쪽을 모아 붙인 바늘이 그 위를 뱅뱅 돌도록 만들어 놨는데,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판 위를 덮은 것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얇은 유리琉璃다.
석문평의 상식으로 유리란, 투명하면 투명할수록 값이 나가는 물건이다. 중원에선 색이 짙은 유리보다는 색이 옅은 유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색이 있는 유리보단 없는 유리가 더 귀하게 대접받는다.
그런데 저 물건에 덮인 유리는 석문평이 이제껏 본 그 어떤 유리보다 더 얇고 투명했다. 맑은 물속을 보는 듯 투명한 유리이니, 값을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한 귀물貴物인 셈이다.
저건 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저런 귀한 유리판을 달아 놓은 것일까. 석문평은 그것이 매우 궁금했다.
끊임없이 들리는 똑딱똑딱 소리는 과히 좋지 않았다. 저것은 딱히 아름답다고 할 만큼 보기 좋은 모양도 아니고, 어디 특별하게 쓸모 있어 보이는 구석도 없었다. 유일하게 특이한 거라고는 매일 같은 시간에 종소리를 내며 우는 것인데, 저게 왜 그 시간만 되면 우는지 알 수 없는 석문평으로서는 그저 고역일 뿐이었다.
‘전혀 몰랐어. 천마께서 이런 분이실 줄이야. 최가나 임학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 뭐라고들 할까?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겠지?’
천마께서 안 계시는 터라 할 일 또한 없어서, 벌서듯 천마의 침전에서 번을 서는 게 전부인 석문평은 하릴없이 딴생각에 골몰했다.
천마에 대한 소문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가 이국의 물건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외유를 지나치게 자주 한다는 것도, 그래서 그의 제자들인 마중사기가 그의 행적을 파악하느라 골몰한다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다.
천마라는 이름은 이미 전설이 되어 있었지만, 남은 것은 그의 그림자뿐. 그가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단서는 그에 대한 신화 속에서조차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영웅으로 이름을 남긴다는 건 모두 이런 것일까?’
천마의 뜻하지 않은 일면이 새로웠던 문평은 그런 형이상학적인 감상까지 떠올리는 중이었다. 확실히 할 일이 없긴 되게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그러고 서 있었을까.
주위를 살피고 구경하는 일에도 지쳐 기괴한 기물이 일각에 몇 번이나 똑딱거리나 세고 있을 즈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흐트러진 자세로 서 있던 석문평은 화들짝 놀라 등을 꼿꼿이 세우고 문 쪽을 돌아보았다.
기별도 없이 열린 문 안으로 성큼성큼, 웬 장한이 들어서고 있는 게 보였다. 방 안의 풍모만큼이나 이국적인 복색을 한 사내였다. 얼핏 보아서는 꼭 파사국波斯國에서 넘어온 서역 상인처럼 보였다.
장한은 흑색의 폭이 넓은 목면 옷에 발끝까지 내려오는 피풍의를 두르고 있었다. 사막을 건너왔는지 움직일 때마다 어깨 아래로 모래가 흘러내렸다. 사내 중에서도 키가 큰 문평이 고개를 들고 봐야 할 정도로 대단한 장신에다 풍채도 좋아서, 걸어 들어오는 모습만 보아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아니, 이게 웬……?’
석문평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거침없는 침입자를 지켜보았다. 호사스러운 방 안에 아무렇지도 않게 모래바람을 이끌고 들어온 남자는 먼지와 흙이 잔뜩 묻은 피풍의를 벗어던지더니, 큰 소리로 시비의 이름을 불렀다.
“예화蘂花! 란란鸞鸞! 수욕물을 받고 차를 내오너라. 수욕물도 차도 뜨겁게 내와!”
풀썩 떨어지는 피풍의에서 자욱이 먼지가 솟아올랐다.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던 석문평은, 남자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내심 흠칫했다.
자기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서슴없이 굴던 남자가 석문평을 발견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넌 뭐냐?”
석문평이 묻고 싶은 말을 남자가 먼저 했다. 질문하는 목소리는 그윽하게 깊었으나, 이쪽을 향한 남자의 얼굴은 새파랗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어렸다. 몹시 잘생기긴 했지만 지나치게 매끈한 얼굴이다. 뺨은 보드랍고 목에는 솜털이 송송한 게, 많이 잡아도 스물 서넛 이상은 안 되었을 것 같다.
‘누구지? 꽤나 신분이 대단해 보이는데?’
문평은 지나치게 당당한 남자의 태도에 고심하며 머리를 굴렸다. 어디 보자. 마중사기 중 가장 어린 것이 환요편이라지만, 환요편은 여자인 데다 그도 서른이 넘었다. 마중사기에서 그다음으로 어린 사람은 포영의인데, 포영의는 이미 얼굴을 알고 있으니 통과.
‘가만. 여긴 뇌정전 아니었나? 더군다나 이 방은 다른 곳도 아닌 천마의 침전이고. 여기에서 감히 주인처럼 행세할 수 있는 사람은……. 젠장, 천마 본인밖에 없잖아!!’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경우의 수를 굴려 보던 석문평은, 뒤늦게 사내의 정체를 깨닫고 소리 없이 경악했다.
‘마, 마, 맞다. 천마다!’
지나치게 어려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 순간 헷갈렸지만, 잘 생각해 보니 천마의 침전에서 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천마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반로환동을 했다더니 그 말이 진짜였구나. 도로 젊어졌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하니 저렇게 새파랗게 어려졌을 줄이야!’
눈에 보이는 모습에 미혹되어 하마터면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던 석문평은,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천마에게 예를 표했다.
“충성. 광영된 주인인 교주님을 뵈옵니다.”
할 수 있다면 오체투지라도 했겠지만, 천하의 천마라도 황제는 아니었기에 그냥 고두를 했다. 깊게 숙인 머리 위로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인사가 늦었다고 목을 자르려는 건 아니겠지?’
석문평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머리를 들라고 하기 전에 고개를 드는 것은 예가 아닌 데다가, 잘못 고개를 들었다가 목이 날아갈까 두려워 감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대충하고 질문에나 답하지 그래? 넌 뭐야? 뭔데 여기에 있어?”
머리 위에서 존귀하신 하문이 내려왔다.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어투였지만, 천마가 가진 천성적인 위압감과 그윽한 목소리 덕에 그 사실을 얼른 깨닫지 못한 석문평은 한층 더 고개를 낮추며 정성껏 대답했다.
“속하의 이름은 석문평이라고 합니다. 교주님을 측근에서 뫼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천마는 잠시 말이 없었다. 단지 으음, 하는 낮은 신음이 들릴 뿐이었다.
“고개 들어 봐.”
어딘지 모르게 시큰둥한 기색으로 천마가 하명했다. 그 명이 어느 명인데 거역할까. 석문평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려 천마를 바라보았다.
석문평의 앞에 버티고 섰던 천마가 허리를 굽혔다. 황감하게도 석문평의 얼굴께로 눈높이를 맞춘 천마는 마시장에 나온 말을 감정하듯 꼼꼼한 태도로 석문평의 얼굴을 훑었다.
젊은 사내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눈은 깊었다. 안광이 형형하고 눈매가 깊은 눈은 설사 고수라 할지라도 감히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아득해서, 그가 살아온 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쯧. 석문평의 귓전에 천마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좀 못마땅한 기색이었는데, 천마의 속내를 읽을 수 없는 문평은 그가 왜 그렇게 못마땅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누가 널 이리로 보냈다고?”
천마가 다시 물었다. 석문평은 이번에도 성실한 태도로 천마의 질문에 답했다.
“추밀각주께서 보내셨습니다. 업무를 직접 지시하신 것은 마영단주님이십니다.”
“그놈들이 쓸데없는 짓을 했군. 이왕 보내려면 제대로 된 거로 보내던가. 뭘 한다고 이런 걸 보내?”
구시렁구시렁. 천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거’라니. 설마 ‘이런 거’라는 게 나를 말하는 건가?’
석문평은 그 말을 알아듣고 옅게 얼굴을 붉혔다.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솔직히 할 말은 없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자신의 무위는 천마의 눈에 차지 않을 것이다. 호완평조차도 자신이 보잘것없기에 보낸다 했을 정도니, 천마에겐 얼마나 가소로워 보이겠는가.
면전에서 쓸모없는 물건 취급을 당한 적은 처음이지만 상대가 상대다 보니 반박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무려 천마가 직접 내린 평이다. 설사 납득하지 못한다 해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다리가 길군. 경공을 익혔나?”
마주 서 있던 시간이 짧았음에도 그새 골격까지 봐둔 듯 천마가 질문을 던져왔다. 석문평은 조심스레 천마의 질문을 긍정했다. 그가 맞다고 대답하자, 천마가 석문평의 허벅지를 짚었다. 짚는가 싶더니, 더듬듯 쓸어내리며 허벅지를 매만진다.
석문평은 기겁했지만 감히 몸을 뺄 수는 없었다. 상관이 좀 더듬었다는 이유로 몸을 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말 근육이군. 빠르게 달리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달리는 신법을 익힌 모양이지? 몸 전체에 근육이 고루 퍼졌고, 쓸데없는 잔 근육이 붙지 않은 걸 보니 빠른 몸을 사용하는 게 특기겠군. 쾌도를 쓰나? 아니면, 쾌검을 쓰나?”
“쾌검을 씁니다.”
“그럼 등도 괜찮겠군. 쓸데없이 무거운 무기를 든 적이 없으니 등 근육도 마르게 붙었겠지.”
그건 좀 마음에 든다며 천마가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석문평은 기분이 묘해졌다. 어쩐지 도살장의 소가 된 것 같았다. 전신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자세히 따져 묻는 게, 부위별로 품질을 검증받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혹시 뭐라도 하나 가르쳐 주시려고 그러나 싶기도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자신이 무슨 천하의 기재도 아닌데 새삼스레 천마의 눈에 들 리는 없는 터라 그 기대도 오래가진 못했다.
“광영된 주인인 교주님을 뵈옵니다. 귀교하신 것을 감축합니다. 교주님.”
“광영된 주인인 교주님을 뵈옵니다. 귀교하신 것을 감축합니다. 교주님.”
뒤늦게 부름을 들은 듯 두 명의 어여쁜 시비가 날듯이 들어와 인사를 건넸다. 바깥세상에 있었다면 천하의 미인으로 이름을 날렸을 만큼 대단한 미색들이었으나, 천마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덤덤하고 시큰둥했다.
“뜨거운 물로 수욕하겠다. 차를 내와라.”
“여기 차가 있습니다. 교주님. 수욕물은 지금 준비 중입니다.”
예화가 우아하다면 란란은 화사했다. 우아한 예화가 교주의 의복을 벗기기 시작하자, 란란이 받쳐 들고 온 쟁반에서 찻잔을 들어 교주에게 바쳤다. 교주는 시중을 받으며 차를 마셨다. 호완평이 대접했던 백호은침의 은은한 다향과는 확연히 다른, 짙고 강한 향내가 방 안을 채웠다.
향이 저토록 강한 것을 보니 차 중에서도 홍차紅茶인 모양이다. 사내가 백차白茶를 좋아하는 경우는 드물기에 호완평의 취향이 의외로웠던 문평은, 한술 더 떠 홍차를 음용하는 천마를 보며 괴팍하다고 생각했다.
이 방 안의 모습만큼이나 천마는 특이한 취향을 갖고 있었다. 사내답고 서민답게 고작해야 흑차黑茶나 마시던 석문평의 입장에서 보자면 특이해도 이만저만 특이한 게 아니었다.
“일단은 수욕 시중부터 들어 봐. 거기까지 쓸모가 없으면 어쩔 수 없다는 걸 염두에 두고. 란란. 저자를 욕탕으로 안내해라.”
가뜩이나 이상한 천마이건만, 설상가상으로 그는 기이한 명령까지 내렸다.
‘수욕 시중이라니? 측근 호위가 수욕 시중을?’
일순 어이가 없었던 석문평이지만, ‘거기까지 쓸모가 없으면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이 들려오자 천마가 내심 무슨 의도로 그런 명을 내렸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천마가 보기에 자신은 그 정도의 용도밖에 생각나지 않는 존재인 모양이다. 호위로 사용하기에는 무위가 턱없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해서 따로 발령을 내기도 귀찮으니 하인처럼 부리는 것으로 쓸모를 대신하려는 듯하다.
무인의 자존심 따윈 고려조차 하지 않는 어이없는 취급이었으나, 상대가 상대인지라 석문평은 한없이 겸허해졌다. 너무나 겸허해진 나머지 이런 취급을 받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여길 정도였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수욕 시중 따위야 그다지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목숨을 걸고 천마의 뒤를 추적하느니 더러운 물을 버리고 등을 밀어주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의 삶의 목표는 오로지 무사태평이었다. 그는 굴곡진 삶이 너무나도 지긋지긋했고, 자신의 삶을 꼬이게 하는 일만 아니라면 무슨 일이라도 기꺼이 할 용의가 있었다.
자욱한 수증기가 뿌옇게 시야를 가렸다. 손을 저어 눈앞을 가로막은 수증기를 흩뜨려 보았지만, 시야는 금세 밝아지지 않았다. 창문이 없어 어둑한 욕실 안에서는 젖은 꽃향내가 풍겨 왔다. 차르륵 차르륵. 욕탕 안으로 뜨거운 물을 긷는 소리가 막힌 벽을 통해 반사되었다.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군그래.’
문평은 내심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뇌정전의 전각들이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던 바였으나, 그중에서도 욕실의 치장은 독보적이었다. 설사 황제라고 할지라도 이토록 화려한 욕탕을 가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금성은커녕 북경도 가보지 못한 문평이었지만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람이 서넛 들어가고도 자리가 족히 남을 넓은 욕탕은, 운남에서 캐낸 최상급의 대리석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다만 욕탕뿐만이 아니라 욕실 바닥 전체가 그랬다.
넓은 벽감을 마감한 것은 습기를 잘 먹지 않는 흑단목이었는데, 도원경桃源境을 섬세하게 돋을새김한 조각들은 사방 벽을 통해 이어져 있고, 그 위에는 색색으로 곱게 채색까지 되어 있었다. 어두운 방을 밝히기 위해 기름종이를 바른 좌등 안에 고래기름으로 만든 초를 넣어 사방에 두었고, 갓 데운 뜨거운 물엔 달콤한 향유를 풀었다.
긴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 올린 아름다운 란란이 꽃잎을 뜯어 물 위에 뿌리는 모습이 보였다. 은어처럼 새하얀 팔이 팔목까지 젖어 있는 그 자태가 너무도 아름다워, 석문평은 그만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옷을 갈아입으세요. 석 무사님. 그런 차림으론 수욕 시중을 들 수 없습니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석문평의 눈길을 눈치챈 것일까. 란란이 쌀쌀한 투로 말을 걸어왔다.
볼을 깨물면 과즙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화사한 미인인지라 쌀쌀맞게 말을 걸어도 어여쁘게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언감생심. 천마의 시중을 드는 시비에게 감히 딴생각을 품을 수는 없는 일이어서 차마 곱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달리 가진 옷이 없습니다, 란 소저. 옷을 갈아입으려면 처소까지 갔다 와야 하는데요.”
석문평은 란란의 지적에 어설프게 웃으며 자신의 행색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봐도 수욕 시중을 들 만한 차림새가 아니지만, 불행히도 그의 처소와 뇌정전은 지나치게 멀었다.
“수욕 시중은 그런 옷을 입고 드는 것이 아닙니다. 소홍아. 옷을 내드리렴. 명한 대로 품이 넉넉한 것을 가지고 왔겠지?”
“예. 란 아가씨. 제일 품이 넉넉한 것으로 골라 왔습니다.”
천마의 시중을 직접 드는 것은 란란과 예화지만, 그녀들이 직접 허드렛일까지 할 수는 없으므로 그 밑에 딸린 시비가 따로 있었다. 그런 아이 중 한 명인 듯, 낯익은 시비 하나가 앞으로 나서더니 석문평에게 매미 날개 같은 옷을 내밀었다.
옷이라고 하기에도 당혹스러운, 속이 거의 비치다시피 하는 반투명한 나삼羅衫이었다.
“아니, 이건 뭡니까?”
얼떨결에 받아 들긴 했으나, 이게 설마 자신이 갈아입을 옷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석문평이 란란에게 되물었다.
란란은 새침하게 눈을 내리깔더니 젖은 팔을 들어 올려 수건으로 닦았다.
“교주님의 수욕 시중을 들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입어야 하는 옷입니다. 깨끗하게 입고 돌려주세요.”
“……네?”
“그 옷을 입지 않으면 시중을 들 수 없습니다. 비록 석 무사님께서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규칙은 규칙이니, 지켜 주셔야 합니다.”
어이가 없어 되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나더러 이걸 입으라니. 몸을 파는 홍루의 여인네나 입을 만한 나삼이잖아!’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 석문평은 설핏 안색을 굳혔다. 수욕 시중을 드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나삼을 입는 건 그와 다른 문제다. 그런 흉한 꼴을 하고 천마 앞에 나서라니,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 아닌가.
웃음거리가 되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그게 아니라면? 그 꼴을 보고 교주께서 심기가 불편해진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죽어 나가는 것은 문평이다. 란란이 아닌 것이다.
“란 소저…….”
“황제의 침전에 후궁을 어떻게 들여보내는지 아십니까? 우선 깨끗하게 씻기고 발가벗긴 채 몸을 검사합니다. 머리를 촘촘한 참빗으로 빗어 혹시 머리채 속에 숨긴 것이 없나를 살피고, 차마 말 못 할 여인의 깊은 곳까지 뒤져 만약의 일에 방비합니다. 그런 후 나신을 이불에 둘둘 말아 내시의 등에 업혀 내가지요. 그것이 바로 황실의 법도입니다.
장소는 다르다 하나 이곳도 마찬가지로 지존의 처소입니다. 황실만은 못해도 이곳 나름의 법도가 있어요. 이 법도를 지키지 못하겠다 생각하신다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을 겁니다. 제게 인정을 호소하려고 하지 마세요.”
란란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예를 들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석문평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화, 황제의 후궁이라니. 하필이면 예를 들어도 그런 예를 든단 말인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는 알겠지만 예시가 너무 과격했다. 그도 장년의 사내이니 음담패설에 익숙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동료들끼리 낄낄거리며 주고받는 것이라면 모를까, 꽃같이 고운 아가씨와 이런 종류의 대화를 나누는 것에는 면역이 없었다.
험한 소리를 한 것은 란란인데, 꼭 자신이 그녀를 희롱한 듯 느껴진 문평은 말을 잇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어리고 아름다운 여인에게 환상을 가졌던 노총각의 순수한 마음은 그렇게 부서지고 말았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겠습니다. 란 소저. 그러니 더는 말씀 마십시오.”
엄청난 말을 꺼내고도 태연한 란란과 다르게, 석문평은 무슨 낯으로 란란을 봐야 할지 몰라 곤란한 낯빛으로 우물쭈물 나삼을 끌어안았다. 설마 눈앞에서 갈아입으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싶어 눈치를 보고 있자니, 란란이 밖에서 기다리겠다며 자리에서 물러난다.
주섬주섬. 입고 있던 흑의 무복을 벗은 문평은 옷인지 천인지 구분할 수 없는 얇은 옷을 피부 위에 걸쳤다. 당연한 일이지만 어깨가 꽉 조였다. 잘못 움직이면 솔기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좁은 소매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팔도 들어가지 않았을 터다.
벗은 옷을 개어 놓고, 몸을 거의 다 드러내는 나삼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흉측했다. 확실히 이 옷을 입으니 어디에도 무기를 숨길 수 없을 것 같긴 하지만, 그것 외에는 어떤 장점도 찾아볼 수 없는 차림이다.
지존이라는 자리도 쉬운 게 아니겠구나. 석문평은 속살이 훤히 다 비쳐 걸친 것 같지도 않은 옷의 깃을 여미며 한숨을 쉬었다.
지존이라는 이유로 수욕할 때마다 사내자식의 이런 꼴을 봐야 한다니, 문평은 그런 자리 따위 줘도 사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덜컹. 욕실 문이 열렸다. 석문평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열린 문 사이로 성큼성큼 천마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냥 천마도 아니고 무려 ‘벌거벗은’ 천마였다.
벌거벗은 천마는 무척이나 당당했다. 뭐, 보아하니 당당할 수밖에 없는 몸이긴 했다. 키는 육 척 하고도 한 뼘은 더 되는 데다 몸매는 또 말도 못 하게 근사했다. 같은 남자가 봐도 일순 눈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몸매였다.
본래 환골탈태를 하게 되면 몸의 골격이 바로잡히고 근육이 제자리를 찾게 된다. 피부가 갈라져 새 살이 돋아나고, 헌 이가 빠지고 새 이가 나고, 새로이 머리카락이 자란다. 화식을 하면서부터 쌓이기 시작하는 노폐물이 모조리 빠져나가고, 몸의 탁기가 사라지며, 그리하여 인간의 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게 바로 환골탈태다.
그런 걸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했는데 그 몸에서 흠결을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는 피부조차 갓 태어난 아기처럼 투명하고 부드러워서, 한번 만져보고 싶다는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저 모습을 보고 누가 산수를 넘은 나이로 보겠어. 역시 반로환동이 좋긴 좋아. 인생을 두 번 사는 거나 다름이 없잖아.’
천마에 비하면 젊다 못해 어리다고 해도 좋을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슬슬 청춘이 가고 있다고 느끼는 30대의 석문평은 내심 천마가 부러웠다.
같은 사내가 봐도 근사한 몸이다. 그 누구라 할지라도 저런 몸을 보면 그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게 뻔했다.
‘누군 참 좋겠네. 돈 있겠다, 지위 있겠다, 명예 있겠다, 거기다 청춘까지 두 번을 살게 되다니. 확실히 하늘은 만인에게 공평치 않아.’
서슴없이 욕탕으로 들어간 천마가 온수에 몸을 담갔다. 찰박거리는 물소리에 정신을 차린 석문평은 욕탕 옆에 놓인 향유 그릇을 들고 천마의 등 뒤로 다가갔다.
천마는 긴 머리채를 탕 밖으로 드리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뒤로 젖힌 이마가 상아로 깎은 것처럼 수려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시키기에 나서긴 했으나 단 한 번도 남의 수욕 시중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석문평은 머뭇머뭇 망설였다.
그런 그의 눈에 천마가 늘어트린 머리채가 들어왔다. 먼지가 잔뜩 묻은 흑단 같은 머리채는 하나도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사막 바람에 잔뜩 헝클어진 머리는 엉킨 채로 굳었고, 그 위에 소복이 모래가 쌓였다.
먼지부터 씻어 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문평은 조심스레 천마에게 말을 걸었다.
“머리부터 감겨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자신이 없어 소심하게 되물었더니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부터 욕탕의 벽에 등을 기대고 머리채를 밖으로 내놓고 있었던지라, 다행히도 자세를 바꿔 달라고 요청할 필요는 없었다.
문평은 란란이 따로 남겨 놓은 물통을 끌어다 놓고, 천천히 천마의 머리를 감겼다. 해초처럼 검은 머리칼은 건강하고 매끄러웠다. 새치 하나 없었다.
엉킨 머리를 세심하게 풀어내고 물로 먼지를 씻어 내렸다. 향유로 머리를 한 번 감기고, 따뜻한 물로 기름을 한 번 더 씻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을 들여 머리를 감기고 나니 어깨가 뻐근했다.
크게 힘쓰는 일도 아니고 고작해야 시중일 뿐이어서 만만하게 봤는데, 막상 손을 대고 보니 이것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일에 드는 품에 비해 마음이 쓰이는 공이 컸다. 쉽지 않은 어른을 모시는 일이니, 머리를 감기는 일만으로도 마음을 졸이게 된다.
“언제까지 머리채만 만지작거릴 참이야? 물 다 식겠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말없이 머리만 내맡기고 있던 천마가 탕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말을 걸어왔다.
살짝 잠긴 듯 나른한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관능적인 기색을 띠고 있었다. 막 두 번째로 머리를 감기고 있던 석문평은 일에 골몰하느라 상기된 뺨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너무 오래 머리만 감기고 있는 게 아닌가 싶던 차였다. 아무래도 이젠 다른 걸 해야 할 것 같다.
“등을 밀어 드릴까요?”
뭔가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대체 뭘 해야 할지 몰랐던 석문평이 순진하게 물었다. 그 질문을 들은 천마가 웃음을 터트렸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천마는 그의 말을 썩 재미있어하는 눈치였다.
“얼떠 보이더니 제법이로군. 하긴. 영의가 보낸 놈인데, 그냥 숙맥일 리는 없겠지.”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팔을 뻗어 석문평의 젖은 팔뚝을 잡아챘다. 앗, 하는 사이에 몸이 균형을 잃었다. 가볍게 끌어당긴 팔에 여지없이 끌려간 석문평은 욕탕 안으로 몸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이게 무슨? 명색이 무인인데도 방비할 틈조차 없었다.
아직 식지 않은 따뜻한 물이 몸 전체를 감쌌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 버린 석문평은 당황한 얼굴로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깜빡깜빡. 얼떨떨하게 깜빡이는 속눈썹에 물방울이 맺혔다 떨어져 내렸다.
“교주님?”
“가끔은 농익은 애무보다 서투른 척 감질나게 하는 유혹에 더 회가 동하긴 하지. 교육을 잘 받았군. 영의의 취향인가?”
천마가 중얼거렸다. 문평은 그런 천마의 태도가 매우 불편했다. 왜냐하면 천마가 그 이야기를 하며 그를 허벅지 위로 끌어올린 데다가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턱 끝을 매만지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벌거벗은 허벅지에 벌거벗은 엉덩이가 맞닿았다. 그 농도 짙은 접촉에 문평은 등덜미 위로 오싹하니 소름이 치닫는 것을 느꼈다.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 자신의 몸에 일어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종류의 일이 느닷없이 벌어졌다. 석문평은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힘겹게 노력했다.
“등을 미는 게 싫으시면 안마는 어떠십니까? 교, 교주님?”
말을 하며 슬금슬금, 엉덩이를 뒤로 물리려고 했지만 천마에게 허리가 잡히는 바람에 오히려 품에 안기듯이 끌어당겨졌다. 빙그레 웃는 입매로 보아 명백한 고의였다. 감히 천마의 허벅지에 올라앉아 그의 성기와 자신의 성기를 맞대는 상황에 처하게 된 문평은 더 이상의 현실 도피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천마는 한 손으로 문평의 허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론 문평의 뺨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정상적인 성인 남자라면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서 말이다.
“왜 이러십니까. 교주님.”
문평은 혼비백산하여 천마의 가슴을 두 손으로 밀었다. 물에 젖은 나삼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 그렇지 않아도 미묘한 분위기를 더욱 묘하게 부추겼다.
천마가 또다시 웃었다. 경우에 없는 일을 당한 이쪽은 황망해서 죽을 지경인데, 정작 이 상황을 만들어 낸 당사자는 문평의 황망함조차도 즐기고 있는 눈치였다.
“영의가 제대로 가르쳤군. 교도인 척하는 것도 꽤 자극적이긴 했어. 무공은 어디서 배웠나? 그래도 제법 일류는 되어 보이던데. 하오문下午門 소속이야? 아니면, 환희루幻戱樓?”
“하오문도 환희루도 아닙니다. 교주님. 저는 마교의 교도입니다.”
“아, 그래? 그렇겠지. 계속해 봐.”
천마는 나른하게 중얼거리며 문평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문평은 그 모습을 보고 천마가 정말로 자신을 연동戀童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키도 크고, 나이도 많고, 덩치도 크고, 더군다나 얼굴까지 평범한 자신을 연동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천마는 진짜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세상에 맙소사.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그야말로 통탄할 사태에 직면하게 된 석문평은 아연실색하며 신음을 흘렸다. 살다 살다 이런 꼴을 당하긴 또 처음이었다.
“교주, 읏, 교주님.”
도망가기 위해 몸을 뒤틀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단단하게 허리를 낚아챈 천마가 그를 꼼짝도 못 하게 붙들고 있었다. 문평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천마는 서슴없이 그의 몸을 희롱했다.
천마의 입에 자신의 유실이 물려 있는 걸 보고 있으려니 정말이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문평은 두 손으로 천마의 어깨를 꽉 잡았다. 천마의 손에 이끌려 자꾸만 미끄러지는 엉덩이를, 그래서 천마의 거대한 그것과 자꾸만 문질러지는 자신의 거시기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문평은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교주님, 으윽. 교주님! 전, 마교 외전 소속, 윽. 적호각 참혼대, 제삼조장 석문평, 마영단주님의 명을 받고, 윽, 마영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천마의 뜨거운 성기가 문평의 가엾은 고환을 짓눌렀다. 상대의 거대함에 압도당한 듯, 팽팽하게 커지고 있는 천마에 비해 풀이 죽어 쪼그라든 그의 성기는 안쓰러울 정도로 작았다.
천마의 이 끝으로 젖꼭지가 씹히고, 엉덩이 사이가 허벅지로 문질러진다. 힘을 줘 밀어내도 꿈쩍하지 않는 천마는 몸 위로 무너져 내린 담벼락 같았다.
이러다 진짜로 엉덩이가 꿰뚫릴지도 모른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정조의 위협 앞에서 공포감에 사로잡힌 석문평은, 다급히 무릎을 세워 몸을 지탱했다. 본의 아니게 다리 사이로 천마의 몸을 끼고 있게 됐지만 덕분에 엉덩이는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아. 그래. 마영이라고? 고작해야 일류 고수가 말이지. 재미있는 설정이군. 계속해 봐.”
기껏 힘겹게 한 설명조차 믿지 않는 태도로 천마가 중얼거렸다.
‘왜 사람 말을 못 믿습니까? 내가 연동이라는 것보다 이쪽이 더 믿음직한 설명 아닙니까?’
천마의 시큰둥한 태도에 피를 토할 것 같은 심정이 된 석문평은 거의 울 듯한 기세로 다시금 외쳤다.
“무위는 일류밖에 안 되지만, 마영이 맞습니다! 트, 특기는 경공! 그리고 추종술. 하악. 흑야의 제자입니다. 교주님의 행적을 감시하다가, 읏, 뒤를 쫓으라 명받았습니다!”
“특기가 경공인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내가 말 안 했던가? 다리가 긴 건 마음에 든다고. 사내의 허리를 휘감기에 딱 좋은 다리더군.”
“교주님, 저 진짜 마영 맞습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이런 몸을 가지고 마영이라는 건 좀 웃기지. 처음이라고 우기기엔 감도가 지나치게 좋잖아. 어딜 보나 제대로 훈련을 받은 몸 같은데.”
“그런 훈련 받은 적 없습니다! 학. 저는, 저는 진짜로 마영…….”
석문평이 뭐라고 하든 천마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는 석문평의 목덜미를 깨물며 엉덩이를 움켜쥐었고, 단단하게 솟은 천마의 성기는 다시금 문평의 엉덩이골에 비벼졌다.
히이이익! 진심으로 소스라친 석문평은 전율로 몸을 떨었다. 이러다간 조만간에 진짜로 처음이 아니게 될 것 같았다.
평소 항문의 순결에 연연하기는커녕 그것이 제 몸에 존재하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했던 문평이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영원히 순결하길 열렬히 바라고 있었다. 승은이라면 나름 승은이겠지만, 이런 승은은 진심으로 사양이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날 살려줘!!’
문평은 천지신명께 비는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교, 교주님! 제발!!”
“……그만하세요. 사부님. 그러다 사람 잡겠습니다.”
무지막지한 성기가 엉덩이골 사이에 숨은 작은 주름에 와 닿았다. 나오기만 해야 할 그곳에 들어가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무작스럽게 머리를 들이민 묵직한 그것에 소스라친 석문평은 비명을 지르듯 천마의 이름을 토해냈다. 자칫하면 정말로 꿰뚫릴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이제 난 끝났구나. 죽은 목숨이구나. 눈을 질끈 감고 다가올 충격을 대비하고 있던 석문평은 그 바람에 누군가가 욕실 안으로 들어선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사위가 조용해졌다. 예상하던 충격도, 각오하고 있던 고통도 찾아오지 않자 의아해진 석문평은 파들파들 떨리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려 주위를 살폈다. 천마가 여전히 허리를 꽉 잡고 있긴 했지만, 그는 더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문평을 허벅지 위에 앉힌 천마와 엉덩이 사이에 천마의 성기를 끼운 문평 옆에는 학처럼 흰 장포를 고고하게 차려입은 포영의가 그림처럼 고요히 서 있었다.
“추밀각주님!”
지옥 끝에서 부처를 만나면 이러할까. 시장통에서 잃어버린 엄마를 만나면 이러할까. 쌀쌀맞은 포영의의 얼굴을 앞에 두고도, 석문평은 눈물이 핑 돌았다. 다른 사람의 존재가 이토록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하늘이 그의 기도에 응답해 포영의를 보내 준 것만 같은 착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냐. 영의야? 이곳은 내 사실私室일 텐데.”
반면에 중요한 순간을 방해받은 천마는 재미없다는 얼굴을 하고 포영의에게 투덜거렸다. 그의 성기는 여전히 문평의 엉덩이 사이에 꽂혀 있었다. 제자에게 보일 만한 모습이 결코 아니었지만, 천마는 그 모습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뭘 하고 계셨습니까. 사부님.”
포영의는 차분히 물었다. 사부가 외간 남자와 정사를 벌이고 있는 광경을 눈앞에 두고도 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치 매일 이런 광경을 보기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네가 준 선물을 즐기고 있지. 설마 네가 진짜로 약속을 지킬 줄은 몰랐다만, 이왕에 받은 선물이니만큼 버리지 않고 쓸 생각이다. 기껏 제자가 보인 정성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천마는 한 점 부끄러움 없는 태도로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어지간한 사람도 기가 막힐 뻔뻔스러운 답변이었으나, 포영의는 여전히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며 천마에게 되물었다.
“사부님은 저자가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누구긴. 네가 전에 약속했던 연동이잖아. 내가 돌아오는 대로 준비하겠노라 장담했었던.”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포영의가 채홍사 노릇을 자처했다고 오해할 만한 대답이었으나, 기실 포영의가 했던 말은 천마가 하는 말과는 약간 달랐다.
포영의는 정확히 ‘교주께서 이토록 자주 교를 비우신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더군다나 호위조차 없이 홑몸으로 하시는 외유라니요. 정 그렇게 심심하시다면 차라리 연동을 들이십시오. 뇌정전을 주지육림으로 만들어도 상관 않겠습니다. 색에 빠지시더라도 교내에서 빠지시는 게 낫습니다.’라고 했었다.
그 말도 순전히 홧김에 한 말이었지 실제로 실행에 옮기란 뜻은 아니었다. 게다가 천마는 그 말을 듣고도 외유에 나가 보름이 넘도록 교로 돌아오지 않았었다.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을 가지고 약속을 운운할 순 없을 터였다.
포영의는 자기가 했던 말을 제멋대로 받아들인 천마를 향해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낯빛이 언짢게 가라앉자 천마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짐짓 은근한 어투로 포영의에게 자신이 받았던 질문을 되돌렸다.
“왜 그러는 거지? 설마하니 이 아이가 정말 연동이 아닌 거냐? 그럼 대체 이 녀석은 뭐야? 제 입으로 말하는 대로, 정말 마영이라도 되는 거냐? 고작해야 일류 고수가?”
천마의 깊은 눈매에 웃음이 매달렸지만, 그 웃음은 마주 보고 함께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포영의는 천마의 미소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고는 뻣뻣하게 등을 굳혔다. 석문평도 마찬가지였다. 문평은 포영의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몸을 굳혔다.
‘설마……. 설마?’
문평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경공이 특기인 일류 고수가 무려 마영이라. 그게 정녕 사실이라면 참 재미있는 일이야. 누가 들으면 꼬리를 붙였다고 하지 않겠어.”
천마는 혼잣말인 양 중얼거렸지만,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석문평이 정말로 마영이라면 그는 제자들이 붙인 꼬리다. 하지만 제자들이 자신에게 감히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으니, 문평의 용도는 연동이 맞다.’ 천마가 내보인 암시는 간단했지만 그 뜻은 무거웠다.
포영의는 창백해졌고, 문평의 얼굴은 납빛으로 물들었다. 모르고 한 일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 알고 벌인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평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오랫동안 물 밖에 나와 있어 차게 식은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말을 끝낸 천마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던 석문평의 몸을 확 잡아당겼다. 석문평은 강한 힘에 이끌려 허리를 주저앉혔다가 악 소리를 냈다.
지끈 파고든 성기가 연약한 점막을 짓눌렀다. 아직 찢어지진 않았지만 한껏 벌어진 뒤는 충혈된 듯 욱신거리고 있었다. 천마의 물건은 지나치게 컸고, 처음인 데다 풀어 준 적도 없는 석문평의 항문은 너무도 좁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헐떡이는 입술 위로 천마의 입술이 다가왔다. 뜻하지 않은 방해로 멈추었던 것을 다시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받은 선물은 유용하게 잘 쓸 테니 이만 물러가도록 해. 뭐, 구경이라도 하고 싶다면 이대로 머물러도 상관없고.”
정사를 계속하려는 상황에서 포영의가 지켜보는 것이 귀찮은지 천마가 명을 내렸다. 남아서 구경하란 말도 그저 빈정거림일 뿐, 속내는 명백한 축객령이다.
하지만 포영의는 말없이 입술을 깨문 채 그대로 버티고 섰다. 천마는 고집 센 제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짙은 눈빛을 한 천마와 시선이 마주치자, 잔잔하던 포영의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사부님. 저 완평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바로 그때, 문 저편에서 호완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전엔 포영의더니 이제는 호완평인가?’
천마는 거듭되는 방해에 슬쩍 미간을 찌푸렸지만, 들어오겠다는 제자를 굳이 막을 마음은 없는지 문을 열도록 허락을 내렸다.
“들어와.”
명을 내리자 문이 열리고, 욕실 안으로 호완평이 들어섰다.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남부끄러운 모습으로 재차 방문객을 맞게 된 석문평의 안색은 희다 못해 푸르게 질렸다.
“오늘따라 손님이 왜 이렇게 많아. 좀 쉬도록 내버려 두면 어디가 덧나는 거냐?”
천마는 청하지도 않았는데 연이어 찾아오는 제자들이 못마땅한지 가볍게 투덜거렸다. 호완평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런 천마에게 인사를 건넸다.
“무슨 말씀을 그리도 섭섭하게 하십니까. 사부님께서 오랜만에 교로 돌아오셨는데, 제자 된 도리로 당연히 찾아뵈어야지요.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사부님? 바깥 구경은 잘하셨고요?”
호완평은 참으로 태연스러웠다. 석문평이 천마의 무릎 위에 벌거벗은 채로 앉아 삽입까지 당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포영의도 그렇고 호완평도 그렇고, 사내를 끌어안고 있는 스승의 모습에 놀라지 않는 걸 보니 예전에도 이런 일은 꽤 자주 있었던 모양이다.
“여행은 잘 다녀왔다. 너희들만 귀찮게 굴지 않으면 여행으로 쌓인 객고를 풀 참이었지. 나는 이제 하던 일을 계속하려고 하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할 셈이냐. 계속 그리들 서 있겠느냐 아니면 아예 자리를 잡고 구경을 하겠느냐?”
천마는 나른한 태도로 호완평을 맞이했다. 정말로 구경하고 가도 상관없다는 투였기에, 문평은 어깨가 빳빳해지도록 긴장하고 말았다.
호완평은 천마의 말을 듣고서야 문평의 존재를 알아챈 것처럼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늘 웃고 있어 도리어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벗은 몸 위에 와 닿았다. 석문평은 도리 없이 드러난 수치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저이는 저희 마영단 소속의 무인이군요. 어지간하면 아랫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으시던 분이 어쩐 일이십니까? 저이가 썩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지요?”
석문평을 알아본 호완평이 천연덕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문평을 대놓고 마영이라고 인정하는 그의 태도에, 사전에 한바탕 당한 게 있었던 두 사람은 심장이 동시에 내려앉고 말았다.
“아니. 이건 영의에게 선물 받은 물건인데. 좀 늙고 시들시들하긴 하지만 이래 봬도 연동이야.”
“아닌 것 같은데요. 제 부하 맞습니다. 사부님께 붙이려고 일부러 골라 뽑은 사람입니다. 제가 몰라볼 리 없지요.”
용감한 건지 간이 부은 건지, 호완평은 문평이 천마의 꼬리로 따라붙을 사람이라는 부분까지 천마의 면전에서 인정했다. 자백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정면 승부였다.
호완평의 만용이 어이없는지 천마의 입꼬리가 삐뚜름해졌다. 그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석문평의 허리에 팔을 얹으며 호완평을 돌아보았다.
“완평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감히 내게 꼬리를 붙였다고?”
천마는 포영의의 입을 다물게 했던 방법을 한 번 더 사용했다. 상대가 저지른 일 자체를 무시해 기를 꺾는 이와 같은 방식은, 그저 존재감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할 수 있는 절대자가 아니면 효용을 볼 수 없었으나 천마에겐 꽤나 유용했다. 암시와 언질만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 있으니 간단하기도 한 데다가, 직접적인 명령 없이도 기가 꺾인 상대에게 지속적인 패배감까지 안겨 줄 수 있으니 효과도 좋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방법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호완평은 천마가 눈감아 주고 넘어가 주는 것으로 입장상의 우위를 차지했던 부분을 곧이곧대로 눈앞에 드러내, 천마가 쳐놓은 덫을 교묘히 피해 갔다.
“예. 꼬리라면 꼬리가 맞습니다.”
호완평은 너무나도 쉽게 사실을 긍정했다.
“너도 참 끈질기다. 저번에 잘라 보낸 목으론 부족했나 보지? 부하들의 목으로 병풍을 만들 참이야?”
손끝으로 슬쩍 석문평의 목 언저리를 매만지며 천마가 속삭였다. 그 나른한 손놀림에 문평은 뼛속까지 소름이 끼쳤다. 애무하듯 그저 가볍게 매만지는 손길이지만, 손가락에 힘이 가해진다면 어떤 꼴이 날지는 불 보듯 훤했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 석문평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입술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필요하다면 병풍을 세워야지요. 구층탑인들 못 쌓겠습니까? 받아 주실 때까지 보낼 겁니다.”
“네가 아예 교도들의 씨를 말리려는 수작인 게지?”
“상관없습니다. 사부님께서 홑몸으로 돌아다니시는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그편이 낫겠네요.”
남의 위에 선 자가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말을 하면서도 호완평은 부끄러운 빛을 보이지 않았다. 온화하지만 강경한 눈빛에서 그의 굳건한 결심을 읽어 낸 천마가 마침내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 하자는 수작이냐. 네가 기어이 나를 꺾을 셈이더냐?”
“꺾으려는 수작도 이기려는 수작도 아닙니다. 오히려 무릎 꿇고 간청드리고자 합니다.”
천마의 노기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완평은 끝까지 꿋꿋했다.
“네. 말씀하셨던 대로 저 사람은 꼬리입니다. 꼬리가 분명히 맞습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불편하시라 붙인 꼬리는 절대로 아닙니다. 저 사람은 사부님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희 마음이 편하려고 붙인 사람입니다. 사부께서 어딜 가시든 그 발걸음을 막을 생각은 없습니다만, 최소한 어디에 계시는지는 알아야 하겠기에. 그래서 싫어하시는 걸 알면서도 굳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는 하지 않으셔도 좋으니 이 뜻을 거절치 말아 주십시오. 없는 사람인 양 무시를 하셔도 좋습니다. 결코, 사부께서 신경 쓰시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무슨 이유로 그게 그리도 궁금해? 내가 어디에 있는 줄 알면 대체 뭘 하려고?”
천마가 냉소적으로 물었다. ‘어쩌게? 혼자 나가 있을 때를 노려 암살이라도 하게?’라고도 들리는 심술궂은 질문이었지만, 호완평은 그 빈정거림을 못 알아들은 척 충직한 대답만을 했다.
“자식이 어버이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일에 이유가 따로 있겠습니까? 제 마음이 그러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호완평은 말을 잘했다. 능변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말을 진심이라고 믿게 하는 데에 소질이 있다는 소리다.
천마는 순후한 얼굴을 하고 우직한 소리만 지껄여 대는 호완평을 향해 냉랭히 미소 지었다. 곰인 줄 알고 키웠는데 여우가 따로 없다. 꼬박꼬박 한마디를 지지 않는 것도 모자라 명분까지 내세우다니. 한 번 쥐어박혔다고 제대로 된 항변 한마디 못 했던 포영의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모습 아닌가.
“우둔하던 녀석이 요설이 늘었구나. 영의보단 네가 수가 높아.”
낮게 웃은 천마가 가볍게 문평을 밀어냈다. 살짝 밀쳐져 천마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온 문평은 막무가내로 들어왔던 천마의 성기가 속을 긁으며 빠져나가는 느낌에 진저리를 쳤다.
천마는 젖어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탕을 나섰다. 조각처럼 늘씬하고 보기 좋은 몸에서 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그는 젖은 몸을 그대로 이끌고서 호완평의 앞에 섰다. 키가 비슷한 두 사람은 눈높이도 비슷하게 맞았다. 천마는 손가락으로 호완평의 턱을 받쳐 올려 시선을 맞추며, 싸늘히 물었다.
“달리 이유가 없다? 너는 네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느냐?”
내게 꼬리를 붙여 감시하려 한 일에 한 점의 사심도 없다. 그 말을 지금 나더러 믿으란 말이지?
직접 하는 말보다 언외언言外言이 더 긴 것은 천마의 버릇인 듯하다. 호완평은 천마가 캐묻는 것이 무엇인 줄 알면서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음에 걸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 올곧게 바라보는 시선은 맑고도 깊었다.
“사부께선 달리 이유가 있길 원하십니까? 정녕 그러시다면 뜻에 따르겠습니다. 바라신다면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드리지요.”
포영의가 했다면 당돌하게 들렸을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호완평이 하니 그 말은 변치 않는 충정의 맹세로만 들렸다. 천마 자신이라면 죽었다 깨나도 못할 소리이건만 호완평은 이런 말을 참 쉽게도 한다. 더 놀라운 것은 호완평이 이런 말을 대부분 진심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입에 발린 소리라면 귓등으로 넘기고 말았을 텐데, 그게 아니어서 문제가 심각했다.
요설이니 뭐니 운운하긴 했지만, 기실 호완평이 한 말의 반 이상이 거짓 없는 진심임을 이미 알고 있는 혁련상이다. 아마 나머지 반절을 차지하고 있는 사심 역시 천마 자신에게 해가 되는 마음은 아닐 것이다. 그걸 알고 있지만, 아니 알고 있기에 더욱 천마는 이놈의 제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섯 살 때 주워와 이제껏 자기 손으로 기른 놈인데, 왜 이렇게 이상한 놈으로 큰 것일까? 천마가 호완평을 키우면서 기대했던 바는 절대로 이런 게 아니었다.
“쓸모없는 놈.”
기회를 줘도 잡지 못하고, 속아 주려고 해도 속이지 않으니 짜증이 치솟는다. 기분이 상한 천마는 냉랭하게 말하며 호완평의 얼굴을 손등으로 쳐냈다. 가볍게 쳤다고는 하지만 감정을 담은 손길이다 보니 붉게 손자국이 남았다.
피하지도 않고 손찌검을 받아 낸 호완평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숙였다. 천마는 그런 호완평을 무시한 채로 욕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있는 대로 짜증을 내며 나가 버리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상해도 이만저만 상한 게 아닌 듯했다.
“닦을 것을 가져와라!”
천마가 소리를 지르자, 대기하고 있던 란란이 얼른 뛰어나와 긴 목면 천으로 천마를 감쌌다. 소홍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비는 천마의 머리를 닦고, 다른 시비는 몸을 숙여 천마의 발을 닦았다.
얼이 빠진 얼굴로 시비들의 부산스러운 시중을 지켜보고 있던 석문평은, 자신에게로 향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심결에 든 눈에 붉어진 뺨을 한 호완평의 모습이 들어왔다.
문평과 시선이 마주친 호완평은 단호한 눈짓을 했다. 얼른 천마를 따라붙으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아니, 또 왜?’
단지 호완평의 명을 이행하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몹쓸 날벼락을 맞았다. 석문평은 위기를 넘기자마자 득달같이 날아든 무리한 요구에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안 됩니다. 못 해요. 차라리 날 죽이십시오.
섣불리 입을 열어 천마의 주의를 끌 생각이 없었던 석문평은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호완평에게 감히 안 된다는 의사를 표현할 정도로 석문평의 결심은 확고했다.
“뭘 하는 건가. 어서 일어나지 않고?”
눈짓만으로는 말을 듣지 않으니 이번에는 전음이 들려왔다.
석문평은 귓전을 때리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입술을 깨물며 호완평을 바라보았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그도 전음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전음이 가능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의사전달 수단은 오로지 눈빛뿐이었다.
그는 새파란 눈빛으로 호완평의 눈을 직시하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호완평이 뭐라고 하든 절대로 안 된다는 뜻이었다.
“가장 어려운 고비는 지났으니 걱정하지 말게.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이니, 저분께서 또다시 자네에게 손을 대시는 일은 어지간하면 없을 걸세.”
석문평이 거듭하여 거절할 의사를 고수하자, 호완평이 회유책을 내세웠다. 하지만 석문평은 ‘어지간하면 없을’ 거라는 미약하기 그지없는 약속을 믿고 자신의 몸을 던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천마를 겪어 본 것은 한 시진도 못 될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천마가 얼마나 제멋대로인 인간인지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고작 심기를 거슬렸다는 이유만으로 휘하를 겁탈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의심은 많고 성격은 더러웠으며, 손버릇은 나빴다. 천마는 기꺼운 마음으로 섬길 수 있는 주인이 결코 아니었고, 석문평은 두 번 다시 그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자네를 협박하게 만들지 말게. 자네는 이미 극비인 정보 중에 한 가지를 알았어. 그 정보가 교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자네가 맡겨진 업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유출된 비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가 없네. 그건 서로에게 너무나 불행한 일이 될 거야. 그렇지 않은가?”
회유책이 먹히지 않자 이번엔 협박을 한다. 살인멸구殺人滅口. 강호에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사용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을 들먹인 호완평은 왼손을 가볍게 내려 허리춤에 매인 도에 손을 갖다 댔다.
스르릉.
엄지손가락을 호수반護手盤4)에 건 호완평이 가볍게 힘주어 밀자, 칼집에서 도가 뽑혀 올라왔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겨우 손가락 반 마디 정도의 짧은 도신이었으나, 도의 고수가 도신刀身을 드러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닌지라 석문평의 안색은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
호완평은 시정잡배가 아니다. 그는 도에 있어서 천하에 손꼽히는 고수다. 그런 사람이 말뿐인 협박을 위해 도신을 드러냈을 리 없다.
석문평은 호완평이 하는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닌 실제적인 위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에도 거절한다면 호완평은 서슴없이 발도해 그의 목을 벨 터였다. 교의 비밀을 알 생각도 없었고, 그걸 밖으로 누설할 마음도 없지만, 호완평이 사정을 봐줄 리 없었다.
호완평의 차가운 시선이 목 언저리를 스쳐 지나갔다. 단지 시선이 지나갔을 뿐이건만, 정말 무언가가 목을 훑고 간 것처럼 목덜미가 서늘했다.
‘제길. 이래서 윗사람들 알력 다툼에 끼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석문평의 바람과 상관없이 발목은 이미 잡히고 난 후였다. 막다른 상황으로 몰린 석문평은 조용히 이를 갈았다.
확 하니 분이 치솟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을 쥐고 있는 호완평의 앞에서 객기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석문평은 의복조차 걸치지 못한 알몸에다 맨손이었고, 설사 무기를 쥐고 있다 할지라도 호완평의 적수는 될 수 없었다.
문평은 자리에서 일어나 물에 젖은 나삼을 신경질적으로 벗어 던졌다. 천마에게 희롱당해 울긋불긋해진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거기에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들은 어차피 이것보다 더 심한 꼴도 봤다. 이제 와 부끄러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철벅거리며 탕을 나온 문평은 젖은 몸 위에 자신의 옷가지들을 아무렇게나 걸쳤다. 욕실 밖의 천마도 옷을 입고 있었지만, 시비들이 정성 들여 말린 몸 위에 깨끗하게 손질된 새 옷을 걸쳐 입은 터라 석문평의 초라하고 낭패한 모습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가해자는 저쪽이고 피해자는 이쪽인데, 어째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 왜 나는 이런 꼴을 당하고도 목숨의 위협을 받아야만 하는 거지? 빌어먹을 강자존의 율법. 염병할 사제 간 같으니라고!’
문평은 사실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 그가 겪은 기막힌 수모는 모두 석문평이 약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손가락 하나만 튕겨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천마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를 짓밟는 것이었다. 단 한 번 도를 휘두르는 것으로 죽일 수 있는 상대니까, 호완평이 그에게 자기 뜻을 강요하는 거다.
석문평이 건드리면 귀찮은 존재만 되었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다. 냉혹하지만 진실이 그랬다. 마교란, 그리고 강호란 원래가 그런 곳이다. 이곳에서 약하다는 것만큼 큰 죄는 없었다.
석문평은 발치로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욕실을 나섰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막 밖으로 나서려던 천마가, 뒤따라 붙는 석문평의 기척을 느끼고 그를 돌아보았다. 석문평은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숙였다. 수치심과 모욕감에 굳은 표정을 천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숙인 머리 위로 천마가 낮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못마땅한 시선이 욕실 안을 향하기도 했다. 그러나 천마의 반응은 그게 전부였다.
물처럼 고요히 서 있는 호완평에게서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린 천마는, 석문평의 존재를 무시하고 미련 없는 발걸음으로 침전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마지못해 따라나서는 석문평의 존재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석문평뿐만 아니라, 성큼성큼 크게 내딛는 걸음을 따라붙느라 종종걸음을 하는 시비들도 의식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는 여러 사람을 뒤에 거느리고서도 혼자 걷는 사람처럼 걸었다. 그야말로 유아독존唯我獨尊. 땅 위에 오로지 혼자 존재하고 있노라 믿는 사람다운 걸음걸이였다.
***
강호의 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종종 헷갈리곤 하지만, 사실 십만대산十萬大山에 있는 마교魔敎와 천산天山의 마교魔敎는 서로 간에 연계가 전혀 없는 완전히 다른 집단이다. 두 마교 사이에는, 십만대산은 중원 최남단인 광동성廣東省에 있고 천산은 최서단인 신강新疆에 있다는 것 이상의 깊은 차이가 존재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원래 마교라는 이름은 어떤 특정한 종교를 부르는 명칭이 아니다. 멀리는 한대의 천사도天師道5)부터 가까이는 명대의 홍교紅敎6)까지, 당대 관부에 반한다는 이유로 박해받는 종교들은 모두 다 마교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십만대산과 천산의 경우도 그러했다. 하지만 두 마교가 같은 이름으로 뭉뚱그려 불린다고 할지라도 진짜 이름은 따로 있었다.
십만대산을 차지하고 있으며, 황실과 관부로부터 마교라는 칭호를 받은 남쪽 집단의 진짜 이름은 백련교白蓮敎다. 남송 때 교조 모자원茅子元이 일으킨 백련교는 불교의 미륵 사상과 옛 마니교의 사상을 혼재해 만든 새로운 종파로 불을 숭상하기에 배화교拜火敎라고도 불렸다.
그들은 이름 그대로 순수한 종교 집단이었는데, 원대에만 하더라도 반원복송反元復宋의 기치를 내걸고 투쟁하는 우국지사들의 모임으로 명성이 높았다.
백련교는 짧은 연혁을 가진 종교였지만 불교적 구세 신앙인 미륵 신앙을 가진 종교로서의 상징성 덕에 급속도로 세를 넓힐 수 있었고, 원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진우량陳友諒이나 장사성張士誠과 같은 시대의 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왕조를 다툴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백련교의 힘을 지원받아 왕조를 세운 이가 바로 주원장朱元璋이다.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한때는 도적질까지 했던 위인이지만, 백련교의 지원을 받은 이후부터는 승승장구해 강남을 제패했고, 마침내는 명明의 개국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그를 황제로 만들어 준 백련교의 힘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자신이 그들의 힘을 빌려 왕조를 세웠기에, 또 다른 이가 나타나 자신과 같은 일을 행할 수도 있음을 경계했던 것이다.
주원장은 명나라의 주인이 백련교가 아니라 주씨 황조이길 원했다. 평생 자신을 따르며 나라를 일군 이선장李善長이나 남옥藍玉 같은 공신들까지 숙청했던 그는 토사구팽을 주저하는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백련교를 마교로 몰았고, 그들을 사정없이 숙청했다.
성세 중이던 백련교라고 할지라도 수십만 관군을 장악한 관부의 상대는 될 수 없었다. 그들은 떠밀리듯 내몰려 중원의 최남단까지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생긴 마교가 바로 광동성의 마교다. 하지만 그들을 마교라고 부르는 것은 관부와 일부 정파 무림인들뿐이었고, 그들 스스로는 절대 마교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명교明敎라고 불렀다. 진정한 밝음은 명 황실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있다는 뜻이었다.
하나 천산에 자리한 마교는 천 년이라는 유구한 세월을 자랑하고 있는 유서 깊은 집단이다. 교敎라는 이름이 붙은 단체답게 본래는 종교 집단이었는데, 백련교와 마찬가지로 당대 관부의 미움을 받아 마교로 낙인찍혀 천 년 전에 중원에서 쫓겨난 이후 줄곧 천산에 머물며 그 세를 유지해 나갔다.
마교라고 불린 역사가 워낙 오래된 탓인지, 그들은 스스로를 마교라고 부르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마교인들은 오히려 그 이름을 자랑스러워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마교라고 낙인찍혀 소외당하면서도 무려 천 년을 버텨왔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역사는 중원의 어느 왕조보다도 길었다.
천산 마교는 천축에서 발원한 인도교印度敎7)의 한 갈래인 인다라因陀羅 신앙에 근원을 두고 있다. 불교에서는 제석천帝釋天이라고도 불리는 인다라 신은, 수만의 인도교 신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신으로 비와 천둥과 뇌전을 다스린다.
초기의 마교는 교주를 이 인다라 신의 화신체化身體라 여기고 숭배했다. 말하자면 포달랍궁과 비슷한 종류의 화신체 신앙인 셈이다.
그러나 천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천산 마교는 점점 종교적 색채를 잃어 갔다. 교라는 이름은 여전히 남아 있고, 교내 직위의 명칭이나 오래된 옛 건물들의 이름에도 아직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오로지 그게 전부였다.
그들에겐 더 이상 교리도 신앙도 존재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교도敎徒라고 칭하면서도 자신들이 무슨 신을 섬기는지 정확히 몰랐고, 원래대로라면 인다라 신의 화신체로 숭앙받았을 교주에게조차 등선을 할 거라는 둥 마선이 될 거라는 둥 얄팍한 소문이 따라다녔다.
그들에게 아직 종교적 색채가 남아 있었다면, 그런 소문은 결코 나지 못했을 터였다. 신의 화신체인 교주를 그 하위 격의 존재인 신선으로 격하시키다니. 누가 감히 그런 발상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천마의 등선예정설登仙豫定說은 교주의 신성화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교의 세속화에 대한 증거라고 볼 수 있었다. 말로는 교라고 하지만, 솔직히 지금의 마교는 종교 집단이 아니라 단순한 무력집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여기 한 명, 마교의 역사적 내력과는 상관없이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로 교주의 등선설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마교의 역사라든가 종교적 교리라든가 하는 심각한 사정 따윈 전혀 모르면서도 교주의 등선설에 격렬한 반감을 품고 있는 이 사람의 이름은 다름 아닌 석문평. 며칠 전부터 호위로 발령받아 교주의 지근거리를 경호하게 된 신입 마영이었다.
‘등선을 할 거라고? 저 사람이?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석문평은 코웃음을 치며 생각했다. 본래부터 천마에 대한 소문에 부정적이던 그였지만, 욕실에서의 일이 있고 난 이후로 더욱 상태가 심해졌다.
‘그 일’ 이후 문평은 천마에 대해 떠도는 모든 허황된 이야기들을 싫어하게 됐는데, 그중에서도 특히나 싫어하는 것이 천마가 등선을 하게 될 거라는 소문이다.
문평은 그 이야기를 그냥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혐오하고 있었다. 그 소문이 거의 혹세무민에 가까운 유언비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사 마선魔仙이라고 할지라도 신선은 신선일 텐데. 신선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아무나 막 되는 건가? 그저 무공수위가 조금 높다고 해서 다 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잖아. 신선은커녕 인간 되기도 아직 멀어 보이는데. 저런 사람에게 대체 뭘 바라는 거야?’
배운 게 짧아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 짧은 배움으로도 그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만약 천마가 진짜로 등선을 한다면, 세상엔 등선 못 할 인간이 없고 용 못 될 물고기가 없을 터였다. 문평은 그 점을 확고히 믿었다.
석문평이 이토록 굳은 확신을 하게 된 것은 지난 며칠간 눈으로 보고 확인한 게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욕실에서의 일이 평균점을 많이 깎아 먹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지만, 그런 사적인 감정을 차치하고라도 천마는 아니다.
천마는 결코 위대하지 않고, 존귀하지도 않다. 무섭도록 강하고 오만한 지배자이긴 하지만 그저 그뿐. 그는 인간을 넘어선 절대자가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인간다워서 곤란한 존재에 불과했다.
첫날. 천마는 정오가 넘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문평도 별생각이 없었다. 단신으로 사막을 넘는 강행군을 끝내고 막 돌아온 참이니 늦잠 정도는 잘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천마는 미시未時8)에 일어나 시비들이 차려 준 점심을 먹더니, 다시 잤다. 그리고는 유시酉時9)까지 깨지 않았다.
둘째 날. 천마는 토이기土耳其10)에서 들여왔다는 이국의 향을 피우고, 서역 상인들에게서 사들인 서책을 뒤적이는 것으로 온 하루를 다 보냈다.
가죽처럼 두꺼운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고 색색이 채색까지 한 이상한 서책이었는데, 궁금증이 인 문평이 슬쩍 곁눈질해 봤더니 죄다 사람의 내장이며 장기 따위를 정교하게 묘사한 것들이라 비위가 상했다.
고약한 취향이다. 세상엔 보기 좋고 아름다운 그림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왜 저런 것을 골라 보는 것일까? 잠시 의아해하던 석문평은 곧 무시무시한 가능성을 떠올리고는 몸을 떨었다. 그의 뇌리에 떠오른 이름은 다름 아닌 강시였다. 불과 몇백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교 최강의 무기로 손꼽혔다던 천고의 마물 강시. 다행히 만드는 기술이 실전되어 현세에는 존재하지 않는 마물이었다.
문평의 머릿속으로 마교에 입문하기 전 강호에서 들었던 온갖 험악한 소문들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하니 저 인간은 그 괴물들을 다시 만들려고 하는 건가?’
지나치게 불길한 가능성을 떠올리고 나니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어린아이를 잡아 뇌를 긁어모으고 처녀의 정혈을 갈취하는 일 따윈 진짜로 하고 싶지 않은데…….’
문평은 천마가 진짜로 그런 일을 시키면 어쩌나 가슴을 졸이며 천마가 책을 읽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셋째 날은 더 가관이었다. 보던 책도 재미가 없는지, 천마는 절반쯤 읽은 책을 집어치우고 란란과 예화를 불러들였다. 손녀뻘인 두 시비는 천마의 부름을 받고 방에 들어왔다가 각각 선물을 받았는데, 그녀들에게 천마가 선물이랍시고 준 물건은 무려 가슴과 젖꼭지를 고스란히 드러낸 여자들을 새겨 넣은 채색 면경面鏡이었다.
석문평이 보기엔 영락없는 성희롱인데 시비들은 매우 감격해서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녀들은 자진해서 천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춤과 노래를 선보였고, 천마는 날이 저물 때까지 꽃 같은 아가씨들의 가무를 즐기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 후로도 천마는 비슷비슷한 나날을 보냈다. 천마는 일하지 않았고 무공도 연마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운기조식도 하지 않았다. 온종일 침전 안에 틀어박혀 먹고 놀았고, 간혹가다 밖으로 나가더라도 침전에 딸린 정원을 산책할 뿐 뇌정전의 대문을 넘지 않았다. 더군다나 바깥나들이만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일까지도 안 해서, 호완평과 포영의가 결재라도 맡겠다고 서류를 싸 들고 침전으로 찾아올 정도였다.
석문평의 눈으로 보자면 한량도 이런 한량이 없었다. 신색이라도 노인답게 근엄했다면 여유로운 은거 생활이라 봐줄 수도 있었겠지만, 정작 보이는 것은 새파랗게 젊은 얼굴과 사내다운 건장한 몸을 한 남자가 빈둥빈둥 시간을 죽이는 광경이었다.
누구처럼 경지에 도달하지 못해 눈에 보이는 광경에 미혹될 수밖에 없는 석문평은, 천하제일인인 천마의 호위가 아니라 팔자 좋은 부잣집 도령을 지키는 경호 무사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기실 문평은 욕실에서의 일이 있은 직후만 하더라도 천마에 대한 동경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천마를 신인 양 숭배하는 마교에서 오래 지내며 자연스레 세뇌된 것도 있었고, 같은 무인의 입장에서 극에 이른 무인에게 품었던 오래된 존경심도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문평 같은 하급 무사에게 살아 있는 전설을 지근거리에서 살필 기회란 그리 흔치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내심 불만을 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천마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졌었다.
하나 막상 눈으로 보게 된 천마의 일상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얼마 남지 않았던 존경심마저 모래가 되어 사라질 정도였다. 이미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쩌면 저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살 수 있는 것일까. 석문평은 그 점이 정말로 궁금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정점에 도달해 더는 할 일이 없는 걸까? 아니면 사람으로서 이룰 수 있는 건 다 이루어서, 이제는 하고 싶은 것도 없는 건가?’
너무도 이해가 안 돼 심지어는 그런 생각마저 해봤지만, 탈속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천마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조차도 부질없이 느껴졌다.
“교주님. 예화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석문평의 귀에 어여쁜 예화 소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책을 읽고 있는 천마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문 쪽으로 붙어 서서, 하릴없이 딴생각에만 골몰하던 석문평은 그 소리를 듣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교주는 서역에서 온 서책에 코를 박은 채 건성으로 예화를 불러들였다. 문평은 예화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광경을 꼼짝 않고 지켜보았다.
“뭐지?”
천마가 물었다. 천마씩이나 되는 위치의 인물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가벼운 어투였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말투도 이상해.’
석문평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도 내심으로는 그렇게 투덜거렸다.
‘저 나이에, 저 지위에,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건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액면가와는 어울릴지 몰라도, 사실 저 양반 산수가 넘었잖아. 그런데 왜 저렇게 말투에 품위가 없는 거야? 하다못해 포영의도 저것보다는 위엄 있게 말하는데 말이야.’
“둘째 공자가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그 녀석이 벌써 돌아왔나?”
예화가 무슨 말을 하든 관심도 없던 천마가 둘째 공자라는 말에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살짝 무릎을 굽힌 예화는 단정한 어조로 천마의 질문에 답했다.
“예. 교주님. 조금 전 도착했습니다.”
“빨리도 다녀왔군. 그래. 어디에서 보자던?”
“취운정으로 모시겠답니다.”
천마의 잘생긴 얼굴에서 잠시 미소가 어렸다 사라졌다. 잘 웃는 편이긴 하지만 진심으로 웃는다는 느낌은 별로 없던 사람인데, 뜻밖에도 이번 웃음은 썩 진심처럼 보인다.
“안주를 챙겨라. 예화. 내가 바깥에서 가져왔던 행낭도 가져오고.”
“예. 교주님. 준비하겠습니다.”
천마의 명에 예화는 야무지게 대답했다. 야무진 대답만큼이나 준비도 빨라서, 유능한 그녀는 고작 일각 만에 필요한 준비를 모두 마치고 천마에게로 돌아왔다.
천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격식보다는 편안함을 즐기는 그는 오늘도 가벼운 경장 차림이었다. 방해되는 것이 귀찮아 머리채를 높게 올려 묶었고, 편하게 움직이기 위해 다리에 각반을 찼다. 본인은 편하기 위해서 한 차림인데, 옆에서 보자니 생김새만큼이나 젊디젊은 복장이라 기분이 묘했다.
그의 외양 어디에도 본래 나이를 짐작게 하는 구석이 없었다. 천마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영락없이 재기 발랄하고 용모가 준수한 청년쯤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 차림을 하고 천마는 밖을 나섰다. 석문평이 천마를 만난 후 처음으로 하는 바깥 외출이다. 뒤따라오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 독선적인 걸음걸이는 이번에도 여전했지만, 다행히 예화나 란란도 무공을 익히고 있어서 어렵지 않게 발걸음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천마와 두 시비, 그 뒤를 말없이 따르는 석문평.
네 사람은 마치 날듯이 빠른 걸음으로 교를 빠져나갔다. 천마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교의 외곽, 그중에서도 외벽을 끼고 도는 산중에 위치한 자그마한 정자였다.
‘취운정翠雲亭이라.’
교의 외곽을 순시하는 임무를 맡았었던 석문평은 그 장소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교를 둘러싸고 있는 외봉外峰 중의 하나인 운암봉雲巖峰 중턱에 위치한 그 자그마한 정자는, 발밑으로 천산산맥의 기이한 봉우리들과 푸른빛이 도는 구름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아늑하고 정취 있는 장소로, 문평도 평소에 마음에 들어 하던 곳이다. 하급 무사가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장소지만, 외진 곳인 데다 감시하는 눈도 없어 윗사람의 눈을 피해 동료들과 술판을 벌인 적도 몇 번 있었다.
사람이 늘 없는 곳이라 마음 놓고 벌인 짓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천마가 발걸음을 옮기는 걸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뜨끔해졌다. 아무 생각 없이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퍽이나 운이 좋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자신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을 때 천마가 들이닥쳤더라면, 그들의 목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내렸을 터였다. 한날한시에 죽기로 맹세한 의형제도 아닌데 그 꼴을 당하는 것은 사양이었다. 문평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서 오세요. 사부님. 이쪽입니다.”
석문평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높이 들어 취운정을 올려다보자 난간에 몸을 기댄 채 팔랑팔랑 손을 흔드는 웬 한량이 보였다.
입으로는 사부라고 부르면서도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사내는, 흐트러진 옷매무새에 헝클어진 머리를 한 괴악스러운 위인으로 말이 좋아 한량이지 한끝만 잘못 빠지면 파락호 취급을 받을 만한 행색이었다.
뒷짐을 진 채 산으로 올라오던 천마가 혀를 끌끌 차며 한량에게 말했다.
“꼴이 그게 뭐냐? 누가 보면 개방에서 굴러 나온 거지인 줄 알겠다.”
석문평의 생각은 천마와 약간 달랐다. 그가 보기에 사내의 모습은 개방보다는 하오문에 더 걸맞았다. 그중에서도 꼭 기둥서방 같았다.
“이렇게 잘생긴 거지가 어디 있습니까? 이 얼굴론 거지 노릇도 못 합니다, 사부님. 여인네들이 어디 가만히 내버려 두겠습니까?”
씨익.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한량이 대답했다. 본인도 제 꼴이 어떤지를 아는 모양이다.
그의 말대로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의 얼굴이 단정하긴 했다. 포영의처럼 절세의 미남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몹시 잘생긴 편이고, 끝이 살짝 처진 눈매가 유순해 보여 꼭 착한 강아지 같은 인상이다.
확실히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얼굴이긴 하지만 그런 이야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부 앞에서 말한다는 점이 어이없었다. 그냥 사부인 것도 아니고 무려 천마다. 천마를 눈앞에 두고 저런 소리를 서슴없이 하는 걸 보면, 저 사내는 옛이야기 속의 토끼처럼 간을 어디다 버려두고 다니는 게 분명했다.
“미친놈.”
천마는 기가 막힌 듯 한숨을 쉬며 낮게 중얼거렸다. 근데, 그러고는 그냥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석문평은 속으로 몹시 놀랐다. 천마가 제자의 건방진 태도를 그냥 보아 넘겼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영의와 호완평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똑똑히 지켜보았던 석문평은 그간 천마를 무척이나 모질고 엄한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안위를 걱정했다는 이유만으로 제자들을 들들 볶고, 그들의 눈앞에서 사내와 정사를 벌이려고 한 것도 모자라 마흔 넘은 제자의 뺨까지 서슴없이 후려치는 모습을 봤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에게 하는 천마의 행동은 그러한 예전의 행적과는 확연히 달랐다. 사내에게 천마는 제법 편하고 이해력이 많은 스승인 듯했다. 천마는 그다지 권위적으로 굴지도 않았다. 포영의나 호완평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내를, 마찬가지로 아무 일 없다는 듯 받아 주고 있으니 말이다.
사내는 끝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천마도 일어나란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돌로 만든 탁자 앞에 천마가 앉자, 예화가 허리에 끼고 왔던 대나무로 짠 바구니에서 안주를 꺼내 늘어놓았다. 바깥에서 먹을 안주라 그런지 국물이 있는 것보다는 마른 음식이 더 많았다.
“오면서 듣자니, 사부께서 열흘 만에 돌아오셨다고 하더군요. 처음엔 제가 뭘 잘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전 운남雲南까지 갔다가 오는데 거의 스무날이나 걸렸는데 사부는 아라사俄羅斯11)까지 다녀오셨으면서 열흘이라니요. 정말 제대로 다녀오신 것이 맞습니까?”
한쪽 팔은 탁자 위에 걸치고 다른 한쪽 손엔 스승보다 먼저 젓가락을 든 불량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사내는 대뜸 추궁부터 했다. 천마는 란란이 건네준 수건으로 느긋하게 손을 닦으면서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곳이 신강이니 운남보다야 아라사가 가까운 게 당연하지. 넌 내가 준 만국전도萬國全圖조차 제대로 안 읽어서 모르는 모양이다만.”
“만국전도요?”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사내가 되물었다. 그게 대체 뭐 하는 물건인데요? 진심으로 되묻는 사내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천진해서, 석문평이 천마라고 해도 진짜로 화가 나진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전에 준 지도책 말이다. 세계 만국의 지형을 수록해 놓은. ……기억하지 못하는 거냐? 설마 또 팔아먹은 것은 아니겠지?”
“아아. 그거요? 아니에요.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고는 있는데 읽어 보지는 못했습니다. 나전어羅甸語12)로 씌어 있는데 어떻게 읽습니까? 전 거기서 중원도 못 찾겠던데요?”
천마가 직설적으로 짚어 주고 나서야 기억이 난 듯 사내는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거 봐도 몰랐다고, 너무나도 해맑게 이야기하는 그 모습에 천마는 다시금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다소 못마땅한 시선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건 자랑이 아니지. 배워야 인간이다.”
“전 제가 배우고 싶은 것만 배우기도 벅차요, 사부. 듣자 하니 나전어는 서역에서도 사어死語라던데요.”
“아직 쓰는 자가 있고 읽는 자가 있는데 그게 어떻게 사어냐. 더군다나 서역에선 중요한 학문적 기록은 모두 나전어로 한다. 네가 흥미를 느끼고 있는 서역산학西域算學책도 마찬가지야. 그 책도 나전어를 모르면 해석이 안 돼.”
“괜찮아요. 산학책은 기호만 알면 읽을 수 있어요.”
“……그래서? 끝까지 안 배우겠다고??”
“사부님은 왜 저한테만 그런 걸 강요하세요? 대사형에게도 삼사제에게도 그런 강요는 안 하시잖아요? 사매한테는 아예 입도 안 떼시면서.”
“막내에겐 그런 걸 이해할 머리가 없어. 영의는 그럴 시간이 없고, 완평은 그럴 필요가 없다.”
천마는 확고히 단언했다. 그 말을 들은 사내는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좁혔다. 나도 그럴 필요 없는데, 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모양이었다.
천마의 둘째 제자라. 그렇다면 사내는 참사검僭詐劍 곽진무郭鎭撫다. 검의 고수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산학과 기관진학에 능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곽진무는 성정이 매우 괴팍해서, ‘단번에 죽고 싶으면 제백도를 건드리고, 괴롭게 죽고 싶다면 소비를 건드려라. 환요편의 적이 되면 평생토록 후회를 친구 삼겠지만, 참사검이 적이라면 후회조차 친구가 되어 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험악한 조언이 강호상에 떠돌기도 했다.
겉보기로는 스물 여덟아홉, 많아 봐야 서른 안팎으로 보이지만 실은 마흔이 다 됐다. 서로 혈연이 아니니 핏줄의 힘은 아닌 것 같고, 천마의 무공 중엔 주안공駐顔功의 기능을 하는 무공도 있는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제가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됐습니까? 사 오셨어요? 상인들 말로는 아라사에서도 귀한 물건이라 구하기 힘들 거라고 하던데요. 혹시 허탕 치신 건 아니시죠?”
화제를 돌리고 싶은 듯 곽진무는 딴청을 부렸다. 산학의 대가라고 하기에 차갑고 명민한 사람을 상상했었는데, 실제로 본 곽진무는 영 뚱딴지같은 성격이라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괴팍하다기보다는 어린아이 같은 성격으로 보이고, 그러면서도 제법 대담해 천마 앞에서도 기죽는 기색이 없었다.
제법 건방진 태도였지만 천마는 그런 곽진무를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깍듯한 다른 제자들에게보다 훨씬 너그러운 게, 곽진무의 그런 성격을 마음에 들어 하는 듯도 보였다.
“세상 어디에 사부가 먼저 밑천을 드러내는 법이 있다던? 너야말로 약속했던 것을 내놓아라. 약속했던 걸 가져오지 못했다면, 나도 네게 줄 게 없다.”
천마의 말에 의기양양, 곽진무는 눈을 반짝였다.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약속은 꼭 지킵니다. 사부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어련할까요. 오가는 길이 멀어 고생이었지 정작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다행히 전에 봐뒀던 곳에 고스란히 있더군요. 그 녀석들이 숨긴다고 숨겨 두고는 장소를 잊었던가 봐요. 덕분에 저만 횡재했죠.”
그는 주절주절 자랑을 늘어놓으며 거창한 손동작으로 품 안에서 술병을 꺼내 들었다. 그가 꺼내든 술병은 아무런 무늬도 없이 평범한 백자 술병이었는데, 주둥이를 밀랍으로 단단히 봉해 놓은 것을 보니 술 중에서도 아주 귀한 술을 담은 모양이었다.
“이게 바로 운남 애뇌산哀牢山의 원숭이가 담근 진품 후아주입니다. 제가 눈독 들였던 게 무려 5년 전부터니까, 최소 6~7년은 된 귀한 술이죠.”
놀랍게도 곽진무가 꺼낸 것은 말로만 듣던 후아주였다. 단도로 주둥이를 봉했던 밀랍을 뜯고 마개를 열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향기로운 냄새가 사방에 퍼졌다. 탁자 위에 귀한 후아주를 당당히 올려놓은 곽진무가 천마를 바라보았다.
“란란. 진무에게 행낭을 줘라.”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천마가 란란에게 명령을 내렸다.
란란은 천마를 대신해 들고 왔던 행낭을 곱게 풀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곽진무는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탁자 위에 올려 둔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천마의 방에 있는 똑딱 기물을 축소해 놓은 것처럼 보이는 작은 똑딱 기물이 눈에 들어왔다. 가죽으로 장정 된 서역책 두 권과 사람 몸에 날개가 달린 요수의 모습을 새겨 넣은 네모난 상자가 하나.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둘둘 감싼 가죽 더미가 하나.
문평의 눈으로 보기엔 귀한 후아주와 바꾸기엔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들이었지만, 곽진무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그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뺨까지 붉힌 채 천마가 가져온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탁상시계라는 거군요.”
탁자 위의 물건들을 찬찬히 살피던 곽진무가 작은 똑딱 기물을 바라보더니 돌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는 마치 귀한 구슬을 만지듯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것을 손에 들더니, 사랑에 빠진 것처럼 열렬한 눈빛으로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시계時計라. 처음 본 이후 늘 용도를 궁금해하던 물건의 이름을 알게 된 석문평은 입속으로 남몰래 그 이름을 굴렸다.
“이렇게 작은 시계는 생전 처음 봅니다. 천하의 산물이 집산한다는 북경에서도 사부님 방에 있는 것만 한 괘종시계밖에 본 적이 없었는데요. 이건 정말 작네요. 작은 만큼 더 정교해요.”
“비싸기도 더 비싸지. 고작 그 물건 하나에 손톱만 한 진주가 다섯 개나 들어갔다.”
“하지만 이건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 물건이에요, 사부님. 서역의 기술력이 총합 된 최신 발명품 아닙니까.”
“알아. 아니까 그 돈을 주고도 사 왔지. 그보다 더 비싼 건 그 옆에 있는 공구들이었다. 고작해야 철로 만든 도구 몇 개일 뿐인데 진주 세 알을 요구하더군. 날도둑 같은 놈들. 신경질이 나서 머리통을 깨 놓으려다 간신히 참았다.”
천마의 말을 듣고 번쩍 고개를 든 곽진무가 서둘러 가죽 더미를 헤쳤다. 성급한 손놀림에 헤쳐진 더미 안을 보니, 가죽으로 만든 각각의 주머니 안에 자그마한 철기구들이 들어 있는 게 보였다.
일반적인 대장장이의 솜씨로는 제련이 불가능할 정도로 작고 날렵하게 다듬어진 기구들이지만, 그 점을 제외하고 나면 어떤 용도가 있는지 잘 알 수가 없는 물건들이다.
그 물건들을 내려다보는 곽진무의 표정에는 뿌듯한 희열이 가득했다. 오왕이 간장干將을 얻었을 때도 저런 표정은 짓지 않았을 성싶었다. 갓 출산한 어미가 자식에게나 보일 법한 표정이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시다니요. 이 기구들은 정말로 가지고 싶었던 것들입니다. 시계라는 물건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섬세해서, 전문적인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는 온전히 뜯어보는 게 불가능하거든요. 사부님 덕분에 이 물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수지 않고 잘 뜯어볼게요.”
감격에 찬 태도로 곽진무가 말했다.
‘헉? 뭔 소리야?’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석문평은 손톱만 한 진주를 다섯 알이나 주고 사 온, 그것도 사부의 선물씩이나 되는 귀한 물건을 뜯어보겠노라 망언한 곽진무의 실수에 내심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잘못하면 눈앞에서 둘째 공자의 머리가 깨져 나가는 꼴을 보겠구나 싶은 생각에, 괜히 제 심장이 쫄깃해진다.
“무작정 시계부터 뜯지 말고 그 옆에 있는 장난감부터 한번 뜯어봐라. 그건 뚜껑을 열면 자동으로 음률이 흐르는 물건이라는데, 움직이는 원리가 시계와 흡사하다니 도움이 될 거다.”
그러나 천마는 이번에도 석문평의 예상을 배신했다. 그가 아는 천마답지 않게 너그럽고 자상했다. 말도 못 하게 비싼 물건을 망가트려 보라고 던져 주질 않나, 그 이전에 연습해 보라고 다른 기물까지 구해다 주질 않나. 제자가 아니라 애첩이라도 대하는 꼴이다.
곽진무가 희희낙락하며 행낭 안에 물건들을 집어넣었다. 그 얼굴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천마는 가볍게 손을 저어 허공섭물을 시전했다. 천마의 손아귀에 후아주가 담긴 술병이 빨려 들어갔다.
천마는 손수 술병을 기울여 빈 잔에 후아주를 채웠다. 아까보다 한층 더 짙은, 그야말로 천상의 그것과도 같은 향기로운 주향이 다시금 폐부를 적셨다.
‘저게 진짜 후아주라 이거지?’
술을 좋아하는 석문평은 천마의 손아귀에 든 술잔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애주가를 자처하는 사람치고 후아주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원숭이들이 스스로 즐기기 위해 담근 술이라는 후아주.
공청석유나 만년화리 같은 것들처럼, 후아주는 강호의 유명한 전설 중 하나였다. 자연이 만들고, 자연으로 묵힌 그 술은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술보다도 깊고 향기로운 맛을 자랑한다고 했다. 누구나 꿈에 그리지만 실제로 마셔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술. 그게 바로 문평이 아는 후아주의 정체다.
믿을 수 없게도 바로 그 후아주가 문평의 눈앞에 있었다. 한 모금을 마시면 10년이 젊어지고, 두 모금 마시면 불로장생한다는 속설은 비록 헛말이라고 할지라도 그 맛이 지극히 뛰어나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했다. 그저 향기만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황홀경에 빠져들 정도였다.
저도 모르게 고정된 석문평의 눈앞에서, 천마는 여유 만만한 태도로 술잔을 비웠다. 우아한 자태로 향기를 맡고, 입 안에서 천천히 굴려 맛을 느끼는 것을 보니 술이 아니라 차라도 즐기는 것 같은 모양새다.
천마는 본인이 준비하라고 명했으면서도 안주에는 젓가락 하나도 대지 않았는데, 석문평은 그런 천마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후아주 같은 명주를 마시면서 안주 따위의 잡맛으로 입을 더럽힐 수는 없는 일이다. 천하의 천마조차도 구할 수 있을 때야 간신히 맛볼 수 있는 술일 텐데, 그런 술을 있는 그대로 즐기지 않는 것은 자연이 만든 걸작을 모독하는 짓이나 다름없다.
쳐다보지 않으려고 해도 시선이 가고, 참으려고 해도 침이 고였다. 후아주라고 하지 않나, 후아주!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라도 마시고 싶어 할 전설상의 명주名酒.
천마의 뒤를 따라다니느라 그 좋아하는 술을 거의 끊다시피 하고 살았던 석문평에게 후아주의 매혹적인 향은, 그야말로 악마의 유혹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강렬한 유혹이었다.
꿀꺽.
후아주의 짙은 향기에 매료되어 자기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던 석문평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깨닫고 몸을 굳혔다. 목 안으로 침을 넘기는 소리는 작디작았지만, 불행히도 이 자리에서 그 정도의 소리도 못 들었을 만한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호기심 많은 곽진무가 바로 눈을 들어 석문평을 바라보았다. 희게 질린 석문평이 애써 시선을 피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곽진무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를 살펴보더니, 웃는 낯으로 고개를 돌려 천마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줄곧 신경이 쓰였는데 말입니다……. 사부님. 저 사람은 대체 뭡니까? 뭐 하는 사람이길래 사부님을 따라온 거죠?”
도무지 돌려 말하는 법이 없는 곽진무는 아예 대놓고 문평의 정체를 확인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질문을 들은 것처럼 천마는 말없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완평이 놈이 저지른 짓이다. 내게 묻지 마라.”
귀찮은 듯 툭 던지는 어투는 얼음장처럼 서늘했다. 기껏 좋던 기분을 잡쳐 버린 듯, 그의 말투는 곽진무를 만난 후 처음으로 냉담하게 가라앉았다.
“대사형이요?”
그의 대답을 들은 곽진무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곽진무는 새삼스레 흥미가 생기기라도 한 것인지 상체까지 앞으로 기울인 채 열렬한 시선으로 천마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사형이 어쩐 일로 그런 기특한 짓을 했답니까? 전 그 사람에게 그런 주변머리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요.”
“뭐? 주변머리가 있어?”
곽진무의 말을 들은 천마는 퉁명스러운 태도로 그를 비웃었다.
“그놈에게 주변머리 따위가 어디에 있겠느냐. 놈에게 그런 게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오늘날 마교가 이 꼴이 되지는 않았겠지. 언제까지나 스승 꽁무니에만 붙어 다니는 놈이다. 자기 손으로 제 밥을 떠먹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녀석인데, 그런 놈에게 뭘 바라느냐?”
천마는 신랄하게 말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어째 원한조차 느껴지는 어투였다.
“그래도 대사형이 사부님께는 가장 지극하잖습니까. 효자도 그런 효자가 없죠. 게다가 자상하기는 또 얼마나 자상합니까? 이번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보세요. 지금껏 저희 중 누가 사부님의 침실 사정까지 돌봐 드린 적 있습니까? 여인인 막내조차 미처 신경을 못 써 드린 일을 세심히 돌본 이가 바로 대사형입니다. 그 깊은 정성을 왜 몰라주시는 겁니까?”
뭘 모르는 곽진무가 사형을 두둔하겠답시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 말을 들은 천마가 다시 코웃음을 쳤다.
“대체 무슨 착각을 하는 거냐? 넌 완평이 사부에게 남첩을 바칠 만한 주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꿈 깨라. 저놈은 남첩이 아니라 미행자다. 엉덩이에 붙은 꼬리란 말이다.”
천마의 목소리가 한층 더 싸늘해졌다. 천마의 말에 자신이 여태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곽진무는 미간을 접었다. 그는 의아한 듯 ‘꼬리?’라고 되뇌더니, 석문평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설마 사형, 아직도 포기를 안 한 건가요? 저번에 비슷한 임무를 맡았던 자가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요.”
곽진무는 석문평도 알지만, 굳이 천마에게 상기시키고 싶지는 않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곽진무의 질문에 천마는 시린 냉소를 머금었다.
“그랬었지. 목을 잘라서 돌려보냈었다. 그랬더니 또 보내더구나.”
“어쩐 일로 그냥 두셨어요?”
“인골로 탑을 쌓는 한이 있어도 계속 보내겠다기에. 교주가 되어서 교도를 몰살시킬 수는 없는 일 아니냐.”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형께는 너그러우시네요. 언제나 결국은 져주시잖아요.”
“뭐?”
“아니. 사형도 머리를 썼다고요. 말로만 그랬지 진짜로 인골 탑 쌓을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죠. 그러니 일부러 저런 자를 골라 보냈겠죠.
딱 보니까 알겠던데요. 완전히 사부님 취향 아닙니까? 다리 길고, 마른 근육에 탄탄한 체격. 게다가 장신. 정조는 위험할지 몰라도 목숨이 위험할 일은 없겠죠. 사부님은 본래 여인은 죽이셔도 취향의 남자는 안 죽이시는 분 아닙니까.”
히죽. 곽진무가 실없이 웃었다. 딴에는 격의 없이 하는 농담인 모양이었으나 그 말을 들은 석문평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정조는 위험해도’라는, 그로서는 도무지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천마는 정말로 남색가였단 말인가? 제자가 뻔뻔하게 저런 말을 할 정도로?’
자신의 몸으로 직접 당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르게 현실도피를 하고 있었던 석문평은, 바로 코앞에 드러난 진실에 그만 머리가 아득해졌다.
천마가 단순히 남색가이기만 하다면 그나마 상관이 없겠으나, 하필이면 자신과 같은 사내가 취향인 남색가란다. 거기다가 호완평은, 그 빌어먹고 염병할 놈의 자식은 그 사실을 뻔히 알고서도 자신을 마영으로 보낸 거란다.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나는 진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거 대체 뭐 하자는 소리냐? 그러니까, 호완평은 다 알고 있었다고? 다 알면서도 나더러 겸사겸사 미행도 하고 몸도 바치고 그러라고 여기에 보냈단 말이지?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치가 떨리는 ‘그일’이 우연히 재수가 없어 일어난 게 아니라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다고?’
어이없었다. 어이없고 화가 나서 눈물이 다 날 것 같다.
뜻하지 않은 벽력탄에 석문평은 속이 끓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곽진무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계속했다. 여전히 천진한 태도로 능글능글, 스승이 아니라 친우라도 대하는 듯 거침없는 말투가 맹랑했다.
“전엔 왜, 그런 일도 있었잖아요. 감히 사부님인 줄도 모르고 습격했던 탑리목분지의 마적 떼들 말입니다. 혈풍단인지 적풍단인지 하던 것들. 그때 그놈들이 타고 왔던 말까지 죄다 잡아 죽이셨으면서 정작 대장이었던 자는 안 죽이셨죠? 생긴 게 너무나 사부님 취향대로라서요.
대사형이 그래 봬도 응용력은 있나 봐요. 그때 일을 기억하고 이렇게 써먹은 걸 보면. 아니. 어쩌면 이건 영의가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걔가 원래 잔머리를 좀 잘 쓰잖아요?”
“따지고 보면 너도 내 취향이긴 하지. 오호라. 네가 그래서 이리도 간이 부은 거로구나. 내 손에 죽을 일은 절대로 없으니까 안심이 돼서 말이지?”
곽진무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놀리듯이 말하자, 천마는 부끄러움도 없이 오만한 태도로 그 말을 받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석문평은 현기증이 났다. 사제 간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농도 짙은 그들의 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설상가상 격으로 진행됐다. 전까지만 해도 격의 없는, 사이가 좀 지나치게 좋은 사제 간으로 보였던 그들이지만 지금은 그냥 콩가루 같았다.
세상에. 사부의 성생활을 면전에서 놀림감으로 삼는 제자도 모자라, 그에 응수해 너도 한번 당해 보고 싶다는 뜻이냐고 으르렁대는 사부라니. 이 얼마나 패륜무도한가.
‘……아니. 지금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니지.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 하는 거잖아. 둘째 공자의 말대로라면 언제고 예전의 일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이야긴데, 이걸 대체 어떻게 하냐고.’
석문평은 어이없는 광경에 잠시 정신을 팔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 제 코가 석 자인데 누굴 걱정하겠는가.
사제 간의 대화가 콩가루건, 보이는 것 이상으로 패륜이 무쌍해 서로 붙어먹는 지경이건 간에 그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그가 신경 써야 할 진짜 문제는 바로 자신이다. 본인만 몰랐을 뿐, 알고 보니 반은 공물 삼아 보내진 문평 그 자신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을 것이다. 이름 모를 마적 대장에 대한 곽진무의 언급은, 그렇지 않아도 걱정스럽던 석문평의 마음에 쐐기가 되어 박혔다. 곽진무는 후일담을 그냥 생략하고 말았지만, 나름의 경험이 있는 석문평은 그 불쌍한 마적 대장이 어떤 꼴을 당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고 하지만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었을 것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그렇게 큰 걸로, 크다 못해 거의 말이나 다름이 없던 그런 걸로 쑤셔 넣어지다니.’
추삽질도 없이, 전부도 아니고 그저 끄트머리 정도만 삽입당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사흘 동안 엉덩이가 아팠던 석문평은 마적 대장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죽어도 그런 꼴을 또 당할 순 없어. 한 번은 몰라서 당했다지만, 두 번은 절대로 안 되지.’
조용한 결의가 석문평의 눈동자 안에서 빛났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자기 자신이 더욱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윗사람의 형편대로 이용당하다가 쓸모를 다해 버려지는 소모품 따윈 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밥을 먹기 위해 칼을 들고, 몸값을 높이기 위해 무공을 배웠던 인간이다. 그는 무인이 아니라 차라리 낭인이었고, 마교에 투신한 것도 그저 살기 위해서였지 이곳에 영원히 충성하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에게는 목숨을 부지하는 것 자체가 명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