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장
“어이, 어서 와. 이쪽이야. 문평聞評.”
시끌시끌. 떠들썩한 잔치판의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술자리에 들어와 동료들을 찾고 있던 문평은, 자기보다 눈이 밝은 친우의 부름에 빙그레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벌써 한 잔씩들 했군그래?”
자리에서 일어서 손까지 휘저은 친우를 목표 삼아 다가간 자리에는 마찬가지로 익숙한 얼굴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불콰하게 취기가 오른 낯빛들을 보니 겨우 한 잔 정도만 걸친 게 아닌 모양이다.
“아무렴. 백화주가 앞에 있는데 자네를 기다릴까. 샘내지 말고 한잔해. 술은 아직 많이 남았어.”
호쾌하게 웃으며 내미는 잔을 받았더니 콸콸콸, 쏟을 정도로 술을 들이붓는다. 친우의 말마따나 한 병에 무려 은자 두 냥이나 하는 비싸디비싼 백화주이건만 도무지 아끼는 기색이 없었다. 평상시라면 턱도 없는 일이었으나 오늘만은 달랐다. 오늘은 평소처럼 술값을 각자의 주머니에서 추렴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흥취가 꽤나 거나하군. 재미들 있었나 보지?”
두엇씩 앉을 수 있는 긴 의자에서 엉덩이들을 추슬러 만들어 주는 자리에 끼어 앉으며 문평이 되물었다. 그 물음의 어디가 그리 우스운 것인지 둘러앉은 친우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렴. 재미있다마다. 마룡쟁패魔龍爭霸가 어디 날이면 날마다 있는 행사라던가? 자네가 못 봐서 유감이야. 문평. 눈뜬장님이 개안하는 기분이었다니까.”
둘러앉은 무리 중 가장 연장자인 악형대가 무릎까지 치며 감탄하는 어조로 말했다. 같은 참혼대斬魂隊의 조장 중에서도 가장 연장자인 악형대岳亨臺는 문평과는 무려 십여 년 이상 차이가 나는 연배로, 문평이 꼬박꼬박 형으로 공대하는 인물이다.
본래는 과묵한 편으로 감정을 크게 드러내는 사람이 아닌데, 저렇게 대놓고 감탄하는 걸 보니 술이 너무 과했거나 마룡쟁패가 그만큼 큰 구경거리였거나 둘 중 하나이지 싶었다.
“형대 형님 말씀대로야. 무인으로 태어나서 그런 구경 못 하는 것도 일생의 한이지. 자네는 어쩌면 그렇게 재수가 없나? 하필이면 이런 날 경비조에 투입되다니, 자네도 자네 조원들도 하나같이 재수에 옴 붙었군그래.”
맞는 말이라고, 옆에서 추임새를 넣던 최가가 맞장구를 쳐 왔다. 얼핏 들어서는 시비가 아닌가 착각할 만큼 과격한 언사였으나, 열이 오른 눈이 흥분으로 인해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면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아닌 게 분명했다.
‘취했군. 이 자식.’
악형대보다 더욱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 최위명催衛名의 몰골을 본 문평은 정신이 간당간당한 그의 상태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최위명은 본래도 말이 거친 데다, 취하면 더욱 입담이 거칠어지는 주사가 있었다. 자칫하면 싸움을 유발할 수도 있는 곤란한 술버릇이지만, 이를 잘 알고 있는 문평은 쓴웃음만 지을 뿐 대거리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화내 봤자 소용이 없다. 내일 아침이면 자신이 한 말 따윈 까맣게 잊을 인사를 붙들고는 뭘 해도 헛일일 뿐이다.
문평은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한입에 술잔을 털어 넣었다. 달큰한 백화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면서 그럴듯한 향기를 남겼다. 확실히 비싼 술이 다르긴 다르다. 늘 먹던 죽엽청이나 싸구려 백주와는 달리 백화주의 뒷맛에는 어딘지 모르게 고아한 아취가 있었다.
그는 입 안에 남은 향긋한 맛에 입맛을 다시며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재촉으로 받아들였던지 최가가 다시 한번 술을 따랐다.
“팍팍 마셔. 팍팍. 이제 남은 재미라곤 술밖에 없으니 그거라도 제대로 즐겨야 하지 않겠나.”
술을 따라주는 건 좋은데, 하지 않아도 좋을 말까지 뒤따르는 게 거슬렸다. 그래도 문평은 그냥 술에만 집중했다. 험하게 말하긴 했지만 최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외당을 경비하느라 제대로 된 볼거리는 다 놓친 마당인데 모처럼 내려진 좋은 술까지 놓칠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악 형, 그게 사실입니까? 이번 마룡쟁패는 승부가 나지 않았다면서요?”
다시 한번 입 안에 고이는 향기를 음미하며 뱃속의 주충을 다스린 문평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들며 질문을 던졌다.
원래는 경비 업무를 마치고 들어오면서부터 궁금하던 이야기였는데, 요란한 환영 인사를 겪는 통에 잊고 있다가 이제야 떠올랐다.
문평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악형대가 반짝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말이 많았던 터라 불감청不敢請이 고소원固所願인 터다. 다른 친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안 묻고 그냥 넘어갔으면 섭섭해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 맞아. 이번 마룡쟁패는 승부가 나지 않았지. 덕분에 마중사기魔中四器 네 분 중 어느 분도 마룡패를 가지지 못했어. 역사상 유례가 없던 초유의 사태라더군. 장로님들도 아연해하시는 눈치더군.”
악형대뿐만 아니라 모두가 긍정하는 것을 보니 바깥에서 들었던 소문은 사실인 모양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문평은 미심쩍은 얼굴을 하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정말 우위를 보인 분이 아무도 없었단 말입니까? 모두 다 같은 교주님의 제자라고 할지라도 자질이 다르고 배운 연혁이 다른데, 그 대결들이 다 무승부로 끝났다고요?”
외곽을 돌면서도 내전에서 벌어지는 대전의 소식은 귀에 들어왔다. 다른 일도 아니고, 무려 마룡쟁패의 일인데 그 결과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리 없다. 하지만 자기 눈으로 본 게 없었던 석문평은 그 소문을 선뜻 믿지 못했다.
못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가 바로 마룡쟁패다.
마중사기라고 일컬어지는 교주의 네 제자는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그 중요한 기회를 그냥 날려버렸다니 그걸 어떻게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겠냔 말이다.
차라리 치열하게 싸우다가 네 명 다 동귀어진했다고 하면 그게 더 믿을 만했다.
그가 알기로 선대에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한다. 오로지 강자존의 율법을 존중하는 마교에서 그 정도 일 따위야 비일비재했다.
“자네가 믿지 못해도 어쩔 수 없네. 사실이 그런 걸 어찌하겠나. 무려 네 번이나 비무를 펼쳤는데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어. 박빙이 될 거라곤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박빙일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똥줄 꽤나 탔을 거야, 장로원 양반들. 미래를 내다보고 각자 선을 댄 후계들이 있었을 터인데, 정작 마룡패는 누구도 가지지 못했으니 앞날이 묘연하지 않은가. 모르긴 몰라도 지금 그네들 눈앞이 캄캄할걸.”
마룡쟁패魔龍爭霸는 마교에서 내려오는 유구한 행사로 교의 후계자 자리를 상징하는 마룡패를 손에 넣기 위해 서로 목숨을 걸고 벌이는 비무대전을 일컫는 말이다.
향후 교敎의 앞날을 좌우할 대세가 정해지는 일인 데다가, 당대의 후계자감으로 손꼽히는 교주의 네 제자 모두가 문무겸전을 갖춘 빼어난 역량의 기재들이라 대전의 결과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사람들은 이번 대전으로 말미암아 마중사기魔中四器 중 누가 가장 강한 자인지 알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아마 장로들도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아니, 누가 후계자가 되든 별 상관이 없는 아랫것들보다, 내세워야 할 입장이라는 게 있는 장로들 쪽이 결과를 바라는 마음은 더욱 컸을 것이다.
“한데 그러고도 네 분은 다 무사하시답니까? 크게 다친 분은 없으셨나요?”
“특별히 크게 손해를 본 사람이 있었다면 결과가 판가름 났겠지. 하지만 그런 분은 안 계셨다네.”
문평은 그 말을 듣고 의혹이 더욱 커지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몸을 사려가며 비무 했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요.”
“설마 그러기야 했겠나. 일상적인 비무도 아니고 마룡패의 주인을 가리는 자리인데.”
문평의 떨떠름한 중얼거림을 들은 악형대는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런 악형대의 주장을 반박하는 사람이 있었다. 소란스러운 주위의 분위기와는 상관없다는 듯 홀로 차분히 앉아 술잔을 비우던 제사조장 임학臨鶴이었다.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이번 쟁패는 다른 때와 달리 변수가 있었으니까요.”
석문평보다 무려 네 살이나 어린 임학은 하얀 얼굴에 유달리 깊은 눈매를 가진 자로 지략과 재치가 매우 뛰어난 사내다. 무공 실력은 참혼대의 조장 중 가장 뒤지는 편이지만 작전을 수행하는 데는 탁월한 성과를 보여서, 고작 스물아홉밖에 안 되는 젊은 나이로 조장 자리를 꿰찼다.
임학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다른 조장들은, 그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는 이야기를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들어 손해가 난 적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마중사기 네 분께서 사기 비무를 하셨다고?!”
……아니. 한 명, 그의 말을 방해하는 인물이 있었다. 술이 머리끝까지 올라 사지 분간도 못 하는 최위명이다.
술김에 목소리까지 커진 최위명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떠들썩한 주변에서 그들을 못마땅하게 돌아보았다. 지나치게 큰 목소리도 목소리지만 말의 내용도 문제였다. 말을 해도 그렇지, 하필이면 사기 비무라니. 그 말은 감히 차기 교주가 되실지도 모르는 분들을 향해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냥 자.”
문평은 최위명의 뒤통수를 붙잡아 탁자로 엎으며 낮게 속삭였다.
“이거 놔, 왜 이래!”
위명은 아등바등 저항했지만, 문평은 꿋꿋하게 팔에 힘을 주고 버텼다. 한동안 실랑이가 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곧 지쳤는지 위명은 발버둥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자는 건지 기절한 건지 분간이 안 가는 태도였으나, 문평은 위명의 머리를 누르는 손을 놓지 않았다. 술버릇 나쁜 최위명과 술을 먹으려면 이 정도의 귀찮음은 감수해야 했다.
“미안하다 학아. 계속해 봐라.”
문평과 마찬가지로 최위명의 주사에 익숙한 임학은 표정조차 변하지 않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저는 석 형과 생각이 비슷해요. 마룡쟁패에서 무승부가 나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심상치 않은 일입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무려 네 번입니다. 강호에서 이름난 고수들인 네 분께서 서로 상대를 바꿔 가며 네 번이나 비무를 하셨는데, 그게 모두 다 무승부였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거든요. 대전을 직접 본 감상을 이야기하건대, 네 번의 비무는 모두가 치열했지만 그중 단 한 번도 목숨이 걸린 적이 없었습니다.”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취기가 오르긴 했지만 이성을 잃지는 않은 듯 얼굴빛은 맑고 눈빛도 곧았다. 술김에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듣고 보니 제법 그럴듯해서,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던 악형대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석문평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우며 임학의 말에 귀 기울였다.
“제 생각엔 아무래도 사전에 서로 약속된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설마하니 진짜 사기 비무라는……?”
“아니,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물론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낸 약조가 있지는 않았겠죠. 제 말은, 서로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인 분위기라는 게 있었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분위기가 오늘의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겠지요.”
임학의 말이 끝나자 좌중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몇몇은 이런 이야길 이런 데서 막 해도 되나 싶은 기분이 드는지 괜히 주위를 둘러보며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학아. 그러니까 네 말은, 그분들이 암암리에 뜻을 맞춰 서로 봐줘 가면서 비무를 했단 소리냐?”
불콰해진 얼굴을 억지로 굳힌 악형대가 목소리까지 죽이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나 임학은 그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기보다는 자기의 본 실력을 감춘 거겠지요. 여기서 모든 것을 다 내보였다간 뒤가 위태로울 테니까요.”
“도대체 왜? 그냥 본 실력대로 이겨서 마룡패를 차지하면 될 일이 아니냐? 정식으로 소교주의 위에 오르면 더는 뒤가 위태로울 일은 없을 텐데. 어째서 거짓 대결을 해서 오히려 사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단 말이야?”
악형대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문평이 질문을 던졌다. 그도 무승부가 난 비무 이야기를 듣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론 대체 뭐가 이상한지까지는 파악하기 힘들었다.
어차피 머리를 쓰는 것은 그의 몫이 아니다. 문평은 습관대로 임학의 조언을 구했다. 임학은 담담한 눈길로 그런 문평을 바라보았다.
“석형은 마룡쟁패를 관람하지 못해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셨지만, 다른 분들께서는 다 같이 자리를 하셨으니까 보셨겠지요? 우리 천마교주天魔敎主님 말입니다.”
임학의 말에 끄덕끄덕, 모두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자를 숭상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마교인들, 그중에서도 하급 무사들은 천하제일인으로 칭송받고 있는 당대의 천마를 마치 신처럼 숭배했는데, 이 자리에 둘러앉은 자들 또한 모두가 그런 자들이었다.
“그분이 어떻게 보이던가요?”
임학이 다시 물었다. 술기운이 가득 오른 사람들은 일제히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대단하셨지.”
“멋있었지.”
“난 진짜 감동했다네.”
“전율이 일었어!”
열광적인 감탄사가 쏟아져 나오는 좌중의 분위기는 평소보다도 더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주먹 한 방으로 융중산의 절벽을 무너트리고, 일엽도강一葉渡江으로 황하를 건넜다는 천마의 전설을 이야기할 때보다 오히려 더 뜨거운 분위기였다.
“정말 굉장하셨지. 난 처음엔 내 눈이 잘못된 줄 알았어. 한데 소문이 사실이더군. 설마 진짜로 반로환동返老還童을 하셨다니.”
술 때문에 유달리 말이 많아진 악형대는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주어 강조하며 자신이 느낀 깊은 감명을 알렸다. 다른 사람들 모두 악형대와 같은 심정인지 그에 대한 동조가 연이어 튀어나왔다.
“극에 이르면 오히려 기운이 갈무리된다지만 그분처럼 강하시면 그것도 아닌 모양이야. 누대와 멀리 떨어진 저 뒤쪽 구석에 앉은 우리에게까지 쏟아지던 그 강렬한 기운이라니.”
“이러다가 진짜 우리 교주님 등선하시는 거 아니야? 왜 신선 중에도 마선이라는 게 있다잖아.”
“하긴. 반로환동부터가 사람의 일이 아니지. 어떻게 사람이 나이를 거슬러 도로 젊어지나? 사람에게 그 경지가 어디 가당키나 한 것인가?”
마룡쟁패를 구경하지 못한 문평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같은 의견이었다. 천마께서는 정말로 반로환동을 하셨다. 그런 분이 우리 천마교의 교주이시니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가 천하제일세天下第一勢다!
유일하게 의견이 다른 사람은 석문평뿐인 듯했다.
‘아니 정말 그분이 반로환동을 하셨단 말인가?’
의심 많은 문평은 쉬쉬하며 교내를 돌던 소문이 사실로 밝혀졌다는 것에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임학을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소문이 들려오긴 했지만, 석문평은 그 소문도 천마에 대한 다른 많은 소문과 마찬가지로 헛소문일 거라고 여겼었다.
“교주님이 반로환동을 하셨다고? 설마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네. 사실이었습니다. 석 형. 그분께선 정말로 젊어지셨더군요. 겉으로 보기엔 고작해야 20대로밖에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석문평은 아연해졌다. 당대의 천마, 천마 교주인 천하제일인 혁련상赫鍊常은 고희古稀도 아니고 산수傘壽를 넘은 나이다. 마중사기 중 가장 나이가 어린 환요편幻妖鞭조차도 서른이 넘었다. 배분은 사부지만 기실 연배로 따지자면 사조뻘이나 다름없는 혁련상이 20대 후반으로 보인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심각한 사기였다.
‘정말 영원히 사실 생각인가, 그 양반은?’
석문평은 예전에 딱 한 번, 먼발치에서 보았던 교주의 얼굴을 떠올리며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때도 유난히 노화가 늦어 고작해야 50대 중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보다도 더 젊어져 20대로 보인단다.
‘기가 막힐 지경이군. 20대라니. 그 말대로라면 그분께서 임학 이 친구 또래로 보인다는 소리가 아닌가?’
문평은 새삼스레 심각해져 임학의 얼굴을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젊기에 가질 수 있는 매끄럽고 윤기 나는 피부와 탁기가 서리지 않은 맑은 흰자위, 주름 하나 잡히지 않은 깨끗한 목선 따위를 꼼꼼하게 살피던 문평은 선뜻 감이 잡히지 않아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아무리 노력해 봐도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세상에. 무려 20대로 보이는 80대라니. 그런 사람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아.”
거기까지 생각하던 석문평은 퍼뜩 눈을 들어 임학을 바라보았다. 임학이 왜 비무 이야기를 하다 말고 교주의 반로환동 이야기를 꺼냈는지 그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이유가 맞느냐는 문평의 눈짓에, 임학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뜻이었다.
“갑자기 교주님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건가? 우린 마룡쟁패 이야기를 하던 게 아니었나?”
하지만 문평처럼 눈치가 빠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시키는 일만 충실히 하면 되는 하급 무사들이다 보니 머리를 쓰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다. 뒤늦게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는 것을 깨달은 악형대는 어눌한 어투로 임학에게 되물었다. 그러나 임학은 귀찮아하지 않고, 찬찬한 태도로 그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본래 사람이 후계를 정하는 것은 인간의 생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늙게 마련이고, 늙으면 죽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에서는 그에 대한 사정이 약간 다르지요. 천마께서 반로환동을 하셨으니까요.
외견상 그분은 오히려 자신의 제자들보다도 젊습니다. 그런데 감히 누가 후계를 자처하겠습니까? 아니, 설사 자처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남은 세월이 문제지요. 교주께서 저리도 건재하시니 후계자가 된다고 한들 교주 위를 물려받으려면 아직도 하 많은 세월이 지나야 합니다. 그 긴 세월 동안 무슨 일이 있을지 어느 누가 알겠습니까? 괜히 튀어나와 모난 돌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마룡쟁패의 개최를 결정한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사정은 이렇지 않았었다. 당대 최고수라고는 하나 천마도 인간이었고,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기실 여든이 넘은 나이로 여전히 일선을 지키는 건 노익장이 강한 강호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천마와 같은 배분의 다른 인사들은 대부분 죽거나 은거를 했고, 드물게 자리를 보전하고 있어도 그는 그저 모양일 뿐, 실권은 대부분 후계에게 물려준 상태였다.
늦었지만 교주 역시도 그런 수순을 따를 생각이었다. 정해진 후계도 없이 자신이 덜컥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큰 피바람이 불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올봄, 꽃구경을 하던 천마가 돌연 깨달음을 얻어버린 데에 있었다. 그는 부지불식간에 물아일체의 경지를 경험하고 두 번째 환골탈태를 해버렸는데, 그게 바로 반로환동이었다. 아마 그도 일부러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일은 이미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그 일로 윗선이 발칵 뒤집혔고, 쉬쉬하면서 아래쪽으로도 소문이 흘러나왔다. 그런 상황에서 마룡쟁패가 열렸다. 천마는 그 자리에 참석한 1만 마교인 앞에서 젊어진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긴가민가하면서도 믿지 못했던 마교인들은 이번 마룡쟁패를 통해 후계자가 아니라 천마의 건재함을 알게 되었다. 대다수의 마교인들은 이 사실에 기뻐하고 환호했지만, 사실 이 일은 천마의 제자들인 마중사기에게 아주 치명적인 문제였다.
초절정의 고수로 이름난 그들이라 할지라도 아직 천마의 전설적인 위명엔 미치지 못했다. 감히 천마의 후계로 나선다 하더라도 그의 뒤를 잇기 위해선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을 터다. 그런데 바로 그 천마가 신체마저 도로 어려져 버렸으니, 부족한 제자들이 어찌 그 앞에서 스스로를 내세울 수 있었겠는가?
임학은 그들이 왜 몸을 사렸는지 짐작을 하고도 남았다. 임학 자신이라도 그 위치에 서 있었으면 달리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임학의 친절한 설명을 들은 악형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 말이 옳은 듯싶었다. 악형대는 머리가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신중함과 자신이 틀렸다면 그 사실을 과감히 인정할 줄 아는 결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그는 말을 하느라 빈 잔을 방치한 임학의 잔에 술병을 기울였다.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거참. 우리 교주님은 지나치게 위대해서 곤란하신 양반이구먼.”
악형대의 술잔을 받은 임학은 말없이 웃었다.
‘똑똑한 친구야.’
석문평도 임학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크게 될 놈이란 바로 저런 놈을 이야기하는 거겠지. 임학 덕분에 의문이 말끔하게 풀린 석문평은 속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친구를 잘 둬야 하는 거다. 내 머리로 알지 못하면 옆에 있는 머리라도 빌려야 하니 말이다.
“근데 석 형. 저 사람 최가는 살아 있는 건가? 어째 아까부터 꼼짝을 안 하지?”
심각한 이야기가 나올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추임새를 넣으며 이야기의 흥을 돋우던 제일조의 부조장 왕우王牛가 안주를 씹으며 물었다. 지나치게 무거워진 분위기를 전환도 시킬 겸, 아까부터 죽은 것처럼 탁자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최위명의 안부도 물을 겸 겸사겸사 한 말이었다.
그 질문에 문평은 그제야 뒤통수를 누르던 손을 걷고 최위명의 안부를 살폈다. 어깨를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아 고개를 숙여 얼굴을 들여다보니, 드르렁드르렁 코까지 골며 잠들어 있었다.
“잡니다. 왕 형. 다행히 오늘은 주사가 덜하네요. 비싼 술이 좋긴 좋나 봅니다.”
“비싼 술이 좋은 게 아니라 우리가 일부러 많이 먹였어. 좋은 날인데 괜히 난동 부렸다가 옥에라도 가게 되면 우리만 손해잖아. 모처럼 일찍 재웠으니 자네도 한잔해. 오늘만은 술 좀 편안하게 먹어 보자고.”
문평의 말에 씩 미소를 지은 악형대가 술병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같은 방을 쓴다는 죄목으로 술자리마다 최위명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던 석문평은 반가운 표정으로 얼른 잔을 내밀었다.
“아니, 형님. 이리 고마울 데가!”
콸콸콸. 아끼지 않은 백화주가 잔 속으로 쏟아졌다. 문평은 손안에 든 사기잔이 사기 대접이 아닌 것을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잔치판의 분위기는 절로 무르익어 갔다. 술이 있고 기름진 고기가 있고 친우가 있는데, 이 자리가 즐겁지 않을 까닭이 없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잔치가 아니기에 천마교의 무사들은 마음껏 먹고 마시며 인생을 노래했다.
그들에게 오늘은 매우 좋은 날이었다. 긴 인생을 사는 와중에도 몇 안 되는, 아무 거리낌 없이 기쁠 수 있는 어느 좋은 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