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53화, 미스틸
제이슨의 요구를 이행하면서 내 레벨은 이제 120에 도달했다.
보조 간부라는 직책에 임시로 있지만, 간부는 아닌 일반 단원이랑 종이 한 장 차이인 미묘한 위치다.
그런 대원의 레벨이 120이라니 아무리 레벨을 숨기고 있다지만, 제이슨도 우르자인도 이런 고 레벨의 단원을 그냥 두고 있는 것은 전력 손실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지금부터 널 간부로 임명하지.”
“가, 간부 말입니까?”
“그래. 사실 120레벨이라면 간부보다 좀 더 높은 부 두령을 맡겨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보조 간부가 부 두령으로 한 번에 뛰어오르는 것은 주변에서 말들이 많을 거야. 그러니 일단 간부가 돼서 어느 정도 일을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부 두령에 임명토록 하지.”
“잘됐네! 이루스. 이제 너만의 팀을 꾸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자, 잠깐만요. 전 아직 누굴 거느릴 실력이 되지 않는데….”
“흠…. 카밀라가 해온 보고에는 그 오만한 엘프 년도 말을 잘 듣도록 만들었다고 하는 데 아닌가?”
“아…. 그, 그게….”
“아- 그만. 이 일은 내 말대로 해라. 이루스 네년이라면 간부 정도는 충분히 해낼 법도 한데 믿고 맡기지. 상황을 봐서 내 판단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다시 단원으로 강등시켜도 되니 말이야. 그런 줄 알고 돌아가 봐라.”
“아…. 네.”
“그리고 너. 이번 쉬는 날 일정이 어떻게 되지?”
“저쪽 세계에 잠시 다녀올 예정입니다만?”
내 말에 제이슨은 잘 되었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다면 네년에게 지시할 일이 있으니쉬는 날 전날 밤에 내 방으로 와라. 그때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뒤이어 그의 축객령을 받으며 우르자인과 함께 방에서 나왔다. 그런 뒤 그녀를 따라 그녀의 방에 이동하여 편안한 의자에 몸을 맡기며 그녀가 준 술을 한 모금 들이키며 제이슨의 의도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간부가 되라고? 내가?”
도적단에 들어온지 이제 3달이 조금 지나가는 나에게 간부가 되라는 내용은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의심의 불을 조금씩 소화 시키는 우르자인 덕분에 조금씩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 이번에 미카르도의 레벨을 흡수해서 레벨이 120이 넘었잖아. 당연한 순서야. 그리고 다른 두령이 이끄는 조를 좀 봐, 지원 성격이 강한 자마칸의 조도 간부가 무려 여덟이야. 에탄 조는 또 어떻고 그쪽은전투 조라서 인원도 많고 그만큼 간부의 수도 가장 많은 열두 명이나 돼. 반면 우리 조는 여성 단원으로만 구성되어 있기에 수가 적고 다들 레벨도 낮은 편에 속하지. 지금까지 사상자도 많았기 때문에 수로도 질로도 딸린 것이 현실이야. 그런 와중에 새로운 간부가 될만한 네 존재는 정말 귀중한 인적 자원이라고.”
“음…. 확실히 여자 노예를 사 와서 전투원으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이번에 다시 노예 상단이 올 거야. 저번 노예들은 질적으로 나쁘지 않았어. 모두 도적단 생활에 적응했고 실력도 좋아서 가볍게 생존하여 팀에 적응했지. 덕분에 튜테 팀의 수도 이제 간부를 제외하고 여덟이 되었으니 다시 활발하게 행동할 수 있을 거야. 이번에는 네가 노예 상단에 가서 노예를 골라와.”
“나 혼자?”
“내가 그날 일이 좀 있거든, 앞으로 2일 후에 노예 상단이 도착할 거야. 내 명령으로 그날 임시 휴게를 주었으니 너랑 미스틸 둘이서 가면 돼.”
“아…. 미스틸 간부라. 처음 만나는 사이지만, 혼자보다야 낫겠지.”
혼자보다는 둘이 낫지. 나 혼자 갔다가 괜히 주변 열기에 밀려나서 한 명도사 오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줄 누가 알겠는가.
이야기가 대충 정리되었으니 ‘알았다.’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잠깐만 아직 전달할 내용 남았어.”
“응?”
“한 팀의 인원은 최소 여덟이지. 이번에 대대적으로 인원 증강에 들어갈 거야. 네 팀에 투입될 추가 인원 여섯 명을 사면 그 뒤는 다른 팀에 넣을 인원을 두 명씩 더 구매해줘. 아, 카밀라 팀은 네가 빠지니까 세 명을 구해줘야겠네. 그렇다면 합계 열세 명을 사주면 되겠어.”
“수가 충분하려나…. 응? 잠깐만, 내 팀에 여섯 명? 그럼 내 팀에 총인원은 나 포함 여덟이 되는 건가?”
“아니 팀 편재를 다시 할 거야. 아홉 명이 돼버린 미스틸의 팀에서 한 명을 네 팀으로 보낼 거고 카밀라가 길들이지 못한 엘프 년 역시 네 팀으로 소속을 옮길 거야. 그렇다면 이미 네 밑에 있는 지크리스까지 합해서 네 명이 되지? 여섯 명이 추가되면 열 명이 되는 거야.”
“아…. 후…. 그 애물단지 엘프를 결국 나에게 떠넘기는군…. 미스틸 팀에서 넘어오는 년은 누구야?”
“쥬린.”
“아…. 그 아이.”
같은 세상에서 온 사람이라고 사정을 봐준 것일까? 뭐가 되었든 앞으로는 자주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각 팀의 인원을 열 명으로 우리 조의 인원을 날 포함해서 41명으로 만들 거야. 그래도 지원조인 자마칸 두령의 조보다 수가 적지만, 차차 늘려나가야지. 범할 여자가 줄어든다고 우리 수가 늘어나는 것을 엄청나게 반대하던 에탄이 지금 다른 세상에 푹 빠져 있으므로 지금이 바로 절호의 기회야. 대 두령 역시 허락을 한 일이니까 최대한 괜찮은 년들로 쓸어 담아와. 만약 수가 적다면 평균적인 아이들도 상관없어. 눈이 죽어 있거나 삶의 희망이 없어 보이는 년들은 되도록 배제하고.”
“그렇게 할게.”
그것으로 전달받을 내용은 끝이 났다. 그녀와 헤어진 뒤 지크리스가 기다리고 있는 내 방에 들어와 아직 실감이 안 되는 간부가 되라는 말을 곱씹기 시작했다.
그러자 막 씻고 나온 듯 개운한 표정으로 온몸에서 김을 피워 올리는 지크리스가 날 빤히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왜 그러고 계세요?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서는….”
“아- 씻고 나온 거니?”
“예. 그보다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고민이 많은 표정입니까?”
“간부가 되라고 하더라.”
“간부요? 누구요? 혹시 언니 말하는 건가요?”
“그래. 나 말이야. 보조 간부가 아니고 정식 간부가 되라는 말을 듣고 오는 길이야.”
“오-! 축하드려요. 언니. 그런데 뭘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고 그래요? 하라면 하면 되는 거지.”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고. 난 누군가를 이끌어본 경험이 전혀 없어. 그런 내가 아홉이나 되는 인원을 제대로 이끌 수 있을 거라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아. 음…. 뭐랄까. 약한 생각 하는 거 같아서 부끄럽지만, 솔직히 실수해서 우리 팀원들 다 죽어 나갈까 봐 벌써 겁이 난다.”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원래 세상에서도 학급의 반장은 고사하고 한 무리의 장이 되어 이끌어본 경험이 전혀 없는 나이다.
사회생활도 말단 직원으로 누군가의 지시를 받으며 이끌려 본 기억은 있을지언정 팀을 이루어 내가 장이 되어 그들을 이끄는 것은 전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었다.
차라리 저쪽 세상에서 한 무리의 장을 맡으라고 하면 생각할 것도 없이 내 경력을 위해 도전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일어난 일은 사람의 목숨을 해치지 않는다. 실수하면 욕을 먹고 보완을 하면서 성장해 나가면 되는 일이니까.
그러나 이곳에서는? 실수는 곧 사람의 목숨으로 이어지는 위험천만한 곳이다.
만약에 내가 한 팀을 이끌다가 판단이라도 잘못 내리는 날에는 수두룩하게 사람이 죽어 나가는 곳이란 말이다.
레오나와 튜테가 어째서 그런 상처를 앓고 서로 반목을 하고 사이가 나빠졌던가. 다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기에 날카로워지다 보니 서로에게 찔리게 된 것이었다.
눈앞에 있는 지크리스와 내가 그런 상황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 적어도 그런 보장 따위는 없다. 그렇기에…. 이 일에 심각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착!
“끄헙!”
어깨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기운에 정신을 차리니 수면 밑으로 깊숙이 잠수한 내 정신을 깨운 지크리스의 양팔이 보였다.
그녀는 내 어깨를 강하게 누르면서 날 깨운 모양이다.
“뭔 고민이 그렇게 많아요. 집어치우고 잠이나 자자고요.”
“하…. 이거 심각한 일이야.”
“알고 있는데 아직 간부 될 것도 아닌데 뭐 벌써 걱정을 하냐는 말이죠. 어차피 하라고 한 이상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인데 간부가 된 다음 고민해도 늦지 않아요. 그리고 일어나지도 않을 일로 고민하는 것도 좀 바보 같지 않나요?”
“….”
딴은….맞는 말이었다. 우문현답이라. 지크리스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을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신기하다는 내 표정을 본 건지 지크리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어왔다.
“지금 그 표정 뭡니까? 기분 나쁜데 말이죠.”
“네가 그런 조언을 해줄 줄 상상도 못 했거든.”
“화낼 겁니다!”
“아하하하 미안해, 미안해. 그래…. 잠이나 자자. 걱정은 나중에 하고.”
지크리스의 조언 덕분일까? 한결 머리가 맑아졌다. 당장 일어난 일도 아닌데 벌써 고민을 하다니…. 확실히 배부른 고민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어떨지 알지도 못하는 데 말이다.
만약…. 그런 비극이 일어나더라도 마음이 부서지지 않을 만큼강하게 나 자신을 단련하면 될 일이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
“안녕. 우리 초면이지?”
“네. 이루스입니다.”
“미스틸이야. 그리고 말 편하게 해. 이제 너도 어엿한 간부가 된 거잖아? 그보다 얘 너 정말 이쁘구나? 화장하니? 어머! 화장도 안 한 거야? 샘나네! 진짜.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아…. 네. 그렇게 해요. 아, 아니지. 그러자 미스틸.”
“그럼 갈까?”
“그래.”
미스틸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통통 튀는 매력을 가졌달까? 긴 은 백발에 도도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상대하기 껄끄러울 거라 생각 했는데 사람은 역시 겉모습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을 다시금 상기하게 만든다.
활발하게 움직여야 하는 도적단의 인원들은 모두 살결이 많이 드러나더라도 활동성이 좋은 옷을 입는데 반면 미스틸은 몸에 착 달라붙는 옷으로 온몸의 살결을 다 가리는 옷을 입었다.
즉 다른 방법으로 기동성을 살린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전신에 타이츠를 입고 중요 부위에는 얇고 단단한 가죽 갑옷을 덧입은 카밀라와는 또 다른 매력이 느껴진다.
키도 크고 팔과 다리가 잘 빠져서 길쭉하니 마치 모델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미모야 이곳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물이 올라 있는 편이니(이곳 세상남자들의 미의 기준은 저쪽 세상 여자에게 더 열광하지만….) 그녀 역시 매우 아름다웠다.
늘씬한 엉덩이를 흔들면서 걷는 모습이 당당함을 자아내어 더 그런 것 같다.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 노예 경매가 열리는 상단의 천막으로 들어가니 이번에도 역시 환호성과 남자들의 욕정으로 뜨거워진 장내가 보인다.
우르자인이 미리 점해둔 자리에 나와 그녀가 앉으니 남자들의 시선이 잠시 모이지만, 그리 큰 관심은 두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모두 저 노예 상단이 데려온 여자들에게 향해 있으니 말이다.
“자!!! 기다리셨습니다. 노예들의 준비가 모두 끝났으니 저품질 노예부터 들이겠습니다. 이번에는 저품질도 되도록 미색이 고운 것들로 준비했으니 많이들 이용 바랍니다! 자 노예가 들어옵니다!”
우와아아아아!!!!!!
남자들의 환호에 사회자를 하는 노예 상인의 목소리가 다 묻혀 버릴 지경이었다.
아픈 귀를 살살 긁으며 옆을 보니 미스틸은 들어오는 노예들을 하나하나 모두 점검해 보고 있었다.
“저품질인데 사려고?”
“우르자인 두령이 이번에는 조금 떨어지는 것들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아! 그리고 저품질 중에서도 가끔 흑진주같이 숨은 실력 있는 년들이 있거든, 아 맞아. 그거 이야기 안 했구나.”
의미심장한 말을 한 미스틸은 내 귀에 대고는 뭐라고 속삭이기 시작했는데 그말을 듣고 난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하이드레인 스킬?”
“헉!”
“놀랄 거 없어 이거 내 능력이거든, 제이슨 두령도 모르고 우르자인 두령만 알고 있는 내 능력, 상대방의 스킬을 볼 수 있는 매의 눈이라는 능력이야.”
“매, 매의 눈?”
“그래. 저번에는 내가 자리를 비워서 우르자인 두령이 날 데려가지 않았지만, 오늘은 내가 있으니 질 좋은 년들은 다 우리가 차지할 수 있다 이거지. 아 참, 네 능력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게. 이미 우르자인 두령에게도 함구령이 내려졌으니까. 간부들은 모두 네 능력을 공유하고 있어.”
“그, 그렇게 된 건가.”
“같은 간부끼리 능력을 숨기는 것은 괜한 분란이 생긴가는 것이 우르자인 두령의 생각이니까. 다음에 튜테랑 카밀라도 자기들 능력을 알려 줄 거야. 내가 1등이란 거지! 하하하 이루스에게 처음으로 능력을 알려준 간부가 바로, 나라 이거지.”
“아…. 하하….”
뭔가. 1등에 집착하는 성격인가? 왠지 카밀라랑 많이 싸웠을 거 같은 성격이라 생각되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려나.
그녀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에 잠시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그녀가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집중하며 말을 이었다.
“이런- 말하기가 무섭게 하나 나왔다.”
“뭐?”
“근거리에서 적의 공격을 확실하게 차단해줄 방어 능력을 갖춘 여자야. 어때? 조금 지저분한 것만 빼면 정신도 올바르게 박혀 있는 거 같은데.”
그녀의 시선을 따라 이동한 곳에는 키가 2M는 훌쩍 넘길 것 같은 거대한 체구의 여성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산발이 된 덥수룩한 머리카락에 얼굴을 다 가려 왠지 무시무시해 보이는 엄청난 위압감의 여성이다.
“저거 엘프처럼 희귀한 종족이네. 자이언트야.”
자이언트, 이름처럼 위압감이 느껴지는 거구의 종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