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18화, 두령 우르자인.
바논과 한 상담은 미노타우로스라는 이름이 거론되자마자 영양가 없는 대화만 이루다가 끝이 났다.
방을 향해 걸어가는 다리가 후들후들 점점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름만 들어도 다시금 되새겨지는 공포의 장면이 온몸에 경련마저 일으킬 정도다.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거대한 그림자와 그 끝을 알 수 없는 입안의 공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끝없는 암흑의 뒤로 이어지는 추락
“헉!!!”
방문 앞에 도착해서야 그 상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고 이마도 땀이 한가득하다.
나에게 이러한 공포를 지어주는 존재는 제이슨과 미노타우로스 둘일 것이다.
통째로 삼켜져서 죽을 수도 있었던 그 순간,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도 그 공포감을 이길 수가 없었다.
“후…. 후우…. 후욱….”
주점에서 마셨던 술기운이 싹 달아나 버렸고 정신이 벼린 칼날처럼 날카롭게 서버렸다.
주점에서 방까지 이동하던 내용이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공포에 시달리며 걸어온 시간 동안 숨도 가팔라져 있었다.
거칠고 긴 호흡을 하며 숨을 다스리고 나서야 몸이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문 앞에서 뭐 하고 있어?”
“헉!!!”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주변에서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불의의 기습이어서 더욱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진원지를 확인하니 그곳에는 카밀라가 작은 입술을 오므리며 날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 너 나 몰래 뭐 잘못 저질렀어?”
“그, 그런 거 아니거든…. 네가 깜짝 놀라게 했잖아. 기척 좀 하고 다녀.”
“흥! 그거야 내 맘이지…. 그보다 지금 시간 괜찮아?”
“응? 아. 괜찮아. 왜 그러는데?”
“우르자인 두령이 좀 보자고 하더라. 요즘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말이야. 거기에 정식 단원이 되었는데 너랑 우르자인 두령이랑 정식으로 인사한 적이 없잖아?”
“아…. 우르자인 두령이?”
두령 우르자인, 대 두령 제이슨이 이끄는 페이머스 도적단의 여성들을 이끄는 실질적인 여성 단원들의 리더다.
나와 카밀라 모두 따지고 보면 그녀의 휘하 소속이고 카밀라의 경우는 그녀 휘하 간부로 카밀라 팀을 이끌고 있었다.
이곳에서 한 달간 생활하면서 카밀라, 바논 말고는 그다지 친한 사이는 거의 없었다.
가끔 카밀라에게 보고차 찾아오는 카밀라 팀의 단원들과 면식은 있지만, 그리 잘 아는 사이는 아니다.
우르자인 역시 이름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 본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딱 한 번 본 일은 있었을 텐데 내가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과거 제이슨이 다른 두령과 간부를 모두 모아서 마석을 두고 회의를 했을 때였다.
다만 그때는 살기 위해서 카밀라의 말에 따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여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면면을 꼼꼼하게 살피지 못했고 그나마 기억에 남는 얼굴이라면 자마칸 두령, 그리고 에탄, 두령과 자신을 속창이라 소개한 놀티아 정도랄까.
에탄과 놀티아는 본지가 너무 오래돼서 얼굴이 가물가물할 지경이다.
‘사실 별로 떠올리고 싶은 면상들은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그 뒤로 저쪽은 어떻게 되었을까….’
잠시 과거 회상에 잠겨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었더니 저 앞에서 카밀라의 독촉 소리가 들려왔다.
“우르슬라 두령을 기다리게 할 거야? 빨리 뛰라고.”
“알았어. 갈게. 간다고.”
그녀의 말에 대답하며 속보로 걸어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는 뭔가 기분이 나쁜 듯한 표정을 하고는 내 가슴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그러더니 내 가슴을 한 대 팍! 하고 치면서 크게 화를 냈다.
“아! 땀 냄새 진짜…. 야 너 우선 씻어. 그 꼴로 두령 앞에 가려는 거야?!”
“여자끼린데 뭐 어때….”
“닥치고 빨리 씻고 나오라고! 처음에는 깔끔한 체하던 년이 왜 이렇게 되었지?”
“목욕이야 잠자기 전해 하면 되는 데…. 솔직히 귀찮아. 몸도 힘들고.”
“아휴 내가 죄지…. 어쩌다 보니 여도적이 아니라 산짐승을 만들어 버렸네.”
“말이 심하네…. 알았어 씻고 나올게.”
결국, 못 이기는 척 물을 뿌리러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정식 단원이 되면 욕실이 딸린 방을 줄 정도로 생각보다 내가 소속되어 있던 블랙 기업의 대우보다 훨씬 좋았다.
다만 뜨거운 물은 나오지 않는다. 간부 이상부터는 뜨거운 물이 나오고 화장실과 옷장 등등 여러 가지 물품이 더 있긴 한데 일반 단원이니 그런 것까지는 바랄 수 없었다.
이렇게 씻으면서 생각을 해보니 카밀라와 같이 지냈을 때가 참 그립기도 하다.
대충 몸의 땀을 씻어내고 두령을 보러 가는 길이니 하는 수 없이 향유를 펴몸에 발랐다.
여자끼린데 뭐가 그리 중요한지 몰라도 카밀라가 하라고 하는데 어쩌랴 상사가 까라면 까는 게 법인데.
내가 내 몸에 향유를 바르는 기분도 참 뭔가 이상하다. 그리고 언제 이렇게 울퉁불퉁하게 변한 걸까?
아! 물론 내 몸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은 아니다. 만질 때는 몰라도 볼 때는 정말 건강해 보이니까.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근육이 생겨도 남자들의 그 더러운 눈은 바뀌지 않았다.
이곳의 도적들은 정말 얼마나 여자에게 굶은 것 걷을까.
“끝났어?”
“응. 향유도 발랐어.”
“확인해 봐야겠어.”
내 말을어찌나 못 미더워하는지 그녀는 간편하게 차려입은 내 가슴에 또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팔 들어 넌 진짜 씻는 거 하나는 못 미더운 년이라고.”
“파, 팔은 왜. 흑!!!”
‘거, 거기까지 확인하는거야! 이, 이상한데….’
내 몸은 민감한 편이고 그래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이 민감한 부분은 특히나 더 민감하다.
지금처럼 겨드랑이에 코를 가까이 대는 행동조차도 거리가 조금 있는데 간질거릴 정도로 민감하다.
오히려 그 장면을 쳐다보면 괜히 더 느낌이 이상해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뒤로 조금 더 내 몸의 향기를 킁킁거리던 그녀는 확인이 끝났는지 나에게서 떨어졌다.
“좋아. 제대로 씻었군. 제이슨 대 두령님이랑 우르자인 두령은 내가 이곳에서 가장 존경하는 두 분이야. 그런 분들에게 예의 없이 땀냄세를 풍기는 건 내가 용납 못해.”
“아. 알았어. 알았다고…. 다음엔 더 신경 쓸 테니 어서 우르자인 두령에게 가기나 하자. 기다리실 거야.”
“아. 그렇지. 아니지! 애초에 네가 몸을 잘 씻었으면 이런 일이 없잖아!”
“으윽….”
결국, 한마다 더해서 본전도 찾지 못했고 그녀의 말이 너무도 맞는 말이라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속으로 투덜거리지만, 역시나 여자인데 몸을 가꾸지 않는 것도 내 잘못이 있어 투덜거릴 수도 없었다.
요즈음 수련, 사냥, 수련, 사냥하다 보니 몸이 많이 피곤해서 그런 건가….
과거에는 몸에서 그 어떠한 냄새가 나는 것도 절대 용인하지 않았던 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냄새나는 것 정도는 그냥 묵인해 버릴 정도로 털털해져 버렸다.
참…. 사람이 생활하는 환경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고 하더니 딱 내가 그 꼴이다.
“도착했어. 앞으로도 잘 기억해 둬. 여기가 우르자인 두령의 방이야. 내가 없을 때 그분 호출이 오면 이곳에 오면 돼.”
그렇게 말한 카밀라가 몸가짐을 단정히 한 뒤 두령의 방에 설치된 문고리를 잡고 문을 두 번 두렷다.
“두 번은 보고를 받고 온 사람이나. 손님. 그리고 세 번은 긴급 상황이야. 전자는 노크 후에 안에서 두령의 대답을 기다려야 해. 그리고 후자는 두령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 바로 문 열고 들어가서 긴급 상황을 보고해.”
“한번은?”
“나중에…. 그건 나중에 알려 줄게. 아니 나중에우르자인 두령에게 들어.”
“흠….”
뭔가 숨기는 것 같았지만, 물어볼 깜냥은 없었다.
카밀라가 가끔 지어 보이는 표정이 있는데 저런 표정을 하면 비밀을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
참 성격이 깐깐하지만, 그만큼 비밀을 공유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일 것이다.
“아. 우르자인 두령은 널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리고 너도 정말 많이 만나본 사람이야.”
“어? 내가 우르자인 두령을 많이 만났다고?”
“얼굴 보면 알아. 으휴…. 우르자인 두령도 장난기가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까.”
“후후훗- 내 욕 그만하고 어서 들어오렴.”
문 안에서 미성의 고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구슬이 굴러간다는 표현을 자주 하곤 하는데 이게 바로 그런 여성 목소리의 표본이지 않을까?
그런데 어디서 정말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카밀라의 말대로 내가 자주 만난 사람이었단 말인가? 그래서 목소리가 귀에 익은가?
끼익!
대답을 듣고 먼저 들어간 카밀라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풍만하다. 정말 풍만하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여인의 몸이다.
그런 몸을 한 여인이 카밀라의 몸을 말 그대로 품에 안아주면서 짓궂게 머릴 쓰다듬었다.
“언니 방문 앞에서 언니 욕을 해? 요년이 요즘 머리가 컸다고 잘 까부네.”
“아으…. 두, 두령 죄송해요. 아으!”
“어…. 저기….”
두 사람의 촌극을 보다 못해 내가 나서니 카밀라를 괴롭히던 그녀가 나에게 다가왔다.
“자기 왔어?”
“어?”
자기? 내가 저 말을 어디서 들었더라? 속으로 고민을 하고 있었더니 내가 떠올리는 것 보다 그녀의 행동이 더 빨랐다.
연한 분홍빛의 가발을 꺼내 자기 머리에 쓰고는 표정을 바꿔 요염하고 섹시해 보이는 여성으로 변모한다.
눈 옆에 점, 그리고 진한 눈화장으로 마무리를 하니 그녀의 얼굴은 내 기억에 강렬하게 남은 한 여성 종업원의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바네사?!”
“정답! 이야. 우리 자기 속이느라 애 많이 먹었다니까.”
“바네사가…. 우르자인 두령?”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우리 여성 간부 3인과 대 두령 정도는 알고 있을걸?”
카밀라의 설명이 뒤를 이었다.
우르자인 두령은 여성 단원들의 삶의 질과 더불어 남성 단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조건으로 대 두령과 뭔가 거래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점에서 일하는 그녀의 두 번째 모습인 바네사가 그 중 한 가지 거래라 한다.
“주점에 올 때마다 내가 잘 듣고 있었지. 요즘 참 활약이 많은 거 같아서 내가 칭찬 좀 해주려고 불렀어.”
“그, 그랬구나. 바네사가 우르자인 두령이었군요…. 몰랐어요.”
“말투가 딱딱해졌네? 그냥 평범하게 대해도 좋은데. 난 우리 단원들하고 언니 동생 하는 게 정말 좋단 말이야. 그러니까 평소처럼 내 엉덩이 두드리며 술 따라 달라고 졸라도 괜찮아.”
“없는 일을 만들어 내지 말라고요! 술 주문은 시켜도 제가 언제 바네사 엉덩이를 두드렸어요?!”
“음…. 아…. 그렇네. 내가 이루스의 엉덩이를 두드려도 이루스가 내 엉덩이를 두드린 적은 없구나. 아쉬워라.”
‘그게 아쉬워할 일인가….’
좀 다른 방법으로, 정말 다른 방법으로 친목을 다지는 두령이란 것이 뇌리에 박히는 순간이었다.
“성격은 이래도 정말 존경받는 분이거든, 그러니까 너무 편하게 대하지는 마라. 다른 간부들이 그 모습 보면 너 정말 죽을걸?”
“에이, 괜찮다 뭐. 이루스는 특별한 내 자기니까 내가 허락할게. 술집이나 나랑 같이 둘만 있으면 그냥 언니- 하고 불러도 좋아.”
“아, 그래도 그건 좀…. 저랑 하늘과 땅 차이인데….”
“역시 그런가. 끙차….”
머리에 쓴 가발을 벗고 화장을 지우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바네사, 아니 우르자인 두령
그녀의 요염했던 표정이 조금 냉철한 표정이 되었고 입술은 편안하지만 앙다물어 카리스마가 돋보였다.
그리고 빛나는 듯한 금발 머리가 참으로 인상적인 여성으로 돌변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가 술집에서 존재를 숨긴 그 바네사라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저 정도로 확실한 변화가 가능하지 않았다면 아마 내가 우르자인을 보자마자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다른 단원들이 그녀가 우르자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참으로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자 다 갈아입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그렇지. 요즘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내가 선물을 주려고 했었어.”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볼게요.”
“그래. 카밀라는 먼저 들어가 봐. 나갈 때 밖에 누가 있으면 중요한 일이 아니면 잠시 기다리라고 전해줘.”
“네. 두령. 그럼 이만.”
카밀라는 몸을 돌려 우르자인 두령의 방을 나갔다.
그러자 우르자인 두령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요염한 미소가 입가에 지어져 있었다. 조금이나마 바네사의 모습이 엿보였다.
“긴장했어 자기?”
“아니…. 그러니까 그 자기라는 호칭은 좀….”
“아하하 미안해 버릇되었나? 그러니까. 이루스.”
“네.”
“입 좀 벌려 볼래?”
“네?”
순간 잘못 들은 줄 알고 그녀에게 다시 질문을 해보았다.
그러나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뒤이어지는 그녀의 말이 똑같았다.
아니 그 강렬해 보이는 요염한 미소가 더욱 진해져 있었다.
“입, 벌려 보라고.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