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8 / 0180 ----------------------------------------------
25. VAMPIRE WEEKEND
"주인님 아까 계속 보던 영화 뭐에요?"
"악마를 보았다라고 최민식 참고하느라."
어느덧 연회의 불이 올랐다.
수현은 그들을 이끌었던 뱀파이어의 안내를 따라,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들이 들어섰던 건물의 일부라면 이쯤되어 끝이 나와야 하는데, 마치 땅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계단은 끝도 없이 내려갔다. 안내자가 든 램프의 불빛이 일렁거리며 그들의 그림자를 흔들었다.
"그거 전에 보셨잖아요?"
"복습 좀 했어."
무슨 복습인지는 모르겠지만 수현의 얼굴이 진지해서 올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하는 앞서서 뱀파이어의 안내를 따르고 있었다. 완만하다가 다시 가팔라지는 게 개미지옥으로 차츰 빨려드는 듯한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거의 다 왔다는 소리에 예브게냐가 투덜거린다.
이내 문이 열리자 눈이 아리도록 불빛이 여기저기서 흔들리고 있었다.
드레스나 턱시도를 차려 입은 남자와 여인들이 잔을 부딪치며 웃고 있었다. 한켠에선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고, 이따금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면 그곳에선 흡혈의 의식이 한창이었다. 문명과 야만이 뒤섞인 파티였다. 입가로 흐르는 피를 닦으며 비죽이 웃던 남자가 수현과 여인들을 보고 눈을 빛냈다.
그리고 먼 곳 가장 높은 단의 의자에 앉아 연회를 오연히 내려다보는 여인이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바닥에 닿을 듯이 길고 풍성하다. 지루한 듯이 살짝 감긴 눈으로 그녀의 피를 이은 자들을 훑었다. 아래로 이어질수록 피는 엷어져 이제 그녀의 형질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아함, 매혹, 그녀의 피에 내려오는 것들이나, 대부분의 혈족들은 그저 피와 향락에 취해 그것들을 잃었다.
그러다가 눈이 돌아간다.
지금 막 연회에 들어서는 이들이 있었다. 걔중 뱀파이어는 한 명이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피냄새가 난다. 아주 짙다. 그녀의 피, 장미 혈족의 적통을 이은 향기다. 생김새에서부터 몸짓, 머리카락의 흔들림까지, 연출한 것처럼 우아하고, 고혹적이다. 나른한 눈길은 그녀의 아랫배가 아려올 정도로 섹시하다.
정하. 그 이름을 떠올렸다.
잠들기 전에 기억하던 얼굴 그대로다.
엘리제는 동방을 떠돌다 한 계집아이를 만났다. 그녀는 드물게도 아름다웠으나, 그것만으로 엘리제를 매혹시킨 것은 아니다.
그 눈동자였다.
소녀가 불한당들에게 윤간 당해 오물을 뒤집어쓰고 아래로 피 흘리며 꿈틀거릴 때.
폭력과 겁박에도 굴하지 않고 오연하던 그 검은 눈동자. 아무리 그들이 소녀를 더럽히려 해도 그 고고한 칠흑은 흐릴 수가 없다. 그것에 엘리제는 매혹되었다. 진창을 구르면서도 고개 쳐들던, 피에 흐르는 기질.
엘리제는 그녀를 자신의 아이로 다시 태어나게 하였다. 그녀는 자신을 범했던 남자들을 고통스럽게 죽였다.
짓밟힐 때에도 짓밟을 때에도 그 눈은 같았다.
그 눈에, 그녀에게 흐르는 피에 엘리제는 걷잡을 수 없이 매혹되었고, 그래서 그녀는 정하에게 키스했었다. 자신의 품에서 떠는 소녀를 다독이고, 서로가 서로를 기쁘게 하는 사랑의 행위를 가르쳐주었다. 자신의 품에서 할딱이던 소녀는 견딜 수 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엘리제에겐 해야할 일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체페슈는 일본의 음양사 일족에게 동맹의 증거로 그들의 후계를 뱀파이어로 만들려고 했고, 그것을 위해 엘리제에게 일본행을 명했다.
위험한 여정이었다. 일본의 음양사 일족은 오로치라 불리는 적과 싸우고 있었고, 그들은 뱀파이어 왕의 딸인 엘리제조차 거침 없이 공격하는 미치광이들이었다. 엘리제는 동맹을 위한 제물로, 키시노라는 소녀를 뱀파이어로 전생시켰다. 그리고 그녀를 공격했던 오로치의 추종자들을 도살하고 오로치와도 싸웠다. 승리했으나 그녀 또한 상처가 깊어, 급히 유럽으로 돌아가 오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지금 엘리제는 그녀의 옛 연인, 정하를 만난 것이다.
눈이 마주치자, 정하는 피하지 않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엘리제는 그 검은 눈을 들여다본다.
한때 엘리제를 향했던 열렬한 경애는 찾아볼 수 없다. 그간 어떤 생을 살아왔을까. 다른 온갖 색들이 뒤섞여도, 흑색을 흐릴 수는 없다. 그녀는 엘리제가 없었던 지난 백년 동안의 고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고하고, 고혹적이다.
엘리제는 웃고 말았다. 오랜 잠이 그녀의 지난 기억들을 바래버리게 했듯이, 정하 또한 오랜 세월이 지난 기억들을 가라앉혔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사랑스러운 건 왜일까.
엘리제가 손짓했다.
정하가 연단 아래 섰을 때 뱀파이어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 견줄 수 있는 아름다운 뱀파이어는 고작해야 엘리제 정도일까. 호기심과 찬탄 섞인 눈길들이 모였다.
"오랜만이야. 나의 연인."
"백 년도 전의 일입니다만."
"벌써 다른 사람이 생긴 거야?"
엘리제는 알 수 있었다. 정하와 함께 왔던 아름다운 소년, 그일 것이다. 강간당한 이후 남자라면 살기를 뿜으며 싫어하더니, 결국은 저런 예쁜 남자애를 택했구나.
동성에게만 끌리는 호모섹슈얼인 엘리제는 조금 서글퍼졌다.
"귀여운 애네."
"……."
"와줘서 고마워."
엘리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그녀의 탐스러운 적색 머리카락이 출렁이며 흐드러진다. 그녀가 천천히 정하에게로 내려왔다.
잠을 자고 눈을 떴더니 멀어져버린, 그녀의 옛 연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속삭였다.
"키스해도 될까?"
정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엘리제는 정하에게 키스했다.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서로가 송곳니를 접고서 입술을 맞대는 스킨쉽.
순간 엘리제가 혀를 사용했다. 정하가 흠칫해서는 고개를 돌렸다. 엘리제가 깔깔 웃었다.
"남자친구 신경쓰는 거야? 정하도 많이 귀여워졌어."
"갑자기……."
"뭐 어때. 옛 연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해줘."
엘리제가 정하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뒤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수현과 일행들을 향했다. 엘리제와 정하의 만남으로 잠시 웅성거리던 연회는 다시 자신들만의 흐름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잔을 부딪치고 피를 마시고.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고.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엘리제에요. 제 연회에 와주어서 고마워요.
엘리제가 싱긋 웃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적색 머리카락이 신기한지 올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고 잠깐 쳐다보았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실 이 아이, 정하는 제 옛 연인이었답니다."
엘리제가 생긋 웃었다. 일행 중에서도 소년이 미세하게 반응하는 걸 놓치지 않는다. 자극하는 보람이 있는 꼬마네. 엘리제가 입술을 혀로 축였다. 지루하던 연회가 갑자기 재미있어졌다. 엘리제가 정하의 팔짱을 낀다.
"사실 첫키스도 제가 가져갔었죠. 후훗. 어쨌거나, 서로 많이 좋아했는데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네요. 부디 여러분들이 정하를 행복하게 해주길 바래요."
엘리가 소년을 쳐다보며 말했다. 소년은 가만히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정하가 남자를 싫어한 게 아니라 그냥 엄청난 얼굴밝힘증이었나. 소년의 아름다운 용모에 엘리제 또한 순간 혹했다. 눈동자는 정하와 같은 칠흑인데, 그보다도 어둡다. 마치 정하를 닮은 듯하면서도 더 깊은, 묘한 분위기의 소년이었다.
고요한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려 돌을 던지는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엘리제는 갑자기 정하의 뺨에 키스했다.
소년의 얼굴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한 번 도발해봤는데 차분하네. 엘리제는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을 반성했다.
"그럼, 모쪼록 즐기시길."
아직 연회는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았다. 뱀파이어의 연회가 괜히 피와 향락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엘리제는 우아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몸을 돌렸다. 정하, 정하를 만났어. 잘 지내고 있네. 그녀의 긴 잠 속에서 몇 번이고 등장했던 아름다운 흑발의 뱀파이어는 꿈과 다를 것이 없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 축복이지만 때로는 조금 슬프다.
엘리제가 그녀를 수행하던 이들에게 말했다.
"잠깐 내 방에 들르고 올게."
그녀의 방에는 백 년을 그대로 자리를 지켰던 장신구들이 있을 것이다. 이젠 그녀의 연인이 아니지만, 한때 그녀의 품에서 새근거리며 잠들었던 소녀를 위하여 몇 가지 선물하고 싶어졌다. 엘리제가 자신의 방으로 가, 문을 열었다.
방으로 들어서 문을 닫은 순간, 그녀는 낯선 그림자를 눈치챘다.
순간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입에서 송곳니가 도드라지고 마력이 끓어오른다. 침입자는 웃고 있었다.
"너는……."
분명 정하의 애인이었던 소년이다.
소년이 자신에게 다가왔다. 엘리제가 불안감에 자기방어를 위해 힘을 흩뿌렸는데, 그녀의 힘은 마치 어둠에 잠긴 것처럼 스러져버렸다. 엘리제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방을 휘감은 칠흑의 힘을 감지할 수 있다.
소년이 싸늘하게 웃는가 싶었다. 그리고.
소년이 체중을 실어서 엘리제의 배를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