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93화 (93/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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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해피 엔드 트리거

"야 결국 다 돈이다. 니가 지금 더 한발짝 못나가고 어영부영거리는 것도 니가 돈이 없으니까, 니가 제수씨보다 집안이, 아니 돈이 모자라니까 자신도 없고 그런 거 아냐. 엉?"

"에이, 형 취했어 소리 죽여, 죽여."

"뭐? 제수씨가 그렇게 죽여줘?"

"푸하하, 무슨 소리야."

둘이 취해 어깨동무하며 밤길을 걷는다.

비틀거리다가 앞에서 걸어오는 행인을 발견하고, 영진이 재균을 밀어 벽에 몸을 붙인다. 재균이 벽에 기대서 무어라 중얼거렸다.

"에이, 로또나 해. 로또. 복권. 저어기 있네 편의점. 가서 로또나 하자 영진아."

"나 그런 거 안해."

"왜 안해."

"어차피 안되는 거. 확률상 뻔해. 난 그런 거에 안기대."

"임마, 홈런을 치려면 일단 배트를 휘둘러야 되는 법이다. 니가 한 장이라도 사는 순간 제로는 아닌 거야."

재균이 영진을 끌었다. 영진이 웃으며 재균을 따른다. 두 남자는 네온사인도 꺼진 밤의 거리를 걸으며 제목도 모를 노래들을 흥얼거린다.

영진이 문득 하늘을 올려보았다. 까만 하늘에 달 하나, 그리고 이따금씩 빛나는 별만 두어개였다.

별이 없어서 좋다.

검은 도화지 같은 밤하늘은 그녀를 떠올리기 적당하니까.

몸은 괜찮을지 걱정이 된다.

영진은 그녀와 결혼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완성이다. 그녀와 결합함으로서 그의 삶은 완벽해질 것이다. 불완전한 지금의 그로서는 그것을 그릴 수조차 없으니 그저 애타게 갈망할 밖에. 그리고 애타는 심상의 자락에서 지윤과 영진은 함께 웃고 있을 테다.

영진이 손을 뻗어 달을 움키고는, 낮게 웃는다.

그녀는 저 달 같은 존재였다. 그로서는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녀를 얻었다. 이제는 더 나아가 평생을 함께할 그때에, 한없이 가깝다.

내가 좀 더 나은 놈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영진이 피식 웃는다. 그녀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치매에 누나는 창녀다. 어린 시절은 늘 가난했고, 지금도 그 수렁을 벗어나지 못해 허덕인다. 외모가 빼어나지도 않고, 돈을 잘 벌지도 못한다. 이 비루한 삶에서 자랑할 것은 오로지 하나, 너를 얻었다는 것이다.

선녀를 추락시킨 나무꾼의 심정으로, 네게 전한다.

나와 결혼해줄래.

이 장면은 그릴 수 있다. 지윤은 의자에 앉아 있을 것이다. 어디이든 그녀가 앉은 곳은 휘황한 왕좌가 되고, 그녀 앞의 광대인 자신은 정중히 무릎을 꿇고 그녀를 청한다. 그리고 이 비천한 광대는 그녀에게 반지를 끼워주며 영원히 함께 하자고 속삭이겠지. 터질 것 같은 진심을 담아서, 가슴을 갈라 보여주고 싶은 그 애정으로 사랑한다 말할 것이다. 그녀가 대답하는 순간 광대는 여왕을 얻은 왕의 신분이 된다.

영진은 하늘을 향해, 그 말을 속삭여본다.

편의점 문이 열리고 재균이 손짓한다. 아르바이트생의 난감한 얼굴이 보였다. 영진은 다시 픽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

지윤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영진은 수술실 바깥에 앉아 있다.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어대는 남학생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남학생은 손끝을 입에서 떼어내고 한동안 어쩔 줄을 몰라 헤매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인다.

십분에서 이십분, 한 시간도 안되는 그 짧은 시간이 이 녀석에게는 마치 영원처럼 길겠지.

하지만 아이에게는 정말로 영원한 끝이란다.

그 말은 삼키고, 남학생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했다. 이내 수술실에서 의사가 나온다.

"끝났다."

"애는 괜찮습니까?"

"애라면 어느 쪽?"

그의 대꾸에 영진이 어색하게 웃는다. 그의 고등학교 선배인 산부인과 의사는, 씩 웃으며 영진의 가슴을 툭, 건드린다.

"표정 펴라. 수술은 잘 끝났다. 학생한테는 문제 없을 거다."

"고맙습니다."

"고마우면 앞으로 이런 일 없게 잘 가르쳐."

"네."

"첫끼는 죽으로 주고 이후엔 식사해도 돼. 이틀은 걷기 좀 힘들 거고…… 자세한 건 페이퍼에 다 있으니까 나중에 받아가."

"네. 수고하셨어요."

"고생은 애가 했지."

그 애가 어느 쪽인지는 특정하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뒤에 서 있던 남학생이 고개를 꾸벅 숙인다. 의사는 쓰게 웃으며 그냥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휘휘 걸어갔다.

병원 앞에서 여학생과 남학생에게 죽 사먹고 택시 타라고 몇 만원을 쥐어주자 둘은 다시 훌쩍이며 고맙다고 고개를 숙인다. 영진은 우는 아이들에게 더 할 말이 없어서 그저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주었다.

차에 시동을 걸며, 전에 보았던 지윤의 두 제자를 떠올린다.

남자애와 여자애, 둘 다 굉장히 수려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간만에 지윤을 만나 힘이 너무 들어갔었다. 거기에 자기 학생들 사정까지 겹쳐 보여서 과한 짓을 했다. 그 아이들은 이런 문제 없이 서로 잘 사귀는 것일까. 그러면 좋을 텐데.

그 아이들은 마치 자신이 지윤을 생각하듯 서로를 사랑할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들을 걱정하지 않겠다. 서로가 서로를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갈 테니까. 그런 만남은 평생 많지 않다.

영진이 상념을 접고 운전대를 잡는다. 지윤은 지금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어제 한 말이 부담이 되었던 걸까. 그녀도 고민하고 있을까.

띠링.

아까부터 계속해서 날아오는 메세지는 불청객의 것이다.

그의 누나가 사과하고 애원하며 돈을 요구한다. 궁지에 몰린 그녀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빚은 억단위다. 그것을 보고 머리가 어질했다. 그녀를 안도와주는 게 아니라, 못한다. 돈이 없다.

그녀 때문에, 무얼 해도 가슴 한 켠에 가시가 걸린 것 같다.

영진이 아무리 무시해도 계속해서 메세지를 보내서, 휴대폰 수신함은 계속 차오른다. 영진이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그녀에게 돈을 주다간 영진의 삶도 저당잡힐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안타까워서 어떻게든 해주고 싶다. 머리를 젓는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런 누나를 어떻게 지윤에게,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에게 설명해야할까 고민한다.

아예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까.

영진은 누나만 없었으면…… 하고 생각하다가 소스라친다.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생각하지 말자.

주말이니 푹 쉬는 거다. 지윤이 없으니, 홀로 드라이브나 해야겠다. 바다를 보러 가는 것은 어떨까. 영진이 차선을 바꾸어 달린다.

*

지윤이 눈을 떴다.

시계를 확인한다. 밤이었다.

몸을 일으키려다가 통증에 멈칫했다.

얼얼한 이물감과 함께 주말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지윤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양손으로 얼굴을 푹 가린다. 와, 진짜. 와. 지윤은 혼자 중얼거리다 팔꿈치로 매트리스를 퍽퍽 때렸다. 발을 구르다가 몸을 돌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아아아 하고 낮게 소리를 낸다.

저질렀다. 변명의 여지 없이.

수현을 찾아가 분위기에 취해 결국 안겼다. 밤새도록 수현에게 깔려 흐느끼고는, 침대에서 끌어안은 채 지쳐 잠들었다. 그리고 수현의 애무로 눈을 뜨고, 아침부터 발정난 짐승처럼 다시 그에게 다리를 벌렸다. 식사를 하고서 엉키고, 샤워하면서 엉키고, 점심을 먹고 엉키고, 주말을 온통 둘만의 성적 유희로 지새웠다.

그 시간 내내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약에라도 취한 기분으로 수현이 하라는 것 모두 따랐다. 그러자 수현은 그녀가 평생 몰랐던 쾌감을 주었다. 몇 번이고 정신을 잃어서 정말로 머리가 이상해질까봐 불안할 정도였다.

수현에게 안긴 시간들을 생각하자 다시 몸이 가볍게 들뜨며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몸이 반응한다.

길들여졌다.

교사가 학생에게.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지윤은 젖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 당해버리면 저항할 수 없다. 그녀의 세계관을 바꿔버린 섹스였다. 속궁합 따져대던 친구들이 한심했었는데,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진짜 쾌락을 알아버린 이상 이제 그것 없이는 버틸 수 없다. 그 감각은 그녀가 알던 남자의 기준들, 경제력, 외모, 성격 같은 것들을 허물어버린다.

수현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금요일부터 주말까지 내내 뒹굴어놓고도 성욕이 생기니.

지윤이 꽃잎을 어루만졌다. 조금 늘어난 듯한 건 기분탓일까. 그 커다란 물건이 하루종일 드나들었으니 무리는 아니다.

영진이 눈치 챌까.

지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행위 도중에 받았던 전화를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하다. 동시에 미안한 감정이 차오른다. 자신은 영진을 배신했다. 수현이 강요한 대로 영진보다 수현과의 잠자리가 더 좋다고 몇 번이나 고백해야 했다. 그리고 수현은 상으로 셀 수 없는 절정을 주었다. 자궁을 채우는 정액을 느끼면서 지윤은 수현을 벗어날 수 없을 거란 생각을 했다. 더 안아달라고 아양을 부리고, 애교를 떨었다. 쾌감에 취해 머리가 흐릿한 가운데 오로지 수현을 갈구했었다.

영진은 좋은 사람이다.

지윤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억눌린 소리를 지른다.

남자친구를 배신한 내가 어떻게 그를 더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이성적으로, 수현과의 관계보다는 영진과의 관계가 정상적이다. 지윤이 필사적으로 머리에서 수현을 밀어내려 애쓴다. 옳지 않다. 수현은 그녀의 제자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다름 아닌 영진이다. 이번 일은 실수다. 실수다. 잊어야 한다. 지윤이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컨트롤한다.

하지만 이미 주말 내내 길들여진 몸을 수현을 원한다.

지윤이 끙끙 앓으며 억지로 욕망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엎드리게 해서 뒤에서부터 그녀를 정복하던 수현, 자신의 물건을 청소하도록 강요하고, 부끄러운 부위까지 범하던 수현의 모습을 생각하자 몸이 달아올랐다. 남자에게 강제당하는 그 기분이 지윤에게 엄청난 흥분이었다. 피학적인 면모가 있는 걸까. 지윤은 지금 다시 수현 아래에 엎드리고 싶었다. 영진에게는 그런 것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내일은 출근인데.

지윤이 억지로 몸을 식히려 애썼다.

영진, 그리고 수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정직해지자면 수현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지금도 쾌락에서 허우적거리던 그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해 몸이 안달을 낸다. 내일 학교에서 수현을 만날 생각에 마음이 두근거린다.

문득, 휴대폰이 진동한다. 영진이다. 지윤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진동을 껐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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