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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해피 엔드 트리거
그녀는 영리하다.
따라서 타고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용모 수려하고 몸매도 날씬하다. 운동신경이 좋아 발레에 재능을 보였고 그만둔 후에는 뒤쳐졌던 공부도 금새 따라잡아 어렵지 않게 교사가 되었다. 성격은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쓰지 않을 정도로 자신만만하고 사람 사귀는 데 능숙해 모두가 그녀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그냥 영리한 것이 아니라, 영리하기까지 한 것이다.
지윤은 예민하게 수현의 낌새를 읽는다. 수현은 그 주말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녀도 겉으로는 여느 날의 일상인 것처럼 연기한다.
그녀는 수현이 뜻하려는 바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더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 지윤은 평소대로 수업하고는 수현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교실을 나왔다. 수현이 소희와 시시덕거리는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히나 억지로 눈길을 돌린다.
내가 먼저 가는 일은 없을 거다.
너도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없던 일로 치는 것도 오히려 좋지 않을까.
지윤이 휴대폰에 떠오른 영진의 메세지를 확인했다.
그 날, 수현에게 흐느끼며 전화 받았던 날에 영진이 말하고자 했던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는 관계를 진전시키고자 한다. 잠시 멈추어 눈을 감았다.
처음 그와 관계를 시작할 때면 어림도 없는 소리였겠지만, 이제는 모르겠다. 그가 최고의 남자는 아니지만, 둘은 운명처럼 만나 호감을 쌓았고 이제는 긴 시간을 함께한 연인이 되었다. 이제는 혼자인 삶을 벗어나 그와의 공전궤도로 빨려드는 것이 어쩌면 맞는 귀결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다들 그렇게 만나, 결혼하고 늙어가는 것이므로.
우리의 삶은 언제나 제한된 선택권 속에 체념하며 흘러가는 것이다.
부모님과 인사하고 싶다 말했다. 지윤은 그 모습을 그려보았다. 부모님은 반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기준에서 한참은 벗어난 남자가 영진이다. 그의 가정사는 불우했다. 지윤은 그런 고난 속에서도 바른 남자로 자란 영진이 좋았지만 부모님께는 그런 것 보이지 않겠지.
차라리 수현이 부모가 원하는 배우자상에 적합할 것이다.
아. 무슨 생각을. 지윤은 이마를 거칠게 짚었다가, 한숨 쉬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수현의 부모는 수현을 돌보지도 않지만, 결국 구체적인 수치로 표현되는 것은 그들이 쌓은 재산일 것이다.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는 수현의 성적을 감안하면 이름 대면 모두가 알 만한 대학에는 갈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이후에 얻을 사회적 지위를 시사하겠지. 용모는 과할 정도로 수려하다. 성격도 유순하니, 부모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배우자였다.
지윤은 카톡을 보고서 답장을 망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견례는 너무 이르다. 영진과의 결혼을 이따금 생각했지만 진지하지는 않았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영진과 결혼한다면 굴곡 없는 삶을 누리게 되겠지. 교사로 일하고, 주말에 방학에 놀러 다니고, 그렇게 아이를 낳고. 휴직했다가 다시 복직하고.
……시시하지 않을까.
실은 지금도.
지윤은 다시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답장했다.
오늘 같이 저녁이나 먹으면서 얘기해.
*
퇴근하려는 찰나였다.
"오늘 여자친구 만나시나봐요?"
영진이 멈칫하고 뒤돌아봤다. 유난히 그를 따르는 여학생, 김민주였다. 문학을 좋아하는 소녀로, 영진의 수업을 가장 열심히 듣는 학생이고 또한 문예부의 부장이었다. 삼학년이 되면서 동아리 활동은 뜸해졌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자신의 자작 소설을 영진에게 보여주며 감상을 요청하는 그런 여자애다.
영진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니?"
"모르세요? 선생님 여자친구분 만나시는 날엔 얼굴표정부터 달라지는 거."
손을 들어 얼굴을 짚었다.
확실히,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영진이 소리내 웃고 말았다.
"민주 너 되게 예리하다. 그래서 글을 잘 쓰나?"
"아, 그 얘기는 하지 말라니깐요."
민주가 부끄러워한다.
영진은 그녀의 습작들을 읽으며 깜짝 놀라고는 한다. 그녀의 눈은 예리해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물들을 관찰하고 자신의 심상을 덧씌우고는 했다. 그 자신은 가지지 못한 재능이었다.
"어쨌건 데이트 재밌게 하세요. 선생님."
"고맙다."
민주가 종종 걸어 교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영진은 웃고 말았다. 예쁜 소녀다. 꿈이 있고, 재능도 있었다. 거기에 노력한다. 저런 아이들은 지켜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다.
그리고 이 사람은, 지켜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지릿하게 한다.
카톡의 대화창을 열었다. 아까 나누었던 메세지를 다시 되새겨본다. 오늘 저녁하면서 이야기하자는 그녀의 메세지를 받은 이후 계속해서 들뜬 기분이다. 괜히 그녀의 프로필을 눌러 사진을 구경한다.
카페에서 빨대로 커피를 마시다가, 카메라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렌즈를 바라보는 사진이다. 이것을 찍은 것은 그였다. 그는 그녀를 찍는 게 좋았다. 언제 어디를 찍어도 아름다웠으니까.
영진이 사진 속 지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갈무리했다.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시동을 걸었다.
사진이 아닌 실제의 그녀가 그의 것이니까.
둘이 만나기로 한 곳은 고깃집이다.
지윤은 입구의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진은 문득 멈추었다. 허리를 곧게 편 자세로, 무얼 생각하는지 눈길은 하염 없이 위를 향한다. 평소보다 가라앉은 분위기로, 무엇인가를 골몰하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왠지 가슴이 저리다. 무엇이 그녀에게 저런 얼굴 짓게 하는 것인지. 혹, 그게 자신인지. 영진은 애써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윤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여, 다가오는 영진을 발견한다. 그 시무룩하던 얼굴이 곱게 휘어 웃음을 맺었다. 수면에 떨어진 물방울이 파문을 그리듯 고요히 번지는 그녀의 미소에, 영진은 저항할 수 없이 마주 웃고 만다.
"오래 기다렸어? 차는?"
"방금 왔어. 오늘 차 안가져왔어."
지윤이 일어서 함께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에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지윤에게 쏠린다. 영진은 묘한 자부심을 느꼈다.
자리를 잡고 삼겹살을 구웠다. 치익, 하고 고기 익는 소리가 났다. 영진이 고기를 곱게 늘어놓다가 눈을 들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지윤과 시선이 마주친다.
"왜?"
"그냥……."
술은 마시지 않았다.
"자기 말했던 거."
"응."
"너무 갑작스러워서……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담담하네."
"진심이니까. 난 기다릴 수 있어."
지윤이 웃는다.
영진이 쌈을 싸고 마늘을 올리는데, 지윤이 젓가락으로 착, 막는다.
"마늘 너무 먹지 마."
"왜?"
"나중에 냄새 나."
영진이 멍하니 지윤을 보다가 픽 웃었다. 둘은 마주 보며 웃고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 이야기들, 앞으로의 생각들. 그렇게 저녁을 마무리하고는 다시 일어나 지윤의 집을 향한다.
지윤은 생각했다.
이게 맞는 일이다.
수현과의 일은 없던 것으로, 잊어버리자.
그렇게 지윤은 죄사하듯 영진에게 안긴다. 그와의 관계로 어제 맺은 부정한 행위를 지울 수 있는 것처럼 영진에게 몸을 연다.
*
"하아, 하아……."
영진은 무언가 낯선 것을 느낀다.
그녀의 몸이 전보다 예민하고, 뜨겁다.
그리고 처음 보는 표정을 짓게 되었다. 모르던 버릇이 생겼다.
이건 무슨 뜻일까. 허리를 흔들면서도 가슴 한켠에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떨쳐내려 영진은 더 거세게 허리를 흔들었다. 지윤이 영진의 목에 팔을 감으며 다리로 영진의 허리를 감쌌다. 영진은 구슬땀을 흘리며, 더 버티지 못하고 곧 사정할 것 같아 필사적으로 컨트롤했다.
대개의 지윤은 영진을 위해 호흡을 조절하고는 했는데, 지금 그녀는 더 해달라는 듯 영진을 옭아매고 쥐어짜낸다.
영진은 버티지 못하고 사정하고 만다.
"하윽. 흐……."
영진이 그녀를 껴안고 늘어진다. 지윤이 허리를 움찔거린다.
"오늘 평소와 다른데."
"바보."
지윤은 영진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얼굴을 감춘다.
가슴이 크게 두근거린다.
이걸로 끝이라고.
말도 안돼.
지윤이 눈을 감았다. 안에서 흐르는 영진의 정액이 느껴진다. 영진은 이미 두 번 사정했다. 오늘의 행위는 이로 끝일 것이다.
…….
영진의 몸은 수현의 그것처럼 매끄럽고 늘씬하지도, 단단하지도 않다.
자신의 깊은 곳을 찔러주지도 못한다.
지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미칠 것 같아.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영진이 허리를 흔들 때마다 지윤은 수현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배운 기쁨 때문에, 이제 이런 걸로는 절대로 만족할 수가 없다. 입술을 깨문다. 영진과의 행위는 불씨만 틔웠을 뿐 절정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영진의 숨이 고르게 이어진다. 아랫배에 닿은 그의 물건은 다시 발기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자기 피곤해?"
"으응……."
지윤은 눈을 질끈 감는다. 수현에게 질리도록 안겨서 목이 쉬도록 신음하던 그때가 떠올라 아래가 젖어든다. 하지만, 그녀를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없다.
아…….
지윤은 울고 싶어졌다.
학교에서 자신을 향해 그저 싱긋 웃던 수현의 얼굴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