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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259화 (259/287)

〈 259화 〉 26. 개선 (3)

* * *

"머리 아파."

허유에게 사지를 뜯기는 꿈을 꿨다.

충분히 있을 수 있었던 가능성이다.

수천, 수만, 수십만에 가까운 선택지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실패하지 않고 올바른 정답을 고른 끝에 도달한 승리였다.

한 번이라도 실수를 저질렀다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약해져서 칼끝이 무디어졌다면, 나는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허유만 그런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내가 거쳐온 강적 중 만만한 상대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승리를 거둔 후에도 한동안은 그 적에게 패배하는 악몽을 꾸곤 했다.

허유가 나오는 악몽은 도대체 얼마나 오래 갈까.

나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한 달은 충분히 갈 것이라고 본다.

"으……, 아야야."

눈을 뜬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래도 제때 눈을 뜬 것 같다. 창밖으로 보이는 아침햇살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보통 크게 다친 후 입원했을 때는 너무 일찍 일어나거나, 혹은 너무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하루 컨디션을 망치곤 하는데, 오늘은 어쩐 일로 제때 눈이 뜨였다.

고통과 함께 졸음이 쏟아지려 하지만 수면의 유혹에 넘어가면 안 된다.

목과 허리에 힘을 주고 상반신을 일으킨다.

붕대와 깁스로 고정된 오른팔을 들어서 눈을 부볐다. 하품과 함께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상처가 터질 뻔했다.

파비아는 호언장담한 것처럼 밤새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건 알겠다. 그건 알겠는데……, 쟤 뺨은 도대체 왜 그래?

"으으……, 사제…… 좋은 아침……"

누가 밤새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퉁퉁 불어있다. 파비아는 피부색이 짙은 편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두 뺨이 어마어마하게 붉어진 상태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꼴이 무척이나 우스꽝스러운 탓에 나는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다. 여기서 웃음을 터트렸으면 진짜 상처가 터졌을지도 모른다.

"파비아, 너 뺨은 도대체 왜 그래?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후후. 사제는 모를 거야."

파비아가 허탈하게 웃었다.

시선이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탓에 죽을 고비를 넘나든 역전의 용사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뺨이 퉁퉁 부어 있는 꼴로 저러니까 그냥 웃기기만 하다.

파비아는 진지한 표정에는 소질이 없다.

"밤새도록……, 나 자신의 번뇌와 맞서 싸웠거든……."

"그건 또 무슨. 그런데 파비아 너, 번뇌 같은 어려운 말도 배웠어?"

"아 그건 있잖아……. 으, 뭐, 그 얘기는 나중에!"

도대체 어느 새?

묘하게 기특하게 느껴진다.

"그보다 사제, 몸 상태는 좀 어때?"

"조금 더 회복해야 할 것 같아. 솔직히 지금은 빈말로라도 건강하다고 할 수 없지."

팔에도 깁스, 다리에도 깁스, 목이나 허리에도 마법적인 처치가 되어 있다.

깁스를 풀 때까지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역시 그렇지……? 사제가 건강해질 때까지는……, 나도……"

파비아의 귀가 움찔 움찔 움직인다. 시선도 힐끔힐끔. 파비아는 포커페이스에 소질이 없을 뿐더러, 시선 처리도 전혀 못한다. 안절부절한 모습이다.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냥 보고만 있어도 알겠다.

하지만 파비아 정도면 마음씀씀이가 좋은 편이다. 연금술사는 내 몸 상태 같은 건 하나도 고려해주지 않고 마구 덮치니까.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린 다음, 고개를 들어서 파비아와 시선을 맞췄다.

"파비아."

"어, 으, 사제. 왜 그래?"

"좀 있다 바람 좀 쐬러 갈래?"

* * *

파비아가 미는 휠체어에 실려서 나아간다.

아침, 그리고 점심을 거친 끝에 간신히 오른팔의 깁스를 풀었지만 아직 나는 두 다리를 전혀 쓸 수 없는 상황이다. 흰 깁스가 얄미울 정도로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다.

오른팔도 그동안 쓰지 않은 탓에 근력 손실이 있다. 나는 아직 약 냄새도 빠지지 않은 오른손에 악력기를 쥐고 꾸욱 꾸욱 눌렀다. 마력도 못 쓰는 상황인데 신체 능력까지 망가지면 진짜로 곤란해진다.

"그런데 팔이 다리보다 먼저 나았네? 신기하다."

파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검을 휘두르는 오른팔보다 다리 쪽이 더 심하게 다쳤다는 사실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이다.

나는 깁스를 한 탓에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발가락을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이건 외상이 아니거든. 모두 안쪽에서 파괴된 거야. 그러니까 당연히, 무게를 버티는 두 다리가 입은 부상이 제일 클 수밖에 없지."

검왕검이 과도한 마력의 유입을 견디지 못하고 파괴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거대한 마력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그 수준에 맞는 기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휘두르는 마력에 비해서 기술은 아직 수준이 떨어졌기 때문에, 거대한 마력은 나 자신의 육체와 검왕검 자신까지 파괴하고 말았다.

"아프진 않아……?"

"충분히 버틸만 해."

"그래도 너무 무리하면 안 돼. 사제는 몸이 재산인 사람이니까!"

파비아의 시선에서 걱정이 뚝뚝 떨어진다. 얘도 샤를로트와 비슷한 느낌이다. 상대방이 너무 깨끗해서 오히려 내가 부끄럽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그 마음을 느끼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 구석이 후끈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파비아는 훌륭한 사저였다.

휠체어에 실린 채로 병원 부지 내에 있는 공원을 돌았다. 나도 여기에 여러 차례 신세를 진 적이 있어서 아는데, 경치가 매우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서 산책하기 정말 좋다.

하지만 지금은 산책할 맛이 덜하다.

꽃도, 나무도 모조리 불타고 쓸려 나간 탓에 공원이 엉망이었다.

허유와의 전투가 남긴 또 하나의 흔적이다.

마지막 순간, 나와 허유의 전투 능력은 물리법칙의 틀을 완전히 깨부수는 수준이었다. 팔을 휘두르고 다리를 내지를 때마다 폭풍을 동반한 기상변화가 발생했다.

사람들이 제때 방공호에 들어간 탓에 인적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물적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나도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잘 실감이 안 났는데 바깥에 나와서 보니까 확실하게 느껴진다.

병원의 건물 외벽에도 비참하게 균열이 가 있었다.

"아, 사제. 저게 신경 쓰여?"

파비아가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들은 이야기를 입에 담기 시작했다.

"루이스 언니한테 들었는데, 그래도 병원은 피해가 덜한 편이래. 사제하고 그 나쁜 녀석이 싸운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병원에는 그, 보호 마법 같은 게 상시로 걸려 있다고? 그렇게 들었어."

"병원은 최중요 시설이니까."

그런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으니까 기가 차는 거다.

나와 허유가 싸운 위치에서 수십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좌표에 있는 데다가 보호 마법까지 철저하게 걸려 있었는데도 이 꼴이니까.

과연 다른 곳의 상태는 어떨까.

병원이 이 모양인 걸 보면 대충 짐작은 가는데.

"그치만 사제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안 끝났을 거야. 그치?"

"그랬겠지."

파비아가 휠체어의 손잡이를 말아쥐며 말했다. 나도 그 표현에 동의했다.

허유는 일개 인간인 내게 패배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본체를 드러냈다. 놈의 본체는 저 드넓은 하늘을 가득 메우고도 남을 정도로 커다란 거인이었다.

그 입에서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내가 천변무궁류의 일식필살검으로 맞받아치긴 했지만, 혹시 내 힘이 부족했다면 도대체 얼마나 커다란 피해가 발생했을까.

직접 힘겨루기를 했던 나는 그것이 지상에 꽂힐 경우 벌어질 참상을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파비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궁금한 거?"

"응. 너하고 내가 거의 삼 개월만에 다시 봤잖아."

"그랬지이……. 꿈에 사제가 나올 정도로 사제 금단증상에 시달렸었어……."

그건 도대체 뭘까.

언어를 순서대로 배운 게 아니라서 그런지, 파비아의 어휘는 가끔씩 나조차 해석하기 어려울 정도로 괴상망측할 때가 있었다.

내가 보고 싶었다는 소리겠지? 아마도.

"아무튼, 갑자기 네 실력이 확 늘어난 거 같아서 신경이 좀 쓰였거든. 고작 삼 개월 동안 어마어마하게 강해졌잖아."

예전의 파비아가 특급 모험가 기준으로 말석에 위치한 실력이었는데, 지금의 파비아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된다.

특급이라는 범위 내에서 분류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이 크게 늘어나 있었다.

일대일이라면 스페트로조차 파비아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삼 개월 동안 파비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사제는 그게 신경 쓰였어?"

"그래, 갑작스런 실력 상승에는 평범하지 않은 수단이 사용되는 법이잖아. 그게 혹시나 네 건강을 해치지는 않을지 신경 쓰여서."

흥미도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나 역시 온갖 싸움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일반적이지 않은 수단을 자주 사용해왔다. 그리고 그 대가에 대해서도 빠삭하다고 자부한다.

지금 내가 이 꼴이 되어 있는 것 또한 내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억지로 사용한 대가였으니까.

그래서 파비아의 갑작스런 실력 상승을 보았을 때 감탄과 함께 두려움을 느꼈었다.

큰 힘에는 큰 대가가 따르는 법이기에.

"으, 어려워서 잘 모르겠지만. 쉽게 말해서 사제가 날 걱정하고 있다는 소리지?"

"맞아."

완벽하게 이해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핵심은 전해졌다. 내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파비아가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히히, 기쁘다. 역시 내가 사제 하나는 제대로 뒀다니까?"

"너하고 함께 수련한 루이스가 아무 말 없는 걸 보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알아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사저의 일이다.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하지.

"으음, 괜찮지 않을까? 아마도."

"아마도?"

내 사저의 정신머리는 도대체……

하지만 파비아의 표정에는 확신이 있었다. 웃는 얼굴로 스스로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또 한 사람의 내가 준 힘이거든."

"또 한 사람의 너……, 라는 건."

"응응. 내 안에 있는, 또 한 사람의 나야."

파비아의 손가락이 얼굴에서 가슴으로 내려왔다. 가슴을 손가락 끝으로 가리킨다.

"사제는 잘 모르겠지만……, 그 니르…… 사원에는 스스로의 내면을 시험하는 연못이 있거든.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으로 정신 수양을 하는? 그런 수행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이래."

중간에 어색하게 말이 끊어진 건 아마 니르바나 사원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탓이 아닐까 싶다.

파비아는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살짝 웃으며, 질문했다.

"거기에서 만난거야? 또 한 사람의 너를?"

"응. 원래는 자기가 나서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대. 그래서 내게 힘을 줘서 대신 싸우게 한 거야."

파비아가 양손을 들어서 쥐락펴락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자세한 의미를 해석하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본인 나름대로 또 한 사람의 파비아가 가지고 있는 강함을 표현하려는 행동으로 보인다.

"그 힘은 지금도 쓸 수 있어?"

"응. 그치만 함부로 쓰면 안 돼. 너무 세서 힘조절이 안 되거든."

펼쳤던 손을 다시 한 번 꽉 쥔다. 그 순간, 천변무궁류의 감각에 파비아의 마력이 잡혔다.

원래 파비아는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마력 통로와 전투 상황에서 사용하는 마력 통로를 구분해서 사용했다.

이것은 파비아 한 사람의 특징이 아니라 수준 이상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요령이다. 천지재변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일상 생활에서 휘두르기 시작하면 인간의 삶을 누릴 수 없으니까.

그런데 추가로 또 하나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파비아가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두 가지 통로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강렬한 마력을 내포한 흐름이.

예전의 파비아에게는 없었던 흐름이다.

저것이 아마도 또 한 사람의 파비아가 지금의 그녀에게 건네준 힘이 아닐까.

"그 나쁜 놈하고 싸울 때는 힘을 조절할 필요가 하나도 없어서 막 썼지만, 원래 그런 식으로 쓰면 안 되는 힘이래. 쓰고 나면 나한테 돌아오는 부담도 크고. 무지 아프거든."

그때의 고통이 떠올랐는지 파비아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표정변화가 다양해서 보고 있으면 지루하진 않다.

"하지만 내가 걱정했던 대가에 비하면 심하진 않네. 그게 다야?"

"응응. 그러니까 사제가 걱정 안 해도 돼."

파비아가 또 다시 생글생글 웃는다. 파비아는 자주 웃는데, 웃을 때마다 느낌이 전혀 다르다. 개과 수인이라서 그런지 인간보다 안면 근육의 움직임이 훨씬 자유로운 것 같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안심이야."

"진짜? 사제, 안심됐어?"

"그래, 안심했어."

나는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 병실로 돌아갈까."

* * *

짧은 외출을 끝내고 병실로 돌아왔다. 파비아는 나를 휠체어에서 침대 위로 옮기려고 했지만, 내가 그걸 말렸다.

"화장실……."

"……아."

파비아도 이해하는 눈치였다. 내가 의식을 차린 건 어제 저녁으로,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화장실을 가지 못했다.

잠시 허둥대긴 했지만 금세 정신을 차렸다. 나를 안고 병실 안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간다.

1인실의 화장실이었지만 보기보다 크기가 넓었다. 이 병실을 잡아준 건 마그누스로, 그는 이 싸움에서 가장 크게 부상을 입은 나를 위해서 제일 비싼 1인실을 잡아줬다.

지금까지는 비싼 값어치를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파비아에 의해 화장실로 옮겨진 후, 나는 오른팔을 써서 벽에 기대듯이 섰다. 두 다리는 아직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체중이 실리면 안쪽에서 바늘로 찔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벽에 기대서 몸을 세우는 것이 고작이다.

"바지……, 내릴게……"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파비아의 눈은 이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뜨여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바지를 내린다. 환자복의 바지는 꽤 많이 내려갔지만, 아직 부족했다. 바지를 아예 아래로 내리고 나서야 비로소 음경을 노출시킬 수 있었다.

"……으, 아……"

파비아는 거의 눈에 핏줄이 설 것 같은 시선이었다. 어설프게 들어올린 양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오랜 시간 바지 안에 들어 있었던 탓인지 내 음경은 상당한 열과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냄새도.

개과 수인인 파비아에게는 오히려 냄새 쪽이 더 치명적이었던 것 같다. 조금 전과 다르게 파비아는 빠르게 정신을 회복하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똑바로 서지 못하고 휘청거린다.

하지만 파비아는 천천히, 힘을 들여 정신을 회복했다. 그 자리에 주저 앉은 채 내 음경을 쥐고, 고개를 들어서 시선을 맞췄다.

"사제……. 시작, 시작해……"

파비아는 거의 울상이었다.

그런 표정이 나도 모르는 가학심에 불을 붙였다. 안 되겠다. 이대로 있으면,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새로운 취향에 눈을 뜨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생각했던 것보다 수치심은 크지 않았다. 사저와 나는 그런 걸 따지기에는 너무 멀리 온 관계였다.

꽤 오래 참은 탓일까. 배뇨가 상당히 길어졌다.

그런데 파비아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눈빛이 몽롱하니 빛이 없다. 하지만 이내 빠르게 고개를 내저으며 뺨을 잡아 당긴다. 시선에서 결연한 각오가 느껴졌다.

배뇨를 끝마치고 다시 바지를 올리기 위해서 파비아가 손을 댔다. 그때 나는 천연덕스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파비아 너, 혹시 발정난 거 아냐?"

"……!!"

파비아는 소리가 없었다. 하지만 소리가 필요 없을 정도로 파비아의 표정 변화가 눈에 띄었다. 턱부터 이마, 그리고 귀까지 순식간에 붉어졌다.

"삼 개월 동안 금욕하느라 그렇게 된 거 아니야? 아침부터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던데."

"그……, 으……, 으잉……, 알고 있었구나……"

"내 꿈까지 꿀 정도라며."

"으으으으……"

사저는 생각했던 것보다 순순히 인정했다. 파비아는 거짓말을 잘 못할 뿐더러, 애초에 거짓말을 잘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솔직함을 미덕이라고 본다면, 파비아는 오래 전에 부처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참기 어려워 보이던데, 꼭 그렇게 참으려는 이유가 있어?"

"……으, 솔직히 지금도 참기 어렵지만……"

조금 전부터 파비아의 시선은 상당히 바빴다. 내 얼굴과 음경을 번갈아서 쳐다보며 침을 꿀꺽 삼킨다.

하지만 파비아의 태도는 단호했다. 양손으로 엑스 자를 만들며 소리친다.

"그래도 사제가 건강해질 때까지는 안 할 거야!"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큰 의지를 얻었는지, 파비아의 태도가 더 딱딱해졌다.

"난 사제의 사저니까……, 참을 줄도 알아야 해!"

"……."

연금술사가 이 소리를 들었어야 하는 건데.

물론 그 사람이 이런 얘기 조금 듣는다고 달라지진 않겠지만.

나도 파비아가 이 정도로 단호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그 덕에 해야 할 말을 고르느라 조금 시간이 걸렸다.

잠시 고민한 후, 나는 파비아와 시선을 맞추고 말했다.

"내가 지금 하고 싶다고 말하면?"

"……."

파비아의 표정이 한 순간 풀렸다. 얼굴에 기대감이 차오른다. 하지만 정말 잠시 뿐이었다. 파비아는 처음보다 조금 힘겨운 표정으로 다시 한 번 고개를 내저었다.

"그, 그래도 나는……"

눈빛이 흔들린다. 파비아의 시선이 내 음경을 한 번 훑은 뒤, 다시 내 얼굴을 향해 돌아왔다.

그 짧은 사이에 파비아는 여러 차례 번뇌에 휘둘렸는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 사제 혹시 그거 때문에 화장실을 부탁한 거야……!?"

"뭐……, 그렇지."

파비아 입장에서 상당히 다급한 상황은 맞는 것 같다. 두뇌회전도 평소보다 빨라졌다. 파비아가 이 정도로 정확하게 내 의도를 짚어내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인데.

사실, 내 몸이 이 꼴이긴 해도 혼자 화장실을 못 갈 정도로 약해지지는 않았다. 무릎 아래쪽을 못 쓰는 상태인 건 사실이지만 바닥을 기는 식으로 이동할 수 있고, 지금처럼 벽을 짚으면 혼자서 일어날 수도 있다.

내가 그러지 않고 파비아에게 부탁한 건, 사실 이거 때문이다.

파비아를 좀 꼬시고 싶어서.

파비아는 나의 냄새에 흥분한다. 또한 그 냄새가 지독하면 지독할수록 더더욱 흥분도가 높아지는 특징까지 가지고 있다. 아마 파비아의 첫 남자가 나라서 그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나도 파비아가 이 정도로 필사적으로 버틸 줄은 몰랐다. 사저의 책임감을 잘못 계산했다.

눈을 질끈 감으며 참을 정도로, 파비아는 나를 아끼고 있는가보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이쯤되면 포기할 때도 됐는데, 나는 오히려 파비아의 모습에 흥분하고 말았다.

파비아의 순수함은 특별했다. 수컷으로 하여금 살짝 더럽히고 싶어지는 기묘한 욕구를 품게 만들었다.

……나도 많이 아픈가보다. 이런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사저가 오래 참은 것처럼 나도 오래 참았다. 아주 조금 흥분했을 뿐인데 음경에 피가 모이기 시작했다. 귀두가 커지고, 붉은 혈관이 도드라지면서 각도가 높아졌다.

귀두는 지독한 냄새를 뿜으며 파비아의 코앞에 멈춰섰다.

"아."

파비아의 조그만 코에서 피가 주륵 흘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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