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249화 (249/287)

〈 249화 〉 25. 신역?? (5)

* * *

"요하네스, 얼마나 더 싸울 수 있을 거 같아요?"

대로를 달린다. 길가에 나온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우리에게 꽂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들만이 홀로 달리고 있다. 시선이 모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검강은 앞으로 네 번, 호신강기는 세 번 정도 쓸 수 있을 것 같소."

"알았어요. 그럼 최대한 마지막까지 아껴두죠."

조금 전, 결계를 부수는 과정에서 요하네스의 검강이 특히 흔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위력은 강했다. 천변무궁류의 제삼검과 검강 둘 중에서 요하네스의 검강이 가장 빼어난 위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검강은 너무나도 흔들리고 있어서, 힘이 강할 때는 우리 중 제일이었지만 약할 때는 우리 중에서 가장 약한 위력을 보일 때가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도 시시각각 위력이 변화할 정도로 불안정하다. 언제 광기에 삼켜질지 알 수 없는 요하네스의 정신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듯한 느낌이다.

그의 광증을 잘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눈을 돌렸다.

지금 우리가 달리고 있는 장소는 제피로스 중앙에 있는 대로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보이는 사람이 적다. 외곽 쪽에 사람이 몰려 있기 때문일까?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이쪽으로 대피해 주십시오!"

대로의 중심, 가장 눈에 띄는 장소에 올리비아가 발판을 딛고 서 있었다. 그 주변에는 스페트로 일파에서 나온 사람들이 각 자리에 서서 시민들을 인솔하는 중이다.

"……."

그때, 사람들을 불러 모으던 올리비아와 나의 시선이 한 순간 마주쳤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석 달의 시간은 충분히 길었다. 전장이 언제, 어떤 식으로 확대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도시 각 구역에 존재하는 방공호를 미리 개방시켜두고, 안전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대피 훈련까지 여러 번 실시했다.

그 대피 훈련에 돈과 인력을 제공한 것이 스페트로 일파였다. 예상보다 조금 이른 타이밍에 시작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연습한 일을 연습한 대로 실행할 뿐.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여기에 있는 1위와 2위는 민간인에게 피해가 가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들을 전투에 집중 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런 조치는 필수였다.

올리비아의 옆을 스쳐 지나간다.

우리의 몸이 교차한 그 짧은 순간, 올리비아는 조그만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아가씨를 부탁하마."

"응."

짧게 대답하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올리비아도 돌아서서 엄지를 들었다.

멈추지 않고 달려 나간다. 대화는 작은 목소리로 이루어졌지만, 들을 만한 사람은 다 들을 만한 대화였다.

마그누스가 기특하다는 듯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좋은 친구를 두었군."

"네."

"……."

연금술사는 여전히 올리비아가 못마땅한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 이 상황에서 올리비아가 큰 도움이 된 건 사실이라 할 말이 있어도 그것을 차마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올리비아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모습을 드러낸 군인들 역시 시민들을 인솔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우리는 제1위와 2위의 얼굴이 신분증이나 마찬가지여서, 귀찮은 검문에 시간을 빼앗길 필요 없이 빠르게 통과할 수 있었다.

제피로스의 넓은 중앙대로를 달리던 중, 우리는 눈에 익은 호텔을 발견했다. 수도에서 파견된 일개 대대가 주둔하고 있는 호텔로, 그들도 나갈 준비를 마쳤는지 호텔 입구에 정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우리처럼 빠르게 돌입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싸움이 끝난 후 뒷수습은 해줄 수 있을 거다. 솔직히, 이기기는 이기더라도 마지막까지 내 다리로 서 있을 자신은 없다. 잘 쳐줘도 이기고 쓰러지는 정도가 한계이지 싶다.

호텔의 옆을 지나친다. 그들 또한 우리의 얼굴을 보았는지 우리의 등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잠시 시선을 마주치고, 다시 고개를 돌린다. 내 시선은 다시 저 멀리에 있는 성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틀림없이 허유가 새로운 수를 써서 우리들의 발을 묶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허유의 성으로 나아가는 길에 우리를 방해하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렇게 생각한 건 나 뿐만이 아니었는지 연금술사가 영 찝찝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수상할 정도로 순탄하게 흘러가서 찝찝해.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대충 짐작가는 건 있어요."

조금 전까지 나도 고민에 빠져 있었지만, 연금술사의 말을 들은 순간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연금술사의 한 마디가 생각을 새롭게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두 남자의 눈빛에도 이채가 떠오른다.

"신현이의 추측이 맞다면, 우리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대상은 그 파비아라는 소녀지. 그리고 그 파비아는 지금 결계 바깥에서 분신을 상대하느라 발이 묶여 있어."

"즉 그 파비아라는 소녀가 발이 묶여 있는 지금이 그 존재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기회로 여겨졌을지도 모르오. 실제로 그 소녀의 실력은 우리 중 누구보다도 높은 영역에 있으니."

마그누스의 대답에 요하네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내 생각도 비슷했다. 허유가 니르바나 사원에서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파비아를 경계하고 있다면, 파비아가 발이 묶인 지금이 오히려 허유에겐 기회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현재 파비아의 전투 능력은 우리 중 제일이다.

백신아조차 검술로는 파비아 이상일지 몰라도, 그릇인 나의 능력 부족으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파비아와 우리가 따로 떨어진 지금,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 파비아가 우리와 협력하게 놔두는 것보다는 먼저 들어온 우리부터 처리한 뒤 파비아까지 각개격파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걸 수도 있다.

"그럼……, 지금의 파비아는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난 무인이 아니라서 정확하게 감이 잘 안 오는데."

"아마 저와 스페트로가 힘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할 거예요."

한 달 전, 나와 스페트로는 힘을 합쳐서 허유의 분신 하나를 간신히 쓰러트렸다.

그런데 오늘 나타난 분신은 한 달 전의 분신보다 훨씬 더 강력한 존재였다. 파비아는 그런 존재를 상대로 거의 호각에 가까운 수준으로 맞서 싸우고 있었다.

지금의 파비아는 예전에 나타났던 '또 한 사람의 파비아'보다도 더 강할 가능성이 높다. '또 한 사람의 파비아'조차 스페트로와 비슷하거나 조금 높은 수준에 불과했는데, 지금의 파비아는 스페트로와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니까.

허유가 경계하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고작 3개월 만에……?"

"네, 납득하기 어렵지만요."

도대체 파비아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서로의 실력을 알아보려던 바로 그때 싸움이 벌어지는 바람에 나도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잘 됐어요. 파비아가 그 정도로 강해지지 않았더라면, 그 분신 상대로 어마어마한 희생이 나왔을 테니까."

나 한 사람의 힘으로도 분신 하나 제대로 쓰러트리지 못하고 스페트로와 힘을 합쳐야 했다. 파비아의 급격한 실력 상승이 아니었다면 전력을 보존한 채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다.

"역시, 제 사저예요."

파비아는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해 주었다. 이 정도로 판을 깔아 줬는데 이기지 못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제피로스를 일주해서 바깥으로 나간다. 허유의 성은 제피로스에서 십수 킬로미터 떨어진 위치에 존재한다.

성의 근처에는 군인이나 모험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아마 이 성의 감시를 위해서 상시 대기하던 인원일 것이다.

"숨은 붙어있군. 아마 결계가 펼쳐지는 순간 피드백으로 의식을 잃은 것 같은데."

"조금 뒤면 군인들이 올 거예요. 뒷일은 그들에게 맡기고 저희는 어서 돌입하죠."

쓰러져 있던 사람을 한쪽에 모아둔 뒤 성의 문에 손을 댄다. 굳게 잠겨 있어서 힘을 주고 밀어도 밀릴 것 같지 않았다.

"두 사람, 준비하세요."

"음."

나는 문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돌렸다. 각자의 칼 끝에 검강이 서린다. 나는 천변무궁류의 제삼검이었다.

검을 휘두르기 위해서 자세를 잡은 그때, 문이 스스로 열렸다. 검을 휘두르던 우리 세 사람은 그대로 공격을 허공에 헛치고 말았다. 돌풍이 매섭게 몰아치며 주변의 초목을 흔들리게 하였다.

천변무궁류의 제삼검을 해제한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강기를 꺼트린 후, 보이지 않는 문의 저편을 노려본다.

마그누스가 시선을 돌리며 턱짓했다.

"들어오라는 소리인가?"

"아마도 그렇겠죠."

성은 희고, 창문이 있어서 빛이 잘 들어오는 구조였다. 그런데도 문 너머의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거대한 필터를 달아놓은 것처럼.

"둘로 쪼개지죠. 저하고 요하네스 씨는 위로 올라가서 그 녀석과 싸우고, 대장하고 선생님은 샤를로트를 찾아서 탈출해주세요."

"위치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마그누스가 질문한다. 그와 나의 시선이 위로 향한다. 최소한 허유의 위치를 못 찾아서 헤맬 일은 없었다. 이 성의 꼭대기에서 무시무시한 양의 마력의 흘러 넘치고 있다.

언뜻 보면 알 수 없지만 성의 꼭대기를 비롯한 고층 지대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공간에 간섭을 해서 풍경이 일그러진 것처럼 보인다.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꽉 죄여드는 듯한, 끝을 헤아릴 수 없는 마력.

그 마력을 쫓아 올라가기만 해도 허유를 찾을 수 있다.

허유의 위치를 찾지 못해서 길을 헤맬 일은 없었다.

하지만 샤를로트는 다르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스페트로를 통해서 전해 들은 정보 뿐.

샤를로트는 성 내부에 존재하는, 어느 거대한 수정 안에 갇혀 있다. 그게 전부다.

그렇지만 샤를로트의 위치를 알아낼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있습니다. 샤를로트는 제가 만들어준 브로치를 가지고 있어요. 샤를로트는 그걸 품 안에 넣어두고 다녔으니까……, 지금도 수정 안에 함께 갇혀 있겠죠."

"그런 걸 그 아이에게?"

"네, 샤를로트는 그렇다 치더라도 스페트로 일파는 적이 많잖아요. 그 정도 조치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하긴 예전에 네가 나 때문에 수도로 올라갈 적에도 그 아이의 호위를 부탁했었지."

마그누스가 이제야 기억 났다는 듯 옛날 일을 끄집어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브로치는 제가 만든 거지만, 그 안에 들어간 마력은 연금술사 선생님의 마력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마력이 너무 부족하다 보니 선생님의 조력을 조금 빌렸어요."

기술적인 부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마력을 공급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와 연금술사의 마력은 성질상 거의 동일한 것이라서 거부 반응도 없었고.

나는 연금술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동일한 마력은 서로 공명하는 법. 성 바깥에서는 샤를로트의 위치를 알 수 없었지만, 성에 들어가면 위치를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연금술사와 나의 마력은 거의 동일한 성질이다. 나도 감지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하지만 감지 범위가 마력의 총량에 비례하는 특성상, 아무래도 나의 감지 범위는 연금술사와 비교해서 하자가 있다.

감지할 수 있는 범위 안이라면 내가 훨씬 더 예민하게 잡아내긴 하겠지만.

"그건 알겠다. 그런데 너희 둘이 올라가겠다고? 내가 아니라?"

"네."

나는 목을 손으로 주무르며 말했다.

"어차피 전투 시간이 길진 않을 거예요. 요하네스 씨는 제가 준비를 끝마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시는 걸로 족합니다. 15초……, 아니 10초면 충분해요. 단기전에서는 대장보다 요하네스 씨가 더 낫습니다."

비록 전투 지속 시간에 하자가 생기긴 했지만, 요하네스가 광기의 영역에 발을 딛은 이후로 두 사람의 실력 차이는 상당히 벌어지게 되었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광기에 삼켜지는 요하네스의 경우 장기전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아마 이 싸움이 그렇게 길어지진 않을 것이다.

마그누스는 자존심이 크게 상한 표정이었지만 그도 머리로는 지금의 인선이 타당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샤를로트라는 아이를 탈출시킨 이후에는 나도 도우러 오마. 그때까진 죽지 말거라."

"그 전에 끝날 겁니다."

오른손으로 목을 한 번 주무르고 검을 뽑는다. 열린 문 너머로 들어가는 그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난데없이 불꽃이 쏟아져나올 수도 있고, 무기의 비가 쏟아질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선두에 나서야 하는 건 나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감지 범위는 좁을지 몰라도 감각의 예리함은 내가 제일이니까.

다른 사람이 감지할 수 없는 숨겨진 마력도 나라면 간파할 수 있다.

빛 한 점 비치지 않는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생각 외로 성 내부 구조에도 공을 많이 들인 것이 느껴진다. 바닥, 벽, 천장 할 것 없이 훌륭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나는 1층 홀을 크게 둘러 보았다. 감각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다. 1층은 안전한 것일까.

내가 허유라면 함정이나 분신을 한두 개 정도 배치해서 침입자들이 숨기고 있는 수단에 대해서 알아볼 텐데, 허유는 도대체 어떠한 수단으로 우리를 공격해올 것인가.

나는 고민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여럿 보인다. 모두 위층으로 통해 있는 것 같다.

"신현아, 샤를로트의 위치를 찾았어."

"정말인가요?"

"응. 저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될 거 같아."

"저희와는 다른 계단이네요."

연금술사가 검지로 구석에 있는 계단을 가리킨다. 나와 요하네스가 사용할 계단과 멀리 떨어진 위치에 놓인 계단이다. 허유와 샤를로트는 따로 떨어진 상태인 것 같다.

다행이다. 둘이 같은 곳에 있었다면 상황이 더 귀찮아졌을 테니까.

허유는 샤를로트를 인질로 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그게 아니면 샤를로트를 인질로 잡을 여유도 없는 상황이거나.

나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눈을 깜박였다.

"여기에서 갈라지죠."

"그럴까."

연금술사가 시선을 들었다. 그녀와 나의 시선이 한 순간 마주쳤다.

사실, 그녀를 데리고 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샤를로트를 구출하는데 그녀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전투 능력은 떨어지는 편이라도 지식이 많고, 술식을 분석하고 해체하는데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전투 능력의 부재로 2급 모험가에 멈춰서 있을 뿐, 그녀의 마도학자적 능력은 스텔라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전원이 목숨을 걸고 나선 이 싸움에서 단 한 사람의 전력이라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녀가 내게 떼를 썼다.

연금술사는 검을 쥔 내 손에 손바닥을 포개었다. 그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 시선을 본 순간 알았다.

잠시 고민하면서도 허리를 굽혔다. 그녀는 드물게도 내 입술이 아니라 뺨에 입술을 맞추었다. 이런 적은 지금까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녀답지 않은 순수함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승리의 여신이 주는 키스야. ……그럼, 열심히 해."

연금술사가 몸을 돌렸다. 나도 마찬가지, 어쩌다보니 잠시 멈춰서긴 했는데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오른쪽 뺨에 남은 감촉을 잊으려고 노력하면서 요하네스를 재촉했다.

"……깨가 쏟아지는군."

"좀 닥쳐봐요."

에라이, 이 망할 아저씨들 같으니.

누가 나이 먹은 아저씨들 아니랄까봐 날 흐뭇하게 바라보는 꼴이 똑같았다. 남의 연애가 그렇게 재미있나.

* * *

"너하고 신현이가 그런 관계가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었는데."

연금술사와 마그누스는 샤를로트를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감지에 능한 연금술사가 앞서고 마그누스가 그 뒤를 쫓는 상황이다. 달리고, 달리고, 달린다.

마그누스는 초조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평소부터 궁금하던 화제를 입에 담았다.

제피로스를 근거지로 활동했던 마그누스는 오래 전부터 연금술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제일 가는 연금술사이며 마도학자. 그리고 천하제일의 괴짜.

실력은 있었지만, 그다지 붙임성이 좋은 성격은 아니었다. 마그누스도 데면데면하게 알고 지냈을 뿐. 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그누스 쪽에서 연금술사를 질색했다.

그런데 연금술사의 모습이 최근 10년 간 눈에 띄게 달라졌다. 백신현이 연금술사의 제자로 들어간 10여년 전의 어느 날이 기점이었다.

"너희는 도대체 어쩌다가 만나게 된 거냐? 네가 먼저 끌어 들였어?"

"신현이 쪽에서 먼저 다가왔었어. 내가 제피로스에서 가장 지식이 해박한 사람이라는 소문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다짜고짜 찾아와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졸라댔지."

연금술사는 앞만 보며 달리고 있었다.

한편 마그누스는 연금술사가 언급한 그 소문에 대해서 짚이는 부분이 있었다.

과거, 노예 검투장을 둘러싼 사건이 끝난 뒤 그는 때때로 백신현과 만나서 그에게 조언을 해주곤 했다. 당시 백신현은 다른 세계 출신으로,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교육 시설을 전전하던 처지였다.

그때 백신현은 그에게 이 도시에서 가장 지식이 해박한 사람을 질문 했었고, 마그누스는 그 질문에 연금술사의 이름을 입에 담았던 기억이 있다.

성격적으로 상당히 하자가 많은 인물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이면서.

마그누스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의 인연을 맺어준 셈이다.

"제자 같은 건 받지 않을 생각이라 처음에는 거부 했었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신현이는 고집이 세잖아. 밤낮 가리지 않고 날 쫓아 다니길래……, 얼마나 잘 하는지 한 번 보려고 일단 조수로 들였지."

"그래서?"

"꽤……, 잘 하더라고. 눈치도 빠르고 힘도 좋아서, 상당히 편리했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그누스 역시 연금술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백신현은 우수한 인재였다. 아니, 우수한 인재가 아니었다면 그런 체질을 짊어진 상태로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모험가의 길을 걷고 있지만 사실 뭘 해도 성공할 인간이다.

10여년 전, 노예 검투장에서 피투성이로 군림하던 소년을 찾아낸 그 순간부터 달라지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지켜볼까……, 하고 생각 했는데 어느 새 10년이 지나 있었어. 그 동안 신현이의 얼굴에서는 어린 티가 사라졌고, 키도 엄청나게 커졌지."

연금술사가 살짝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다.

"꽤 괜찮은 남자가 되어 있었어. 남에게 주기 아까울 정도로."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줄이야."

"무슨 불만이라도?"

"아니, 그런 건 아냐. 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전투 능력으로 따졌을 때 연금술사는 마그누스의 상대가 전혀 되지 못한다. 하지만 한 순간, 마그누스는 연금술사의 살기에 눌려서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마그누스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은 뒤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죽지 않게 노력해라. 너는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떠나지 마. 그렇게 되면 아마 신현이는 평생 극복하지 못할 거다."

"알고 있어."

일반적으로 격이 다르다고 평가 받는 특급 모험가. 그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위치한 이들에게도 쉽지 않은 싸움이다.

전투 능력만 따졌을 때 2급에 지나지 않는 연금술사에게는 지나치게 위험한 전장이다. 그녀 정도의 목숨은 언제라도 개미처럼 짓눌려서 사라질 수 있다.

연금술사도 그 사실을 알고 뛰어 들었다. 마그누스가 새삼스럽게 다시 짚어줄 것도 없는 문제였다.

어차피 패배하면 다 끝장이다. 그럴 바에야 연금술사는 싸움의 최전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쪽은 징그러울 정도로 신현이를 챙기네. 과보호 하는 것도 아니고."

"뭐……, 내가 가르친 아이 중에서 특히 우수한 친구니까."

"그게 다는 아니잖아? 그쪽의 과거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어. 신현이에게 누군가를 비춰 보고 있는 거지?"

"완전히 닮은 건 아니다. 나이 차이도 꽤 나. 살아 있었다면 신현이보다 여덟 살에서 아홉 살 정도 많았을 거다."

책이나 신문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연금술사처럼 그 시대를 직접 살아본 사람이 아니면 모르는, 마그누스의 과거 속에 존재하는 이야기.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람 중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연금술사와 요하네스, 그리고 스페트로가 전부일 것이다.

꽤 오래 전 이야기다. 20년도 더 되었으니까.

마그누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스텔라는 알고 있어?"

"뒷조사를 한다고 나오는 내용은 아니니까, 아마 모르고 있겠지."

그가 변명하듯 대답한다. 원래 스텔라와 마그누스는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2위와 3위,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먼 사이였다. 스텔라에게 마그누스는 뛰어 넘어야 하는 대상이었고, 마그누스는 이제껏 스텔라에게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스페트로 가문을 둘러싼 사건을 거치면서 두 사람은 눈에 띄게 사이가 좋아졌다. 스페트로에게 패배해서 함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후로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상당히 사이가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대화를 나눠보니 생각보다 이야기가 잘 통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럼 진짜로 유부남을 공략할 생각이었나."

연금술사의 눈매가 일그러진다. 오물을 보는 듯한 차디찬 눈이었다. 하지만 그 대상은 마그누스가 아니다. 멀리에 있는 다른 사람을 회상하는 얼굴이다.

"음? 그건 무슨 소리냐?"

"그런 게 있어."

연금술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도무지 이해 하지 못할 반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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