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17. 가면 검사 (5)
* * *
'군침은 무슨, 저 사람이 너하고 싸워주기는 한다냐?'
『아, 하지만 가면 검사를 알아보잖아요. 당연히 저하고 한 판 붙으러 온 거 아니겠어요?』
'그건 모르지.'
백신아는 자기 마음대로 말을 해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얘는, 이 정도면 거의 병인데.
명목상 가면 검사는 진 노인과 지금까지 마주치지 않았던 선수다. 나는 진 노인을 모르는 채 하며 관리실 쪽으로 다가갔다.
들킬 요소는 없다. 얼굴은 숨겼고, 검왕검의 검자루 부분도 다른 쇠붙이를 덧대어서 모양을 바꿔둔 상태이니까.
백신현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가면 검사의 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가면 검사 군."
그때, 관리실로 들어가려던 나를 진 노인이 멈춰세웠다.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돌린다. 진 노인은 내 목소리를 안다. 조심하는 게 좋겠지.
"말씀하시지요, 노인장."
목소리를 살짝 긁으며 변조. 나도 이런 연기에는 거의 도가 텄다. 어색하지 않게, 괜찮은 목소리가 나왔다.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지하 격투계의 수많은 고수를 굴복시킨 정체불명의 초고수, 가면 검사의 소문은 나도 들어 알고 있었네. 간신히 시간을 내서 찾아왔는데 마침 운 좋게 마주칠 수 있었군."
그러게 말이다.
진짜 운도 없지.
요즘은 이틀에 한 번씩 찾아오는 데다가 찾아오는 시간도 완전 랜덤이라, 오늘 진 노인하고 마주치게 된 건 그야말로 재수가 옴 붙었다고 말해도 할 말이 없다.
역시 나야, 재수 하나는 끝내주게 없지.
"노인장은 누구십니까?"
모르는 척, 뻔뻔하게 질문한다.
"양지에서 변변찮은 상회를 이끌고 있는 뒷방 늙은이라네."
진 노인 역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뻔뻔하게 거짓말이다.
물론, 서방에서는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 수 있지만 동방에서 진 노인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다.
이쪽의 사람이라도 신문을 즐겨 읽는다면 알 수 있을 정도다. 하여튼, 유명한 노인이니까.
"요즘은 도전 상대가 없어서 경기에 뛰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이 친구의 상대를 해줄 수 있겠나?"
"이 친구라 함은?"
고개를 돌려서 진 노인 옆에 서 있던 남자를 주목한다.
큰 키에 넓은 어깨. 체격 조건은 장기간 혼수 상태에 빠져서 근육이 줄어든 나와 비슷한 수준이다.
마력을 제외하더라도 상당한 수준으로 단련된 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에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더해지니까, 분위기가 진짜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 정도 수준에 압박감을 느끼는 것도 좀 이상하고, 그리고 이건 그냥 기분 탓이지만 묘하게 익숙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알 수 없지만……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인가?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친구일세. 가면 검사의 소문을 듣고 저 멀리 수도에서 여기까지 찾아왔지."
"저와 싸우기 위해서……?"
"그렇다네. 서두르지 않으면 자네가 뒷세계에서 아예 은퇴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진 노인은 나의 심리를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조금 놀랐다. 나는 원래 연륜이라는 말을 잘 믿지 않는 편인데, 이 노인에 한해서는 예외를 적용해도 될 거 같다.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보지 않은, 그저 소문만 무성한 인물의 행동양식을 예측하고 행동에 들어가다니.
연금술사가 이따금씩 보여주는 번뜩이는 판단력의 근간이 이것일까.
진 노인이 살짝 비켜서자 검은 가면을 쓴 남자가 나를 돌아본다. 그의 가면은 눈구멍이 뚫려있는 걸 제외하면 아무런 무늬도 찾아볼 수 없는 무면無?이었다.
마치 흑기사의 투구 같다.
"이 친구는 저 멀리 수도에서 가면 검사의 소문을 듣고 제피로스까지 찾아왔네. 그리고 뒷세계에 빠삭한 내게 부탁해서 이 지하 투기장에 도달했지."
진 노인이 나를 돌아본다.
"가면 검사를 찾아서."
"……."
이때, 백신아는 내 머릿속에서 거의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무게감 따윈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천박한 비명을 지르면서 깡총깡총 뛰어다닌다.
내가 그러하듯, 백신아도 그의 실력을 얼추 가늠한 상태다.
눈앞에 서 있는 검은 가면은 우리가 지금까지 뒷세계에서 맞붙었던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
마그누스나 스페트로에 필적할지도 모른다.
백신아는 이런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 링 네임은 알고 계실 테고……. 그쪽의 이름을 듣고 싶습니다. 본명 말고, 여기에서 쓸 이름이요."
"……조."
검은 가면이 띄엄띄엄 목소리를 높였다.
그 또한 진짜 목소리를 숨길 생각인지 상당히 긁는 톤이었다.
"조, 그렇게 불러주시오."
가면 검사와 조.
두 초인의 대결은 일주일 후로 정해졌다.
* * *
공방으로 돌아온 뒤, 연금술사에게 내게 겪었던 일에 대해서 설명했다.
"일주일 뒤? 왜 그렇게 뒤로 밀었대?"
연금술사는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다.
지금까지의 가면 검사는 그 날 시합을 잡으면 거의 당일에 출전해서 끝장을 보아왔다.
일주일이나 미룰 이유가 없다.
"그건 저 때문이에요. 지하 투기장 말고, 경기장을 다른 곳으로 수배해달라고 요청했거든요."
"네가? 어째서?"
"척 봐도 그 '조'라는 사람은 마그누스 대장이나 스페트로에 버금가는 수준의 고수더라고요. 그런 사람하고 제대로 부딪치면 지하 투기장이 아예 통째로 무너질걸요."
흘러넘치는 마력의 크기를 보았을 때, 지극히 당연한 추론이었다.
한 판 붙더라도 지하 투기장에서 부딪쳐서는 안 된다.
나와 '조'를 제외한 모든 인간이 돌더미에 파묻혀서 생매장될 것이다.
그 지하 투기장의 지부장에게 야외 경기장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했고, 준비가 완료되는 게 딱 일주일 뒤였다.
지하 투기장만이 음지의 자산인 건 아니다. 아마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그리고 상대도 저도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부딪쳤다가 금방 끝나면 아쉽잖아요."
그 어떤 불합리한 상황에서도 이겨낼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일류라지만, 할 수 있다면 최고의 컨디션으로 부딪치게 하고 싶다.
그 정도로 공을 들여야 백신아도, 그리고 가면 검사를 찾아 여기까지 온 '조'라는 남자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조'와 백신아 둘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지만.
그 정도로 수준 높은 고수와 부딪칠 수 있는 기회가 그렇게 자주 오는 게 아니다.
평생에 다시 없을 지도 모르는 중요한 싸움이다.
최고의 컨디션과 전략을 가진 채 시합에 나서는 것이 도리다.
"응. 그래서 신아는, 좋아해?"
연금술사가 턱을 괴며 질문했다.
"선생님이 지금의 신아를 보시면 아마 깜짝 놀라실 걸요. 너무 좋아해서."
"그 정도구나. 싸움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신기하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가볍게 눈짓했다. 그녀가 지금 백신아의 말과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아마 표정을 팍 구겼을 것이다.
쉬지 않고 뽈뽈 돌아다니면서 조잘대는 꼴이 딱 눈밭에 나간 강아지 같다.
흥분을 도저히 참지 못하는 모습이다.
『짜릿해, 늘 새로워. 역시 싸움이 최고야.』
저런 금치산자 같은 놈을 봤나.
"싸우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길 자신은 있어? 그 정도로 세다면 신아가 실력으로 앞선다 치더라도 정해진 시간 안에 마무리하진 못할 거 같은데."
연금술사는 지극히 당연한 의문을 토해냈다.
그녀의 말처럼, 백신아는 실력으로는 세계 제일이라도 그 어떤 수단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백신아가 세계 제일의 검사로 군림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5분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부딪친 음지 세계의 고수들은 정해진 시간 안에 마무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그 '조'라는 남자는 다르다.
스페트로와의 전투가 그랬고, 마그누스와의 비무가 그러했던 것처럼 정해진 시간 안에 마무리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
백신아는 온갖 강적과의 싸움, 그리고 음지와의 전투를 거쳐서 놀라울 정도로 실력을 늘렸지만 그럼에도 장담은 할 수 없다.
무대가 양지라면 그냥 열심히 싸우다가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만, '조'와 맞붙게 될 전장은 음지. 패배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조'의 첫 인상은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원래 사람은 겪어봐야 하는 법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 있는 연금술사도 생긴 것만 보면 꽃 하나도 제대로 못 꺾을 것 같은 가녀린 양갓집 규수처럼 보이지만, 실제 성격은 소시오패스에 가깝다.
결국 '조'의 인격은 겪어봐야 알 수 있다.
우리의 전제 조건은 무조건 승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일단 몇 가지 방법이 있어요. 그 중 제일 확실하고 효과가 증명된 전략은, 신아가 5분 동안 제가 싸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제한 시간이 다 되면 제가 차례를 이어 받아서 맞서 싸우는 거죠."
"스페트로도 그런 식으로 쓰러트렸던가. 그럼, 그걸로 갈 생각이야?"
"그게 제일 확실하긴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법으로 해보고 싶네요."
"어째서?"
연금술사가 새삼 고개를 갸웃했다.
백신아가 환경을 조성하고 내가 싸우는 전략은 이미 실전에서 그 쓰임새가 증명된 전략이다.
효과가 증명된 전략을 두고, 다른 불확실한 전략을 시도한다는 사실이 연금술사에게는 영 이상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확고하다.
어느새 백신아도 내 생각에 관심이 생긴 것인지, 소리를 죽인 채 내 말을 기다리고 있다.
"그 '조'가 도전한 상대는 제가 아니에요. '가면 검사'죠. 그리고 '가면 검사'는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입니다."
벽에 기대어 둔 검에 흘끔 시선을 움직인다.
"싸움에 나서야 하는 것도, 승리해서 영광을 손에 쥐어야 하는 것도 제가 아니라 '가면 검사'가 되어야 해요. 스페트로 때처럼 제가 승리의 영광을 붙잡는 일은 피하고 싶네요."
가면 검사.
그것은 내가 아니라 백신아를 위해서 준비된 이름이다.
"그럼 어쩔 생각이야? 처음에 네가 좀 싸우다가 신아한테 교체하려구?"
"아뇨. 그건 무리에요. 처음 본 순간, 실력 차이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마그누스 대장에게 한 수 부탁했던 그때처럼 몇 수도 못 버티고 나가 떨어지고 말 거예요."
시간을 끌고, 환경을 만드는 것도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의 내게 그러한 역할을 완수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은 없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그럼……?"
"5분 안에 '가면 검사'가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전략을 짜는 게 바람직하죠. 이게 일반적인 전투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조'의 정체가 제가 예상하는대로라면 딱 하나 그에게서 승리를 받아낼 방법이 있어요."
"네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항상 이상한 게 튀어나오던데. 아주 괴상망측하거나, 혹은 아주 치사하거나. 이번에는 어느 쪽이야?"
"둘 다예요."
"그렇구나."
연금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괴상망측하다, 치사하다, 연금술사하고도 큰 인연이 있는 단어이다.
나도 이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성격이 많이 더러워진 경향이 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건 모두 연금술사에게 나쁜 물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연금술사가 나쁘다.
나는 검을 향해 똑바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이건 솔직히 네가 생각해도 좀 지나치게 치사한 방법일 수 있어. 그러니까 전적으로 선택은 네게 맡길게. 마음에 들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전에 스페트로하고 싸웠을 때처럼 가자."
「알았어요, 검주. 말해주세요.」
"그건……"
나는 지금 생각한 전략과, 그 전략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차례로 제시했다.
「그, 그런 방법이……」
당연히 백신아는 상당히 기겁한 분위기였다.
조금, 지나치게 치사한 방법인 건 사실이다.
이걸 그대로 수행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스페트로와 맞붙었을 때의 전략을 그대로 시도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지금 내가 제시한 허황된 전략보다 좀 더 확실하기도 하다.
「너무 무모한 방법 같은데……, 저기 검주께서는 왜 그런 전략을?」
"네가 네 의지대로 싸울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짧아. 하루에 딱 한 번, 그것도 5분 뿐이지. 나는 그 짧은 시간조차 너 자신을 위해서 싸우는 게 아니라 나의 승리를 위해서 싸우는 게 껄끄럽게 느껴졌을 뿐이야."
이제는 안다.
최선을 다해서 맞서 싸운 끝에 손에 쥔 승리의 달콤함과 영광을.
하지만 그 승리의 또 다른 주역인 백신아는 정해진 5분 동안의 전투를 거친 후 곧바로 제어권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제대로 된 승리를 만끽해본 경험이 많지 않다.
승리의 미주는 달콤하다.
동료에게도 나눠주고 싶을 만큼.
그러니까 나는 백신아가 '가면 검사'로서 오롯이 5분 동안의 전투를 신나게 즐겨줬으면 좋겠다.
그것을 위해서 생각한 전략이다.
「……검주, 저 지금 살짝 감동 먹은 거 같아요.」
실제로, 백신아는 살짝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서글픈 톤은 아니고, 약간 감정이 북받친 것 같다. 몸뚱이만 제대로 있었어도 "검주우……" 하면서 내 다리에 매달리기라도 할 것 같은 목소리다.
"그래?"
「치사하고 야비하긴 하지만, 재미있어 보이네요. 그리고 검주의 호의도 있으니까……. 이번에는 그 방법대로 한 번 싸워볼래요.」
"잘 생각했어."
백신아 본인도 잘 납득 시켰겠다, 이젠 그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서 다시 수행에 들어갈 차례다.
이대로 시작해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나는 그런 걸 선호하지 않는다.
반복된 연습의 끝에 승리도 있을 수 있는 거다.
내가 흰 종이를 꺼내서 펜으로 훈련 스케줄을 짜기 위해서 책상 앞에 앉았을 때, 갑자기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예의 바른 노크였다.
고개를 돌렸다. 여기에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지? 일단 노크를 한 거 보면 루이스는 아닌데.
연금술사가 날 보며 눈짓하기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그녀와 나 사이의 상하관계는 명확하다.
다시 한 번 노크가 울린다. 그리고 나는 세번째 노크가 울리기 전에 문고리를 잡고 돌려서 손님의 얼굴을 확인했다.
나와 비슷한 체격을 가진, 나이가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니?"
제2위의 특급 모험가 마그누스. 그리고 제3위의 스텔라.
내가 잘 아는 두 남녀가 문앞에 서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