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13. 검왕을 찾아서
* * *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물론 루이스의 검술은 당대에서 손꼽히는 수준의 대단한 검술이다.
하지만 그것도 특급의 수준일 뿐. 특급조차 넘어선 영역에 있는 천변무궁류와 비교하면 큰 손색이 있다.
조금 전에 그림자가 보였던 파비아의 검술도 마찬가지다.
파르네제식 검술에 버금가는 훌륭한 검술이긴 하지만 여전히 천변무궁류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검술을 바꿔가면서 휘두른다고 해도, 모두 천변무궁류 하나만 못한 검술이다.
도대체 '저 존재'는 무엇을 위해서 저러한 형태의 검술을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
난이도로만 따졌을 때는 오히려 백신아와 부딪치는 게 더 어려웠다.
검왕검은 어째서 이 가상 공간에 저런 존재를 불러낸 것일까.
나는 짧은 고민과 함께 파르네제식 검술을 튕겨냈다. 루이스와 같은 검술이지만 완성도에는 차이가 있다.
더 빠르고 강력한 파르네제식을 알고 있는 내게 이 정도의 검극은 통하지 않는다.
힘을 주고 밀어낸 순간 그 '그림자'와 같은 존재는 튕겨나가듯이 거리를 벌리면서 충격을 경감시켰다.
아직도 파르네제식으로 덤빌 생각인가? 그게 아니면 또 다른 수가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또 다시 '그림자'와 같은 존재의 자세가 변했다.
이번에는 검술조차 아니었다.
"흑주영식살법……"
검으로 창술을 쓰려는 건가?
검을 써서 창술의 자세를 취하는 괴리.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검에는 검의 자세가 있고, 창에는 창의 자세가 있다. 강해보이는 걸 마구 뒤섞는다고 해서 최고의 무술이 나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어설프게 창의 자세를 취한 만큼 올리비아나 샤를로트에게선 보지 못한 빈틈까지 보인다.
올리비아의 창도 꺾은 내게 그런 반편이 창술이 통할 리가 없었다.
나의 의문을 뒤로 한 채 흑주영식살법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창을 쥔 상반신을 극단적으로 힘을 빼서 이완시키고, 그 상태에서 순식간에 힘을 줘서 빠른 속도와 더불어 어마어마한 위력을 얻어내는 것이 흑주영식살법의 기본이다.
칼끝을 창처럼 겨눈 채 달려드는 속도는 그야말로 번개가 달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부족하다. 흑주영식살법의 가속은 일정 거리 이상을 전진하면 급격하게 줄어드는 단점이 있다.
하물며 지금 그림자가 쓰고 있는 건 창이 아니라 검. 두 무기가 가진 리치의 차이가 문제가 된다.
나는 흑주영식살법의 공격 범위를 뒷걸음질로 벗어난 후, 앞으로 내지른 검을 뒤로 거두는 그 순간 함께 따라 들어갔다.
"……."
하지만 나는 그 상태에서 함부로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여기에서 함부로 공격해 들어가면 그 순간 흑주영식살법의 또 다른 기술에 걸리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은 검을 쓰지 않고 어깨로 부딪친다. 몸을 살짝 낮춘 후, 튕겨 올라가듯이 위로 밀어올린다.
그림자의 자세가 무너졌다. 나는 낮은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을 위에서 아래로 힘을 줘서 내려찍었다.
큼지막한 참격이 그림자의 오른쪽 어깨를 찢고 명치까지 깊숙이 꽂혔다.
그게 끝이었다.
그림자의 몸이 안개처럼 잠시 흔들리더니 그대로 흩어진다.
"……이게 끝인가?"
나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검을 내려찍은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온 행동이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거 같다.
뭐야, 이게 진짜 끝이야?
그 후로도 방심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10초, 20초…… 거의 1분 가까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진짜로, 이게 전부인 거 같다.
나는 살짝 김이 빠져서 그 자리에서 검을 검집에 되돌린 후에도 영 만족하지 못한 얼굴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이제야 좀 시동이 걸리려던 참이었는데, 영 아쉽다.
"도대체 뭐였던 걸까."
이것이 검왕검 내부에서 발생한 일인 만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겨 버리는 건 어려웠다.
검왕검은 도대체 내게 뭘 말해주고 싶어하는 걸까.
나는 살짝 고개를 내저은 후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 * *
그리고, 3일 후.
루이스는 구르제스를 떠나 홀로 근처에 있는 지방의 경찰청으로 향했다.
해신교 사태의 뒷수습을 위해서이다.
해신은 쓰러졌고, 교주도 실종됐지만 해신교를 구성하던 인원은 아직 남아있다. 루이스는 그들을 깔끔하게 제거하기 위해서 구르제스를 비록한 이 지역 전반을 총괄하는 경찰청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확보한 증거물을 체줄하고 특급 모험가 신분을 내세워서 구르제스의 해신교를 아예 엎어버릴 생각이었다.
"……."
그리고 나 역시 잠시 구르제스를 떠나서 이웃해있는 도시에 와 있었다.
마차를 좀 벌리기 위해서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구르제스에서 천년 만년 죽치고 앉아서 연구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기본적인 장비는 가져 왔지만 제피로스에 놓아두고 온 물건이 너무 많다.
그래서 아예 구르제스에서 발견한 장서나 기계 따위를 연금술사의 공방으로 싹 옮겨버릴 생각으로 여기에 왔다.
지금 당장 고생은 좀 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그쪽이 틀림없이 더 싸게 들 거다.
'음, 스페트로 가문의 문장이다. 이쪽에게 부탁해볼까.'
근처에 있는 도시를 쫙 돌아봤는데, 여기에 있는 운송 업체가 가장 괜찮아 보인다.
입구에 붙어있는 문장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스페트로 가문하고 관계가 있는 하청 업체가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인연이 있었기 때문일까. 스페트로 가문에게 일을 맡기면 뭔가 일이 좀 더 잘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디 보자, 우리가 옮겨야 하는 짐이 어느 정도였더라.
『검주, 검주. 이 정도 크기는 어때요?』
내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을 때, 검집에서 백신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은 역시나 겉멋에 신경을 쓰는 성격이라서 가장 크고 화려한 마차에 마음에 움찔한 것 같다.
'이건 너무 크지 않나? 이 정도로 큰 마차면 다룰 수 있는 마부도 드물 거 같은데.'
나 역시 마차를 다루는 기술에는 문외한이다.
크기별로 분류되어 있는 마차를 하나씩 돌아보면서 고민한다. 옮겨야 하는 짐을 양을 고려하면 좀 커다란 마차를 쓰기는 해야 하는데…….
음, 그래, 이걸로 할까.
"이 마차로 하겠습니다."
"아, 네."
결국 최고로 큰 사이즈에서 한 단계 작은 마차를 골라서 돈을 지불하고 빌렸다.
하지만, 지금 당장 멀리까지 나갈 수 있는 마부가 없기 때문에 내일까지 기다려달라는 말을 들었다.
이건 내가 재촉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에서 구르제스까지 간 뒤, 다시 제피로스까지 가야 하는 일정이니까.
잠시 기다릴 수밖에 없겠다.
"내일 아침까지 도시 입구에 오시면 마차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마차를 고용하는데 쓰인 비용은 해신을 쓰러트리고 받은 보수로 해결했다.
검왕회는 도무지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이었지만 돈 계산 하나는 철저했다. 음, 이건 좀 마음에 드네.
'그럼 내일 아침까지는 꼼짝 없이 여기에 있어야 하고……, 일단 숙소부터 잡고 나서 잠시 돌아볼까.'
『좋은 방! 전 무조건 비싼 방이 좋아요!』
'그런 식으로 돈 함부로 쓰다가 골로 가는 거야. 하지만 음,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오늘은 좋은 방을 골라서 쉬어볼까.'
해신하고 맞서 싸운 건 나와 루이스 뿐만이 아니다. 백신아 또한 그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싸워준 장본인인 만큼 녀석의 지분도 어느 정도 고려 해줘야 한다.
백신아에게 보수를 준다는 마음으로 숙소를 잡은 후 백신아를 허리에 차고 처음 보는 도시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호기심이 강한 성격인 나는 처음 보는 도시에 도착하면 하릴없이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
이곳은 구르제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도시인데, 아예 시골 어촌인 구르제스와 비교하면 입지조건이 꽤 괜찮은 편이다. 왕래하는 사람이 제법 보인다.
비슷한 입지조건인 제피로스와 비교해도 사람은 조금 더 많은 거 같다.
바다가 근처에 있는 만큼 주요 특산품은 당연히 생선. 어시장의 규모도 굉장히 크고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내일 새벽에도 열린다던데, 구르제스로 가기 전에 몇 마리 사서 가져갈까. 구르제스에선 생선 맛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까.
돌아보면 생선을 다루는 식당도 많다.
오늘은 여기에서 하나를 골라서 먹어볼까. 어딜 들어가도 실망하진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천천히 입맛을 다시고 있었을 때 갑자기 백신아가 나를 다시 불렀다.
『검주, 검주. 있잖아요. 저기 건물 2층 좀 보세요.』
"응?"
백신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든다.
내가 들어가려던 식당 옆에는 조그만 2층 짜리 건물이 있었는데, 그 건물에는 간판이 하나 붙어 있다.
낡은 간판에 대문짝만한 글씨로 '검왕회'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저기가 검왕회의 본거지인 거 같다.
구르제스하고도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심심찮게 왕래를 해온 거겠지.
'음, 어쩔까. 한 번 인사라도 하러 들어가볼까.'
『아, 시비라도 거시려구요? 전 좋아요.』
"그럴 리가 없잖아. 말 그대로 인사만 좀 하겠다는 거야."
나는 주변에 다니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 마음 속의 소리를 입으로 토해내며 백신아를 타박했다.
백신아는 안 그런 척을 하면서도 은근히 양아치 기질이 있어 보였다.
"저 사람들은 검왕에 대해서 공부해온 세월이 길잖아. 뭔가 아는 게 있을 수도 있을 거 같아서 그래."
또 다시 호기심이 동한 나는 배고픔도 잠시 잊고 검왕회의 본거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1층 건물은 카페고, 검왕회는 2층을 빌려서 쓰고 있는 것 같다.
허름한 간판이나 건물 디자인을 봤을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그다지 부유한 조직 같지는 않다.
어쩌면 우리에게 준 보수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넘겨준 것일지도 모른다.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어, 뭐야. 불이 꺼져 있네."
「오늘은 쉬는 날인가봐요.」
해신 토벌 건의 뒷수습으로 바빠서 그런 건가? 나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계단을 올라서 2층으로 향했다.
2층에는 새하얀 종이에 검왕회라는 석 자가 굵직한 필기체로 적혀 있다.
그 아래에 조그만 글씨로 '지금은 외출 중입니다. 잠시 후에 방문해 주십시오'라고 쓰여 있는 게 보인다.
일단 밥이라도 먹고 와서 다시 찾아와 볼까.
내가 그 자리에서 돌아서려던 바로 그때, 계단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검왕회를 찾아 오신 겁니까?"
"네. 검왕회의 사람들하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서."
몸을 살짝 틀어서 계단 아래쪽을 돌아본다. 그 자리에는 순한 인상의 남자가 빗자루를 들고 서 있었다.
"지금은 다들 식사하러 나가셨습니다. 30분 뒤에 다시 찾아오시면 될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하긴, 시간이 딱 그 즈음이긴 하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죄다 나가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나처럼 갑자기 손님이라도 찾아오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계단을 내려와서 친절한 남자에게 살짝 인사를 한 다음 돌아선다. 그런데 또 다시 그 남자가 나를 뒤에서 불렀다.
"혹시 급한 볼일이면 제가 대신 전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예요."
진짜로 그 정도까진 아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상당히 집요했다.
"아니면 안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제가 차는 좀 내드릴 수 있습니다. 저도 검왕회 사람이거든요."
"그런가요?"
나는 살짝 돌아서며 남자를 다시 주시했다.
사람이 남아 있기는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빗자루를 들고 있는 남자는 선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정확히는, 제가 검왕회의 회장입니다."
"그쪽이요?"
"네, 그렇습니다. ……백신현 씨."
중년 남성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지만, 나는 놀란 티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 남자가 진짜로 검왕회의 회장이라면 나에 대한 정보는 이미 알려져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검주.』
'응.'
한편 백신아는 이 남자의 모습으로부터 뭔가를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백신아가 조용히 속삭였다.
『이 사람……, 루이스 아씨보다 강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