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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99화 (99/287)

〈 99화 〉 12.5. 재충전 (4)

* * *

"야, 백신아. 그거 뭐야?"

"검주."

가까이 다가가서 어깨에 손을 얹고 말을 걸자, 그때서야 백신아는 내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행동했다.

녀석은 무척이나 허둥대는 태도였다.

물론, 백신아 자체가 평정심하고 거리가 있는 녀석인 건 사실이지만 오늘은 평소와 비교해도 느낌이 많이 다르다.

원인은 백신아의 맞은편에 서 있는 정체불명의 실루엣 때문이다.

가까이서 보아도 뭔가 형체가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다. 꼭 사람의 그림자가 실체를 얻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고 해야 할까.

또한, 이렇게 가까운 위치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검은 그림자 같은 표면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치 액체처럼 표면이 마구 출렁이는 데다가 소용돌이까지 치고 있다.

그 모습이 상당히 불길하게 느껴졌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하기 어렵다. 키를 보아하니…… 여자 같기는 한데, 도대체 이게 뭐야?

"그게 있잖아요. 여기에서 검주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머릿속으로 제가 잃어버린 옛날의 기억이 떠오르더라구요. 완전히는 아니고, 군데군데 빠진 부분은 있었지만요."

"이 공간에서 네가 부를 수 있는 건 네가 알고 있거나 한 번 붙어본 상대 뿐이지. 그럼 이건 네가 그 기억을 바탕으로 여기에 불러낸 존재라는 소린가?"

"네, 그죠. 제 기억 자체가 애매하기 때문에 영 어중간한 형태에서 끝나 버렸지만요."

획 돌아선 백신아가 검은색 실루엣의 옆에 서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실루엣의 덩치는 백신아보다는 크고, 루이스보다는 작은 정도였다.

도대체 뭘까.

내 감각이 강한 거부감을 표출하고 있다는 건, 내게 위협이 되는 상대라는 소리인데.

나는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뜬 뒤 백신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잘 모를 때는 일단 부딪쳐 봐야겠지. 백신아, 대련을 준비해줄 수 있을까? 이 녀석하고 한 번 붙어보고 싶어."

이 세계에서 나는 머릿속에 그린 물건을 그대로 현실에 불러낼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백신아의 힘을 빌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백신아의 주인은 나였지만, 이 공간의 주도권은 내가 아닌 백신아에게 있었다.

모든 것은 백신아의 도움 아래 이뤄지고 있다.

잠시 고민하던 백신아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따로 짐작가는 게 없으세요?"

"딱히. 나도 아직 여기에 있는 책을 다 훑어본 건 아니니까."

새하얀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루이스가 연금술사를 돌아보며 질문했다.

바닥에 엉덩이를 대는 순간 루이스의 몸이 무의식적으로 흠칫 튀어올랐다. 현실 세계에서 가져온 환통이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다 훑어본다고 한들 완벽하게 이해할 자신도 없고. 검왕검의 제작 공정에는 연금술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의 온갖 수준 높은 기술들이 죄다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연금술사답지 않은 힘이 없는 목소리다. 지금까지 루이스는 그녀가 이 정도로 자신 없는 태도로 말하는 걸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살짝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넘기며 연금술사가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음…… 검왕검에 대해서 조사해나가면 나갈수록, 뭔가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런 게 있어."

"의지요? 신아가 아니라, 검왕검의 의지?"

"정확히는 검왕검을 설계하고, 제작한 사람의 의지. 저 아이가 검왕검의 온갖 기능을 통솔하는 관제 인격인 건 사실이지만, 저 아이라고 검왕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건 아니잖아."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건 그렇죠. 실력은 천하제일이지만 뭔가 얼빠진 면도 있고."

루이스의 시선이 살짝 움직인다. 시선의 끝에는 백신현과 가까운 위치에서 열심히 시선을 맞추는 백신아의 모습이 있다.

연금술사와 비교하면 꽤 크지만, 루이스보다는 조그만 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흰 머리카락. 개구쟁이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다양한 표정을 보고 있을 때면 루이스도 마음이 편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 실력은 무시무시했다. 당대 제일의 특급 모험가조차 깔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재빠르고 날카로운 검격.

마치 천사와 악마의 양면성을 모두 품고 있는 듯한 소녀였다.

"……아니 뭐,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요. 그래서 그 의지가 어떻게 느껴지는데요?"

루이스는 고개를 휘휘 저은 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연금술사는 살짝 고개를 까딱거린 후, 스스로의 입술을 혀로 햝으며 대답했다.

"이건 그냥 내 학자로서의 감이지만, 신현이를 강하게 키우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 같아."

"그렇다면……?"

"일단 신현이를 강하게 키우는 건 어디까지나 준비에 불과하고, 진짜 목적은 그 다음에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연금술사는 양손을 동글게 말아서 망원경처럼 만든 다음 그걸 눈에 붙인 상태로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의 끝에는 백신현이 있다.

"어쩌면, 신현이가 더 강해지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걸지도 몰라."

"저거, 움직이게 할 수는 있을 거 같아?"

"으음…… 일단 움직일 수는 있을 거 같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이 '인물'의 자료와 세트로 쓰는 '검식'에 대한 자료가 제 안에 남아 있네요."

새하얀 머리카락의 백신아는 검은 실루엣의 앞에 서서 상반신을 굽히고 있었다. 가슴 부분에 붙어있는 뚜껑을 열고 이런저런 요소를 체크하는 중이다.

비유가 어려워서 살짝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어찌됐든 싸울 수는 있을 것 같다.

"이름도 생김새도 제대로 몰라서 '이런 형태'가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검식에 대한 자료는 제대로 남아있는 거 같아요. 이 자료를 로드시키면 아마 그 내용물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겠죠."

"명칭이나 다른 부분은 죄다 파손되어 있는데 검식에 대한 자료만 살아있는 건가. 신기한걸."

"아무래도 제가 기록하는 정보에는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는 거 같아요. 1순위가 검식, 2순위가 인물, 3순위가 물건…… 이런 순서로 되어 있고, 우선순위가 높을수록 더 철저하게 보호하는 거죠."

그래서 백신아가 가지고 있는 온갖 정보 중에서도 검식에 대한 기록만큼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는 건가.

다른 정보는 죄다 잊어버린 주제에 천변무궁류 하나만큼은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도 그런 우선순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200년간 관리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도 검식만큼은 기억하고 있는 건가. 넌 저장매체로서도 일류일지 모르겠어."

"헤, 제 얼굴에 금칠해주시니까 나쁜 기분은 아니네요."

최강의 검사는 나를 돌아보며 최고로 멋진 미소를 지었다.

"검주, 저도 어떻게 검식을 로드하는 것까진 성공했지만 내용물에 대해서는 아직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예요. 위험한 검술일수도 있으니까 주의를 기울여주세요!"

"알았어. 시작해."

"그럼, 시작합니다!"

백신아는 시꺼먼 실루엣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한 번 후려친 다음, 부리나케 달려가서 나와 그 실루엣의 중간 지점에서 멈춰섰다.

마치 심판 같은 모습이다.

「그오오오오오오오오오!!」

백신아가 실루엣을 기동시킨 그 순간 놈이 짐승처럼 굵은 포효를 내지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고, 불안정하고, 소용돌이치던 표면 위로 하나둘씩 색감이 입혀진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아직 색칠이 다 끝나지 않은 것처럼 팔과 다리 끝의 말단 부분에만 색이 입혀졌을 뿐, 나머지 부분은 여전히 검은 실루엣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그 상태가 한계인 걸까. 색감이 더해지는 게 종료된 그 순간, 검은 실루엣은 왼손을 바닥에 붙이고 세 개의 다리를 써서 내달렸다.

세 개의 다리로 가속된 속도를 그대로 오른손의 검에 싣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그 자리에서 쭉 밀려나가더니,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공격은 제때 받아냈다. 충돌각도 상당히 비틀어서 최적의 방어 자세를 굳힌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 방어 태세에도 개의치 않고 녀석의 충격은 무겁게 꽂혔다.

어마어마한 완력이다. 최소한 특급 모험가에 버금가는 수준.

그리고 그 힘을 살리는 기술도 아주 절묘했다. 무작정 휘두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힘과 속도를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는 적절한 자세였다.

"……후!"

하지만 놀라는 건 여기까지. 설령 특급 모험가 수준의 공격이라고 해도 지금의 나를 한 번에 쓰러트릴 수는 없다. 바닥에 넘어진 것도 충격을 더더욱 분산시키기 위한 나의 선택이었다.

「크아아아아악!!」

쓰러진 나의 위로 짐승의 검이 무자비하게 떨어진다. 노리는 위치는 명치. 머리를 겨누지 않은 이유는 내가 고개를 틀어서 피할 가능성을 염두해뒀기 때문일 것이다.

피격 면적이 좁은 급소를 노리는 게 아니라 피격 면적이 넓은 부위를 노려서 확실하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저 검식의 특성 같았다.

나는 쓰러진 자세에서 허리춤의 검집을 뽑아냈다. 검집을 방패처럼 세워서 가드. 동시에 오른손의 검을 움직여서 목덜미를 베어내는 궤적으로 휘두른다.

짐승처럼 울부짖은 그 존재는 파고들 때와 물러날 때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뒤로 젓혀서 회피한 뒤, 그 기세를 그대로 살려서 백덤블링과 함께 거리를 벌린다.

"……."

그 시간 동안 나는 몸을 일으켜서 자세를 추스렸다. 보기와는 다르게 꽤 강하다.

찌르기를 거의 쓰지 않고, 최대한 넓게 베어내는 방식으로 확실하게 상처를 입혀 나간 끝에 승리를 취한다.

목표로 하는 바가 명확하고, 목표 이외의 요소를 모두 제거한 깔끔한 검술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표정이 굳어 있는 이유는 전혀 다른 문제 때문이다.

나와 부딪친 이 검술은 내가 얼마 전에 겪어본 적이 있는 검술이었기 때문에.

"……뭐야, 왜 저게 파비아의 검술을 쓰고 있는 거지?"

파비아. 가상 공간 바깥에서 짐승처럼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개과 수인의 검사.

검왕의 제자이며, 어쩌면 내가 사저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는 여자.

지금의 검술은 내가 알고 있는 그녀의 검술과 상당히 많은 부분이 닮아 있었다.

그녀의 검술을 보다 수준 높게 펼치면 지금의 형태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내가 지금의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파비아가 검왕검의 제작공방 아래에 감금되어 있었던 건 검왕검이 완성되기 이전의 일로 추측된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의 검술이 검왕검의 내부에 정돈된 자료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일까.

검왕이 별도로 첨부시킨 건가?

내가 의문을 느낀 바로 그때, 갑자기 실루엣이 취한 자세가 변했다. 하지만 그 변화는 너무나도 지나친 것이었다.

같은 검술의 범주 아래에서 다른 검식을 취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별도의 체계의 검술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그것뿐만이 아니다.

저 모습, 저 자세 또한 내가 잘 알고 있는 검식이다.

저건……

"내, 내 검술이잖아?"

대련을 구경하고 있던 루이스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그래, 루이스의 말과 같았다.

저 시꺼먼 실루엣이 취한 자세는 루이스의 파르네제식 검술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었다.

하지만 원본은 아니다.

저것은 희대의 천재 루이스에 의해서 개량된, 말하자면 루이스식 파르네제 검술.

"……."

나의 고민이 깊어진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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