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무스는 이제 더는 랑제스 저택의 정원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일상 전반의 기준점이 되는 리브가 곁으로 돌아왔으니, 앞으로는 그저 무탈하고 안온한 나날만 이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그는 요즘 다른 것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근래에 그가 받는 그림 수업이었다. 혼자 수업을 받을 때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리브가 새로운 학생으로 합류한 뒤로는 안 좋던 기분이 아예 땅속으로 파고드는 중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을 마치고 별장을 나서는 디무스의 표정은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
턱을 괸 채 빠르게 스쳐 가는 창밖 풍경을 응시하던 디무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해고해야겠어.”
그러지 않아도 잔뜩 심기가 불편한 그 때문에 마차 내부는 적막하던 참이었다. 덕분에 나지막한 그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대뜸 말을 뱉은 디무스는 일자로 입술을 꾹 다물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맞은편에서 그런 디무스의 안색을 살피며 불편한 얼굴로 앉아 있던 찰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선생을 다시 찾으라는 말씀이십니까?”
“더 실력 좋은 화가는 많아.”
수업을 직접 보지 않은 찰스는 디무스의 기분이 안 좋은 원인을 정확하게 추측하지 못했다.
불친절하고 예민한 제 상사가 친절하게 전후 사정을 설명해 줄 리가 없으므로, 찰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디무스의 옆에 앉은 리브에게로 향했다.
그녀라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야기해 주리라. 또한 디무스가 저렇게 구는 이유가 단순히 본인의 기분 문제라면, 그녀가 디무스를 말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리브는 새로운 그림 선생을 구하는 게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번거롭고 시간 낭비인지 이해해 줄 정상인이니까.
찰스의 노골적이면서도 간절한 눈빛을 받은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디무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단순히 그림 실력이 좋은 것과 잘 가르치는 건 다른 문제죠.”
“로이데스 양은 학생을 지도해 본 경험이 있으시니 더 잘 아시겠군요!”
디무스가 그림 선생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능력 때문이 아니구나! 역시 변덕스럽고 까탈스러운 상사의 성정이 문제였던 것이다!
어차피 새로운 화가를 수소문해 봐야 디무스의 성정을 감당할 자가 없을 테니, 찰스로서는 더 일을 늘리지 않기를 바랐다. 따라서 그는 리브의 말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기로 했다.
반색하며 대번에 저를 추켜세워 주는 그의 태도에 리브가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제 경력이 그리 대단하지는 않아서 다른 이의 지도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
“펜던스 남작가의 영애가 오리 새끼처럼 쫓아다녔던 걸 보면 그대의 지도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하고 싶은 말만 툭 뱉고 침묵하던 디무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리브를 칭찬하는 그의 목소리에 티끌의 망설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도리어 당사자인 리브만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붉어진 얼굴로 작게 대꾸할 뿐이었다.
“…오리 새끼가 아니라 새끼 오리라고 해 주세요.”
저 말은 본인의 지도 능력에 관한 칭찬은 인정한다는 건가.
디무스와 함께 하더니 리브도 그를 닮아 점점 뻔뻔해져 가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찰스가 제 상사에게 물었다.
“아무튼 그… 로이데스 양은 지금의 그림 선생이 마음에 드시는 모양인데, 어떻게 할까요?”
은근한 그의 물음에 디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으레 그가 신경질을 부릴 때면 짓는 표정이었다.
역시 리브의 말 한마디 정도로 디무스의 까다로운 성정에 맞서는 건 무리였을까? 지레 겁을 먹은 찰스가 막 ‘새로운 화가를 찾아보겠다’라고 말을 덧붙이려는 찰나였다.
“놔둬.”
놀라움으로 인해 눈을 크게 뜨는 찰스를 짜증스럽게 본 디무스가 창밖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턱을 괴고 바깥으로 시선을 고정한 모습이 누가 봐도 심통 난 어린애였다.
곁에 앉아 그런 디무스를 가만히 살펴보던 리브가 나지막하게 말을 걸었다.
“저 때문에 그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죠?”
“처음부터 별로였어.”
마치 본인은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듯했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찰스가 봐도 지금 디무스는 퍽 옹졸한 이유로 성질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뭔지는 몰라도 그 원인에 리브가 얽혀 있는 건 확실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곤조곤 이어지는 리브의 말들이 찰스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는 선생이에요. 가르치다 보면 자신감을 북돋아 주기 위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 법이죠. 사심이 있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세상에, 디무스는 그림 선생이 리브를 칭찬했다는 이유로 저렇게 불쾌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새삼스럽게 칭찬을 빼앗겼다며 질투하는 건 아닐 테고, 아마 칭찬을 건네는 선생과 그걸 듣는 리브 사이의 분위기가 불만스러웠던 게 아닐까? 디무스의 소유욕과 독점욕이 얼마나 강한지는 찰스도 아주 잘 알았다. 당장 그가 수집한 온갖 예술 작품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물며 리브 로이데스라니. 누가 그녀에게 말만 걸어도 정색하며 노려볼 디무스인데, 그런 그의 앞에서 그녀를 칭찬했다면 뒷일이야 뻔했다. 어쩌면 디무스가 아니라 그림 선생을 위해서 그를 해고해 줘야 하지 않을까.
찰스가 진지하게 그림 선생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와중에도 리브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게다가 모두가 저와 당신의 관계를 알아요. 당신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제게 치근거릴 사람은 적어도 이 부에르노에서는 없어요.”
찰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아무렴, 그 소문을 내려고 누구보다 고생한 게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부에르노 내에서 리브는 디무스의 정부로 먼저 알려진 터라, 그 이미지를 전부 뒤바꾸기 위해 그는 별짓을 다 해야 했다.
디무스가 그녀를 위해 공개 재판을 마다하지 않고 말테와 싸웠다는 사실이야 있는 그대로 알리면 되었지만, 둘의 첫 만남이나 애정을 쌓아 가는 과정 따위는 아무래도 대중들이 듣기 좋은 방식으로 각색해야 했다. 적당히 사실과 허구를 섞어 가며 그럴듯한 연애사를 짜내느라 아돌프와 머리를 맞대고 몇 밤을 지새웠는지 모른다.
과거 자신이 한 노고를 떠올리며 눈물을 머금고 있던 찰스의 귀에 디무스의 냉소적인 대꾸가 들려왔다.
“기껏해야 연인이지.”
기껏해야 연인이라니! 그 ‘연인’이 얼마나 힘겹게 이루어진 관계인데!
도망간 리브를 찾아다니던 그 당시의 흉흉함을 제 상사는 전부 잊은 건가? 그 이후, 재판을 끝내고 부에르노에 돌아와서 뒷수습을 하느라 바빴던 건?
무려 수하들의 땀과 눈물이 만들어 낸 결실이거늘!
억울한 마음이 치솟았지만, 찰스는 올라오는 감정을 꾹 억눌렀다. 대신 연애를 시작하며 더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한 상사의 눈 밖에 나 버린, 불쌍한 그림 선생에 관해 다시 생각을 이어 갔다.
“설마 마르셀 선생님의 말을 아직도 신경 쓰고 계세요?”
그림 선생에게 어떤 식으로 본인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걸 전달해 줄지 고민하던 찰스가 경악 어린 눈으로 리브를 보았다.
그림 선생도 모자라 이젠 카밀 엘레오노르까지 언급하다니! 리브에게 호감을 품고 리브의 도주까지 도운 카밀을 디무스가 얼마나 싫어하는데!
“간언을 마다하면 좋은 결과를 맞이할 수 없지.”
“아마 마르셀 선생님은 그런 의도가 아니셨을 것 같긴 하지만…. 저는 그분의 선언이 현실성 있게 들리지 않았어요.”
“그야 당연히, 그의 말은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까.”
오만한 목소리로 대꾸한 디무스가 힐끗, 바깥의 풍경을 확인했다.
“도착했군.”
열심히 달리던 마차의 속도가 줄어들다가, 마침내 천천히 멈춰 섰다. 디무스를 살피느라 바깥 풍경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던 리브가 뒤늦게 도착지를 확인하고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택이 아니네요?”
“이번에 새롭게 단장 중인 전시관입니다. 아직 빈 자리가 많기는 하지만 미리 사람을 보내 정리해 두었으니, 바로 들어가 보셔도 됩니다.”
얼른 설명한 찰스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 뒤로 디무스가 내려서 얼떨떨한 표정을 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리브를 에스코트했다.
이번에 새로 구매해서 단장한 전시관은 아직 물건을 다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화려하게 꾸며 놓은 까닭에 미완성이라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저녁 식사는 안쪽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함께 들어가지 않으시나요?”
“제 안내는 여기까지입니다.”
환하게 불이 켜진 전시실로 향하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한 찰스가 뒤로 물러났다.
이제 그는 돌아가서 아돌프와 함께 부디 오늘의 저녁 식사가 완벽하게 마무리되길, 그리하여 상사의 예민함이 조금이라도 덜어지길 기도할 시간이었다.
***
디무스에게 여러 개의 전시관이 있다는 것은 리브도 알고 있었다.
단순히 누드 작품뿐만이 아니라 다른 예술품 중 취향에 맞는 것을 모아 둔 그런 장소들이었다. 다만 그 전시관들의 규모가 대체로 큰 편인데, 새로운 장소를 또 만들어 냈다는 게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었다.
찰스가 얼른 들어가라며 두 사람을 떠민 뒤, 전시관으로 들어서는 내내 디무스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리브는 전시관의 외관을 보며 용도를 추측해야 했다.
그림 그리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으니 아마 본인의 작품을 걸어 두기 위해 만든 장소가 아닐까? 어쩌면 그 옆에 리브의 그림도 한두 개 정도 걸릴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쪽으로.”
입구를 들어서고도 이렇다 할 실마리를 찾을 수는 없었기에, 리브는 순순히 디무스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맛있는 음식 냄새가 아련하게 풍겨오는 걸 보면 저녁 식사가 준비된 장소로 이동하고 있는….
“어?”
리브의 다리가 우뚝 멈춰 섰다.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익숙한 서명.
“여긴….”
“로이데스 부부의 작품을 수집해 둔 전시관이네.”
흔들리는 눈으로 전시된 물건을 바라보던 리브가 뒤를 돌아보았다. 디무스는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무엇으로 채워야 그대가 좋아할지 아직 모르겠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