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15)화 (115/138)

식사 후, 리브는 드디어 코리다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만남은 저택 응접실, 디무스의 눈앞에서 이루어졌다. 이쯤 되니 리브는 자매의 편안한 대화를 위해 디무스가 자리를 비워 줄 거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응접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도 리브는 내심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며칠 사이 코리다의 상태는 어떻게 되었을지,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리고 마침내 문이 열리고, 코리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리브가 몸을 벌떡 일으키자 코리다가 반색하며 외쳤다.

“언니!”

“코리다!”

며칠 만에 다시 만난 코리다는 생각보다 아주… 건강해 보였다.

물론 코리다의 상태가 나빴길 바랐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코리다의 모습과 비교하면 너무 안색이 좋아져서 놀랐을 뿐이다.

저도 모르게 우뚝 굳은 리브에게 후다닥 달려온 코리다가 리브를 꽉 끌어안았다. 리브의 몸을 끌어안은 코리다의 팔이 잘게 떨렸다.

“몸은 괜찮아?”

늘 자신이 코리다에게 건네던 질문을 반대로 받게 되자 기분이 이상했다.

늘 자신이 돌봐 주고 세심히 살펴야 했던 동생인데.

“응. 너는 어디에 있었던 거야?”

“아돌프 아저씨랑 티에리 선생님이랑 있었어. 티에리 선생님이 진찰도 봐 주셨고, 언니 기다리면서 약도 잘 먹었어. 그런데 언니 식사는 한 거야? 왜 이렇게 말랐어?”

리브의 품에 고개를 묻고 있던 코리다가 얼굴을 번쩍 들었다. 그러더니 리브의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아저씨가 밥도 안 줘?”

위로 치켜 올라간 눈매가 심상치 않았다. 말문이 막혀 잠시 침묵하던 리브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 아저씨?”

“얼굴만 예쁘게 생긴 저 아저씨!”

코리다가 당당하게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 끝에는 멀찍이 떨어져서 이쪽을 보고 있는 디무스가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코리다와의 대화가 들릴 정도로 가깝진 않았다. 그가 들었다고 한들 새삼 건방지다며 화를 낼 것 같지도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저씨라니.

아돌프가 아저씨인데 디무스도 아저씨라니.

물론 코리다의 나이를 생각하면 두 사람 모두 아저씨라고 부를 법하긴 한데….

“…너 그 말 아돌프 씨나 거트루드 박사님 앞에서도 한 건 아니지?”

“엄청 많이 했는데?”

리브가 저도 모르게 디무스의 눈치를 보았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 모를 게 분명한 그는 리브와 코리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채고는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들어서 그의 시선을 피한 리브가 코리다의 어깨를 감싸며 작은 목소리로 타일렀다.

“코리다, 그분들은 후작님을 모시는 사람들이야.”

“하지만 두 분도 저 아저씨가 얼굴만 예쁘고 성격은 더럽다는 사실에 동의하셨어.”

그야, 그건 사실이니까….

입술을 벙긋거리던 리브는 굳이 이 화제를 이어 가지 않기로 했다.

아돌프와 티에리가 따로 무어라 경고해 온 게 없으니까 괜찮겠거니 하는 회피적인 마음이 일었다.

없는 자리에서는 왕족도 욕한다는데, 그들도 수하로서 얼마나 고충이 많겠는가. 디무스와 함께 이곳 애들린데까지 온 걸 보면, 도망간 리브를 뒤쫓으면서 그들도 꽤 고생했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오죽 힘들었으면 코리다의 험담에 동조했겠어.

“그래, 일단… 그분들이 너에게 나쁘게 대한 건 없는 것 같으니 다행이네.”

“하지만 저 아저씨는 언니한테 나쁘게 대한 것 같네?”

뚱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코리다가 디무스를 흘겨보았다. 그 눈초리에 리브도 덩달아 디무스를 돌아보았다. 저를 보는 자매의 시선을 느낀 디무스가 아까보다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또 도망갈 궁리를 한다고 의심해서 강제로 자매를 떼어 놓을지도 몰랐다.

헛기침하며 얼른 시선을 거둔 리브가 코리다를 토닥이며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코리다.”

아무래도 디무스의 상태를 보니, 쉽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간 쌓인 욕정 때문인지 아니면 이곳까지 쫓아오며 누적된 분노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미지의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이 저택을 나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간 침대로 도로 끌려갈 기세라, 일단 디무스의 저 정체 모를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을 코리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직도 막막하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모른 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벗어나고 싶으면 총을 쏘라고 했다지만, 그게 가능할 리 없잖아.’

정말로 리브가 디무스를 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라면, 그는 아직도 리브가 도망간 이유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 후작님과 언니의 의견이 조금 달라서 합의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빨리 네 곁으로 가고 싶은데….”

“언니, 있잖아.”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는데, 코리다가 단호한 목소리로 리브의 말을 잘랐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리브를 보며 잠깐 주저하던 코리다가 심호흡을 한 뒤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돌프 아저씨가 애들린데 여학교의 입학 절차를 알아봐 주셨어.”

눈을 깜박이며 코리다의 말을 듣던 리브가 곧장 안색을 돌변했다.

“그 사람이 또…!”

“내가 부탁했어.”

언성을 높이려던 리브가 코리다의 대답에 멈칫했다. 그 틈을 타, 코리다가 재빨리 말했다.

“티에리 선생님이 그러는데, 무리한 여행을 하면서 몸이 이 정도 버틴 걸 보면 정말 많이 좋아진 거래.”

긴장한 것 같긴 하지만 그렇다고 충동적으로 뱉는 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두 손을 맞잡은 채 선 코리다가 진지한 눈으로 리브를 올려다보았다.

“언니, 나 계속 도망 다니는 거 힘들어. 하기 싫어.”

리브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말문을 잃고 코리다의 말을 듣던 리브가 더듬거리며 입술을 뗐다.

“도망은, 가지 않아.”

“단순히 도망가기 싫다는 게 아니라….”

코리다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언니의 핑곗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

“코리다!”

“나를 정말 언니 인생에 걸림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느끼는 부담감도 이제는 이해해 줘야 해.”

리브가 다급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코리다가 빠르게 말을 이어 갔다.

“언니 인생에서 나를 빼 줘. 앞으로 그냥 언니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좋겠어.”

코리다는 한참 전부터 할 말을 준비했던 사람처럼 거침이 없었다.

멍하게 저를 보는 언니를 물끄러미 보던 코리다가 쓰게 웃었다. 그녀는 이미 리브의 이러한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크게 놀라지 않았다.

“나 때문에 도망가지 말고, 나 때문에 도망 못 가지도 마.”

코리다가 디무스를 향해 힐끗 눈짓했다.

“사실 언니 쓰러져 있을 때 내가 한번 대들어 봤는데, 저 아저씨가 나를 죽일 것 같진 않아.”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서 있던 리브가 그 말에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생각해 봤는데, 나를 건드리면 언니가 저 아저씨를 평생 미워할 거 아니야? 그래서 날 못 건드리는 것 같아.”

코리다가 덤덤한 시선을 들어 리브와 눈을 마주쳤다. 그 눈을 보며 리브는 문득 깨달았다. 제 여동생이 아주 많이 자랐음을.

그녀가 여동생을 지켜 주기 위해 만든 커다란 새장 속 공간이 이제는 너무 좁아졌음을.

“코리다….”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 언니.”

창공을 날기 위해서는 날갯짓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언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성장한 이에게 필요한 건 안전하고 안락한 새장이 아니라, 제 날개를 온전히 펼 수 있는 창살 바깥의 세상이었다.

코리다에게도, 리브에게도.

***

알고 보니 저택 건물은 한 채가 아니었다.

리브와 디무스가 있는 곳이 본채라면, 몇 개의 별채와 고용인 숙소가 본채 뒤에 딸려 있었다. 코리다와 디무스의 수하들, 그리고 고용인들이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지척에서 대기 중이었던 그들이 다시 별채로 돌아간 뒤, 다시 본채에는 디무스와 리브만 남았다. 저택이 비워지자마자 침대로 끌고 갈 줄 알았던 디무스는 어쩐 일인지 리브를 가만 놔두었다. 덕분에 리브는 사색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리브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시간이었다. 차라리 디무스와 뒹굴기라도 했으면 쓸데없는 감정에 젖을 여력이 없었을 텐데.

“대화가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지.”

별채가 보이는 방향의 창가에 앉아 우두커니 상념에 잠겨 있던 리브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그녀를 온종일 화초 취급하려나 싶었는데, 말을 걸어 오는 걸 보면 또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디무스는 리브가 앉은 자리와 멀지 않은 곳에 놓인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 시가를 물고 있었다. 빨갛게 깜빡이며 타들어 가는 시가 끝을 바라보던 리브가 문득 입을 열었다.

“혹시 또 후작님이….”

“나는 아무것도 명령하지 않았네.”

리브가 무슨 소리를 할 줄 짐작했다는 듯, 디무스가 딱 잘라 말을 끊었다. 그런 뒤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잠깐 보니 여동생이 그대를 닮았다는 건 알겠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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