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14)화 (114/138)

온기가 느껴졌다. 눈을 떠서 확인할 필요도 없이 누군가 제 곁에 누워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익숙한 살냄새였다. 요 며칠 질리도록 부대꼈으니 그 주인을 모를 수가 없었다.

디무스가 제 곁에서 자다니.

덜 깬 정신머리라서 그런가, 복잡한 상념보다는 신기한 감정이 가장 먼저 들었다. 분명 그와의 마지막 상황이 별로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복기하던 리브가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상체를 채 다 일으키기도 전에 허리를 붙들려 도로 누워야 했다.

“또 어딜 가려고.”

자는 줄 알았는데, 누운 상태로 그녀를 보는 파란 눈동자에는 졸음기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는 게 아니라 단지 곁에서 감시하고 있었던 걸까?

속을 알 수 없는 그 시선을 물끄러미 마주하던 리브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못 있을 이유가 있나.”

“실컷 안으신 것 같으니, 더 누워 있을 필요는 없겠죠.”

리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리에 감긴 팔에 힘이 들어갔다.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디무스의 음성이 딱딱하게 변했다.

“내가 실컷 안았으면 넌 아직도 못 깼어.”

“그러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무심코 나오는 대꾸가 곱지 않았다. 아무래도 혼절하기 전 느꼈던 화가 아직도 속에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원망이니 화니, 리브는 언제나 그런 감정들을 멀리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언제든 감정에 휩싸여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디무스에게 새삼 제 원망이나 서운함을 토로하느니, 빠르게 체념하고 상황을 수습하는 쪽이 편했다. 어차피 그와 저의 견해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질리도록 확인했었다. 과거와 같은 대화를 번복하는 건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도망치려거든 몸이라도 잘 챙기든가.”

그러나 디무스는 이 대화를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상태가 엉망이니 푹 쉬어야 한다던데.”

“쉬었잖아요.”

“이 꼴로 나가면 여동생 반응이 볼만하겠군.”

그 말에 리브가 멈칫했다. 좋게 보아도 제 몰골이 엉망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단지 고된 도주 생활 때문만이 아니라, 며칠 동안 디무스에게 시달리며 온몸이 얼룩덜룩했다. 이불을 덮었어도 목덜미까지 숨기진 못했을 텐데.

흐려진 안색으로 제 몸을 힐끗 본 리브가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다.

“…코리다가 제 모습을 봤나요?”

그녀의 걱정이 무엇인지 짐작했다는 듯, 디무스가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

“그대는 여동생을 바보로 아는군.”

리브는 치미는 탄식을 억누르며 시선을 내렸다. 이쯤 되니 코리다에게 무슨 변명을 둘러대야 할지도 이젠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아무 관계가 아니라는 발뺌은 이제 불가능할 것이다.

그나마 코리다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디무스의 태도를 보니 코리다에게 어떠한 위해를 끼치진 않은 듯했다.

하기야, 그에게 다시 잡히고 난 뒤에도 리브는 그가 코리다에게 나쁜 짓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심각하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코리다의 건강을 살펴 주었던 당사자라서일까? 그 의도가 무엇이었든….

객관적인 사실만 따지자면 처음부터 디무스는 늘 관대했다. 그리 과분하게 대해 주니 자신도 주제를 모르고 마음을 키워 간 게 아닌가.

그리 생각하자 다시금 울적해졌다. 결국 이 모든 관계에서 말썽거리인 건 그녀 자신뿐인 것 같았다. 정부 자리에 만족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테니까.

어쩌면 지금이라도 납작 엎드리면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시는 건방지게 굴지 않겠다고, 내일 당장 사라질 수도 있는 관심이나마 감지덕지 받아먹겠다고 빌면 전처럼 적당히 괜찮은 정부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하지만 그리 살다가는 자신이 정말로 말라 죽을 것 같았다. 그에게 빌고 매달리는 게 힘든 게 아니라, 그로 인해 다시 커질 제 감정을 억누를 자신이 없었다.

“도망가지 않으니 놓아주세요.”

답이 나지 않는 문제를 두고 골머리를 싸매야 시간 낭비밖에 더 되나. 리브는 일단 눈앞에 닥친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뭘 하려고.”

“코리다가 있다면, 아돌프 씨도 그 곁에 있을 테니까요.”

“아돌프?”

디무스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리브는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에 감긴 팔을 밀어냈다.

“약을 안 챙겨서요.”

“무슨 약.”

“피임약이요. 전에도 그랬으니 이번에도 아돌프 씨가 준비했겠죠.”

준비성이 좋은 사람이니까. 아마도 저택 문이 잠기는 순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강 짐작했을 것이다.

지금 먹어도 약효가 돌까? 확실하지 않아도 안 먹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일전에 받았던 피임약은 전부 부에르노에 두고 왔다. 디무스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도망쳤으니, 약도 쓸모가 없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설사 잡힌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뒹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리브의 설명에 디무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곧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도망갈 힘도 없으니까 걱정 마시….”

“먹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네.”

리브가 경직된 얼굴로 디무스를 돌아보았다. 디무스의 입가에 희미하게 떠올라 있는 것은 삐딱한 미소였다.

“씨라도 배면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하겠지.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

리브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그게 무슨…?”

“앞으로도 그따위 약은 줄 생각이 없다는 소리야.”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스르륵 풀렸다. 그녀를 놓아주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살결을 어루만지는 손가락에는 명백히 어떠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경악 어린 눈으로 디무스를 보던 리브가 황급히 그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후작님!”

“나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알려 줬어.”

어느새 자세는 뒤바뀌어서, 리브는 디무스의 아래에 깔리게 되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사내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으나, 그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조금도 없다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모욕하려는 의도조차 아니라는 뜻이었다. 애라니, 지금 이 남자가 제정신인가?

“그리고 너는 그러지 못한다고 했지. 내 곁에 눌러앉아 있겠다는 소리인데, 그렇다면야 애 하나 배는 게 얼마나 큰 문제가 될까.”

“그 말이 왜 그런 식으로…! 잠시만요!”

리브가 다급하게 그의 손을 잡았다. 지금 디무스의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요 며칠의 그는 미친놈처럼 보였고, 그녀가 정말 임신을 할 때까지 집요하게 들러붙고도 남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거침없이 움직이던 디무스의 손은 불현듯 멈추었다. 짜증 가득한 시선이 리브의 목덜미를 지나 가슴께로, 그리고 납작한 아랫배까지 닿았다.

그가 제 몸을 훑어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리브가 불안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을 때마다, 피부 가죽 위로 갈비뼈가 도드라졌다.

“쯧.”

낮게 혀를 찬 디무스가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던 공기가 서늘하게 진정되었다.

“뭘 하든 간에 일단 그 몸뚱이부터 정상으로 돌려놔야겠군. 식사부터 하지.”

이런 식으로 임신할 생각은 추호도 없을뿐더러 이 몸뚱이는 원래 정상이었다. 지금은 그저 조금… 피로한 것이지.

반박할 말이 혀끝까지 치밀었으나, 리브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괜히 디무스의 신경을 긁으며 말꼬리를 잡는 것보다는 당장의 허기를 해결하는 데에 더 큰 관심이 기울었다.

누군가 가져다 놓은 듯한 옷가지를 대충 걸친 디무스가 리브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대로 나갈 줄 알았던 그는 마치 리브를 기다리듯 문가에 서 있었다.

감시하는 것 같은 그 시선이 못내 불편해서, 리브가 본인 몫의 옷가지를 움켜쥐며 슬그머니 그를 외면했다.

“먼저 나가셔도 돼요.”

“내 눈 밖에서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런 상황에서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그야 나도 모르지. 그러니 눈앞에 두는 거 아닌가.”

혼절했다가 깨어난 게 조금 전이고, 코리다까지 인질로 잡혀 있는데도 도망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조금만 이성적으로 따져 보면 그러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 사람이었다. 도망쳤던 전적을 비꼬고 싶은 의도인가 싶어, 리브가 디무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리브가 침묵하자 디무스의 눈초리에 담긴 의심이 더욱 짙어졌다.

냉랭한 얼굴은 그녀가 아는 그의 얼굴이었으나, 그는 전처럼 모든 걸 아는 사람처럼 여유롭지 않았다. 오히려 놀랍도록 비이성적이었다.

“잔머리 굴려 봐야 안 넘어가.”

저렇게 으름장을 놓는 것까지 그답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다시 만난 그 순간부터 줄곧 그랬지.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기이한 감정이 속에서 꿈틀거렸다. 리브는 묘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다가, 묵묵히 옷을 걸쳤다. 디무스는 리브가 모든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어이 그녀를 끼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으로 가는 내내 디무스의 손은 리브를 놓지 않았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