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97)화 (97/138)

디무스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축복의 기도에 참석하는 일정 때문이다. 평소라면 당연히 거부했겠지만, 추기경과 자연스럽게 만날 자리로는 그만한 행사가 없었다.

어지간한 행사는 불참하는 디트리언 후작이라고 해도 이 정도면 얼굴을 비칠 법하다고, 누구나 그렇게 이해할 테니까.

그리고 공사다망한 추기경 입장에서도 디무스와 독대하기에 이보다 더 자연스러운 자리가 없을 테고 말이다.

‘축복의 기도’는 칼리오페 추기경이 부에르노에 지내는 동안 열리는 행사 중 가장 크고 성대한지라, 온 도시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어느 때보다 유동 인구도 많았다.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인원수가 지극히 한정적이었음에도 예배당 밖은 인산인해였다. 그런 분위기가 디무스의 신경을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다행히 칼리오페 추기경과의 약속은 예배당 안, 그에게 따로 배정된 공간에서 잡혔다.

다시 만난 칼리오페는 기억 속의 모습보다 조금 더 늙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호수 같은 벽안을 반짝이며 디무스를 응시했다.

“오랜만이구나, 디무스.”

디무스는 대답 대신 칼리오페의 맞은편에 앉았다. 손 닿는 곳에 지팡이를 기대어 두자, 칼리오페의 시선이 그쪽으로 머물렀다.

“몸은 많이 나았느냐.”

디무스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틀었다.

몸이 나았냐니. 몇 년 전의 안부를 이제야 건네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나.

“진즉 나았습니다.”

“하지만 지팡이를 놓지 않고 있구나.”

“쓸모가 많아서.”

“그뿐이냐?”

그 물음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디무스가 무심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복직이 가능한지 묻는 겁니까?”

그의 지팡이는 장식품이 아니었다. 그의 다리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에 문제가 없으면서 전투에 투입되기에는 그다지 좋지 않은, 어중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군을 나올 당시, 디무스의 다리는 꽤 못 쓸 지경으로 망가져 있었다. 마지막 전투로 인해 입은 부상이었다.

본래 계급을 따지자면 전장에 나갈 일이 없어야 했을 디무스는 스테판 때문에 한창 전쟁터를 구르던 시기였고, 마지막 전투 이후에는 객기로 견딜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계속 군에서 버텼다가는 정말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불구가 되어 제대할지도 몰랐다. 당연히 디무스는 제 몸 상태를 만천하에 알릴 생각이 없었던 터라, 그의 불명예스러운 제대 기록에 의료 항목을 제외했다.

당시의 몸 상태를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칼리오페는 그중 하나였다.

“복직할 생각 없습니다.”

다리는 치료했다. 현장을 나가지 않고 지휘부에 머무르면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 굳이 복직하자면 할 수도 있겠으나….

디무스가 눈살을 찡그렸다. 한동안 잠잠하던 감각이 점점 되살아나는 것 같다. 몸의 흉터들이 벌레처럼 전신을 기어 다니는, 불쾌하고 끔찍한 감각.

리브를 곁에 끼고 있는 동안은 느낄 일이 없던 것이었다.

“말테 공작 영애가 직접 대화하겠다며 먼저 움직였는데, 만났느냐.”

“루지아에게 듣지 못했습니까?”

디무스가 실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장미꽃도 없이 청혼하기에 걷어찼는데.”

물론 장미를 가져왔다면 그 반지르르한 얼굴에 집어 던져 준 뒤 걷어찼을 테지만.

입술을 꾹 다물고 침음을 삼킨 칼리오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테는 쓸모가 많은 가문이다. 네가 제대로 자리를 잡으려면….”

“이곳 생활도 나쁘지 않습니다. 대충 지도를 찍어서 온 것치고는.”

추기경의 말을 툭 자른 디무스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풋풋한 차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독한 연초나 술을 좋아하는 디무스로서는 도통 왜 마시는지 모를 종류의 차였다. 그저 조금 쓴 풀 맛이 나는 물에 불과한데.

“신께서는 모두에게 마땅히 어울리는 자리를 내리셨고, 우리는 결국 그 자리를 찾아가게 되어 있다. 그러니 너 또한 네 자리로 돌아와야 하지.”

“신은 내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불손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칼리오페는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혀를 찼다. 본인 몫의 차를 마시며 마음을 다스린 추기경이 차분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빼앗긴 걸 돌려주고 싶다고 하면 듣겠느냐.”

“모든 가치는 시간에 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과거의 것들은 지금의 나에게 별 가치가 없고.”

거의 마시지 않은 찻잔을 도로 내려놓은 디무스가 소파에 몸을 기댔다. 소파라고는 하나 그의 저택에 있는 것에 비하면 한없이 질이 낮았다.

단지 소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 방은 전체적으로 추기경을 모신 방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간소했다.

칼리오페 추기경은 사치스러운 걸 싫어했기에, 그가 머무는 장소는 대체로 이렇게 검소하게 꾸몄다. 아마 이곳의 성직자들도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이런 방을 준비해 두었겠지.

아무리 봐도 그와는 영 맞지 않은 공간이다. 얼른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아직 나를 원망하고 있느냐.”

감흥 없는 눈으로 응접실을 둘러보던 디무스의 시선이 추기경에게로 향했다.

“나의 사명은 한 명의 인간에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신은 내가 위를 보도록 이끌고 계시지.”

권력욕을 굳이 저렇게 빙빙 돌려서 표현할 까닭이 무엇인가.

한없이 진지한 추기경의 말을 들으며 디무스는 생각했다. 성직자라서 그런가, 신을 들먹이지 않으면 말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라고.

대화에 조금도 집중하지 않는 디무스를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오페 추기경은 진중한 태도로 말을 이어 갔다.

“네 어머니는 그걸 이해했다.”

달갑지 않은 화제였다. 내내 무관심하던 디무스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내게 더 많은 이들을 굽어살펴야 하는 사명이 있음을 이해했어. 다만 그녀가 굳이 너를 내게 남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저 좋을 대로 한 해석이었다.

디무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틀었다.

“저런, 모르셨군요. 어머니가 나를 낳은 건, 당신의 그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죽음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고, 슬픔에 잠길 나이는 진즉 지났다. 디무스는 어머니를 측은하게 여기지만 그렇다고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어린애처럼 집착하진 않았다.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그녀를 회상하며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을 자격을 가진 건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추기경과 어머니 사이의 추억이 무엇인지 디무스는 알지 못했다. 다만 둘의 과거가 어떻든 어머니의 말로를 본 건 디무스였다. 자기 세계에 빠진 저 고고한 성직자가 아니라.

“그저 당신에게 특별한 단 하나가 되기 위한 도박이었죠.”

매일 예배당을 찾던 어머니를 지켜본 건 바로 자신이다. 기어이 칼리오페 추기경의 눈이 닿을 만한 마을에 정착하는 어머니를 말이다.

그것은 의도가 명확한 삶이었다.

“그 뜻은 이루어졌고, 내 존재로 인해 당신은 평생 그녀에게 얽매이게 되었으니 나쁘지 않은 베팅이질 않습니까.”

비록 그녀가 바라던 대로 살아서 재회하지는 못했으나, 죽어서도 자신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 칼리오페 추기경에서 디무스의 존재는 본인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매개체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떠올리는 과거는 주로 죄책감을 동반하는 듯했다.

그러니 어머니는 얼마나 후련할까. 간절히 바랐던 사내를 기어이 죽음으로나마 옭아매었으니.

그에 반해 눈앞의 저 늙은 남자는 어떠한가. 세상의 많은 신도를 굽어살피기 위해 어머니를 버렸다고 말하고 있으나, 실상 전혀 놓지 못하고 있는 몰골이 참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칼리오페 추기경은 본인이 한 여자에게 일평생 집착하고 있음을 인지하고나 있을까?

“다들 내가 뭘 뺏겼다고 말하니, 자기 물건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애새끼가 된 기분이군요. 어리게 봐 줘서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하나?”

빈정거리며 시가를 꺼내 든 디무스가 허락도 없이 그것을 입에 물었다.

“앞으로의 생활이 평탄하지만은 않을 거다.”

“그라티아 선출이 얼마 남지 않았죠.”

시가를 문 채로 덤덤하게 중얼거린 디무스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왜, 누가 나를 납치해서 협박이라도 하겠답니까? 추기경의 추악한 과거를 폭로하겠다든가?”

“…말테는 좋은 방패다.”

그 말은 마치 디무스의 안위를 걱정하기라도 하는 듯했다.

“치맛자락 뒤에 숨어 봐야 총탄을 막을 수 있으려고요. 못 본 사이에 많이 순진해졌군요. 기도를 너무 많이 하고 다니신 것 아닙니까.”

냉담하게 대꾸한 디무스가 시가를 빨아들였다. 독한 시가 연기에 휘감기려니 매스껍던 속이 그나마 좀 나아졌다.

“기도만으로는 세상의 평화를 유지할 수 없어.”

얼마나 우스운 모순인가. 모두의 앞에서 전쟁의 비통함과 평화의 절실함을 호소하는 추기경이, 뒤로는 군 상부에 제 사람을 심기 위해 애쓰는 것이.

심지어 그는 본인의 행동에 거창한 대의를 들먹이며 합리화하고 있었다. 디무스로서는 절대 설득되지 않을 대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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