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
“농담이에요. 그러셨을 리 없다는 거 저도 알아요. 후작님께서는 다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걸 좋아하지 않으시니까. 그저 너무 심각하시니까 분위기를 풀어 보려 한 말이에요.”
리브가 희미하게 웃었다. 웃음이 나올 리가 없는 상황인데도.
“…그러는 선생은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군. 누드화가 유출될까 봐 내내 걱정하던 사람답지 않게.”
“처음에는 놀랐지만, 지금은 진정했어요. 그리고 후작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 주실 테니까요.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역시 이상했다.
디무스가 보아 온 리브라면 이런 순간에는 불안에 떨어야 했다. 저렇게 초연한 얼굴로 남의 일 이야기하듯 하는 게 아니라.
“어차피 마음을 졸여 봐야 당장 해결되지 않는 일이잖아요.”
리브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디무스가 몸을 일으켰다. 조용히 서 있는 리브의 앞으로 다가간 그가 손끝으로 리브의 턱을 잡아 올렸다.
얌전히 내리깐 순종적인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디무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괜찮은 게 아니라 괜찮은 척하는 거군.”
가지런한 속눈썹이 순간 파르르 떨렸다.
“주동자를 잡아다 줄 테니, 법정에 세우기 전에 뺨이라도 직접 내리쳐.”
“괜찮….”
“그런 소리를 하려면 괜찮은 얼굴로 하랬지.”
디무스의 단호한 말에 리브가 달싹이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건조하던 눈가가 조금 촉촉해진 것 같기도 했다. 무언가 감정이 울컥 치민 듯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엄지로 리브의 눈 아래를 쓸어 냈다. 흘리지도 않은 눈물을 닦아 주듯 매만지는 그 손길에 리브가 시선을 들었다.
“화를 내. 받아 줄 테니까.”
레스토랑에서의 일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지 이제야 알겠다. 그날 이후 리브는 그의 앞에서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서럽게 울던 게 전부 꿈이었던 것처럼 시종일관 평온하고 잔잔하게 디무스를 대했다. 행동만 보아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투정이라도 부리든가.”
리브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그녀는 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며칠간 보아 왔던 그 정적인 상태였다.
눈살을 찌푸린 디무스가 무어라 말을 뱉으려는 순간이었다. 문득 리브가 디무스의 단정한 옷깃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흉터를 보여 주세요.”
“…흉터?”
“네. 후작님의 몸에 있는 흉터요.”
“갑자기 왜?”
처음 흉터를 보았던 날 이후로, 리브는 특별히 그의 몸을 보며 사적인 감상을 뱉은 적이 없었다. 새삼스러운 그녀의 요청에 의문을 표하자, 리브가 슬며시 눈을 깜빡였다.
“…만지면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아서요.”
금방이라도 꺼질 불씨처럼 희미한 음성이었다. 그녀는 손끝이 디무스의 크라바트를 살짝살짝 건드렸다. 의식하지 않으면 알아채지도 못할 만큼 소소한 움직임인데도, 보고 있자니 괜스레 갈증이 일었다.
이 손길에 어떠한 의도가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단순히 그가 지금 그녀를 원하고 있기 때문일까?
“집무실에서는 싫다지 않았나?”
“이젠 괜찮아요. 하지만 후작님이 내키지 않으시다면….”
흰 손가락이 크라바트를 놓고 얌전히 떨어져 나가려는 걸 확인한 디무스가 리브의 허리에 팔을 둘러 강하게 당겼다. 작고 가볍고 부드러운 체구가 그의 품에 폭 안겨 왔다.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디무스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럴 리가.”
책상에 기대선 디무스는 상의를 전부 벗은 채였다. 리브는 그런 디무스의 앞에서 열심히 제 마음대로 그의 몸을 주물렀다.
오늘의 리브는 유난히 더 적극적이었다.
그녀가 능동적으로 섹스에 임한 적은 제법 있지만, 그래 봐야 디무스에 비하면 소극적이라는 표현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오늘의 리브는 얼핏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게 싫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와 달라서 더 흥분되었다. 흉터를 만지고 싶다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던지, 그녀는 디무스의 몸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건드렸다. 이따금 그 위로 애틋하게 키스를 하기도 했다. 그 키스는 과감한 것 같으면서도 조심스러웠다.
누군가와 닿는 걸 그리도 싫어하던 과거가 우습게도, 디무스는 그녀의 손에 오롯이 제 몸을 맡겼다. 저를 어루만지는 리브의 모습이 자극적이라 보기 좋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지금 리브의 손길은 마치 그를 ‘귀하게’ 여겨 주는 것 같다고 느끼게 했다. 그것이 그를 무방비해지도록 만들었다.
“선생도 참 희한한 취향이 있군.”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흉터들이 좋다고.”
“욕심내도 될 것 같아서?”
리브는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내민 그녀가 어깨 부근의 찢어진 흉터 자국을 핥아 올렸다. 그러다가 콱 깨물었는데, 어린애 장난 같은 힘이라 아프기보단 간지러웠다.
아무래도 천성이 남을 해치지 못하는 여자인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브는 디무스의 어깨와 목덜미를 열심히 깨물고 빨았다.
제 딴에는 애써서 피부 위로 흔적을 만들고 싶은 눈치였다. 어설프게 입질하는 토끼를 보는 기분이었다.
“울혈을 남기고 싶으면.”
디무스가 몸을 수그렸다. 희고 여린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이를 세우자, 팔딱거리는 맥박이 느껴졌다. 약간의 힘만으로도 맥없이 스러질 생명이었다.
혀로 질척이는 타액을 가득 묻히고 강하게 빨아들이자 리브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읏.”
귓가 가까이에서 들리는 그녀의 짧은 탄성이 기꺼웠다. 디무스가 입술을 묻은 채로 미소 지었다.
“더 세게 빨아야지.”
빨갛게 달아오른 피부를 잘근잘근 깨물자 리브가 몸을 뒤틀었다. 자극적인 쾌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무의식적인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디무스가 그녀를 놓아줄 리 없으므로, 그녀는 부질없이 바르작거리다가 희미한 신음성을 흘렸다.
하얀 목덜미가 순식간에 울긋불긋해졌다. 마치 꽃잎이 흩뿌려진 듯한 모양새였다. 집무실 한 귀퉁이에 놓여 있는 누드화 속에 천박하게 표현된 울혈과는 감히 비교되지 않는 아름다운 흔적이었다.
허리쯤에 걸려 있는 리브의 상의를 완전히 끌어 내린 디무스가 치마를 헤집었다. 리브가 그에게 몸을 기대며 이마를 그의 어깨에 문질렀다. 잔뜩 흐트러진 적갈색 머리카락이 디무스의 흉터 가득한 맨살을 간지럽혔다. 뜨거운 숨과 함께 축축한 느낌이 어깨 쪽에서 느껴졌다.
디무스가 그 느낌을 확인하고자 고개를 돌리려는데, 리브가 돌연 디무스를 강하게 밀었다. 책상 끄트머리에 걸쳐 있던 엉덩이가 완전히 뒤로 밀려나면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디무스를 책상 위에 주저앉힌 리브가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바지 버클을 툭, 푸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안아 주세요.”
살짝 잠긴 음성과 함께 귓바퀴에 따뜻한 입김이 닿았다. 동시에 발끝에서부터 열기가 훅 끼쳐 올라왔다. 손으로 리브의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가 놓은 디무스가 그녀의 허벅지를 받쳐 단숨에 제 위로 올렸다.
다리 위로 느껴지는 무게감과 함께, 헐벗은 몸이 바짝 맞닿았다. 리브의 입을 벌려 혀를 찔러 넣으며, 디무스가 다급히 그녀의 속옷을 움켜쥐었다.
얇은 천을 쭉 찢어 내자 질척하게 젖은 속살이 손끝에 닿았다. 입술을 맞댄 상태로 아래에 중지를 쑤셔 넣었다. 치맛자락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지만 벗길 여유가 없었다.
숨이 모자라 헐떡이는 입술을 거듭 문지르면서 손가락을 움직이던 디무스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
우당탕!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옆으로 밀어내고 그녀를 눕히자, 그제야 리브의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꺼풀이 젖어 있고, 눈가가 새빨간 와중 물기가 가득했으며, 입가도 번들거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가쁜 숨이 연신 터져 나오고 있었다.
흥분으로 물든 눈동자가 초점 없이 허공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디무스에게 닿았다.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칭얼거리는 어린애처럼 두 팔을 뻗어 왔다. 디무스는 기꺼이 그녀에게 제 목덜미를 내주었다. 그녀가 디무스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다리를 벌리고 흉흉하게 솟은 성기를 단숨에 꽂아 넣었다. 리브가 헛숨을 삼키며 등허리를 크게 들썩였다. 완만한 굴곡을 그리며 들썩이는 리브의 등에 땀방울이 맺혀 갔다.
성기를 끝까지 찔러 넣은 채로 잠시 멈춰 있던 디무스가 리브의 등 아래로 손을 넣어 쓰다듬었다. 끈적한 체액이 책상 위와 손바닥을 더럽혔지만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땀 때문에 살결이 유독 매끄러웠다. 그녀를 끌어안고 목과 가슴에 울혈을 만들어 가던 디무스는, 불현듯 품 안의 몸뚱이가 너무 앙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