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인가? 오늘은 손님을 받지 말라고 했잖나!”
굳게 닫아 두었던 가게 문을 살짝 연 사장이 문지기에게 다그쳤다.
“아니, 이 여자가 자꾸 예약되어 있다는 거짓말을 해서 막느라 소란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안에 계신 분이 어떤 분인데 그런 거짓말을… 아이고,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조용히 정리하겠습니다!”
문틈 사이로 연신 문지기를 나무라던 사장이 입구 쪽으로 다가온 디무스를 발견하고선 화들짝 놀라 바짝 몸을 낮추었다. 디무스는 그런 사장을 무시하며, 그가 살짝 열어 놓은 가게 문틈을 응시했다.
“들여보내.”
“네, 얼른 쫓아… 네?”
“예약이 되어 있다고 했다는데, 이 약방은 귀머거리를 문지기로 세워 두나?”
평온한 어조로 흘러나온 독설을 얼떨떨하게 듣던 사장이 가게 문을 열었다. 덕분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차림으로 선 여자를 확인한 디무스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약방이 아니라 의상실을 먼저 데려갔어야 했다. 저런 꼴을 하고 들어오겠다는 소리를 하니 문전박대를 당하지.
“저, 정말로 약속이 되어 있으신…?”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한 사장과 문지기가 리브와 디무스를 번갈아 보았다. 그들로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외관만 봐도 너무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 게 뻔하니 더 그럴 것이다. 디무스가 차가운 조소를 흘렸다.
“손님도 제대로 못 알아보는 형편없는 눈으로 어떻게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야.”
“죄, 죄송… 이놈, 어서 사과드려라!”
반사적으로 사과를 하려던 사장이 얼른 문지기에게 호통쳤다. 그때까지도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문지기가 제 옆에 선 여자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이 모든 일들에 초연한 듯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 문이 열렸을 때, 그녀는 분명 목덜미와 뺨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마도 모욕감을 느꼈기 때문이겠지.
그녀는, 리브 로이데스는 생각보다 자존심이 더 강한 여자니까.
“죄송합니다, 손님.”
문지기의 사과를 받는 리브의 표정은 퍽 묘했다. 아마도 머지않은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 있지 않을까?
리브가 이곳에서 문전박대당했던 사연을 디무스는 이미 보고 받아서 알고 있었다. 그가 리브에게 사람을 붙여 둔 지는 꽤 오래되었고, 무방비한 평민 여성 하나 따라다니는 일 정도는 훈련된 사람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직원을 제대로 관리하는 게 좋겠어. 건방을 떠는 모습에 불쾌해진 손님이 ‘방문하기 편한 다른 곳’을 찾아가기라도 하면 어쩌나.”
디무스의 조롱은 문지기와 리브에게 닿을 정도로 충분히 컸다. 엉거주춤 허리를 숙이며 눈을 굴리던 문지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무례를 저지르지 않을 테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거의 바닥에 엎드릴 지경으로 허리를 굽히는 문지기의 모습에 이번에는 리브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용서할 테니 그만하라며 손사래를 치다가, 직접 문지기를 일으켜 세우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 행동을 본 디무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언제까지 입구에 서 있을 생각인가, 선생?”
“아, 네.”
리브의 손은 문지기에게 닿기 전 도로 거두어졌다. 잔뜩 찌푸려졌던 디무스의 미간도 덩달아 조금 펴졌다.
하이롭 사장은 이제 리브의 외관 같은 건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극진하게 그녀를 인도했다. 리브는 그런 사장의 태도에 거북함을 느꼈는지, 주춤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디무스 쪽으로 붙어 섰다. 무의식적으로 의지할 대상을 찾은 것이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디무스는 기꺼이 그녀를 잡아 제 곁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앞으로 공급되는 신약은 이 여자에게 넘기도록.”
사장은 군말 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도리어 놀란 건 리브였다. 하이롭으로 오라는 전갈만 보냈을 뿐, 자세한 사정은 이야기하지 않았던 디무스가 이제야 리브에게 조금 늦은 설명을 했다.
“도미니안에서 만들었다는 신약 말이네. 매번 내가 동행해 줄 수 없으니 선생이 받아 가야지.”
“신약….”
“필요하지 않나?”
멍하던 리브의 얼굴에 점차 혈색이 돌았다. 녹색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빛으로 반짝였다.
“…필요합니다.”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대꾸한 리브가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느라 입술이 색을 잃고 희게 질렸다.
지금 키스하면 딱 맛이 좋을 것 같은데.
디무스가 그렇게 생각한 찰나, 약을 가지러 들어갔던 직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단하게 밀봉된 약을 들고 나타난 직원은 디무스의 곁에 서 있는 리브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으나, 눈치 없이 제 의문을 표출하진 않았다.
“이겁니다. 복용할 때는 한 번 더 의사의 확인을 받은 뒤, 사용법을 숙지하셔야 합니다.”
“네.”
사장에게서 약을 건네받은 리브가 묘한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볼일이 끝난 디무스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마차는 가게 바로 앞에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거창한 배웅을 받으며 약방을 나선 디무스가 먼저 마차에 오르고, 리브가 뒤를 이어 마차에 올랐다. 그 찰나에 몇몇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굳이 시선을 피하자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단속하지 않은 건 디무스의 선택이었다. 리브도 그걸 눈치챘는지, 별말이 없었다.
마차에 탄 리브가 무릎 위에 올린 약봉지를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아셨나요?”
“뭘?”
마차가 흔들리며 출발했다. 편히 몸을 기댄 디무스가 힐끗, 리브에게 시선을 던졌다.
“제가 예전에 하이롭에서 받은 취급이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거라면 실망스러울 것 같은데.”
리브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의 일상을 안다는 걸 애써 숨기지 않았으니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가 있겠지.
과연 디무스의 말에 리브는 별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다시 생각에 잠긴 듯 약봉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눈길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후작님께서 보이시는 그 관심이 언제부터였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그게 중요한가?”
“그거라도 알면 제가 앞으로 어떻게 처신할지 결정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디무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라 현재 아닌가. 선생이 똑똑하게 내 곁을 지켜 내면 언제나 이런 대접을 받을 텐데.”
“똑똑하게요.”
디무스의 말을 입 안으로 곱씹던 리브가 문득 약봉지를 빈 옆자리에 옮겼다. 그러곤 디무스의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대체 무얼 하려고 이러는 건가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잠시 주저하던 리브가 디무스의 가슴께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에서 디무스를 올려다보는 리브의 얼굴은 단정하면서도 어딘가 속을 긁는 처연함을 풍겼다. 차분한 녹색 눈동자로 디무스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리브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키스해도 될까요?”
디무스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 반응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리브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과감하게 다가온 것치고는 꽤 빠르게 기가 죽는 그녀의 모습이 꼭 연약한 미모사 같았다.
“아까 제게 키스하고 싶으신 것 같았어요. 제 짐작이 틀렸나요?”
조금 전보다 자신감이 많이 줄어든 목소리로 질문한 리브가 눈을 굴리다가 슬그머니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그러나 디무스가 곧장 그녀의 허리를 감싸 끌어안는 바람에 그녀의 행동은 부질없는 시도로 그쳤다.
“앗!”
무게 중심이 완전히 무너진 리브가 앞으로 넘어지듯 디무스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디무스가 그런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수그렸다. 입술이 다소 급하게 맞부딪쳤다.
불편한 자세로 기댄 리브가 매달리듯 디무스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균형을 되찾으려 바르작거렸으나, 디무스가 혀를 깊이 찔러 넣으며 파고드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흐트러졌다. 놀라서 벌어진 입술 사이로 질척한 타액이 흘러내리는 건 금방이었다.
“흐읍….”
질척하게 혀를 빨아들이는 소리와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신음이 마차를 채웠다. 디무스가 혀끝으로 리브의 연약한 입천장을 긁어내렸다. 그럴 때마다 앓는 듯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그녀의 달아오른 감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진득하게 입 안을 휘저은 디무스가 입술을 살짝 뗐다. 그러기 무섭게 리브가 숨을 몰아쉬며 디무스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불편한 자세로 키스하느라 평소보다 더 숨이 차오른 모습이었다.
디무스는 리브가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제 어깨를 가만히 내 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 사이로 흰 목덜미가 살짝 엿보였다.
“예약해 둔 의상실만 아니었어도.”
마차를 저택으로 돌리라고 명령했을 텐데.
디무스가 먹음직스럽기 그지없는 목덜미를 응시하며 중얼거리자 리브가 움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