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70)화 (70/138)

“그럼 저 혼자 내려가나요?”

“안쪽에 딱히 위험한 요소는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로 저 혼자?”

“주인님께서 자주 찾으시는 곳입니다. 지하실은 이 저택에서 가장 안전할 장소지요.”

필립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확인차 한 번 더 물었을 뿐.

결국 필립을 뒤로한 채, 리브가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불을 상시로 밝혀 두는 곳인지,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임에도 어둡고 음습한 느낌은 없었다.

다만 제 발소리에 지레 놀라서 두어 차례 멈춰 섰다가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그러느라 리브는 길지 않은 계단에 한참이나 시간을 소요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마지막 계단을 내려선 리브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반적으로 지하실이라는 장소를 떠올릴 때 상상할 수 있는 어둡고 습기 찬, 음산하고 버려진 듯한 그런 공간은 아니었다. 오히려 위층의 다른 방들과 다를 바 없이, 혹은 그보다 더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리브가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굳혔다.

“누구…!”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는데, 다시 보니 사람의 형태를 한 대리석 조각상이었다. 그 옆으로도 다양한 조각상과 그림들이 가득 진열된 게 보였다.

“후작은 병적일 정도로 누드 작품을 좋아한다니 이상 성욕이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잊고 있던 카밀의 말이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 후작에게는 누드 작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곳은 적나라한 누드화와 나신 조각상들을 모아 둔 작은 전시실이었다. 대부분 전신이 묘사된.

브레드의 붓끝을 통해 탄생한 몇 점 안 되는 제 누드화들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작품들이었다.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처럼 생동감이 넘치는 근육이나 선명한 색감, 요염한 자태와 완벽하게 균형 잡힌 나신.

세상의 모든, 완벽한 인간의 육체는 전부 이곳에 모여 있는 게 아닐까?

홀린 것처럼 작품들 사이를 걷는데, 구석에 유난히 이질적인 액자들이 보였다. 화려한 액자들과 달리 단조롭다 못해 낡아 보이는 나무 액자에 걸린 그림.

그것은 리브의 누드화였다.

“세상에.”

리브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작품들 사이에 나란히 걸려 있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수준의 작품인지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브레드의 미숙한 실력뿐 아니라 모델인 리브의 어설픔까지도.

“이걸 이렇게 버젓이 걸어 두다니….”

보는 사람도 없는데 홀로 낯이 뜨거워졌다. 리브는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며 괜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혼자였다.

다른 누드화와 비교하니 더 확실하게 알겠다. 리브는 정말이지 모델의 재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나마 스스로 그럭저럭 볼만하다고 여겨 왔던 몸뚱이도 이렇게 보고 있자니 너무나 평범했다.

그동안 어떻게 후작 앞에서 뻔뻔하게 옷을 벗어 던졌지?

대체 자세는 또 왜 저렇단 말인가. 정말 작업할 때 저렇게 서 있었나? 하다못해 풍경화 속 아름드리나무도 저것보다는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문제는 누드화가 한 점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정말로 전부 구매한 건가?”

자신이 모델을 섰던 몇 점 되지도 않는 누드화들이 전부 이곳에 있었다. 그녀가 처음 옷을 벗었던 작품부터, 가장 최근 완성된 옆얼굴이 드러난 누드화까지.

브레드가 ‘후작이 자신을 후원해 줄 것’이라며 자신하던 까닭을 이젠 알겠다. 누드화를 그리는 족족 후작이 사 갔다면 브레드가 착각할 법도 했다.

할 말을 잃고 그것들을 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곳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니. 다가오는 걸음 소리를 들은 리브가 수심 어린 얼굴로 입술을 뗐다.

“그림을 내려 주시면 안 되나요?”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묻자, 뺨으로 시선이 느껴졌다. 리브가 그 눈길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꼭 이렇게 걸어 두셔야 하나요?”

너무 부끄러웠다. 아마 제 안색에 그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뻔히 그것을 보았을 후작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있었다.

“구매한 작품을 어떻게 보관할지는 구매자 마음인데.”

“하지만 제 누드화들은 너무….”

리브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말했다.

“이상하잖아요.”

그녀의 말에 후작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수준이 많이 떨어지긴 하지.”

리브의 누드화를 뺀 나머지 작품들이 너무 훌륭했다. 당장 몇 점만 보아도 그랬다. 후작은 단순한 이상 성욕자가 아니라 엄연히 가치 있는 작품을 알아보고 수집한 게 틀림없었다.

이렇게 수준 높은 그림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문외한인 리브가 보아도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작품들이 가득한 와중에 저런 초라한 누드화라니!

심지어 가만 보니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걸려 있었다. 놀리려는 심산이 아니고서야 위치 선정까지 어쩜 저렇게 적나라할 수 있을까.

“애초에 왜 구매하셨는지 모르겠어요.”

리브의 중얼거림은 답을 기대한 게 아니었으나, 의외로 후작은 선뜻 입을 열었다.

“궁금해서.”

간명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너무 형편없는 나머지 궁금해서.”

기껏 이유라고 해 봤자 누드 작품이라서 구매했다는 내용 정도를 예상했던 리브가 눈을 크게 떴다. 형편없는 작품이라서 돈 주고 샀다는 말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이런 걸 작품이랍시고 내놓았는지 궁금했다는 걸까?

“뭐가 궁금하셨어요?”

조금 전처럼 대수롭지 않게 알려 줄 줄 알았는데, 후작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다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짤막한 답변을 내놓았다.

“모델이.”

리브의 눈동자가 가볍게 떨렸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리브가 제 누드화들을 확인했다. 뒷모습뿐인 누드화였다. 나신이라는 걸 빼면 특별히 대단할 것도 없어 보이는 뒷모습.

“…혹시 처음부터 저를 알고 계셨어요?”

후작은 대답하는 대신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언제부터 그녀를 안 것인지,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마주침 중 무엇이 의도된 것인지 묻고 싶었으나 그는 아마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후작이 바라보고 있는 그림은 가장 최근에 그려진, 옆얼굴이 드러난 누드화였다.

리브가 보기에 그림 속의 여인은 아주 초라하고 창백하기만 했다. 도대체 무엇이 그의 관심을 끌었는지 전혀 짐작 가지 않을 정도로 볼품없는 몰골이었다.

아니, 형편없어서 궁금해졌다고 했지. 저 초라함이 후작의 관심을 사로잡은 걸까.

평생 남들 위에 군림해 온 사람이라서 신기하게 느껴졌던 건가?

“그렇다면 더욱 저 그림을 걸어 두실 이유가 없어지신 것 아닌가요?”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왔다.

“부에르노에서 이 전시실보다 안전한 장소는 없어. 그림을 숨기고 싶다면 응당 이곳에 보관해야지.”

후작의 허락이 있어야만 출입할 수 있는 지하실. 그런데 애초에 이 지하실은, 철옹성처럼 굳건하게 문을 걸어 잠근 디트리언 후작 가문의 저택에 위치한 지하실이었다. 앞으로도 누가 과연 대문을 넘어 볼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폐쇄적인 장소.

후작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후작이 누드화를 구매한 이상, 이 지하실은 누드화를 숨기기에 가장 최적의 장소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리브는 굳이 저것을 걸어 둘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다.

“모델은 그림 속이 아니라 후작님의 앞에 있잖아요.”

그가 누드화를 원했던 이유가 오직 ‘모델’ 때문이라면.

“원할 때 언제든 저를 벗기실 수 있어요.”

잠시나마 그림을 향했던 후작의 눈길이 다시 리브에게로 돌아왔다. 이채가 서린 그의 눈동자가 리브를 집요하게 담아냈다.

“천박한 말을 그리 단정하게 뱉을 수 있다니, 선생은 신기한 재주가 있어.”

말의 내용은 얼핏 조롱 같은데, 어투가 너무도 덤덤하고 눈빛이 진지해서 모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저를 똑바로 마주하는 그녀의 모습에 후작이 헛웃음을 흘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천박했으면 금방 질리기라도 할 텐데.”

질리지 않아서 아쉽다는 듯한 그의 어투에 리브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그가 저에게 질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제 와서는….

“저는….”

그냥 이 남자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림이 아니라 실제의 저를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타인에게 가시를 드러내는 그가 제 앞에서는 좀 더 많은 것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그가 앞으로도 자신에게 질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처럼 충동적으로 그녀를 대동하고 남에게 보이지 않았던 부분을 선뜻 알려 주었으면 좋겠다.

누구도 모르는 그의 모습을 저만 알고 싶었다.

“그러니 저 그림은 치워 주시면 안 되나요?”

깜빡임도 없이 리브의 눈을 응시하던 후작이 한 걸음 다가왔다. 눈가와 뺨을 감싸고 가볍게 어루만지던 그가 고개를 수그렸다.

맞물리는 입술이 어느 때보다 부드러웠다. 입술을 가르고 침범하는 혀끝이 리브의 혀를 간지럽히듯 건드리다가, 입 안을 살살 훑었다.

후작의 이가 부드러운 케이크를 베어 물듯 아프지 않게 입술을 물었다. 속을 근질근질하게 만드는 접촉에 리브의 심장이 술렁거렸다.

장난치듯 두어 번 입맞춤을 한 그가 살짝 고개를 물리며 속삭였다.

“선생의 뜻대로.”

목 끝까지 치민 탄식을 겨우 억누르며, 리브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 그녀는 이제 이 관계의 종결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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