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잘 회복한 모양이지.”
“네?”
“체력이 썩 좋지 않아 보였는데.”
후작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들은 리브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관계를 맺고 난 뒤에 리브가 기운을 차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었다. 만약 그곳이 후작의 저택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자고 싶을 정도로 진이 다 빠졌었다.
아니, 사실 후작은 자고 가도 된다고 말했지만.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코리다를 생각하니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부득부득 씻고 돌아가겠다고 한 게 리브였다. 솔직히 공기가 차갑게 식은 그 삭막한 방에 오래 머무르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고.
“…저는 평균적인 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하.”
후작은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감흥 없이 감탄했다.
“그렇다면 그 평균의 기준점을 높이는 게 좋겠군.”
“기준점을 높이라는 말씀은….”
“한번 뒹굴어 보았으니 미련 없이 거절하겠다고 말할 셈이 아니라면. 다음에도 회복할 시간을 이렇게 넉넉하게 줄 수 있을지 모르겠거든.”
그동안 부르지 않았던 건 흥미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몸을 회복하라는 배려였나?
리브는 얼떨떨한 눈으로 후작을 보았다. 언제나처럼 그는 심드렁하게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멍하게 보며 리브는 문득 실없이 생각했다. 쉴 시간을 준 걸 보면 그에게도 티끌만 한 양심은 있는 모양이라고.
솔직히 그만한 양심도 없으면 정말 사람이 아니기는 했다. 첫 경험에 그만한 흉기를 받아 내야 했던 리브는 정말이지, 몸이 쪼개지는 줄만 알았으니까.
그마저도 나중에는 전부 쾌감으로 치환되는 바람에,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울음을 터뜨렸다지만 말이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그날의 감각을 떨쳐 내고자, 리브가 재빨리 입술을 뗐다.
“제게 선택권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요.”
“나는 싫다는 이를 굳이 억압할 생각이 없어.”
가벼운 어투로 대꾸한 후작의 새파란 눈동자가 리브를 힐끗 보았다.
“또한, 상대가 거절할 까닭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지.”
참으로 오만한 말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본인을 원할 거라는 소리가 아닌가.
얄미운 것은, 그의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후작의 밤 시중을 들겠느냐고 묻는다면 성별이나 나이를 불문하고 달려들 사람이 당장 부에르노에만도 천지에 널려 있었다.
이미 그와 밤을 보낸 리브 역시… 앞으로도 후작을 마다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서로 흡족하지 않았던가.”
“제게 흡족하셨나요?”
“응.”
때때로 그가 뱉는 긍정의 대답은 너무 쉬워서, 그 진위를 의심하게 되었다. 선뜻 어떠한 반응을 내비치지 못하고 침묵하는 리브의 모습에 후작이 조소를 흘렸다.
“나는 아주 까다로운 수집가야. 그러니 내 기준에 부합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제가 꼭, 후작님의 수집품으로 낙점되었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아닌 것 같나?”
뜬금없게도 이 순간 카밀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 사이에서 값비싼 조각상 취급받는 와중 본인은 사람을 조각상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는 후작.
그런 남자에게 수집품 취급이라도 받게 되었으니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불편한 감정이 미묘하게 마음 한구석에 피어올랐다. 이건 마치, 섹스했던 당일 홀로 남겨져서 느꼈던 그 기분과 비슷했다.
괜스레 궁상맞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마치 후작에게 대단한 무언가를 기대하다가 배반당한 것처럼 굴고 있질 않나. 시작부터 명확했던 관계인데.
후작은 처음부터 그녀를 적당한 흥밋거리로 여겼고, 리브는 그의 관심을 감지덕지 받아드는 처지였다. 이는 주도권이 일방적인 얕은 관계에 불과했다.
쓸데없는 제 감정을 애써 털어 버린 리브가 짐짓 가벼운 어투로 물었다.
“박제도 수집하시나요?”
“박제?”
리브의 시선이 물총새에 닿아 있음을 확인한 후작이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대꾸했다.
“가치가 있는 것은 소유해서 나쁠 게 없지.”
그런 것치고 취급이 썩 좋지는 않았다. 박제품도 나름대로 관리 방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물총새의 섬세한 깃털을 하나하나 눈으로 헤아리던 리브가 조금 낮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소문을 들었어요. 저택 지하에 사람을 박제해 두신다는 소문이요.”
“재미있는 소문이군.”
정말로 우스웠던지, 후작이 짧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박제가 될까 두렵나?”
“들었지만 믿지 않아요.”
후작은 웃음기를 숨기지 않으며 혀를 찼다.
“진짜면 어쩌려고?”
“그렇다면 제 어리석은 안목과 짧은 판단력을 원망하겠죠.”
“저런.”
내내 분수를 보고 있던 리브의 턱을 잡아 자신 쪽으로 돌린 후작이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대화를 나눌 때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묻어났는데, 막상 마주한 얼굴에서 웃음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후작의 벽안은 차분하다 못해 냉담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살아 있는 선생을 원하지, 죽어서 예쁘게 장식된 선생을 원하진 않아.”
지척에서 느껴지는 숨결이 뜨거웠다. 리브는 제 턱을 잡고 있던 손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마치 턱을 감싸듯 문지르며 미끄러지듯 목선으로 내려가, 이내 뒷덜미로 넘어가는 일련의 과정들을.
이 내밀한 접촉이 어디에서 멈출지는 전적으로 후작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온전히 맡기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혀로 입술을 축인 리브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코리다의 치료를 위해 베리워스 저택을 방문했습니다.”
거리가 가까워서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더 작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리브는 최소한 떨거나 더듬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 저택에 온 건 그녀 혼자가 아니니까.
당장 한 시간 뒤면 코리다가 제 언니의 행방을 찾을 터였다. 그리고 후작과 보낸 한 번의 밤을 고려해 볼 때, 그는 결코 한 시간 내에 무언가를 끝내진 않을 테고.
“고려해 주셨으면 해요.”
“요구하는 게 능숙해지고 있군, 선생.”
“노력해 보려 합니다.”
얌전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리브가 눈동자를 조금 굴렸다. 코앞에 있는 푸른 눈동자는 사람의 정신을 빨아들이는 요사스러운 보석처럼 보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똑바로 응시하게 되었다. 그게 후작에게는 어떻게 비칠지 모르겠지만.
“그걸 바라시는 것 같아서.”
후작이 눈매를 접었다. 리브는 이번에도 자신이 ‘정답’을 골랐다는 걸 깨달았다.
“배움이 빨라.”
기특해.
그의 마지막 말은 겹쳐진 입술 탓에 흘러나오지 않았다.
***
칼리오페 추기경이 부에르노를 방문하는 날짜가 공개되었다.
정확히는 추기경의 순례 일정이 공개되었고, 그 일정 중 부에르노가 껴 있는 것이었다. 추기경은 며칠간 부에르노의 몇몇 예배당을 돌아보고, 고아원을 다닐 예정이라고 했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사는 추기경의 방문이 아니라, 추기경이 부에르노 내에서 보낼 구체적인 일정이 되었다. 추기경을 모시기 위해 이미 도시 자체에서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단발성 행사가 아주 많았고, 보통 이런 자리에는 온갖 유명 인사가 얼굴을 비추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번에야말로 디트리언 후작이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기대했다. 특히 신문사에서는 도통 얼굴을 내비치지 않으려 드는 디트리언 후작의 그럴듯한 사진 몇 장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사진기를 점검했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관심은 디무스가 알 바 아니었다.
“언론사에 미리 언질을 주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내심 기대하는 눈치입니다.”
신문을 읽는 디무스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찰스가 보고했다.
“사진을 찍어 봐야 내지도 못할 것을.”
“그들은 모르니까요.”
디무스는 희미한 조소를 흘리며 신문을 책상 위로 던졌다. 신문의 1면에는 선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추기경의 모습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일단 날짜에 맞춰서 일정은 조정해 두었습니다.”
“조정해야 할 정도로 내 일정이 거창하진 않을 텐데?”
대체로 디무스의 일상은 무료한 편이었다. 그에게는 귀족의 의무도, 책임도 없으니까. 가문을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사명감 역시 찾아볼 수 없고.
그가 행하는 일정이라고 해 봐야 정기적으로 미술관장을 만나 미술품을 구매하거나, 비공개 경매에 참여하는 정도였다. 그나마 최근에는 리브를 만나면서 지루하기만 하던 생활에 약간의 자극이 생겼다지만 말이다.
추기경을 위해 일정을 조정하는 건 불필요한 짓이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디무스는 찰스를 나무라지 않았다. 어쨌든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었기 때문이다.
“자리 마련할까요?”
“손수 납신다는데 얼굴은 봐야지.”
유배지까지 행차하는 노고를 생각해서 한 시간 정도는 내줄 수 있겠지.
냉소적으로 중얼거린 디무스가 사진 속 남성을 응시했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도 추기경은 여전히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추기경은 뭇 신도들의 환심을 아주 쉽게 샀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라는 걸, 디무스는 추기경의 신도들을 보며 깨달았다.
게다가 칼리오페 추기경은 교단 내에서도 유독 평화를 부르짖는 편이었다.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 대륙에서, 평화를 기원하는 인자하고 마음씨 좋은 추기경을 싫어할 신도는 없으리라.
“이번에야말로 차기 그라티아에 유력하답니다.”
찰스가 넌지시 건네온 말에 디무스가 한쪽 입매를 끌어 올렸다.
교단의 최고 성직자이자 수장인 그라티아는 추기경 중에서 선출되는 자리였다. 가장 영예롭고, 드높게 우뚝 서서 만인의 존경을 받는 자리.
그 자리를 얻기 위해 흘려야 하는 피는 물론, 강을 이룰 정도로 넘치고 말이다.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짓던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거스틴 추기경이 강세라지 않았나?”
“작년에 엘바와 토르스텐 간 전투에서 대패했던 일로 내부적인 입지가 크게 틀어진 모양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볼까요?”
“됐어. 대강 짐작이 되는군.”
구체적인 사정을 알아 봐야 디무스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그들이 만든 무대에서 퇴장한 지 오래였으니까. 이제 와서 치근거리는 걸 보면 아마도 그들은 퇴장한 배역이 도로 부활하는 유치한 스토리를 짜낸 모양인데….
그거야 그들 사정 아닌가.
심드렁하게 시선을 거두려는 찰나, 찰스가 보고를 이었다.
“그리고 말테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