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주머니를 받아 든 리브가 멈칫했다. 아돌프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일전에 로이데스 양의 질문을 웃어넘겼던 건 명백한 제 실책입니다. 죄송합니다. 일단 당장 구할 수 있는 여유분을 최대로 넣었으니, 다 사용한 뒤 부족하면 언제든 요청하세요. 유통되고 있는 약 중 가장 무해하다는 것으로 가져왔습니다. 더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시고요.”
리브가 묘한 얼굴로 제 손에 들린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그렇지, 먹어야 하는 게 맞지.
피임약은 사실 공개적으로 유통되는 종류의 약이 아니었다. 그러나 듣기로는 꽤 수요가 높아서 종류도 다양하다고 했다. 사창가에서 창부들이 사용하는 싸구려 약부터, 귀족의 정부들이 사용할 법한 값비싼 고급 약까지.
아마 이건… 후자겠지.
“이제 매달 거트루드 박사가 로이데스 양의 진찰을 할 겁니다. 간단한 절차이니 부담가지지 않아도 됩니다.”
호의라 칭해야 마땅했다. 오늘의 일이 시발점이 되어, 앞으로 후작과 종종 이런 시간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니까.
다만 그녀에게 후사를 볼 생각이 없을 테고, 행여 생기기라도 하면 낙태를 해야 할 게 틀림없었다. 그럴 바에야 사전에 방비하는 게 백배 낫다는 건 당연했다.
머리로 전부 이해했는데, 리브는 어쩐지 울적했다.
실은 몸을 씻을 때부터 그랬다. 제 몸에 남은, 배려 없는 그의 흔적들을 보면서. 볼일이 끝나자 추가 근무 때처럼 먼저 나가 버리던 등이 떠올라 묘했다.
애초에 그를 도발한 게 저 자신인데도.
사정을 다 아는 아돌프가 피임약을 챙겨 주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닌데, 이조차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막 씻고 나온 몰골로 후작의 수하에게 피임약을 받는 제 꼴이 너무, 창부나 다름없었다.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질 않나.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가슴 한쪽을 물들이는 참담함을 애써 숨기며, 리브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돌프는 편히 쉬다가 돌아가고 싶을 때 부르라며 몸을 돌렸다.
문이 닫히고, 그녀는 도로 혼자 남겨졌다. 그러나 서늘하게 식은 방 안에서 오래 머무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녀는 덜 마른 머리를 대충 묶고 곧장 저택을 떠났다.
***
브레드가 걱정되었지만, 후작의 경고가 귓가를 맴돌아서 차마 작업실을 찾아갈 수 없었다. 비겁하게도 그랬다.
리브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던 카밀은 이제 수업과 상관없이 수시로 남작가를 드나들어서, 종종 밀리언의 수업을 하러 방문한 리브와 마주쳤다. 그때마다 그는 친근하게 인사를 해 왔고, 리브는 모호하게 웃으며 그와의 거리를 지켰다.
코리다의 치료도 시작되었다. 중단된 그림 작업 대신 코리다의 치료를 위해 정기적으로 베리워스 저택을 방문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치료에 코리다는 긴장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경계심을 풀었다.
나아가 코리다는 베리워스 저택의 서재에도 드나들게 되었다. 후작의 배려였다.
그러지 않아도 코리다의 교육을 두고 내심 걱정이 많았던 리브는 그 호의를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게다가 코리다와 친해진 아돌프가 서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수업이라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코리다가 관심을 보이는 서적에 관해 대화를 나누기에는 충분했다.
그걸 본 리브도 이참에 자신이 아는 것도 가르치자 싶어서 곁을 지켰는데, 코리다는 어쩐지 아돌프와 단둘이 대화하는 걸 더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결국 리브는 반쯤 눈치를 보며 자리를 비켜 주어야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리브가 잘 모르는 화제에 관해 이야기하던 코리다가, 지루하면 볼일을 보러 가라며 먼저 리브의 등을 떠밀었다.
베리워스 저택에서 리브의 볼일이라고 할 만한 게 뭐가 있겠는가.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면서도, 늘 혼자 집에만 있던 코리다에게 이 시간이 얼마나 색다른 즐거움을 주는지 뻔히 아는 터라 불만을 표할 수도 없었다.
“오늘도 쫓겨나셨군요.”
서재 문을 응시하며 떨떠름하게 서 있던 리브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동식 트레이를 밀며 다가오는 이는 필립이었다. 그는 매번 서재에 머무는 코리다에게 직접 간식을 챙겨 주고 있었다. 리브가 괜찮다며 만류해도 너털웃음을 짓기나 할 뿐, 그만둘 생각은 없어 보였다.
심지어 필립이 챙겨 오는 간식들은 티에리의 자문을 받아 엄격하게 재료를 선별한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니 거절하기도 민망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금방 나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리브에게 당부한 그가 얼른 서재로 들어섰다. 안쪽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필립이 서재를 나왔다. 이동식 트레이를 아예 서재에 두고 나왔는지, 그는 빈 몸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필립이 허허로운 미소를 지으며 리브를 안내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리브는 일단 그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아서 울창한 수목원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수목원 안에 유리온실이 있다고 말씀드렸었지요.”
“네, 기억나요.”
“코리다 양과 아돌프의 독서 토론을 기다리는 동안 둘러보시면 아주 좋을 겁니다. 온실 안에는 편히 쉴 수 있는 공간도 있답니다.”
리브가 수목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체로 코리다는 한 시간 정도를 서재에서 보냈다. 족히 한 시간을 다른 걸 하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전까지는 기다리는 동안 밀리언의 수업 준비를 했는데, 오늘은 깜빡하고 수업 자료를 놓고 온 참이었다.
어차피 이 저택에서 할 일도 없는데, 필립의 권유대로 산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싶었다.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히 돌아보라는 필립의 말을 뒤로한 채, 리브가 수목원 안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시원하고 청량한 공기가 공간을 가득 채운 게 느껴졌다. 인위적으로 다듬어진 뭇 정원들과 달리, 베리워스 저택의 수목원은 상당히 자유분방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게 신기했다. 이따금 귓가로 정체 모를 새소리도 들려왔다.
필립이 말한 유리온실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반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온실은 바깥에서 보면 반구 모양이라, 홀로 신비롭게 보였다.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에 유리온실의 표면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와….”
유리로 저런 온실을 만들다니. 모르긴 몰라도 보통 기술이 아니었다. 과연 필립이 그리 자신만만하게 보여 주고 싶어 한 이유가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감탄하던 리브가 성큼성큼 온실로 다가갔다. 온실 유리는 뿌옇고 불투명해서, 안쪽 풍경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파릇파릇한 그림자가 들쑥날쑥하게 선 것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그마저도 마치 울타리처럼 선 게, 커튼이라도 되는 양 내부를 가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밀자 온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형형색색으로 피어난 꽃이었다. 온실을 가득 채운 꽃을 확인하기 무섭게, 코끝으로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꽃 냄새가 풍겼다.
눈을 휘둥그레 뜬 리브가 두리번거리며 온실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시선 닿는 곳마다 크고 작은 꽃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단지 꽃만 있는 게 아니라, 돌을 깎아 만든 작은 폭포 모양의 분수도 보였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꽃향기와 어우러져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느릿느릿 걸으며, 리브가 홀린 듯 꽃구경에 빠져들었다.
쪼르르, 딱!
어디선가 톡, 톡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소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리브는 곧 새로운 분수를 발견했다. 가로로 고정된 대나무가 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고 시소처럼 반대편으로 기울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시선을 끄는 건, 물이 떨어지고 있는 위쪽에 내려앉은 황금색 물총새였다.
‘황금색?’
조류에 관해서 잘 모르는 리브지만, 저렇게 선명한 황금색 깃털을 가진 새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리브는 놀라움을 숨기지 못한 채 물총새를 빤히 보았다.
물총새는 당장이라도 수면으로 달려들 것처럼 아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긴 부리가 금방이라도 벌어질 듯했고, 곱게 접힌 날개는 금방이라도 퍼드덕거릴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물총새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건 박제네.”
등 뒤에서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에 리브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지팡이를 짚은 후작이었다. 서 있는 위치로 보아 아마 그는 온실 안쪽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계신 줄 모르고 제가….”
말끝을 흐리며, 리브가 슬쩍 뒤로 물러섰다. 후작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물총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작할 때 황금 가루를 섞은 염료로 깃털을 염색했지.”
황금 가루라니, 어쩐지 색이 너무 화려하다 싶었다.
쓸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치품을 온실에 아무렇지 않게 방치한 후작의 작태에 리브가 입을 벌렸다.
그녀가 얼떨떨한 눈으로 물총새를 보고 있는데, 후작이 느릿느릿 곁으로 다가왔다. 리브가 슬그머니 거리를 벌린 게 무색하게도 두 사람은 바짝 가까워졌다.
거대한 체격이 가깝게 서자 어쩔 수 없이 의식되었다.
하물며 그 대상이, 몸을 섞은 사내이니만큼.
리브가 시선을 조용히 내리깔았다. 그녀가 입을 다물자 두 사람 사이에 쪼르르 떨어지는 물소리만 울려 퍼졌다.
섹스하고 난 뒤 후작을 마주한 게 처음이었다. 코리다의 치료가 시작되고, 몇 번의 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추가 근무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브의 추가 근무는 굉장히 불규칙적으로 진행되었기에, 후작이 부르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리브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섹스가 마음에 안 들었나.
혹은 한번 잤으니 관심이 떨어졌나.
그런 생각도 들긴 했다. 그러나 리브는 막연하게 그러진 않을 거라고 짐작했다. 후작이 정말 관심을 끊는다면, 코리다의 치료에 그토록 관대한 태도를 보여 주진 않을 것 같으니까.
그리고 리브는 지금 후작이 보여 주는 모습을 통해 얼추 제 짐작이 맞는다는 걸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