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20)화 (20/138)

“밀리언, 정말 오랜만이네.”

“네, 선생님.”

언뜻 보기에 밀리언의 웃음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뺨이 조금 홀쭉해진 걸 보면 살이 빠진 것 같은데, 밀리언은 딱히 아팠던 기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막상 교재를 펼치니 금세 우울한 얼굴로 칭얼거렸다.

“오랜만에 공부하려니까 머리가 너무 아파요. 오늘은 쉬면 안 돼요?”

정말로 아파서 그렇다기보다는 공부하기 싫어서 어떻게든 놀 궁리를 하는 모습이었다.

평소처럼 엄하게 고개를 내저으려던 리브는 이내 마음을 돌렸다. 비록 밀리언에게 아무것도 듣지 못했지만, 수업을 쉬었던 기간 동안 밀리언에게 무언가 일이 생겼던 건 확실해 보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마음고생을 꽤 한 모양이니, 오늘 하루 정도는 긴장을 풀어 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좋아. 펜던스 부인께서 허락하신다면, 오늘은 기분 전환 겸 외출을 하자.”

“정말요?”

“그래. 요즘 호숫가에서 꽃으로 치장한 배를 띄운다더라. 궁금하지 않아?”

“궁금해요!”

“선생님이 여쭤보고 올 테니 잠시 기다리렴.”

충동적인 외출이라 어쩌면 거절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펜던스 부인은 흔쾌히 다녀오라며 마차를 내주었다. 그녀 역시 딸의 우울한 상태를 알고 있었던 듯했다.

“오히려 감사할 일이죠. 통 식사도 제대로 안 하고, 바깥을 나가지도 않아서 걱정이 많았거든요.”

생전 아프지 않던 아이가 감기로 크게 앓더니 기운을 많이 뺀 것 같다며, 펜던스 남작 부인이 넌지시 말을 덧붙였다. 기분 전환을 위해 놀러 나가되, 너무 무리하게 두지는 말라는 뜻을 은연중에 내포한 말이었다. 리브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당부를 받아들였다.

주방에서 급히 다과를 챙긴 하녀가 그들의 일정에 동행했다. 충동적인 외출치고는 나쁘지 않은 준비였다.

“와, 하늘 좀 보세요!”

마차 창밖을 가리키며 들뜬 표정을 짓는 밀리언의 모습에 리브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혈색이 도는 밀리언의 얼굴을 보니 그럭저럭 괜찮은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앉던 호숫가는 오늘도 풍경이 아름다웠다. 탁 트인 광경은 여느 풍경화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감동을 주었다. 시야를 갑갑하게 제한하는 액자도 없으니 그야말로 눈 닿는 곳이 그림이고 작품이었다. 잠깐의 근심마저 잊을 수 있을 정도였다.

“선생님, 꽃 배예요!”

하녀가 준비해 주는 다과를 기다리던 밀리언이 낮게 탄성을 뱉으며 호수를 가리켰다. 과연 조금 멀리에, 알록달록한 생화가 가득 담긴 조각배가 잔잔히 떠다니는 게 보였다.

가게에서 귀동냥으로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는 건 리브 역시 처음이었다.

“와, 너무 예뻐요. 탈 수는 없을까요?”

“아마도 그건 어려워 보이네.”

일단 배가 너무 작았고, 그마저도 꽃만 가득 실린 상태였다. 리브의 말에 밀리언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다가 이내 새침한 얼굴로 다짐했다.

“아빠에게 배를 사 달라고 할 거예요! 저것보다 훨씬 더 예쁘게 꾸민 배로요!”

“배?”

“네! 배를 사면 제일 먼저 선생님을 초대할게요! 꼭 저랑 같이 타 주셔야 해요?”

배를 사면 가장 먼저 함께 타겠다니. 카밀이 지도법을 알고 싶다며 자신을 찾아온 게 괜한 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리브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건 친구들이랑 타는 게 더 재미있지 않을까?”

밀리언의 많은 친구를 떠올리며 넌지시 물었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어째 좋지 않았다.

입술을 뾰족하게 만든 밀리언이 제 앞에 놓인 스콘을 포크로 쿡쿡 찌르면서 불퉁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사실, 애들이랑 싸웠어요.”

“싸웠다고?”

설마 했는데, 정말로 문제가 생겼구나.

눈을 동그랗게 뜬 리브가 밀리언을 빤히 보았다. 애꿎은 스콘만 엉망진창으로 만들던 밀리언이 한숨을 내쉬며 본격적으로 입을 열었다.

“생일 파티가 끝나 갈 때쯤에 말이에요. 글쎄, 제이린이 돈으로 후작님의 관심을 얻었다면서 저를 비웃잖아요.”

“저런….”

제이린은 해상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델리 상단의 고명딸이었다. 다들 쉬쉬하지만 그들이 어느 한미한 자작가의 족보를 샀다는 건 부에르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쨌든 델리 상단의 상단주는 귀족 족보를 사서 딸을 자작 영애로 만들었고, 사교계에 내보냈다. 리브가 알기로는 펜던스 가문과도 사업적인 파트너 관계였다.

“그래서 우리 집에 돈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후작님이 돈 때문에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질 분은 아닌 것 같다고 대답했어요. 선생님에게 배운 대로, 차분하고 교양 어린 목소리로요. 그랬더니 도리어 제이린이 우는 거예요? 애들은 제가 제이린의 사정을 배려해 주지 않고 눈치 없이 말했대요.”

“그랬구나.”

“저는 다시 말했죠. 돈이 많아서 돈이 많다고 한 게 왜 기분 나쁜 말이냐고요. 제이린네 저택이 경매로 넘어간 거랑 우리 집이 부자인 게 무슨 상관이에요?”

“오, 그렇구나.”

최근 델리 상단의 배가 침몰했다고 떠들던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었나?

리브는 내심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이 경매로 넘어갈 정도라면 자금난을 크게 겪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그 집 외동딸이 시기와 질투로 괜히 역정을 낸 모양이었다.

“게다가 제이린이 후작님을 짝사랑하면 오히려 저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이린은 저 때문에 후작님을 뵙게 된 건데.”

심지어 그 제이린이라는 친구는 디트리언 후작을 짝사랑하기까지 한단다. 밀리언의 또래 영애 중 그를 선망하지 않는 아가씨가 있겠느냐만, 아무래도 어린 아가씨의 순정까지 질투심에 불을 붙인 게 틀림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밀리언은 제이린의 짝사랑을 언급하면서도 따로 불편하다는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후작에게 보이던 밀리언의 관심이 진지하거나 심각한 수준은 아닌 듯했다.

그보다는 친구와 다투었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자신이 비난받았다는 사실에 더 큰 불편함을 드러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도 제가 잘못한 거예요?”

입술을 삐죽거리는 밀리언의 모습에, 리브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밀리언의 말을 바탕으로 따지자면 먼저 실수한 건 제이린이었다. 심지어 그 자리는 밀리언의 생일 파티 자리가 아니었던가. 모로 보나 제이린이 경솔했고, 주변 친구들의 판단 또한 이성적이었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브는 그 제이린이라는 아이가 어떤 심경이었을지, 아주 잘 상상되었다. 어째서 울음을 터뜨렸는지도 말이다.

“제이린과 화해하고 싶어?”

“그날은 좀 그랬지만… 사실 나쁜 애는 아닌걸요. 그래서 이렇게 된 게 솔직히 좀 불편해요. 그런데 다들 제이린 편만 드는 것 같아요.”

단지 제이린과 더 친하다거나 밀리언의 행동이 나빴다는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리브는 이 불편한 구도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을 짚고 올라가면, 그 끝에 후작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확히는 후작을 향한 사람들의 욕망.

그가 한 것이라고는 그저 같은 저택을 두 번 방문한 것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이를 들썩이게 만들다니.

예전이라면 리브 역시 그 들썩거리는 인파에 동조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매주 그를 마주하고, 가끔 정제되지 않은 모욕을 받기도 하는 제 처지로서는 이제 마냥 그를 환상 속의 인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다들 후작의 냉정한 눈빛이라도 받고 싶다며 한탄하지만 직접 그것을 마주하고 견딜 수 있는 이는 몇 없을 것이다.

잠깐 떠올린 것만으로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리브는 재빨리 생각을 털어 낸 뒤 차분하게 말했다.

“처음에 제이린이 말을 심하게 한 건 사실이지. 그러니까 선생님이 보기에 잘못은 제이린이 한 거야. 제이린도 시간이 지나면 본인이 얼마나 부끄러운 행동을 했는지 깨닫겠지. 다만 밀리언, 앞으로는 대화할 때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 더 배려해서 이야기해 보렴. 내가 상대방을 배려한다면, 상대방 또한 나를 배려해 주는 법이니까.”

말을 하면서도 리브는 제 말이 조금 허황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듯한 정론이긴 하나 현실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소리였다. 당장 리브가 겪은 과거의 경험만 돌이켜 봐도 그랬다.

내가 상대방을 배려해 봐야, 돌아오는 건 냉담한 무시이거나 우습게 보는 시선이지.

하지만 이런 차가운 현실까지 벌써부터 설명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밀리언이라면 아마도 어떤 상황에서든 리브가 받지 못한 배려를 받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배려할 상대에게도 순위를 매기니까.

“정말요?”

“그럼. 만약 그러고도 상대가 너를 배려하지 않으면, 그때는 정당하게 화를 내고 잘못을 지적하면 돼.”

리브의 말에 밀리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밀리언이 이내 의아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후작님은 누구도 배려하지 않으시잖아요. 그래도 모두가 그분을 따르고 좋아해요.”

“그건….”

할 말을 잃은 리브가 얼른 머리를 굴렸다. 다행히도 밀리언은 리브의 난처함을 알아채지 못한 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어요. 어차피 계속 싸운 채로 있을 수도 없고요. 저도 가문 간의 협력 관계 정도는 아는 영애거든요!”

짐짓 의젓한 척 고개를 치켜든 밀리언이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종종 다 큰 어른인 척 굴고 싶을 때 밀리언이 하는 행동이었다.

“선생님께 이야기하니까 기분이 좀 풀리는 것 같아요.”

“다행이네. 친구들과도 잘 이야기해 봐.”

아무튼 기분이 좋아졌다니 다행이었다. 리브는 옅게 웃으며 본인 몫의 찻잔을 들었다. 잔을 들자 훈기가 얼굴에 확 끼쳐 왔다. 조심스럽게 잔을 기울이는데, 밀리언이 명랑한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네. 아, 선생님도 보셨죠? 이번에 아빠가 큰맘 먹고 엄청 비싼 그림을 낙찰해 오셨어요.”

“복도에서 본 것 같아.”

리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밀리언이 리브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제가 몰래 들었는데, 후작님이 즐겨 찾는 화가의 작품이래요. 어쩌면 또 방문하실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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