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9)화 (19/138)

“브레드?”

“리브, 여기서 다 보네?”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작업복 대신 깨끗한 평상복 차림에 헌팅캡을 쓴 브레드가 리브를 향해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대뜸 그녀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한 그가 리브의 맞은편에 앉은 카밀을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분은….”

불분명하게 흐려지는 말끝에 불순한 추측이 섞이는 듯했다. 눈을 가늘게 뜬 브레드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리브를 돌아보았다.

리브는 그가 괜히 허튼소리를 할까 싶어 얼른 입을 열었다.

“밀리언의 미술 선생님이세요. 지도법 때문에 논의할 일이 있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고요.”

구구절절 만남의 연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리브는 구태여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 수고가 무색하게도 브레드는 이 만남을 전혀 순수하게 보고 있지 않았다.

“아하, 그렇구나. 우리 리브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브레드 딴에는 리브의 친척 행세라도 해서 도움이 되고 싶은 듯했다. 리브는 민망함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감쌌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갑자기 끼어든 브레드를 보고 있던 카밀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미술 선생님이시라니, 저도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친근하네요!”

“그러시군요.”

카밀의 무뚝뚝한 대답만 들어 보아도 그가 지금 이 상황을 얼마나 탐탁지 않게 받아들이는지 알 수 있었다.

리브가 손끝으로 브레드의 팔을 쿡 찌르며 브레드의 뒤를 가리켰다.

“브레드. 일행이 있어 보이는데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이쪽을 힐끔거리는 중년의 남자는 분명 브레드의 일행이 틀림없었다. 리브가 무심코 그 중년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톱 해트에 점잖은 프록코트를 걸친 중년 남성은, 후덕하고 인자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브레드와 어울리기에는 너무 고상해 보여서, 리브는 순간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평소 도박과 술을 즐기는 브레드에게 저런 지인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으니까.

리브의 시선이 미심쩍게 변하려는 순간, 브레드가 그녀에게 쾌활하게 인사를 했다.

“아, 그래그래.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어쩐지 평소보다 더 들뜬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인가?

점잖게 웃는 중년 남성에게 돌아가 뭐라고 이야기하며 가게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브레드의 뒷모습을, 리브가 빤히 바라보았다.

술집도 아니고, 이런 커피 하우스에서 중년 신사와 저렇게 들뜬 얼굴로 만나는 브레드라니. 보면 볼수록 이상했다.

“의외의 인맥이시네요.”

조금 전 느낀 이상함을 곱씹던 리브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카밀은 그녀를 따라 브레드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였다.

단순히 양해도 없이 대화에 불쑥 끼어든 무례한 사람을 보는 시선은 아니었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리브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혹시 브레드를 아세요?”

“미술전에서 매해 낙방하는 화가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카밀은 미술을 전공했지. 심지어 아주 유명한 예술 학교 출신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에글란틴 예술학교 출신이라는 점이 전국의 화가를 전부 꿰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런 화가가 한둘은 아니잖아요.”

“…매해 낙방하던 화가가 최근 엄청난 후원자를 만났다며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다닌다면, 모를 수가 없게 되지요.”

떨떠름한 카밀의 대답에 리브가 말문을 잃고 입술을 다물었다.

브레드가 말했다는 ‘엄청난 후원자’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안 봐도 뻔했다. 그들의 작업은 철저하게 비밀인데, 두루뭉술하긴 해도 저렇게 운을 띄우고 다니는 게 괜찮은 건가 싶은 걱정도 들었다.

작업 시간마다 번번이 방해하는 후작의 행태에 관해 충분한 공감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놈의 후원은 포기하지 못한 걸까?

“행실이 좋아 보이진 않았습니다. 물론 제가 선생님의 친분에 섣부른 관여를 하는 건 옳지 않겠지만… 저도 나름대로 이쪽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몸이니, 조금 더 많은 걸 듣지 않겠습니까? 저는 되도록 저 남자와 거리를 두고 지내는 편을 추천해 드리고 싶네요.”

카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어 조언했다. 대답 대신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리브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어떻게 저런 남자와 친해지셨는지 궁금하군요.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시는데.”

그의 말대로 리브와 브레드는 겉보기에 전혀 접점이 없었다. 사는 곳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니 우연이 아니고서야 마주칠 계기가 없었다. 리브는 조금 더 먼 과거를 떠올렸다.

브레드를 만난 건 그녀가 부에르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픈 코리다를 데리고 먼 여행길을 지나오느라 잔뜩 지친 어느 날이었다. 여관방에서 단기 숙박을 하며 지낼 만한 곳을 찾던 중, 리브는 치안이 나쁘지 않은 거리에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나온 방을 발견했었다.

이미 몇 번이나 사람에게 덴 적이 있었음에도 리브는 홀린 듯 그 방을 계약할 뻔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아마 너무 피로하고 지쳐서 더는 깊은 고민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그 방을 소개해 준 건 사기꾼이었다. 진짜 집주인이 장기간의 여행으로 잠시 집을 비운 동안, 멋대로 집주인 행세를 하며 세를 내주려 한 것이다.

사기 계약을 막아 준 건 브레드였다. 브레드가 정의로운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끼어든 건 아니었고, 그 역시 사기당할 뻔한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작업실을 구하고 있었는데, 사기꾼에게 하마터면 큰돈을 날릴 뻔했다고 했다. 리브가 계약서를 작성하기 직전 사무실을 찾아온 브레드가 난동을 부리며 동네방네 사기 행각을 떠들었고, 덕분에 리브 역시 서명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게 인연이 되어 이어진 게 어느덧 이리 오래된 것이다. 브레드는 그들의 첫 만남을 두고, 제 공이라기보다는 그저 리브가 운이 좋았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리브는 브레드에게 충분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이후, 그녀에게 종종 일감을 주기 시작한 것까지 더하면 더욱 그 고마움을 떨칠 수 없고.

“제가 신세를 졌어요. 부에르노에 정착할 때 이런저런 도움도 받았고요. 화가로서는 어떤 소문이 도는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고마운 지인이에요.”

차분한 리브의 말에 카밀이 놀란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다가 곧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제 말이 너무 심했네요.”

“괜찮아요. 제게 좋은 사람이 남에게도 좋은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는 법이니까.”

리브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잔을 들었다. 그리 길게 대화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커피는 겨우 한 모금 정도의 양이 남아 있었다. 카밀은 진즉 잔을 다 비운 상태였고 말이다.

“음, 그 말은 무척 인상 깊군요.”

낮게 탄성을 뱉은 카밀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저는 선생님께 어떤 사람인가요?”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오래 본 건 아니죠. 겨우 두 번째 만남이잖아요.”

“그렇네요.”

카밀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선생님께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건….”

리브가 무어라 말하려는 걸 노골적으로 막으며, 카밀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아, 그럼 이만 일어날까요?”

그는 듣지 않아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산뜻하게 웃으며 모자를 집어 들었다.

“오늘 만남을 청한 건 저니까,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

“네? 하지만.”

“신경 쓰이신다면 다음에는 선생님이 사 주세요.”

시원스럽게 웃으며 얼른 계산하러 가는 카밀의 뒷모습을 보며, 리브는 그가 참 노련한 사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아마 그녀가 조금만 더 어리고, 형편이 좋았다면 저 젊은 청년에게 설렘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분홍빛 미래를 상상하며 홀로 앞선 감정을 키워 나갔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꿈을 꿀 수 있는 리브 로이데스는 없어졌다.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그녀는, 커피 한 잔 값을 아끼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구질구질하고 옹색한 여자이니까.

리브는 씁쓸하게 시선을 내리며 턱 아래로 보닛 끈을 묶었다.

이러한 처지는 조금 나아질지언정, 근본적으로 달라지진 않을 터였다.

아마 죽을 때까지.

***

카밀과의 만남 이후, 먼저 펜던스 남작가를 찾아가 볼까 고민하는 리브의 앞으로 서신이 도착했다. 밀리언이 드디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는 소식과 함께, 계속 미뤄지던 밀리언의 수업을 다시 시작하자는 내용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네요, 로이데스 선생. 오늘도 우리 밀리언 잘 부탁해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환대해 주는 펜던스 남작 부인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한 리브가 하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펜던스 남작가를 방문한 리브는 저택 내부의 변화를 쉽게 알아챘다. 전보다 더 많은 미술품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워낙 저택을 고풍스럽게 꾸미는 펜던스 남작가라 주기적으로 아름다운 가구를 들이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에 띄게 미술품이 늘어난 건 이례적인 변화였다.

수많은 작품은 마치 누군가에게 과시하듯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곳이 전시관이 아니라 저택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조금 과하게 보이기도 했다.

펜던스 남작이 미술품에 관심을 보인 게 최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물론 이들이 자신들의 많은 돈을 어떻게 소비하는가에 관해서 리브가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을 필요는 전혀 없겠지만 말이다.

모호한 얼굴로 벽에 걸린 커다란 액자를 응시하던 리브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밀리언은 언제나처럼 공부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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