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ol.10 Oxogan The Goddess of the Moon -->
왕원희는 딱봐도 이 세상 기술이 아닌듯한 WAV(Wearable Archane Vest)의 착용감에 한동안 어버버거렸다. 하긴 나도 처음입었을땐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이 된 기분이라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옷인가 싶었지.
"아이고 엉덩이 빵빵한거 봐라."
"아얏!"
찰싹!
아무튼 왕원희의 속옷과 겉옷을 다시 입혀줄 시간따위는 없었기에 나는 그녀의 엉덩이를 뻘건 자국이 날정도로 때려준 다음, 지금까지 유체화 상태로 내 곁을 지켜온 륭 사부를 호출했다. WAV를 입는다고 해서 완전 무적은 아니였기 때문에 륭 사부로 하여금 왕원희를 지키게끔 하려는 심산이였다.
사실 이렇게까지 해서 왕원희를 지킬 가치가 있나 싶지만 지금까지 쓸데없이 고생한데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살려놔야만 했다. 맨날 고급 스테이크만 먹다가 분식 돈가스같은걸 먹으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별미가 아니겠는가?
"륭 사부 그럼 그 칠칠이 좀 부탁할게요."
"본녀에게 맡겨만 주게, 연자여. 이 땅에 헤일, 지진, 태풍이 몰아닥친다고 해도 이 처자를 지켜내겠네."
"으음 그렇게까지 싸움이 격해지진 않을것 같긴한데 아무튼 고생좀 하세요."
옷을 챙겨입고 여자화장실을 벗어난 나는 백월교의 성당으로 직행했다. 이제 왕원희의 안전이 확보됐으니 앱솔루트 모나크, 미하엘로프 소장이 보이자마자 이매망량의 손아귀로 비틀어 죽이면 게임 오버였다.
그런데 내가 애써 살심을 억누른채로 성당에 도착했을때 앱소루트 모나크는 성당 밖이 아닌 안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걸음으로 따지자면 열걸음도 채 안되는 거리긴 한데 문제는 백월교의 성당 전체에 마(魔) 몰아내는 종류의 결계가 펼쳐져 있다는 것이였다.
악마나 언데드같은 사특한 존재를 몰아내는 신성한 아우라가 이매망량들을 브로콜리늪에 빠진 다섯살 꼬맹이들처럼 몸을 배배 꼬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미하엘로프 소장의 휠체어의 손잡이를 다른 누구도 아닌 아크엔젤 하희빈이 직접 쥐고 있었기에 이매망량의 손아귀로 비틀어죽이기는 쉽지 않아보였다.
나는 마치 정말 볼일이 급해서 화장실에 다녀온 사람처럼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신전안으로 접근했다. 아바타 옥사건과 비교한다면 본체 김사건은 그저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신성한 아우라는 나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내 원기를 복돋는 느낌이랄까?
"이게 하희빈 네가 전에 말한 신성결계인가? 뭐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 펼친것치곤 그럭저럭 쓸만해보이네."
"아크리퍼, 미하엘로프 소장은 약속을 지켰어. 그러니 슬슬 달의 신전의 건설을 마무리지어줬으면 하는데."
"다 지었는데 무슨 개소리야? 내가 니들 달나라 여행 데려가서 신전주위에 꽃줄 두르고 컷팅식까지 해야 믿을셈인가?"
"위성화면으로 관측된적은 없지만 나는 계시를 통해 달의 신전이 거의 완공단계에 이르렀다는것 정도는 알 수 있어.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한가지가 빠져 있더군. 바로 디아나님의 동상이지. 만약 일반적인 건축물과 달리 동상의 디자인이 너무 디테일해서 만들기가 곤란한거라면 이쪽에서 석공을 붙여주겠다. 너는 그것을 옮기기만 하면..."
"알았으니까 시덥잖은 소리는 집어치워. 요새는 3D프린터랑 설계도만 있으면 로뎅 뺨치는 조각상을 수십, 수백개도 양산할 수 있어. 내가 디아나 여신의 조각상의 배치를 미룬건 어디까지나 몇가지 확인할게 있어서야."
"이렇게 된 마당에 대답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알고싶은걸 말해라, 아크리퍼."
"저기 신전 주위에서 하릴없이 얼쩡거리고 있는 KGB 특수부대원들이 입고 있는 하얀색 슈트 어디서 손에 넣은거지?"
내가 가장 처음 화이트 팬텀슈트를 입은 러시아 군인들과 마주쳤을때부터 궁금했던 사실 하나. 그것은 천외천중 한명이였던 건스미스, 율리시안 헉스포드의 작품인 팬텀 슈트가 어떻게 앱솔루트 모나크의 손에 들어갔냐는 것이였다.
처음부터 건스미스와 앱솔루트 모나크가 상하 혹은 협력 관계에 있었다면 말은 돼지만 과연 율리시안 그 오만한 인간이 다른 누군가와 손을 잡는다는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물론 마지막에는 내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애처롭게 손을 내밀었지만 말이다.
"팬텀 슈트라면 민간군사기업 고스트의 미얀마 지부 근처의 폐공장에서 손에 넣었다. 천외천의 일원인 건스미스가 세운 이 군사단체는 돈만 된다면 우리 러시아군도 충돌을 꺼리지 않았기에 발족한 그날부터 항상 요주의 대상이였지. 마음먹고 섬멸전을 시도하려고 해도 지부가 동남아 곳곳에 퍼져있는데다 고스트 슈트의 방탄기능과 사격보정기능때문에 우리 KGB조차 손가락만 빨기 일수였지만... 그러던 어느날 고스트의 컨트롤 타워 모종의 이유로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아무리 손과 발이 여러개라고 해도 머리가 없다면 오합지졸일뿐이기에 간단히 미얀마의 비밀공장을 접수하고 러시아에 슈트제작기술을 들여와 양산에 들어갔던것이다.
이 정도면 어느정도 설명이 됐겠지?"
"......"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고 과거 도엔버를 잡아들이기 위해 기야스를 타고 미얀마로 향했던 일을 떠올렸다. 당시 그 미얀마 지부의 고스트 대원들을 전멸시킨건 나와 시스트린이였지만 지부시설을 날려버린건 다름 아닌 율리시안 본인이였다.
자기 여자친구의 정조대 잠금이 풀렸다는 이유로 비밀공장을 지키는 지부를 날려버리다니 율리시안도 진짜 적잖이 똘끼가 충만한 녀석이였군. 나처럼 여자친구곁에 1000살도 넘은 흡혈귀를 24시간 주둔시키면 처음부터 그런일이 발생할 여지자체가 없을텐데 말이다.
"충분한 대답이 됐을거라 믿고 다음 질문을 받겠네."
"좋아, 그럼 지금 나에게 말을건 인간이 진짜 스노우 엠파이어 길드의 수장인 앱솔루트 모나크인지 한번 물어보고 싶군. 이미 한번 더미를 내세운적이 있으니까 두번 내세우지 말라는법은 없지 않겠어?"
"나 자신이 자신이 맞음을 증명하라. 그것참 어려운 문제로군. 신분증을 제시할 수 도 없는 노릇이니 나는 이 한마디로 증명을 대체하지."
[내가 미하엘로프 소장이자 앱솔루트 모나크다. 이 얘기는 진실이다!]
부상을 입은곳이 비단 다리뿐만이 아니였는지 왠지 모르게 불편해 보이던 목소리로 말을 하던 미하엘로프 소장이 갑자기 기차화통이라도 삶아먹은듯 괴성을 내질렀다. 움찔! 무슨 페이크 펀치도 아니고 고작 소리를 내지른거에 놀란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 나는 맞바로 더 큰 고함으로 대응했다.
"그냥 차라리 신분증을 제시해 이 새끼야!!!!! 무슨 예수님 말씀도 아니고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내가 곧이곧대로 믿어야하냐?"
"눈치채지 못한것인가, 아크리퍼? 나는 방금 언령을 사용해서 나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해내 보였다. 언령이라는 힘의 특성상 함부로 거짓말을 했다간 반대급부로 죽음까지 감수해야만한다. VOT 온라인의 3대 술사라 일컬어지라는 너라면 모를리가 없다고 생각했다만."
"다, 당연히 알고 있었지. 그냥 진짜로 신분증이 한번 보고 싶어서 그런것 뿐이야. 러시아에서 소장씩이나 하는 양반은 어떤 신분증을 가지고 다니는지 궁금해져서 말이야."
"뭐 정그렇다면 못보여줄것도 없지. 어차피 위조하려면 위조못할것도 없는 종이쪼가리지만 이것이 내 신분증이다."
나는 미하엘로프 소장이 품안을 뒤적여 꺼내든 신분증을 건네받았다. 미하엘로프 소장은 마음막 먹으면 얼마든지 위조가 가능하다는듯한 어투로 말했지만, 고급스럽게 코팅된 신분증에 박힌 국방주장관 도장이라던가 1mm단위로 띄어쓰기를 한 러시아 글자같은건 쉽게 위조할 수 없는 종류의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어차피 이딴 신분증따위는 내 관심사 밖이였기때문에 대충 훑어본 다음 다시 미하엘로프 소장에게 돌려주었다. 만약 저게 위조된 신분증이라고 한들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알아볼 방법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뼈다귀같은 손으로 다시 신분증을 받아든 미하엘로프 소장이 난데없이 각혈을 해 내 바지를 더럽히는게 아닌가?
쿨럭쿨럭, 쿨럭쿨럭.
"임마 앱솔루트 모나크,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새로 산 바지가 더렵혀졌잖아!"
"미, 미안하군. 보시다시피 나는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아서 말이야. 너희와 노트북으로 위성통신을 할때는 네말마따라 더미중 하나의 입을 빌렸기 때문에 쌩쌩했지만 본체로 오랜만에 말을 하려니 조금 버겁군."
"이제와서 동정심 작전같은건 역겨우니까 집어치워. 남의 엄마를 코앞에서 자살시킨 주제에."
"그 대단한 아크리퍼에게 동정심같은게 있긴하던가?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잔악무도한 아크리퍼가 고작 시베리아 산맥으로 복수를 마무리 했다는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어쭈 이게 누구맘대로 복수를 마무리지었다는거야? 내 복수는 이제 시작이야. 시베리아 산맥을 날려버린건 내 복수의 질주의 신호탄에 불과해. 이번 거래만 마무리되면 시베리아 산맥을 날려버린 포격이 러시아 전역을 일괄타격할거다."
"그래그래. 내가 소문으로 알고있는 아크리퍼라면 응당 그래야겠지."
나는 마치 피스메이커Ⅱ가 시베리아 산맥을 날리는 선에서 그쳐 아쉽다는듯한 미하엘로프 소장의 말투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노트북으로 위성통신을 할때만 하더라도 시베리아 산맥의 부재로인한 다각적인 후폭풍을 걱정하지 않았던가?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로군.
"또 다른 질문이 남아있나?"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아있지. 왜 이런 납치극까지 벌여가면서 달의 신전을 지으려고 하는지 그 목적을 듣고싶군."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크엔젤이 더 잘 대답할 수 있을것 같군.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녀의 요청을 조금 과격한 방식으로 수용했을뿐인지라."
"누차말하지만 내가 달의 신전계획을 추진하려고 했을땐 아크리퍼 네가 색향천월관의 주인인지도 몰랐고 김여령 박사를 납치할 생각따위는 조금도 없었어."
"그래서 너는 죄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건가, 하희빈?"
"그, 그런건 아니지만 김여령 박사의 죽음이 절대 고의가 아니였음을 말하고..."
"하희빈! 나는 법보다 주먹이 까갑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또 그렇게 행동해온 사람이지만 법률상에서도 미필적 고의라는 죄목이 있어. 네가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였다고 해도 미하엘로프 소장을 위시한 KGB 특수부대의 침입을 방관한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뭐 네가 미필적 고의를 인정하기 싫다면 인정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나는 법이 아닌 주먹으로 네년을 심판할거니까. 그러니 잔말말고 달의 신전을 지으려는 목적이나 말해봐."
"...디아나님을 이 땅에 강림시켜 새로운 신앙네트워크를 세울 생각이였다. 예수, 부처, 하느님같은 신적 존재들이 오랫동안 지구의 종교인들에게 뿌리를 내려오긴 했지만 그 실체는 허상과 같아 그 누구도 목격한자가 없다. 때문에 디아나님이 이 땅에 강림해 그 권능 을 우민들에게 펼쳐보이기만 하신다면 단숨에 백월교는 전 세계인의 국교가 될 수 있겠지. 어차피 달과 신전이라는 두 키워드만으로 익히 짐작했던 일 아닌가?"
"네말대로 대충 그런 목적일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본인 입으로 확인을 해둬서 나쁠건 없으니까 말이야. 뭐 묻고싶은건 다 물었으니까 약속대로 디아나 여신의 동상을 제자리로 옮겨주지. 하지만 경고하건데 죽음의 신의 복수를 고작 달의 여신따위가 막을 순 없을거다."
나는 VOT 단말기를 이용해 메키닉로이드 고블린(Goblin)으로 하여금 디아나 여신의 동생을 신전의 중앙으로 옮기도록 지시했다. 사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동상을 옮기는 대신 그냥 다이너마이트의 기폭장치를 누를 수 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앱솔루트 모나크, 아크엔젤과 세가지 문답을 나누면서 뭔가 굉장히 꺼림직한 느낌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말을 할 순 없지만 둘중 누군가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이런 찜찜한 기분을 간직한채로 크림슨 메이든의 하수인 제작을 이어나갈 수 는 없었다.
필요하다면 달의 여신을 두드려 패서라도 진실을 밝혀내리라. 그게 바로 나 죽음의 아버지 겸 주인 겸 왕이자 우주 제일의 또라이기도한 아크리퍼의 방식이니까!! 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