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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 Oxogan The Dances With Wolves
"이봐 늙은이, 히어로 특촬물을 너무 많이 본거아니야? 모든 사람이 가면을 쓴다고 강해지는게 아니라고. 댁은 여전히 전이술사라는 점을 기억해."
"맞는말일세. 나는 여전히 전이술사지. 가면을 썼다고 내 본질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다네. 그런데 거기에 무슨 문제라도?"
"전이술식으로 어떻게 내 버릇을 고쳐줄지 궁금해져서 말이야. 그 나이에 순간이동으로 폴짝폴짝 뛰면서 재롱을 부리는것도 좀 아니지 않나?"
"자네는 전이술사에 대해서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것 같군. 뭐 흔한 일이야. 모든 술사들이 자신이 파고든 술식계열이 최고라고 떠들며 다른 분야를 깎아내리기 바쁘지. 특히 전이술식의 경우 우주물류산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속성으로 익힌 어중떠중이들이 늘어나 사람들 인식이 말도 아니더군. 생계형 술사라나 뭐라나. 크하하하.
사람 목숨 하나정도는 간단히 취할 수 있는 전이술식의 대가를 눈앞에 두고 쪼개는 꼴이라니... 우스워, 아주 우습다고!"
체어맨 아니 이제는 데드마스크라고 불러야하나? 아무튼 전이술 교수님이 내 새치혀 놀음에 화가나셨는지 노골적으로 찐득한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품에서 레스토랑에서 쓰일법한 은수저세트를 꺼내 내게 던지는 제스쳐를 취했다.
체어맨이 사오십대치곤 젊은이 못지않게 정정한 교수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위력적인 암기술을 지닌 암살자는 아니였기 때문에 위협적으로 다가온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순간, 푹푹푹푹, 이미 4개의 포크와 나이프가 내 무릎과 팔꿈치에 박혀들어와 있었다.
방심해서 당했다라기 보다는 체어맨의 순간이동 암기술이 무영창을 넘어서 무딜레이였기 때문에 대처할 틈 자체가 없었다. 물론 얼마안가서 얼티밋 언데드 폼의 재생력이 포크와 나이프를 밀어내고 피부조직을 온전히 재생했기에 치명타는 아니였지만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런이런 자네가 죽지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솔직히 말해서 방금 일격으로 비명횡사하면 어쩌나하고 노심초사하고 있었다네. 그래도 주둥아리를 털어재낀만큼, 나름 숨겨진 한 수 가 있었던 모양이군. 아주 즐거운 승부가 되겠어."
"나도 방금 공격이 너무 쉽게 무산되서 댁이 상처입었을까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우리 의외로 통하는게 있는 모양이야?"
"하여튼 그놈의 주둥이질... 헛!"
말하는 도중에는 공격하지않는 신사적인 싸움을 하기엔 이미 체어맨과 나 사이의 골이 너무 깊어진 상태였다. 양손의 블랙탈론에 변이에너지를 때려붇자 10갈래의 쇠꼬챙이가 체어맨을 향해 쇄도 했다.
그러나 체어맨을 꼬치로 만들기 직전 그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어느샌가 내 뒤를 점하고 있었다. 확실히 전이술사는 상대하기 까다롭군. 블랙탈론을 회수하면서 혀끝을 찬 나는 마구잡이식 공격으로는 재미를 볼 수 없다는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손톱이 그 길이까지 늘어나다니 이건 나도 예상못했군. 그런데 말일세. 자네야말로 스스로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해봐야할 시기라고 생각하지 않나? 자네를 DF등급의 강령술사라고 알고 있었네만 지금까지 보여준 재생력과 손톱만 보면 술사라기 보다는 무슨 괴물같지 않은가?"
"무슈야 지금 저 늙은이가 하는 말 들었냐? 지금 주인님이 열심히 싸우고 계신데 언데드 부하가 거기서 구경만 하고 있으니까 내가 강령술사인지 모르겠다잖아! 애도 아니고 일일히 지시안해주면 못싸우냐?"
"그...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안그래도 저 인간 술사의 약점을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단일공격이라면 순간이동으로 회피할 수 있지만 광역공격이라면 쉽지않을터.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매스 슬로우!"
내가 닥달해서 시전하는건지 아니면 정말로 미리 준비한 저주술식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슈가 모래바닥에 지팡이를 꽂아넣더니 저주의 물결을 퍼트렸다. 심지어 그 물결은 나까지 휩쓸고 지나갔지만 얼티밋 언데드 폼을 지닌 내게 음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저주술식은 산들바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체어맨의 경우 유능한 술사라 하나 결국 보통의 인간. 저주의 물결이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단순히 움직임을 넘어서 사고능력과 동체시력까지 저하될 터였다. 분명 그리됐어야 했지만 사정은 딴판이였다.
저주의 물결이 체어맨을 덮치려던 그 순간 그의 신형이 반투명해지더니 사악한 마력을 그대로 통과시켜 버렸다. 술식전개가 끝나자 다시 선명해진 체어맨의 육체. 인간인 그가 스펙트럴 띵(Spectral Thing)의 전매특허인 유체화를 사용했을리는 없고 전이술식으로 자신의 신체를 이공간으로 밀어넣었다라는 설이 신빙성이 높아보였다.
"무슈야 대가리 박아."
"아이고 주인님 제가 허... 허리가 부실해서 그렇게 무리가 가는 동작은 안됩니다."
"그래서 니 허리가 멀쩡하면 이 전투에서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말해봐. 여기 네 고향이라고 했잖아. 즉 홈그라운드라는 소린데 왜 이렇게 무쓸모한건데?"
"그, 글쌔요. 주인님의 승리를 기원하며 열심히 응원을..."
"자네 그렇게 안봤는데 자신의 무능함을 부하에게 전가하는건가?"
"뭐! 무능함? 학부생 시절에 박사급 논문을 게재한 내게 가장 안어울리는 단어로군. 지금까지 한거라곤 내 공격을 회피한것뿐인 교수님이 그런 말을 할 처지도 아니고 말이야. 도발을 할려면 최소한 논리적 명제를 기반으로 해야지, 어거지를 부려서야 쓰나?"
"내가 자네를 공격하지 못해서 공격안하는게 아닐세. 그저 오랜만에 하늘 높은지 모르고 날뛰는 건방진 애송이를 만난터라 좀 더 진득히 즐기고 싶어져서 말이야."
"어이쿠 그려셨어요?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나, 나는 더 이상 노땅이랑 히히덕 거리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나는 인벤토리에서 아이언 메이든을 꺼내 언데드 대대를 소환했다. 소환과 동시에 [공격] 명령어를 전달해 눈앞에 존재하는 모든것을 파괴하도록 하니 거인족 패밀리는 하늘 위에서 거대한 주먹을 내리꽂고, 자이언트 윔과 센티페드는 땅속을 파고들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르곤과 미노타우르스는 발이 푹푹빠지는 모래바닥을 성난 몸짓으로 헤쳐나가며 체어맨을 포위해 들어간다. 재아무리 순간이동으로 회피한다 한들 천라지망 앞에서는 한계가 있는법. 사방을 압박해 들어오는 언데드들은 금방이라도 체어맨의 두개골을 쪼갤기새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그런데 별다른 방호구없이 흉측한 가면 하나를 달랑 착용한 체어맨은 뭐가 그렇게 여유로운지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너털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 늙은이가 죽을때가 되니까 정신이 반쯤 나갔나? 승리가 확정된 상황에서도 체어맨을 주시하고 있던 나는 곧 그 여유로움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체어맨의 손짓에 한눈에도 물리적 법칙에 어긋나 보이는 공간의 틈이 생겨났고 유리창이 깨진것 마냥 점점 벌어진다. 그리고 그 틈으로 언데드 크리쳐들이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는것 마냥 흡착되기 시작했다. 사지가 찢어져도 싸울 수 있는 언데드 크리쳐들이 육편조각이 되어 나뒹굴기 시작했으니 단 몇초만에 벌어진 일이였다.
"아이고 주인님 저는 저렇게 되고 싶지 않습니다. 부... 부디 에보니 메이든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십쇼. 조금 답답하긴 해도 거기가 평화로웠던것 같습니다."
"아 정말 쫑알쫑알 시끄럽네. 그렇게 무서우면 저 멀찍이 떨어져 있어. 전투 방해하지 말고."
"이것참 자네의 소중한 장난감들을 내가 망가뜨려버렸군. 미안해서 어쩌지?"
"댁말대로 나한테는 장난감병정에 불과한 소모품이니까 제발 그거 쓰려트렸다고 우쭐해하지좀 마. 여차하면 소모전으로 댁 마력이 먼저 바닥나게 만들 수 있을정도니까."
"그 얘기를 들으니 너무 무서워서 오금을 지리겠군. 크하하하."
체어맨은 비웃고 있었지만 실제로 실현 가능한 전략이였다. 정확히는 마력을 바닥낸다기 보다 마력기관에 과부하가 올때까지 몰아붙이는 방식이였지만. 비스트코인 스테이션에서 체어맨이 50번 가량의 순간이동 후에 오버드라이브 현상을 겪는걸 분명 확인하지 않았던가?
다만 문제는 체어맨의 블랙홀 같은 공격이 언데드를 수리하는것 보다 새로 만드는게 나을정도로 박살내버린다는 것. 말그대로 소모전인만큼 나도 타격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였다. 때문에 나는 이매망량 악령천인대를 동원해 체어맨의 콧대를 눌러주기로 했다.
스펙트럴 띵인 이들이라면 공간의 틈으로 빨려들어갈 일이 없겠지. 살아있는자들에 대한 악의로 가득찬 망령전사들이 부활해 체어맨에게로 짓쳐들었다. 체어맨도 이번 공격은 괄시할 수 없었는지 순간이동으로 멀찍이 물러나 거리를 확보했다.
"이건 반칙이지 않은가? 물리적 타격에 이뮨인 언데드를 보내다니."
"뭐 어쩌라고? 애시당초 이 싸움이 룰을 따질정도로 페어한 싸움이였나? 꼬우면 댁도 반칙 하던지."
"안그래도 그럴 작정이였다네. 정말이지 궁금하단 말이야. 과연 뇌가 감자주스처럼 으깨져도 재생할 수 있을지가!"
체어맨이 품안에서 또 다시 식기세트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앗차!싶은 순간 그의 손아귀에서 포크와 나이프가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나는 어지러움증에 구토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뭐지? 이 뇌가 진탕치는 느낌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였다. 정말로 체어맨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 뇌속으로 전이시켜 망신창이로 만들었던 것이다. 뇌라고 하는 것은 다른 신체부위와 달리 기억을 보존하고 사고를 진행하는 역할을... 우욱! 사라져가는 의식속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한건 영력망이 끊겨 회귀하는 이매망량들이였다.
* * * *
왜 성녀님이 마족과 결탁한 마녀로 몰려야 하는걸까? 제 1 성기사단의 항복서신을 받아본 이래 수십, 수백번도 넘게 고민해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살아있는 천신이라 불리우며 많은 이들에게 덕을 베풀어왔던 성녀님.
마족의 침공을 목전에두고 그 누구보다 최전선에 나서 약자들을 보호했던 성녀님. 전재산을 쏟아 마족전쟁의 상처를 보듬었던 욕심없는 성녀님. 성국의 국력회복에 지대한 공헌을 한 그녀가 성국의 검에 겨눠진다는 사실은 너무나 이율배반적이다.
그것도 마족전쟁의 암운을 걷어내고 성국이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이때에 마족침공설이 도는것도 우스운 일이지. 아직도 내게는 성검 아발란체로 마왕의 목을 베었던 감촉이 선명하다. 그건 단지 꿈이였을뿐일까?
"에녹 단장님 제 1성기사단의 본대가 신전의 코앞에 이르렀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모두 항복하라. 설마하니 그들이 같은 성무관에서 훈련한 성기사의 피를 볼만큼 타락하진 않았겠지."
"하지만... 에녹 단장님은 검집을 내려놓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성녀님께 아침문안인사를 올린 뒤 그 문앞을 지킬 생각이다."
"저희에게 죽기전 마왕격살검과 함께싸울 영광을 주실 생각은 없으신겁니까?"
"만약 마족과 싸우는 전쟁이였다면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서라도 함께 싸웠겠지. 하지만 같은 성기사끼리 피를 흘려봐야 공허할 따름이다. 신전의 모든 식솔들을 이끌고 네가 대표로 항복해라. 내가 마지막으로 내리는 임무다."
"조... 존명!"
무릎을 꿇은채 질질짜고 있는 부관을 뒤로한채 나는 미리 준비해둔 30일치 식량을 들고 성녀님의 방으로 향했다. 존재 자체만으로 주위의 일정공간을 성역으로 만드는 그 신성은 아직 죽지않았다. 성녀가 마족에게 몸을 팔고 신성을 잃어버렸다는 괴소문은 터무늬 없는 소리지.
새하얀 원목으로 만들어진 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칼과 방패로 무장한 제 1성기사단과 함께 악명높은 이교도심판관들이 그녀를 척살하기 위해 앞마당을 점거한 상황에서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봄햇살처럼 따스한 목소리가 응답해온다.
"에녹인가요? 들어와도 좋아요."
"실례하겠습니다. 제 4 성기사단장 에녹이 누시아님을 뵙습니다."
"오늘같은 날만큼은 좀 거추장스러운 예식을 집어치우는게 어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예식이 무너지면 공경하는 마음이 무너지고 그것이 불손한 행동으로 이어질까 두렵습니다."
"하하. 정말 여전하다니까. 마왕을 상대로도 그렇게 예의를 갖췄나요? 대련하는것처럼?"
"아뇨. 그는 예의를 차려도 될만큼 여유로운 상대가 아니였습니다. 젖먹던 힘까지 쏟아야 했기에 다소... 개싸움이 됐지요."
실로 치열했던 마왕과의 싸움을 단 한단어로 묘사하기 위해 고민하던 나는 뒷골목 왈패시절의 용어인 개싸움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마치 몸에 맞지않는 옷을 입듯 이제는 어색하게 느껴지는 상스러운 말. 하지만 마왕과의 싸움을 표현하기엔 최적이였다.
"호오. 에녹이 개싸움같은 단어도 말할줄 아는군요?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일인가요? 제가 마녀로 몰린 일과 관련해서는 충분히 대답하지 않았던가요? 에녹이 이해하지 못했을뿐."
"살아있는 천신처럼 행했기에 오히려 마녀가 됐다는 말씀.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찌됐든 제 답은 하나뿐입니다. 여기 30일치 식량을 준비했으니 앞으로 30일간 방에서 나오지 마시길 바랍니다."
"30일이라... 그렇게나 오랜시간동안 제 방문앞을 지킬 셈인가요?"
"제 체력이나 정신적 역량을 생각하면 30일이 한계겠죠. 더 오래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말라해도 할거죠?"
"예."
"그러면 마음가는대로 행동하세요. 저도 하고싶은대로 할테니."